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행성〉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지지를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렉스는 이렇게설명했다. "온라인에서는 (아스퍼거인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틀에 박힌 버릇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채팅할 수 있기때문이죠." 사회적 압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눈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눈썹을 치켜세운다든지, 억양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는등 순간순간의 비언어적 소통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아스퍼거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 그런 식의 소통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2005년경에 이르러 인터넷에서 하나의 표현양식으로 자리잡은 텍스트를 통한 대화는 <잘못된 행성> 사용자들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신호에 애를 먹었던 사람에게 인터넷은 해방구였다. 채팅창에서는 누가 아스퍼거인인지 전혀할 수 없었다. - P700
<잘못된 행성>의 구독자 수가 치솟기 시작할 무렵 아스퍼거 증후군을 둘러싸고 형성된 정체성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공공정책과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진 것은물론, 할리우드에서는 "아스퍼거적" 인물이 나오는 쇼를 기획하고 온라인 액세서리 샵에서는 "아스피의 자부심Aspie Pricle "이란 주제로커피컵, 머리띠, 커튼, 토트백, 티셔츠 등 온갖 물건을 팔았다. 당시인기를 끈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사회적으로 서투르지만, 지적으로는 뛰어나다네.socially awkward intellectually advanced." "누구나 때때로 자폐인 비슷할 때가 있지 않나요?" 우타 프리스는 물었다. "저 역시 가끔은 약간 자폐 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요." 실제로 아스퍼거 증후군이 "정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정확한 구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개념은 사람들에게 쉽게 먹혀 들었다. 누구나 스펙트럼이라는 냇물에 발을 담가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농담이 전혀 우습지 않다거나, 규칙을 너무 곧이곧대로 지킨다고 놀림을 당한다거나, 그저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 지니고 있는 성향을 버젓이 DSM에 승인된 진단명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일말의 안도감과, 심지어 약간의 만족감까지 선사했다. - P704
이런 생각은 일부 "아스피"들이 특정한 우월성을 주장하며 장애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템플 그랜딘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동안 혼자 바위를 깎아내는 데 몰두했던 아스피가 인류 최초로 돌로 된 창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약간의 자폐적 성향은 멋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폐인이 그녀 혼자만은 아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자폐인의 뇌는 창조적 사고를 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과 세상을 바꿔놓을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필요한 인내심을 갖고 있다. 자기를 아스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이런 생각을 점점 발전시켜 인류의 지식과 문화에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자폐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 일종의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이작 뉴턴, 에밀리 디킨슨, 에이브러햄 링컨, 미켈란젤로, 모짜르트, 반 고흐 등이 흔히 언급되었다. 템플그랜딘이 서문을 쓴 놈 레전Norm Ledgin 의 《제퍼슨 진단하기 Diagnosing Jefferson)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아스퍼거 증후군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책 한 권을 통째로 바친 후, 그것이 "제퍼슨의특이한 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 P705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 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제공해야 할서비스의 종류가 확실히 달라지자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동과 함께 자폐증의 정치학을 영원히 바꿀 훨씬 급진적인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이다. 그 개념은 자폐공동체 내에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일부 자폐 부모는 새로운 적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폐인들 자신이었다. - P712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신경다양성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매우 건전하고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은 훨씬 논쟁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 무슨 완치가 필요한가? 그러니 자폐증 역시 완치 따위는필요 없다. 자폐인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자폐를 없애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 P718
스스로 자폐인이었기 때문에 네이만은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맞서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네이만이 논쟁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않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자폐인이란 사실을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기고 자신과 동료들이 심한 편견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대놓고 논쟁을 벌여서 이로울 것은 없었다. 네이만은 딱 맞는 시점에 ASAN을 출범시킨 셈이었다. 자폐증을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하며, 따라서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명망있는 단체는 공연히 그와 논쟁을 벌여 무지몽매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인터넷 채팅방과 블로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그를 깎아내린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네이만의 가장 큰 표적인 오티즘 스피크스는 다소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응수하지 않았다. - P729
