최소한 백신법정은 정당성을 입증할 기회를 제공했다. 청구인이 백신에 의해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타당성있게 입증하면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백신법정은 일부 유형의 상해에 대해서는 백신이 문제란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으므로 생물학적 기전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했다. 예컨대 매우 드물지만 소아마비 백신은 실제로 소아마비를 일으킬 수 있으며, DTP 백신은 아나필락시스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자폐증은 사전 인정된 부작용에 해당되지 않았다. 변호사가 의뢰인을위해 보상을 받아내려면 자폐증이 백신과 관련이 있다는 이론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소송의 주인공인 어린이가백신 접종으로 인해 자폐증이 생겼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결코 만만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 P669

최근 몇 년간 캘리포니아주의 자폐증 발생률을 추적해보는 것이었다.자폐증 발생률이 떨어지고 있다면 티메로살 이론이 맞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백신 제조사들은 대부분의 어린이용 백신에 티메로살을 사용하지 않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백신을 통한 메틸수은 노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폐증 역시 줄었을것이었다. 커비는 자칭 시민 케인Crizen Cam 이라는 블로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2007년까지 3~5세 어린이 중 자폐증 진단이 감소하지 않는다면 자폐증-티메로살 가설에 치명타가 되겠지요." 마침내 마감 시점인 2007년이 되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자폐증 유병률은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올라갔다. 다시 일년이 지나자 유병률은 더욱 높아졌다.
이런 식으로 백신이 문제라는 주장은 끊임없이 반박당했다. 결국백신 반대 진영의 가장 큰 성취조차 서서히 해체되었다. 항상 주변부를 맴돌던 백신에 대한 불신은 자폐증이란 호재를 만나 주류 문화 속으로 급부상했다. 변화를 부채질한 것은 주류 언론이었다. 종종 과학자들과 백신에 반대하는 부모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식으로 과학과 근거없는 믿음이 거의 동등한 것처럼 보도했던 것이다. 이런 관행은 과학적 데이터가 쌓이면서 백신의 양면성이란 서사가 약화되기 시작한 2007년과 2008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퇴조했다.  - P671

백신 논란의 와중에 오티즘 스피크스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선한 원칙과 과학의 충돌을 겪었다. 양극단의 지지층 사이에가로놓인 거대한 격차를 좁히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방접종의 "입증된 효과"를 지지한다는 강령을 지닌 그들은 어느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했다. 동시에 백신이 혹시라도 유해할지 모를 가능성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어느 쪽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양쪽을 모두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 P683

백신이론을 믿고 오랫동안 지지해온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매우 이례적으로 헤이스팅스는 판결문의 한두 문장을 할애하여 세디요 가족을 비롯한 자폐 가족들이 그런 이론을 확신하도록 부추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는 다시 기울임체를 써가며 그들이 "매우 잘못된" 조언을 한 의사들과 다른 전문가들의 말을 믿었다고 썼다. "세디요 가족은 잘못된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고 지적하며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개인적 견해로는 그 의사들이야말로 전반적으로 그릇된 의학적 판단을 내린 데 대해 유죄를 선고받아야 할 것이다." 통렬하고도 가혹한 일침이었다. 백신이론은 또 실패한 것이다.
나머지 가족들도 차례차례 패소했다. 항소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2010년 여름 마지막 항소 건이 기각되었다. 미쉘 세디요 가족이었다. 부모들을 부추겨 소송을 시작했던 변호사들은 한 푼도 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바로 흥미를 잃어버렸다. 과학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 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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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는 우리가 교재로 쓰던 칼리마코스의 풍자시에 대한 두 페이지짜리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되어 있는 것은 한 페이지뿐이었다. 나는 시간에 쫓기면서 서둘러 편법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편법이란, 일단 영어로 써놓고 이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방법이었다. 이 편법은, 줄리언이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방법이기도 했다. 줄리언에 따르면 그리스어산문 작법 공부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실용적으로 쓰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산문 작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쉽게 언어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사고법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그리스어를 다른 언어의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억지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한정해버리면, 사고의 패턴이 전혀 달라져버린다. 결국 상당히 평이하고 일반적인 개념이 엉뚱한 개념으로 바뀌는가 하면, 그 개념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 생생하게 살아나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리스어 개념을 영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곤란을 겪고는 한다. 불을 뜻하는 라틴어의 인켄디움(incendium)은 프랑스 사람들이 담배에다 붙이는 퍼(feu)와는 다르다. 이 둘은 불은 불이라도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무정하고 흉폭한 퓌르(pur)와도 다르다. 그리스어로 퓌르(pur)라고 할 경우, 이불은 일리온(트로이아-옮긴이) 성 위로 오르는 불길,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적한 해변에서 파트로클로스의 화장단솟아오르는 불길을 말한다. - P314

