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에 광주항쟁 3주년을 기해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 전 총재가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1980년 5.17 계엄령 이후 야당 정치인의 투쟁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는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시킨 깃발이 되었다. 목숨을 담보한 23일간의 단식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서 신민당이 탄생했다. 우리는 김영삼 씨의 단식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6월 4일 70여 명의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의 듀폰 서클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 등의 팻말을 만들어 시위했다. 피켓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한국 대사관과 국무부, 백악관으로 이어지는 가두에서 시위를 했다. 남편은 6월 9일 자 <뉴욕 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했다. 김영삼 씨의 단식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조야의 여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문동환, 뉴욕의 임정규, 로스앤젤레스의 김상돈, 샌프란시스코의김재준 목사가 각각 그 지역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조직을 만들어 교포들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모국의 민주화 운동을 원했다. 또 8월 12일에는 김재준 목사 송별 만찬이 있은 후 김영삼 씨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P247

정부는 2월 12일 총선 전에 있을 그의 귀국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서울에서 안기부전 단장이 워싱턴으로 날아왔다. 총선 전에는 귀국을 절대 허용할 수 없으며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청와대 정무비서관도 귀국하면 다시 구속될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뉴욕 타임스> 기자가이 말을 전하면서 그래도 귀국할 것이냐고 전화를 했다. 그래도 귀국한다고 하니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런 이후 ‘제2의 아키노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이슈로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굉장한 반응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미국 정부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남편을 초청해국무부 직원 200여명 앞에서 강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안전 귀국보장과 전 대통령 방미 안건을 연계하는 무언의 압력이었던 셈이다. 그즈음전 대통령의 두 번째 미국 방문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노 상원의원이 공항에서 사살(1983.8.21) 당한 일이 생생했을 때이므로, 20여명의 저명인사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그와의 동행을 자원했다. 하원의원 2명(에드워드 페이건Edward Feighan, 토머스 폴리에타Thomas Foglietta), 카터 행정부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 퍼트리샤 데리언 Patricia Derian 과 전직 대사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퇴역 해군 대장, 세계변호사협회 회장, 대중 가수, 목사 등등이 자원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기자단이 동행 취재를 했다.
우리는 1985년 2월 6일 정든 워싱턴을 떠나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1박을하고 8일 낮에 귀국했다. 《뉴스위크》지는 커버스토리로 선정해 ‘폭풍의 귀국Storming Homecoming‘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우리 일행은 일반 승객과 함께줄을 서서 입국 심사를 받기로 약속했다. 공항 빌딩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복 경찰이 뛰어나와 우리 내외만 떼어 끌고 가려 하자 동행인들은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결사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는모습을 동행 기자들이 고스란히 기록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부끄러운시절의 한 풍경이다. 특히 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 데리언 여사가 많은 폭행을 당했다. 자신의 차관보 사무실 문에 ‘김대중을 구출하자‘라는 스티커를 붙여놓았던 데리언은 남편을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 자문위원으로 추천하는 등 많은 도움과 격려를 해준 열렬한 지지자였다.
우리는 결국 일행과 격리되어 커튼이 쳐진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워졌다. 동교동 집은 공사할 때 두르는 가림막에 에워싸여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귀환이었다. 2년 3개월 만의 착잡한 귀환이었다. 2만여 명의 환영 인파가 마중을 나왔다는데 우리는 한 명도 못 보았다. 우리 대신 동행한 인사들이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니 정말 감사하고 잘된 일이었다. - P251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할지 모른다는 루머도 떠돌았다. 1986년 가을 아시안 게임 후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훗날의기록을 보면 이는 사실이었다.