하지만 "치료하지 말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벨은 이 부분이 청중, 특히 주지사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외부인에게 깊은인상을 주지 않기를 바랐다. 이 특이한 대학생이 모든 자폐인을 대변한다고 판단하지 않아야 했다. 사실 네이처럼 재능있고 말 잘하며 설득력을 지닌 활동가들이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울수록 점점 많은 사람이 심한 장애를 겪는 자폐인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벨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밤중에 나가 돌아다니다 강이나 이웃집 수영장에 빠져 익사하지 않도록 24시간 눈길을 뗄 수 없는 사람들, 성인이 된 후에도 하루에 두 번 이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엄연히 자폐공동체의 일원이지만 인터뷰 따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저녁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결국 대중은 자폐증이 얼마나 심한 장애일 수 있는지, 삶을 누릴 기회를 얼마나 많이 박탈하는지,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에 코웃음을 치는 일부 가족이 "진짜 자폐증"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 P731
네이만은 정중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지만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벨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통찰을 남기기도 했다. 활동가로서 그의 투지와 진실성이 난공불락이라 할 정도로 견고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빙빙 돌려 말하거나, 사실을 지어내거나,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자녀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극도로 절망하는 자폐인의 어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도 조금도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움츠러들거나, 동정을 표시하거나, 어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벨은 네이만이 진정으로 자폐 장애인인지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전혀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확신을 나타내주기도 했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의관점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태도가 사이먼 배런코언이 "심맹"이라고 일컬었던 고전적 자폐성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배런-코언이 제안한 "필연적 결과 이론"에 따르면 이런 인지 방식은 남에게 공감을 느끼는 경험을 저해한다. 이런 개념은 논란이 있으며 아스퍼거인에게 모욕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스퍼거인들은 공감 "결손"을 시사한 연구들이 과장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역의 장애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때문에 아스퍼거인이 "신경정상자들"의 세계에서 살기가 그토록 어렵다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 P733
오래도록 부모들이 변화를 주도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자폐증에 관한 대화는 어린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레오카너가 창안했던 "유아자폐증"이란 진단명에서 이바 로바스의ABA 치료, 공교육 편입을 위한 투쟁, 백신을 둘러싼 논란에 이르기까지 자폐증에서 주목받은 부분은 항상 어린이의 장애라는 측면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레인 맨>에서 그려낸 레이먼드나 템플 그랜딘은 자폐증을 겪는 성인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폐증을 생각할 때는 누구나 어린이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피트 게르하르트는 스펙트럼의 "성인 쪽에는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유명한 성인 자폐증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그는 동료들이 어린이 쪽을선호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어린이가 성인보다 훨씬 귀엽고 신체의크기나 오래도록 굳어진 습관이라는 면에서도 도움을 주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가 성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앞날이 밝은 선택"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763
자폐 성인들의 환경을 보다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려는 노력은 적어도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아직까지 소규모실험에 그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녀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이면서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나이든 자녀의 삶을 염려하는 부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자폐적 ‘다름‘에 대한 인식이 계속 확산되면서 이들을 돌보는 것이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할 책임이란 생각이 널리 퍼진다면, 거기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언어능력과 언론에서 다루기 좋아하는 특별한 재능과 기술을 겸비한 자폐인뿐만 아니라 모든 자폐인에게 살아갈 공간을 마련하는 데 발벗고 나설 수 있을 것이다. - P768
야, 너 왜그래? 이 자식아! 게르하르트에게 이 말은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는 버스 앞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기 전에 니콜라스를 보호해야 했다. 갑자기 다른 승객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게르하르트는 그가누군지 몰랐지만, 분명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몇 주간 니콜라스와함께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다니며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게르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년을 괴롭히는 승객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얘가 왜그러냐구? 얘는 자폐인이요 이제 당신들이왜 그러는지 말해봐요.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가든지." 긴장 어린 정적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남성은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니콜라스 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니콜라스를 건드리지 않았다. 게르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그 버스가 즉흥적으로 자신이 평생 그려왔던 공동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노선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다녔던 십여 명의 승객 사이에 일종의 친근감이 생겨났던 것이다. 미시시피주 포레스트처럼 이웃들은 어딘지 다른 그 소년이 사실은 "우리 중 하나",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일은 뉴저지주의 한 버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서든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P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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