어떤 의미에서 내가 고전어과 동아리에 친밀감을 느끼는 까닭도 여기에있다. 고전과 동아리 역시 수세기 동안 사멸의 길을 걸어온 이 그리스어가그려내는 끝없이 아름답고 끝없이 처절한 풍경을 이해한다. 그들 역시 5세기적인 눈으로 그리스어 책을 펼치고는 어쩐지 타향을 대할 때처럼 세계가 서먹서먹하고 낯설게 보이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내가 줄리언을, 특히 헨리를존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의 이성, 그들의 눈, 그들의 귀는 그 엄격한 고대의 리듬에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세계는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 세계라는 것에 의하면 그랬다. 그러나 내가 그세계를 흠모하는 관광객이었던 반면, 그들은 자신들을 정기적인 방문자를넘어 영주권자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 P315

시간이 갈수록 버니에 대한 나의 증오는 자라갔다. 사냥개처럼 그는 재빨리 본능의 코로, 내가 가장 감추고 싶어하던 나의 취약한 부분, 나에게 수많은 불면의 밤을 안기던 약점의 냄새를 맡아나갔다. 그가 나를 상대로 되풀이해서 벌인 이 기묘한 장난은 대단히 가학적이었다.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나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다. 어느 날 그는 나의 넥타이를 보면서 이런말을 했다.
"멋진 넥타이다. 에르메스 같은데,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의 손이 식탁 위를 건너와 나의 넥타이를 뒤집었다. 물론 싸구려 넥타이에 에르메스 상표가 붙어있을리 만무했다. - P343

