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널 믿지 않았어. 따라서 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었어. 그런데도 넌 그러지 않았어. 이유가 뭔가?"
"헨리, 도대체 너희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모르니까 네가 좀 가르쳐주지."
말하기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나는 결국 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죽였어. 그렇지?"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놀랍게도, 참으로 놀랍게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웃었다.
"역시 너답군. 내가 예상했던 대로 넌 역시 날카로워. 언젠가는 네가 다알아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내가 이렇게 자초지종을 네 앞에 털어놓는이유도 거기에 있어."
커튼만큼이나 무겁고 현실적인 어둠이, 조그만 전등이 빚어낸 불빛 밖을일렁거렸다. 메스껍다는 느낌과 함께, 나는 한순간 네 벽이 밀려오는 듯한일종의 폐소공포증의 느낌을 동시에 경험했다. 그렇게 밀려오던 벽은 어느순간부터는 우리를 끝없는 어둠 속에 남겨두고 현기증이 날 만한 속도로물러나는 것 같았다. 나는 침을 삼키고 헨리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누구였어?"
헨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대답했다.
"그저 그런 사람이었어. 우연이라고 할까?"
"목적이 없었다는 거야?"
"하느님께 맹세코 없었어."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글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지난 가을 줄리언 교수의 수업 시간에, 플라톤이 시적 광기라고 불렀던 박카이아, 즉 디오뉘소스적 광란 상태를 놓고 토론하던 것 기억나?"
"기억나는군."
조바심이 났다. 살인의 과정 설명에 플라톤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헨리다운 수법이었다.
"우리도 한번 경험해보기로 했어."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뭘 해보기로 했다고?"
"박카이아를 경험해보기로" - P258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해. 언젠가 자동차로 사슴을 친 적이 있어. 참 아름다운 동물이었는데....… 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몸부림치는 그 사슴 앞에서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따금씩 그 사슴을 생각하고는 하는데, 막상 사슴을 친 그날보다는 뒷날 생각할 때가 더 괴로워. 우리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분명해. 그러나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제 문제는 그 일 자체가아니야. 문제는, 불행히도 버니가 알고 있다는 데 있어."
"무슨 뜻이야?"
"오늘 아침에 버니가 노는 꼴 보았지? 우리를 미치게 하고 있지 않았어? 나는 교수대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고 있는 기분이야."
열쇠가 꽂히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헨리는 술잔을 들어, 꽤 많이 남아 있는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프랜시스일 거야."
그는 그러면서 머리 위에 있던 전등을 켰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