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짜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2월 오후 2시. 가정부를 구하는 위조 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캉"에서 버스를 타고 카부르로 향했다. 카부르에 위치한 뮈조 씨 부부의 집은 해안과 제방, 고급 호텔이 들어선 활기찬 도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번잡스러움을 피해 그림 같은 새로운 구역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뮈조 씨 부부의 베란다는 그 쾌적한 거리에서 건물 정면 창문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이기에 - 마치 연극 무대에서 빛나는 장면처럼 -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조끼를 입은 뮈조 씨는 테이블 주위를 돌며 서성거리고 있었고, 이따금씩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 위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정성 들여 화장을 했고, 머리매무새를 단정히 손질하고 있었다. 차고와 울타리 사이의 흰 조약돌 길에 막 들어서는 순간, 뮈조 씨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아내를 향해 몸을 돌리는데, 분명 그녀에게 알리려고 그랬을 텐데, 그녀는 이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린다.
"가정부신가요?" - P28

이제 우리는 영화를 본다. 청소 작업복을 입고 진공청소기를 든한 남자가 사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양복을 입은또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작업복을 입은 청소부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그녀는 "이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모두가 다 인사를 할 필요는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예의 그 두 남자실습생 중 한 사람이 그 사이에 모리스라고 자기소개를 한 뒤, 발언기회를 얻어 말한다.
"또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어떤 회사에서 이틀 동안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게 알려준겁니다."
여자 강사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여러분은 사람들이 인사도 안 하고 또 인사를 받아도 대꾸를 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거나 부루퉁할 일이 아닙니다. 다 자기할 나름이지요. 또 그것은 태도의 문제구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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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탐닉의 시대에서 살아가기

기분이 좋아, 기분이 좋아, 기분 좋은 데 쓰이는 이 세상의 모든 돈 - 레번 헬름 Levon Helm

이 책은 쾌락을 다룬다. 동시에 고통도 다룬다. 무엇보다 쾌락과고통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쾌락과 고통의 관계가 왜 중요할까?
우리가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풍요가 넘치는 공간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중독성 물질, 음식, 뉴스, 도박, 쇼핑, 게임, 채팅, 음란 문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오늘날 큰 보상을 약속하는 자극들은 양, 종류, 효능 등 모든 측면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했다. 디지털 세상의 등장은 이런 자극들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스마트폰은 컴퓨터 세대에게 쉴 새없이 디지털 도파민을 전달하는 현대판 피하주사침이 됐다. ‘나는아직 무언가에 중독된 적이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장담컨대 머지않아 자주 찾는 웹사이트에서 그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 P5

과학자들은 중독 가능성을 측정하는 보편적인 척도로서 도파민을 활용한다. 뇌의 보상 경로에 도파민이 많을수록 경험의 중독성은 더 커진다. 도파민의 발견과 더불어 지난 한 세기 동안 신경과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획기적인 발견 중 하나는, 뇌가 쾌락과 고통을 같은 곳에서 처리한다는 사실이다.
쾌락과 고통은 저울 양 끝에 놓인 추와 같다. 초콜릿을 한 조각먹으면 다음 조각이 또 먹고 싶어지고, 괜찮은 책, 영화, 또는 비디오 게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을것이다. 그런 순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우리 뇌의 균형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쾌락이 아니라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다.  - P6

넓게 봤을 때 중독中毒 Addiction은 어떤 물질이나 행동(도박, 게임, 섹스)이 자신 그리고/혹은 타인에게 해를 끼침에도 그것을 지속적·강박적으로 소비 활용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27

어떤 대상에 중독되는 데 가장 큰 위험 요소 중 하나는 그 대상에 대한 용이한 접근성이다. 중독을 일으키는 대상(이하 ‘중독 대상‘)을 구하기 쉬울수록 시도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오피오이드opioid의 급속한 확산은 이사실에 대한 비극적이면서도 강력한 예시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에서는 오피오이드 처방(옥시콘틴, 바이코딘, 듀라제식 펜타닐)이 4배로 증가했다. 미국 전역에 그러한 오피오이드가 널리 유통되면서 오피오이드 중독률과 이에 관한 사망률 역시 증가했다. - P30