그러나 이런 불쾌한 기억이 늘 나를 괴롭히기는 했어도 버니에게 그런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반대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버니를 사랑했다. 어쩌다 버니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휘파람을 불면서 낡은 보도를 깐닥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애중이 착잡하게 뒤엉킨 감정으로 괴로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수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었다. 모습, 몸짓, 머릿속에 든 것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버니라는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경우에는 버니가 무슨 짓을 하건 화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는전과 다름없이 정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고는 했다. 그러니까 여느 때처럼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의자 등받이에 턱 기대면서부터는 태연하게 악담을 퍼붓고는했다. 그의 악담은 지극히 질이 낮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결코, 결코버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나자신에게 맹세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약속을 수없이 깨뜨려야 했다. 나는 여기에서 약속이라는 말을 쓰면서, 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최종적 약속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버니에게 느꼈던 것만큼의 처절한 분노는 경험한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버니가 김이 잔뜩 낀 안경을 쓰고 쉰 냄새를 풍기면서 내 방으로 들어와 늙은 개처럼 머리에 앉은 빗방울을 털어내고는, "이봐요, 목마른 늙은이를 위해 마실 것 좀 내놔봐요" 한다고 해도 예전의 그 애정은 되살아날 것 같지 않다.
혹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Amor vincit omnia)라는 옛말을 상기시키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짧고 서글픈 인생을 통해 내가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옛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기가 쉽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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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널 믿지 않았어. 따라서 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었어. 그런데도 넌 그러지 않았어. 이유가 뭔가?"
"헨리, 도대체 너희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모르니까 네가 좀 가르쳐주지."
말하기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나는 결국 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죽였어. 그렇지?"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놀랍게도, 참으로 놀랍게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웃었다.
"역시 너답군. 내가 예상했던 대로 넌 역시 날카로워. 언젠가는 네가 다알아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내가 이렇게 자초지종을 네 앞에 털어놓는이유도 거기에 있어."
커튼만큼이나 무겁고 현실적인 어둠이, 조그만 전등이 빚어낸 불빛 밖을일렁거렸다. 메스껍다는 느낌과 함께, 나는 한순간 네 벽이 밀려오는 듯한일종의 폐소공포증의 느낌을 동시에 경험했다. 그렇게 밀려오던 벽은 어느순간부터는 우리를 끝없는 어둠 속에 남겨두고 현기증이 날 만한 속도로물러나는 것 같았다. 나는 침을 삼키고 헨리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누구였어?"
헨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대답했다.
"그저 그런 사람이었어. 우연이라고 할까?"
"목적이 없었다는 거야?"
"하느님께 맹세코 없었어."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글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지난 가을 줄리언 교수의 수업 시간에, 플라톤이 시적 광기라고 불렀던 박카이아, 즉 디오뉘소스적 광란 상태를 놓고 토론하던 것 기억나?"
"기억나는군."
조바심이 났다. 살인의 과정 설명에 플라톤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헨리다운 수법이었다.
"우리도 한번 경험해보기로 했어."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뭘 해보기로 했다고?"
"박카이아를 경험해보기로" - P258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해. 언젠가 자동차로 사슴을 친 적이 있어. 참 아름다운 동물이었는데....… 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몸부림치는 그 사슴 앞에서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따금씩 그 사슴을 생각하고는 하는데, 막상 사슴을 친 그날보다는 뒷날 생각할 때가 더 괴로워. 우리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분명해. 그러나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제 문제는 그 일 자체가아니야. 문제는, 불행히도 버니가 알고 있다는 데 있어."
"무슨 뜻이야?"
"오늘 아침에 버니가 노는 꼴 보았지? 우리를 미치게 하고 있지 않았어? 나는 교수대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고 있는 기분이야."
열쇠가 꽂히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헨리는 술잔을 들어, 꽤 많이 남아 있는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프랜시스일 거야."
그는 그러면서 머리 위에 있던 전등을 켰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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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시작되었을 무렵 정말로 자폐증이 유행했다면 뭔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새천년이 시작되기 불과 몇 년 전에 나타난 것이라야 했다. 그때부터 자폐증 유병률이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영국에서 대부분의 어린이가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것이라야 했다. 두 국가가 유행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경로를 통해 어린이의 몸속으로 들어가 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야 했다.
최근에 등장한 것. 어디에나 있는 것. 몸을 침범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이런 특징들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1998년 겨울 런던에서마침내 용의자의 이름이 밝혀졌다. 바로 백신, 예방접종이었다.
소위 자폐증의 백신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의료행위로 인해 어린이에게 자폐증이 생길 수 있다는 대중적 공포였다. - P611

저자들의 주장은 명백했다. MMR 백신 속 살아있는 홍역 바이러스가 장의 염증을 유발할지도 모르며, 이 염증은 다시 뇌의 염증을유발하여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분명 흥미로운 생각이었지만 전적으로 가설에 불과했다. 논문은 부모들의 기억을 가장중요한 근거로 제시했다. 강력한 과학적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증거였다. 웨이크필드와 동료들 역시 논문의 전체적인어조를 통해 그것이 가설에 불과함을 사실상 인정했다.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약 그렇다면". 심지어 "관련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말이 도처에 등장한다. - P613

물론 드문 일이지만, 불운하게도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받고 나서 자녀가 평생 앞을 못 보거나, 귀가 안 들리거나, 사지가 마비된사람에게는 이렇듯 논리적인 설명이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백신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가족의 절망은 더욱 커진다. 가족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믿을 만한 증거는 시간관계다. 그런 증상이 거의 정확히 백신접종과 며칠, 심지어 몇 시간 차이로 나타났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관련된다고 인과관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웨이크필드가 MMR 백신과 어린이의 자폐행동을 연결시킨 것은 "시간상 선후관계", 바로 그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자녀를 연구에 참여시킨 열두 가족에게 웨이크필드의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있는 데이터가 없다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웨이크필드야말로 자신들의 말에 진정으로 귀기울여준 첫 번째 과학자였다. 어느 누구도 MMR 주사와 자녀의 질병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타당하다거나 의미있다고 받아들이지않았다. 게다가 웨이크필드는 소화기 전문의였다. 소화기에 놀랄 정도로 문제가 많다는 것은 열두 명의 어린이에게 공통된 두 가지 문제중 하나였다. 또 하나는 자폐증이었다. 가족들이 보기에 두 가지 문제는 연관이 없을 수 없었고, 게다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 P617