11월 2일 장세동 부장이 또다시 전 대통령의 지침을 전달했다. 전 대통령의 구상은 11월 8일 토요일 저녁 11시에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자정을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비상조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군에서 죽이기로 했으니 정계에서 은퇴시키고 재수감과 외국행을 택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 같은 계엄 선포와 비상조치안이 나온 배경에는 10월 28일 일어난 전국 26개 대학 학생들의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이 있었다. 농성 나흘째 무려 1,274명의 학생을 연행해 구속한 학생운동 역사상 최다 구속을 기록한 사건이다. 그들은 그만큼 ‘사형수 김대중‘이 대통령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동안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다.
"만일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선제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고심하던 남편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희생을 두고 볼 수 없다며 11월 5일 제안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의외의 곳에서 화답이 왔다. 그즈음 서독을 방문 중인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남편의 불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대중 씨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내가 차기 대선 후보를 양보하겠다."
그 후 남편은 ‘불출마 선언‘을 뒤집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김영삼씨의 ‘대선 후보 양보‘ 기자회견은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을 재는 잣대는 처음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상조치설의 디데이는 조용히 지나갔다. 김대중이 불출마 선언을 해서인지 아니면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책을 골라 쌓아놓았다.
"내가 감옥에 가거든 이 책들을 차입해주오."
남편은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 - P262

5.18 광주민중항쟁 7주년 기념 미사가 거행되던 5월 23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의미심장한 미사 강론에 이어 7주기 및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나자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명의의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수사 내용이 조작되었습니다. 그를 직접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의해 짜여졌고 또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한 장의 성명은 국민의 의분을 폭발시켰다. 종교계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비롯한 재야의 각계각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일민주당은 손을 잡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를 5월 27일 창립했다. 해방 후 최대 조직이었다. 국본은 고문으로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김영삼 민주당 총재, 연금 중인 김대중 상임고문을 선임했다. 국본은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씨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절차를 진행하려는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 날짜에 맞추어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를기획했다. ‘6.10 대회‘의 정식 명칭은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였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했다.
국민들은 국본의 행동지침을 따랐다.
청년들은 최루가스가 안개처럼 자욱한 거리를 질주하고 여성들은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이들을 응원했다. 그런가 하면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리며 달렸다. 전국의 교회와 사찰은 타종으로써 참여했다. ‘독재타도‘, ‘호헌 철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었다. 사무실의 직장인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빌딩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손수건 등이 꽃잎처럼떨어졌다. 길거리의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무료로 나눠 주었다.
가정주부들은 김밥으로 시위대를 격려했다. 영호남이 하나로 외쳤으며 남녀노소가 한 몸이었다. 해방 후 우리에게 그 같은 대동제를 지낸 날이 또 있었을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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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 맨 앞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포승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현관에 들어와 서서 응접실 의자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더니 또 우르르 나갔다. 그 청년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며, 지금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인데 그의 허위 자백을 받아 사건을 조작하려고 해도 그가우리 집에 온 사실이 없어서 내부 묘사를 못하니까 현장 답사를 시킨 것이었다. 고문에 굴복해서 허위 자백을 하고 법정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한 또 한 사람이 정년이다. 광주사태 배후조종 자금의 금액을 정하는 단계에서 수사관이 했다는 말이다.
"학생이 1,000만 원을 받았다면 너무 많지. 그러니까 500만 원을 받은것이다. 잘 기억해두어라. 500만 원이다."
정동년이 출옥하여 양심선언을 하며 폭로한 말이다. 왜 정동년인가. 그들이 가택수색을 해서 가져간 방명록에서 종이 한 장을 통째로 사용해 호기롭게 서명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남편은 부재중이었으며 그리고 더욱이 학생들은 만나지 않던 때였다. 우리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85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후 그가 사죄하러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다.
처음에는 ‘국기문란 사건이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내란 음모 사건‘으로, 다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발전했다. 오직 김대중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나리오의 변화 과정이었다. 공소장은 13만 자로, 낭독하는 데만 6시간 20분이 걸렸다. 6명의 검찰관이 교대로 했다. 우리는 처음에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줄 알았는데 유독 남편에게만 국가보안법이 추가되었다. 내란 음모는 법정형의 상한이 무기징역이므로 사형 죄명이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수괴‘로 꾸며낸 것이 바로 ‘한민통의장‘이었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한민통‘ 미국 지부를 만들고 일본지부를 결성하려던 차에 납치당해 끌려왔던 것이다.  - P214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눈물로 기도하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매만지면서 나마저 무너져선 안된다고 마음을 다졌다. 9월 13일 남편의 최후진술이다.