인터넷은 중독 대상에 대한 높은 접근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우리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강박적과용을 부추긴다. 영상은 ‘입소문이 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말그대로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밈meme이 등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혹자들이 온라인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때, 그 행동은 다른 사람들도 하고 있기 때문에 ‘평범하게 보인다. ‘트위터‘는 전문가들과 대표들이 똑같이 좋아하는소셜 미디어 메시지의 송수신 플랫폼으로서 이름이 딱 맞는다." 우리는 새 떼들과 같다. 우리 중 하나가 날갯짓을 하면, 전체가하늘로 날아오른다. - P41

강박적 과용의 문제를 겪기 가장 쉬운 이들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계층인데, 그중에서도 잘사는 나라에서 사는 이들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보상 수준이 높고, 효능이 강하며, 새로운약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시에 의미 있는 일자리, 안전한 주거, 수준 있는 교육, 적절한 의료 서비스, 법 앞에서의 인종 및 계급적 평등에 소외되어 있다. 이는 중독 위험 요소의 위험한 연쇄작용을 불러온다. - P44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완충재를 가득 채운 독방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를 너무 질병처럼 대하고 과하게 관리하는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러면 아이들은 상처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처할 방법도 모르게 된다.
우리가 아이들을 역경으로부터 보호한 탓에, 아이들이 역경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을 거짓으로칭찬하고 현실을 감추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인 탓에, 아이들이 참을성이 떨어지고 권리만 더 내세우며 자신의 성격적결함에 무지하게 된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이 원하는 걸 다들어준 탓에, 새로운 쾌락주의 시대를 조장하게 된 건 아닐까? - P53

뇌의 주요 기능성세포는 뉴런neuron이라고 불린다. 뉴런들은 시냅스에서 전기 신호와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을 통해 서로소통한다.
신경전달물질은 야구공과 같다. 투수는 시냅스 전presynaptic 뉴런이고, 포수는 시냅스 후postsynaptic 뉴런이다. 투수와 포수 사이의 공간은 시냅스 틈새synaptic cleft다. 공이 투수와 포수 사이에서던져지는 것처럼, 신경전달물질은 뉴런들 사이를 오간다. 뇌에서 전기 신호를 조절하는 화학적 메신저인 셈이다. - P66

도파민은 보상 과정에 관여하는 유일한 신경전달물질은 아니지만, 신경과학자들 대부분은 도파민이 그중 가장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도파민은 ‘보상 그 자체의 쾌락을 느끼는 과정‘보다 ‘보상을 얻기 위한 동기 부여 과정‘에 더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유전자 조작으로 도파민을 만들 수 없게 된 쥐들은 음식을 찾지못하고 음식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굶어 죽지만, 음식을 입안으로 바로 넣어주면 음식을 씹어서 먹으며 그걸 즐기는 것처럼 반응한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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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나 자신을 사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렇게 말하니 정말 살인자 같다!) 신문에서 살인사건 관련 기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주 경계선을 넘어 다른 주로 도망 다니는 자들, 마약에 중독된 소아과 의사들, 범죄 혐의를 받는 인격 파탄자들이 자기네들이 나쁜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데, 심지어는 짐짓 자기 자랑까지하는 데 충격을 받고는 한다.
"나는 본바탕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이것은 얼마 전에 텍사스 주에서 여섯 명의 간호사를 도끼로 쳐 죽인 연쇄살인범 - 보도에 따르면 전기의자에 앉게 된- 의 말이다. 나는 이 사건의 보도를 흥미롭게 눈여겨본 적이 있다.
나는 스스로를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우리의 텍사스 친구가 보여주듯이, 자신을 아주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불가능한 모양이다.  - P9