문제는 주류 의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웨이크필드 말고는 자폐증과 MMR이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전성에관해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는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부모들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MMR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렇듯 확실한 답이 없는 초기 상황은 웨이크필드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예방주사가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대중적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웨이크필드조차 연관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그 때문에 영국의 언론, 인간의 본성, 자폐증과 백신 사이의 관련성은 모두 한가지 공통적인 요소와 한데 묶였다. 바로 공포였다. - P623

그녀는 홍역을 언급하지 않았다. MMR 백신을 언급하지 않은 셈이다. 대신 배후에 전혀 다른 용의자가 있다고 지목했다.
그것은 수은이었다. 분명한 것은 백신에 수은이 들어 있으며, 수은은 잘 알려진 독성 물질이라는 점이었다. 1930년대부터 수은은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백신에 첨가되었다. 고무마개로 밀봉된 백신 바이알 속에는 여러 차례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 들어 있었다. 주사할 때마다 바늘을 병 속에 찔러넣어 일회분을 흡인했다. 이론적으로 주삿바늘은 매번 완전히 멸균처리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때때로 살아있는 미생물이 주사액 속으로 들어가 병 속의 백신을 오염시키고 환자를 감염시키는 일이 때때로 벌어졌다.
1930년대에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일라이 릴리 사LilyangCompany 에서 티메로살thmerosal이란 제품을 개발했다. 티메로살은 항균 및 항진균 효과를 나타내는 분말로, 보통 용액 상태의 보존제로 사용되었다. 티메로살의 두 번째 음절인 ‘mer‘은 주성분인 ‘수은mercury‘에서 따온 것이었다. 분자량을 기준으로 수은은 티메로살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티메로살은 아주 조금만 사용해도(0.01퍼센트용액) 멸균 상태를 유지하는 효과가 뛰어나 수십 년간 비강 분무액에서 콘택트렌즈 보존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의 표준성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의 보존제가 새로운 물질로 바뀐 뒤에도 제약회사들은 백신에 티메로살을 고집했다. 1990년대후반까지도 티메로살은 30종이 넘는 백신에 사용되었다. - P625

희한하게도 성명서는 권고안 중 어떤 것도 실제로 티메로살의 위험이 알려졌기 때문에 채택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현재 수준의노출이 유해하다는 데이터나 증거는 없다"고 주장하여, 이 점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명서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그런 확실성을 깎아내리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백신을 맞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연성있는 매우 작은 위험"이란 말을 반복하면서, 앞으로티메로살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은 "모든 잠재적 위험에 대비한다"는 원칙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게다가 AAP는 당시 회장이던 조엘 알퍼트Joel Alpert 의 성명을 두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는데, 이 또한 명확한 의도와는 달리 믿음직하게 들리지 않는 바람에 정반대 효과를 내고 말았다. "현재 사용되는 티메로살의 수준은 어린이에게 해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수준을 더 낮춘다면 안전한 백신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두 보건단체의 명확하지 못한 메시지는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공중보건 지침이 되고 말았다. 또한 그것은 가장 예기치못한 결과를 낳았다. - P628

그때쯤에는 힘의 균형추가 너무 많이 기울어 보건의료 관료들이모욕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도 티메로살과 자폐증 사이의 관련성을 믿는 사람들의 분노에 완전히 주눅든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의회가 대중에게 부여한 권한을 이용하여 부모들은 정부측 과학자들의 내부 이메일, 메모, 회의기록 사본을 손에 넣고 혹시 정부에서 수은의 위험을 덮으려고 한 흔적이 있는지 꼼꼼하게들여다보았다. 2005년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라는 환경 전문 변호사는 회의록 중 하나를 근거로 《롤링스톤Rolling Stone》지에 "치명적 면역 Deadly Immunity"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정부와 백신 제조사들이결탁하여 "티메로살의 위험을 감추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제도의 오만과 힘과 탐욕에 관한 소름끼치는 증례 연구"라고불렀다. 기사가 나가자 상원에서는 정부의 과학 공무원들이 금전적 이해상충을 비롯해 부적절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정식 조사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백신정책을 이끄는 사람들은 거의 피의자 취급을 받았다. - P635

오티즘 스피크스의 두 번째 우선순위는 "권리옹호"였다. 한번 거물조직으로 인식되자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오티즘 스피크스 로비스트들은 즉시 권력 심층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밥 라이트나 그가 보낸 특사와 만나기를 거부하는 정치인은 없었다. 수년간이런 상황이 지속된 덕에 오티즘 스피크스는 주 의회들을 설득하여보험회사에서 자폐증 치료 비용을 급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전까지 자폐 가족은 거의 항상 보험급여를 거절당했다. 자폐증은 의학적 질병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오티즘스피크스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통과시킨 새로운 보험 관련 법안보다 물질적으로 더 큰 혜택을 준자폐증 "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 P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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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또한 사신 일행이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판첸이준 불상을 제외한 나머지 선물을 죄다 역관들에게 줘버렸다고 썼다. 그런데 역관들도 이를 마치 분뇨처럼 더럽게 여겼다고 한다. 역관들은 판첸의 선물들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부들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마부들조차 더러운 돈이라며 그 은으로는 술 한 잔도 사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깨끗하다면 깨끗할 것이나, 남의 풍속으로 보자면 촌놈의 어리석음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지원은 불상을 준 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지 않는 경직된 태도에 일침을 가하긴 했지만, 이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박지원이 기대한 것은 사신 일행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판첸의 선물에 관한 한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이었음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으리라. - P265

앞서 박명원이 1783년 여름까지도 1780 년의 봉불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듬해인 1784년 음력 시월에 박명원은 사은행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은행은 건륭제가 정조의 첫아들인 문효세자의 책봉을 흔쾌히 승인해준 데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특별 사행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사행에 수년 전 봉불지사 소동을 일으켰던 박명원이 임명되었건만 아무런 물의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박명원 자신도 1783년 여름과 달리 지난 과오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박명원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어 1785년 1월에 해당하는 정조 8년의 음력 십이월 11일에 베이징을 향해 떠남으로써, 봉불지사의 오명을 쓰며 물러나야 했던 외교 무대로 복귀하였다.
•••••••
뚜렷한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도는 없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개한 박명원 변호론이 1783년 여름과 1784년 겨울의 차이를 낳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이 1780 년의 사행에서 돌아와 자료의 정리 및 편집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를 일단 탈고한 시점은 1783년경으로 추정되니 말이다. - P238

여기서 좀 ‘비딱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찰십륜포」의 이야기들이 정말 박지원이 강조한 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요즘으로 치면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 『열하일기』의 「찰십륜포」 등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두고 이렇게 ‘발칙한‘ 질문을 던진 경우는 아마도 없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부터는 몸소 목도한 바를 기록하였다는 박지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시시콜콜 따져볼 작정인데, 발칙하기로는 결론 역시 질문에 뒤지지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미리 밝혀두자면 이렇다.
「찰십륜포에 실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사실 ‘팔월 11일‘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 관람을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팔월 14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박지원은 두 사람의 만남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기껏해야 박명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역시 전해 들은 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박지원의 말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였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경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팔월 11일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한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곤란 불상 이야기‘ 바로 다음에 팔월 14일에 있었던 ‘건륭과 판첸의 만남‘에 대해 ‘전해 들은 바‘를 접속함으로써 박지원이 박명원을 위한 변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 P242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와 관련하여 유념할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박지원은 이날 숙소를 떠난 적이 없다. 12일 13일과 마찬가지로 종인 신분의 박지원에게는 입궐이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이날 오후에 있었다는 세 사신의 ‘대성전 배알‘은 구월 17일 장계」의 내용과 모순이다. 장계에 따르면 이날 삼사는 종일 궐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날 오후 삼사가 열하 태학의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를 배알했다는 「태학유관록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허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박지원이 삼사의 대성전 배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다분히 박명원 일행에 대한 봉불 혐의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를 모신태학에 6박 7일을 머물렀는데도 대성전 참배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박명원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셋째,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에서는 이날 사신의 동정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두드러진 활동이었던 불꽃놀이 구경 사실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찰십륜포」의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던 날짜를 밝히지 않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박지원이 팔월 14일의 일기에서 그날 박명원이 불꽃놀이를 구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찰십륜포에 묘사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 팔월 11일이 아니라 팔월 14일의 일이었음을 당장 파악했을 것이다.
또한 「찰십륜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만은 확실히 박지원이 목도한 바가 아니라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P247