얼마나 빠른 속도로 떨어졌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필름을 천천히 틀어놓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눈에는 그때의 광경이, 사고로 위장된 상황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의 장면장면이 보이곤 한다. 소나기처럼 떨어지던 자갈, 풍차처럼 돌아가던 버니의팔, 나무뿌리를 잡으려다 하릴없이 허공만 그러쥐던 버니의 손 소리에 놀라 관목 숲 속에서 날아와서는 까옥까옥거리며 컴컴한 하늘로 날아오르던 까마귀 떼, 카메라가 헨리에게로 넘어가면.... 벼랑에서 한 발 물러서는......헨리. 바로 이 순간에 필름이 영사기 안에서 헛돌면서 스크린은 암흑이 된다. 다 끝났다(Consummaturn est).
밤에 침대에 누울 때마다 나는 이 지겨운 소형 다큐멘터리 영화의 관객이 되어야 한다(눈을 뜨면 영화 장면은 온데간데없어진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처음부터 다시 돌아간다). 나는 이 영화가 개인의 견해를 무시한 충실한 다큐멘터리인 데, 섬세한 장면까지 남김없이 담고 있는 데, 감정이 깡그리 배제되어 있는 데 자주 놀라고 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내 머릿속의이 영화는, 내가 체험한 것을 독자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세하게 거울에 되비쳐내고는 한다. 시간의 흐름과, 되풀이되는 상영은 기억에다 원래의 경험에는 없었던 위험한 요소를 덧붙여서 경험을 살찌운다. 나는 그날의 그 일을 냉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공포, 연민도 없었다. 나에게 있었던 것은 오로지 호기심뿐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인상은 내 시신경 안에서 맹렬하게 타오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가슴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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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그렇게 우리의 무의식이 촉발하는 그런 본능은 아니다. 어쨌든 버니가 연출하는 위기는 급박하게 다가오는 그런 위기가 아니었다. 그 위기는서서히, 조용히 증폭되면서 다가왔다. 그 위기는 추상적으로나마 연기될 수도 있었고, 얼마든지 변형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까지도 손을 거두면 아무 일도 없을 터인 그 최후의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상황을 재고할 여지가 있었다. 우리의 목숨에 대한 공포만으로도 버니를 교수대로 끌고 가 목에 올가미를 걸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버니가 딛고 선 의자를 걷어차게 하는 데는 나름의 급박한 어떤 자극이 필요했다.
버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리에게 계속해서 그런 자극을 공급했다. - P354

"너는 거기에서 틀리고 있어. 우리가 완벽한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어떤목적지에 이르려 하면서 일의 순서를 지나치게 꼼꼼하게 계획해둘 경우 그논리적인 방법이 우리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성적인 사람의 눈에는 이성적으로 계획한 일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는 말이야. 그러나 우연, 혹은 우연이 가져오는 행운은? 그건 보이지 않아. 예측 불가능, 비인위적인 것이야. 우리 입장에서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버니를 따라다니는 게 좋겠어, 아니면 버니가 자기의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주는 게 좋겠어?"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단조로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P398

헨리가 그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버니는 헨리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물었다.
"세상에 너희들 여기에서 뭘 하고 있어? 시체라도 파묻고 있는 거야, 뭐야?"
헨리는 웃었다.
"잘 왔다. 우리는 역시 재수가 좋아."
"사슴 사냥꾼들의 전당대회라도 벌어진 거야 뭐야?"
"응. 그렇게 부르는 수도 있기는 해."
"있기는 해? 웃기네."
버니가 헨리를 비웃었다.
헨리는 입술을 깨물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응, 그렇게 부르는 수도 있기는 해, 나는 그런 용어가 마음에 안 들지만말이야."
사방이, 세상 만물이 그렇게 조용할 수 없었다. 멀리서 숲 속 어딘가에서,
딱따구리의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말해봐. 도대체 너희들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버니가 물었다. 버니는 그제야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숲이 조용해졌다. 소리라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헨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고사리 몇 포기 캐려고."
그러고는 버니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2권에서 계속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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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행성〉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지지를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렉스는 이렇게설명했다. "온라인에서는 (아스퍼거인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틀에 박힌 버릇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채팅할 수 있기때문이죠." 사회적 압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눈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눈썹을 치켜세운다든지, 억양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는등 순간순간의 비언어적 소통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아스퍼거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 그런 식의 소통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2005년경에 이르러 인터넷에서 하나의 표현양식으로 자리잡은 텍스트를 통한 대화는 <잘못된 행성> 사용자들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신호에 애를 먹었던 사람에게 인터넷은 해방구였다. 채팅창에서는 누가 아스퍼거인인지 전혀할 수 없었다. - P700