그러나 박지원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는 사신 일행의 불꽃놀이 구경 사실에 관하여 침묵했다. 아니, 그저 침묵만 지킨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박명원 등이 피서산장에서 불꽃놀이 등을 즐기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간대를 열하 태학의 대성전을 참배했다는 정황상 신뢰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채웠다. 불꽃놀이 자체가 주제인 「매화포기」에서도 박지원은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의 독자는 「찰십륜에 묘사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을 영락없이 팔월 11일의 일로 읽게 된다.
또한 박지원은 「찰십륜포」의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에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 곧바로 "황제가 (피서산장) 후원에 매화포를 놓고는 사신을 불러 (피서산장으로 들어와서 보게 하였다."라고 썼다. 비록 자신이 박명원 등과 동행했다고 명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팔월 11일 오전 판첸을 만날 때부터 줄곧 박명원과 행동을 함께하는 박지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독자는 불꽃놀이 현장에도 박지원이 당연히 동석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불꽃놀이가 14일의 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없다. 14일에 박지원은 줄곧 태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48

또한 박지원은 여기에서 강하고 사나운 토번을 황제가 몹시두려워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서번西藩(문맥상 티베트)은 강하고 사나우나 황교를 심히 두려워하므로 황제가 그 법사를 우대한다고 하였다. 즉 박지원은 청이 판첸을 우대한 이유를 티베트의 군사적 위협 가능성에서 찾았다. 이는 박지원이 과거 토번 왕국이 당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였다는 역사의 기억을 호출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몽골·티베트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 부족을 노정한 것으로, 열하에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박명원 일행과 함께 베이징에 다녀온 노이점盧以漸(1720~1788)이 "몽골 사람들을 누르기 위해" 그들이 앙모하는 판첸을 특별히 초치招致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나, 1780년 연말에 동지사의 부사로 떠나 이듬해 귀국한 신대승 (1731~?)이 "몽골을 두려워해서" 건륭제가 판첸을 우대하였다고 보고한 것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 P255

팔월 11일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군기대신이 와서 조선에 사찰과 관제묘가 있는지 묻는 장면도 달리 읽힌다. 구월 17일 장계에는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팔월 9일 통역관의 질문 장면이나 팔월 10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군기장경이 와서 『열하일기』 에서와 마찬가지 질문을 던진 것을 황제를 알현한 후의 일로 소개했다. 알현 전과 알현 후로 갈리긴 하나 내용은 비슷한 장면이다. 그러나 문맥상 의미는 적잖이 다르다. 장계의 문맥에서 군기장경의 질문은 우연히 불쑥 던진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에『열하일기』의 「태학유관록은 이미 팔월 10일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데 더하여 황제 알현 전에 사찰과 관제묘에 대한 질문을 배치함으로써, 조선 사신을 판첸과 만나게 하려는 건륭제의 의지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야기 소재의 취사선택과 배치 · 구성에서 관찰되는 박지원의 비범한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열하일기』를 역사학적 사료의 비판 대상으로 올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순간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는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간접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뜻하지 않은 봉불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박명원과 그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 P289

박명원 일행이 사행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 돌아온 것은 1780년 음력 시월 27일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시월 28일에는 무림군 이당이 이끄는 사은사 일행이 서울을 떠났고, 그로부터 겨우 사흘 뒤인 십일월 2일에는 서유경 등 동지사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였다.
사은사 이당 일행은 세 통의 표문을 가져갔다. 첫 번째는 건륭제가 박명원을 통해 정조에게 보낸 비단 선물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밝힌 사은 표문이었다. 두 번째는 박명원 일행에 대한 각별한 우대에 감사한다는 표문이었고,
세 번째는 앞으로는 영원토록 사은방물을 보내지 말라고 한 황제의 조치에 사은하는 표문이었다.
••••••
열하에서 박명원 일행을 접견한 다음 날인 팔월 12일,
건륭제는 앞으로 조선에서 사은의 뜻을 밝혀야 할 때에는 표문만 보내고 방물은 일절 보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비추어 보자면, 황제가 정조에게 보낸 특별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표문에 방물을 보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은 방물을 보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에 감사한다면서 굳이 사은 방물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형상 황명을 거역하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정조는 별도의 자문을 준비하여 앞으로 영원토록 혜택을 입을 터이기에 단 한 차례라도 감사 표시는 해야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십이월 14일 이당 일행으로부터 표문과 방물을 접수한 청의 예부는 그다음날 정조가 보낸 별도 자문의 내용을 건륭제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십이월 22일에 이번에 보내온 사은 방물은 받지 말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챙겨온 방물을 다시 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물을 특별히 받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특별 선물로 안장을 갖춘 말과 비단 그리고 담비 가죽 등을 조선에 보내라고 하였다. 아울러 앞으로는 결코 사은 방물을 조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P267

결론적으로 1780년 건륭제의 칠순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파견한 세 차례의 사행은 정조 연간 대청 외교의 경향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정조는 분명 청나라를 상대로 자발적인 성의 표시를 반복했다. 만약 정조가 영조처럼 청을 조만간 망할지도 모르는, 또는 망해야 마땅한 오랑캐 국가로 여겼다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는 청을 사대 외교의 합법적 상대가 되는 대국 또는 적어도 우호적 관계를 다질 필요가 있는 이웃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는 일이었다. - P278

1782년 초의 반전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매년 빡빡한 공식 일정이 조선 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특별히 베푼 은혜로 간주되었다. 청의 예부는 매번 특별한 은혜의 내역을 문서로 만들어 조선에 알렸다. 조선의 국왕은 다음 동지사 편에 사은의 표문을 보내 특별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밝혔다 (방물은 1780년 건륭의 지시에 따라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 1782년 초에 이르러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청이 이제는 우리를 각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라며 매우 반겼다. 요즘으로 치면, 양국 외교 관계의 비약적인 증진 또는 격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서 밝히듯이 사실 이 문제는 단지 조선과 청 두 나라만의 관계 증진에 국한하여 접근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시각을 중시하여 문제를 조선의 대청 외교 관계라는 맥락에 국한해서 보자면, 건륭제의 조선 사신에 대한 ‘특‘은 일단 조선 국왕 정조의 ‘성의‘에 대한 화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90

황제께서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말로 국왕에게 돌아가서 안부를 물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직접 너희 나라 국왕이 세자를 얻었다는 자문을 보니 내 마음이 몹시 기뺐다."라고 하므로 저희는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화신의 안내로 원래의 반열로 돌아왔는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 있기도 전에 황제께서 먼저 세자라고 호칭하므로 좌우에서 호위하는 대신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외국 국왕의 득남 소식에 이토록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역사상 전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정조로서도 황제의 득남 축하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정조는 ‘특별히 사례하는‘ 뜻을 담은 문서와 방물을 준비하여, 황인점 일행과 함께 청에 갔다가 막 돌아오고 있던 박제가에게 발길을 돌려 문서와 방물을 들고 이미 베이징을 향해 떠난 동지사 일행을 뒤쫓아가게 하였다. - P299

종번宗藩의 대응 개념이라는 측면을 중시한다면 외번外藩이라는 말은 황족이 아니면서 왕작을 받은 모든 존재에게 쓸 수 있다. 조선의 국왕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을 외번의 하나로 꼽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동번東藩‘이라는 말은 조선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명·청의 황제들과 조선의 국왕들은 양국의 관계가 매우 친밀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쌍방 모두 조선을 가리켜 외번이니 동번이니 하는 말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였을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조선은 분명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청나라에는 절대로 외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외번이 존재하였다. 이들 ‘외국이 아닌 외번‘은 기본적으로 몽골 출신의 왕공 작위 소지자를 가리키는데, 그 기원은 청의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P302