<잘못된 행성>의 구독자 수가 치솟기 시작할 무렵 아스퍼거 증후군을 둘러싸고 형성된 정체성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공공정책과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진 것은물론, 할리우드에서는 "아스퍼거적" 인물이 나오는 쇼를 기획하고 온라인 액세서리 샵에서는 "아스피의 자부심Aspie Pricle "이란 주제로커피컵, 머리띠, 커튼, 토트백, 티셔츠 등 온갖 물건을 팔았다. 당시인기를 끈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사회적으로 서투르지만, 지적으로는 뛰어나다네.socially awkward intellectually advanced."
"누구나 때때로 자폐인 비슷할 때가 있지 않나요?" 우타 프리스는 물었다. "저 역시 가끔은 약간 자폐 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요." 실제로 아스퍼거 증후군이 "정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정확한 구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개념은 사람들에게 쉽게 먹혀 들었다. 누구나 스펙트럼이라는 냇물에 발을 담가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농담이 전혀 우습지 않다거나, 규칙을 너무 곧이곧대로 지킨다고 놀림을 당한다거나, 그저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 지니고 있는 성향을 버젓이 DSM에 승인된 진단명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일말의 안도감과, 심지어 약간의 만족감까지 선사했다. - P704

이런 생각은 일부 "아스피"들이 특정한 우월성을 주장하며 장애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템플 그랜딘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동안 혼자 바위를 깎아내는 데 몰두했던 아스피가 인류 최초로 돌로 된 창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약간의 자폐적 성향은 멋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폐인이 그녀 혼자만은 아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자폐인의 뇌는 창조적 사고를 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과 세상을 바꿔놓을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필요한 인내심을 갖고 있다. 자기를 아스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이런 생각을 점점 발전시켜 인류의 지식과 문화에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자폐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 일종의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이작 뉴턴, 에밀리 디킨슨, 에이브러햄 링컨, 미켈란젤로, 모짜르트, 반 고흐 등이 흔히 언급되었다. 템플그랜딘이 서문을 쓴 놈 레전Norm Ledgin 의 《제퍼슨 진단하기 Diagnosing Jefferson)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아스퍼거 증후군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책 한 권을 통째로 바친 후, 그것이 "제퍼슨의특이한 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 P705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 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제공해야 할서비스의 종류가 확실히 달라지자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동과 함께 자폐증의 정치학을 영원히 바꿀 훨씬 급진적인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이다. 그 개념은 자폐공동체 내에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일부 자폐 부모는 새로운 적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폐인들 자신이었다. - P712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신경다양성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매우 건전하고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은 훨씬 논쟁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 무슨 완치가 필요한가? 그러니 자폐증 역시 완치 따위는필요 없다. 자폐인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자폐를 없애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 P718

스스로 자폐인이었기 때문에 네이만은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맞서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네이만이 논쟁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않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자폐인이란 사실을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기고 자신과 동료들이 심한 편견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대놓고 논쟁을 벌여서 이로울 것은 없었다. 네이만은 딱 맞는 시점에 ASAN을 출범시킨 셈이었다. 자폐증을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하며, 따라서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명망있는 단체는 공연히 그와 논쟁을 벌여 무지몽매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인터넷 채팅방과 블로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그를 깎아내린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네이만의 가장 큰 표적인 오티즘 스피크스는 다소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응수하지 않았다. - P729

하지만 "치료하지 말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벨은 이 부분이 청중, 특히 주지사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외부인에게 깊은인상을 주지 않기를 바랐다. 이 특이한 대학생이 모든 자폐인을 대변한다고 판단하지 않아야 했다. 사실 네이처럼 재능있고 말 잘하며 설득력을 지닌 활동가들이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울수록 점점 많은 사람이 심한 장애를 겪는 자폐인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벨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밤중에 나가 돌아다니다 강이나 이웃집 수영장에 빠져 익사하지 않도록 24시간 눈길을 뗄 수 없는 사람들, 성인이 된 후에도 하루에 두 번 이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엄연히 자폐공동체의 일원이지만 인터뷰 따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저녁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결국 대중은 자폐증이 얼마나 심한 장애일 수 있는지, 삶을 누릴 기회를 얼마나 많이 박탈하는지,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에 코웃음을 치는 일부 가족이 "진짜 자폐증"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 P731

네이만은 정중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지만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벨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통찰을 남기기도 했다. 활동가로서 그의 투지와 진실성이 난공불락이라 할 정도로 견고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빙빙 돌려 말하거나, 사실을 지어내거나,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자녀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극도로 절망하는 자폐인의 어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도 조금도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움츠러들거나, 동정을 표시하거나, 어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벨은 네이만이 진정으로 자폐 장애인인지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전혀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확신을 나타내주기도 했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의관점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태도가 사이먼 배런코언이 "심맹"이라고 일컬었던 고전적 자폐성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배런-코언이 제안한 "필연적 결과 이론"에 따르면 이런 인지 방식은 남에게 공감을 느끼는 경험을 저해한다. 이런 개념은 논란이 있으며 아스퍼거인에게 모욕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스퍼거인들은 공감 "결손"을 시사한 연구들이 과장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역의 장애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때문에 아스퍼거인이 "신경정상자들"의 세계에서 살기가 그토록 어렵다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 P733

오래도록 부모들이 변화를 주도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자폐증에 관한 대화는 어린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레오카너가 창안했던 "유아자폐증"이란 진단명에서 이바 로바스의ABA 치료, 공교육 편입을 위한 투쟁, 백신을 둘러싼 논란에 이르기까지 자폐증에서 주목받은 부분은 항상 어린이의 장애라는 측면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레인 맨>에서 그려낸 레이먼드나 템플 그랜딘은 자폐증을 겪는 성인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폐증을 생각할 때는 누구나 어린이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피트 게르하르트는 스펙트럼의 "성인 쪽에는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유명한 성인 자폐증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그는 동료들이 어린이 쪽을선호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어린이가 성인보다 훨씬 귀엽고 신체의크기나 오래도록 굳어진 습관이라는 면에서도 도움을 주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가 성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앞날이 밝은 선택"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763

자폐 성인들의 환경을 보다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려는 노력은 적어도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아직까지 소규모실험에 그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녀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이면서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나이든 자녀의 삶을 염려하는 부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자폐적 ‘다름‘에 대한 인식이 계속 확산되면서 이들을 돌보는 것이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할 책임이란 생각이 널리 퍼진다면, 거기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언어능력과 언론에서 다루기 좋아하는 특별한 재능과 기술을 겸비한 자폐인뿐만 아니라 모든 자폐인에게 살아갈 공간을 마련하는 데 발벗고 나설 수 있을 것이다.  - P768

야, 너 왜그래? 이 자식아!
게르하르트에게 이 말은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는 버스 앞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기 전에 니콜라스를 보호해야 했다.
갑자기 다른 승객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게르하르트는 그가누군지 몰랐지만, 분명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몇 주간 니콜라스와함께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다니며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게르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년을 괴롭히는 승객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얘가 왜그러냐구? 얘는 자폐인이요 이제 당신들이왜 그러는지 말해봐요.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가든지."
긴장 어린 정적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남성은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니콜라스 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니콜라스를 건드리지 않았다. 게르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그 버스가 즉흥적으로 자신이 평생 그려왔던 공동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노선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다녔던 십여 명의 승객 사이에 일종의 친근감이 생겨났던 것이다. 미시시피주 포레스트처럼 이웃들은 어딘지 다른 그 소년이 사실은 "우리 중 하나",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일은 뉴저지주의 한 버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서든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P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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