청나라에서 외번이라는 말이 원래 ‘바깥 지방의 몽고tulergi goloi monggo‘라는 만주어의 번역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청 초의 외번은 곧 몽골 유목민 집단의 수령들을 의미하였다. 후금-청에 복속한 유목민들 중에는 청의 팔기八旗에 편입된 자들도 있었지만, 복속 이후에도 옛날과 다름없이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유목 생활을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깥 지방의 몽고‘였다. 홍타이지는 이들 집단의 수장들에게 황족과 마찬가지로 왕공의 높은 작위를 부여하여 우대하였고, 그들이 원래 거느리던 유목 집단에 대한 관할권도 인정해주었다. 몽골 왕공들은 왕공작위와 자기집단에 대한 관할권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여기에다가 앞서 말한 방식의 혼인을 통해 청 황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떤 학자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청 일대에 걸쳐 황실이 몽골 왕공의 딸을 며느리로 들인 것이 163회, 몽골 왕공의 아들을 사위로 삼은 것이 432회를 헤아릴 정도였다. - P307

청의 황제가 외번 왕공에게 ‘연반조근‘ 의무를 부과하다
청 황제와 외번 왕공의 끈끈한 관계는 단지 혼인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더라도 멀리 초원으로 떠난 뒤 죽을 때까지 친정나들이를 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그 딸이 낳은 외손주 역시 외가를 찾지 않는다면, 혼인 관계 및 그로 인해 형성된 혈연관계는 실질적인 의미를 잃기 십상이다. ‘Out of sight, out ofmind‘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은 자주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옛날 한이나 당의 황제들이 주변 이민족의 수장들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데에는 이 같은 원리도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의 황제들은 외번의 왕공들을 자주 만나 유대를 확인하고 강화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년 연말연시의 ‘조근‘이었다. 조근이라는 말은 원래 제후가 주기적으로 주나라 천자의 조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근이라는 개념 자체는 중국의 역사에서 낯선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외번의 조근‘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초원 유목민 집단 수장들의 정기적인 조근은 과거 명과 같은 한인 왕조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청조 고유의 제도이자 전통으로 이해된다. - P308

이처럼 건륭제는 조선에만 사상 초유의 특은을 베푼다는 혐의가 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바꾸어 말하자면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베푼다는 일시동인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3대 연회의 문호를 외국 사신들에게 개방하였다. 이제 매년 연말연시 베이징의 황성과 원명원을 무대로 거행되던 3대 연회의 의미는 종래의 외번 왕공들을 위한 잔치라는 데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3대 연회는 이제 국내의 무슬림 벡과 금천의 토사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까지 포함하는, 말하자면 천하 만국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건륭의 ‘성세‘를 기념하고 즐기는 연례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 P325

홍경모의 발언과 같은 친청 언설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북학 담론이 문자화되어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1780 년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사조가 더욱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1780 년대 이후 조선 사인들의 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듯하다.
1780년대 이후 대청 인식의 변화를 두고,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명나라 숭정제의 비극적 최후로부터 약 150년이나 지난 때이므로 오랑캐 침략자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상의 한쪽 측면만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청나라가 그들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혈통이 아니라 덕의 유무를 따져야 한다는 논리와 정확히 공명하고 있다. 치욕과 분노의 기억은 세월의 침식으로 소실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실된 기억의 빈자리에 이처럼 적극적인 친청 언설이 저절로 들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청나라 하면 오랑캐 침략자라며 이를 갈던 조선에서, 1830년경 홍경모의 경우처럼 정치적 정당성을 온전하게 갖춘 ‘대공지정‘의 정치체로 청을 찬미하는 언설이 등장하게 만든 토대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지금까지 살펴본 1780년대 이후 건륭제가 추진한 정치적 기획이 직접 또는 간접의 효과를 거둔 결과로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 - P333

홍경모가 연행을 경험한 도광 10년경은 건륭제의 기획이 이미 50년 가까운 실천의 역사를 쌓은 때였다. 조선의 관료들은 동지사의 세 사신만 헤아려도 연인원로 1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건륭제의 기획을 몸소 경험한 것으로 계산된다. 청조의 환대와 청궁정의 화려함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조선의 사인들은 자신들의 견문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글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 적어도 연행을 경험한 인사들과 그들의 견문을 공유한 주변 사람들의 대청 인식은 친청의 색채를 점점 더 짙게 띠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잘못이 없다면, 금천의 토사들을 두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면 반드시 (자신들의 견문을 )서로 서로에게 알리고 이야기해서 한마음으로 향화向化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 건륭제는, 비록 청나라는 역사 속의 모든 왕조처럼 멸망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획이 모두 헛된 노력에 그친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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