작년 11월 5일 박 대통령의 국장을 집에서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는데 아직도 내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박 대통령의 죽음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 ••• ) 나는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것입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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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건 간에 읽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똑같이 하측두 피질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다. 그리스어나 영어처럼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나 중국어처럼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언어나 거의 차이가 없다. 이는 데제린의 병변 연구와 뇌 영상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또한 같은 영역의 과다 활동으로 기능의 항진이나 왜곡이 야기되는 다양한 ‘과잉‘ 장애로도 입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실독증의 반대는 어휘 환시나 문서 환시, 즉 헛 문자를 보는 증상이다. 시각 경로(망막에서 시각피질까지 시각에 관련된 부위)에 장애가 있는사람들은 환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도미니크 피치의 연구진은 환시를 겪는 이 환자들의 4분의 1에게 "텍스트, 낱말, 낱자, 숫자, 음표 환시"가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피치의 연구팀이 밝혀냈듯이, 그런 문자 환각은 왼쪽 후두 측두 부위, 특히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손상을 입는다면실독증을 일으킬 수 있는 바로 그 영역)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실독증 환자는 어휘 환시를 겪는 환자든 혹은 어떤 언어든 정상적인 읽기가 가능한 환자든 간에, 결론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즉, 글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대뇌 우세반구(언어가 자리 잡은 반구)에 문자와 낱말을 (그리고 수학이나 음악 등의 다른 시각적 표기 부호도) 인식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하나의 신경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 P88

여기서 심오한 물음이 떠오른다. 어째서 모든 사람에게 읽기 기능이 붙박이로 딸려 있는 것인가? 쓰기는 인류 문화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명된 것인데?
말로 하는 의사소통(그리고 그 신경학적 기제)에는 자연선택이라는 점진적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모든 자취가 남아 있다. 선사시대 인류의 뇌 구조의 변천 과정은 정교한 두개골 속 틀과 여타 화석 증거를 통해 속속들이 밝혀졌으며, 더불어 성도聲道의 변천도 추적했다. 인류가 말을 시작한 시기가 수만 년 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읽기 능력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문자를 사용한 역사가 5,000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의 일이다. 사람 뇌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 읽기에 탁월하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이것을 월리스 문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사람의 뇌에 잠재된 (언어, 수학 등) 많은 능력(원시 혹은 선사 사회에서는 거의 쓸모없었을 능력)의 역설에 깊이 경도되었다.
윌리스는 자연선택이 당장 유용한 능력의 발생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있겠지만, 수만 년 뒤에 나타난 고등한 문화에서나 인정받을 만한 잠재적 능력의 존재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인류의 이러한 잠재력을 어떠한 자연 작용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월리스는 하릴없이 초자연적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신이 사람의 정신 속에 그런 능력을 심어 넣은 것이라고 말이다. 월리스의 관점에서 신이 내린 선물로 이보다 좋은 예는 없었다. 충분히 진보한 문화가 출현할 때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는 특별한 새 능력 말이다.  - P89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와 여러 자극들이 가득한 세상이며, 우리의 생존은 이러한 자극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를 에워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체계, 빠르고 확실한 환경 분석방법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보는 능력, 즉 대상을시각적으로 정의하는 능력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엄청난 지각능력, 온갖 기능의 계층구조 전체를 동원하는 능력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일련의 조명 상태나 주위 환경에 따라 그곳에 놓인 사물의 모양, 표면, 윤곽, 경계를 보며, 그사물의 이동 혹은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관점이 바뀐다. 이런 변동 많은 복잡한 시각적 혼돈 속에서 시각 대상의 성질을 추론하거나 가정할 만한 불변의 요소를 추출해야 한다. 우리 주위의 그 무수한 사물들 하나하나에 각각 해당 표상이나 기억 심상이 따로 있어야 한다면 무척이나 비경제적인 세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조합인데, 무한한 방식으로 조합될 수 있는 어휘의 유한한 집합이 필요하다. 가령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짜 맞춰 하나의 언어를 구사하는 데 들어가는 만큼의 낱말과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처럼 태어났을 때나 그 직후에 바로 인식이 가능한 대상도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보고 만지고 조작하고 느낌과 모양새를 관련시키는 등 경험과 활동을 통해 습득된다. 시각적 물체 인식은 하측두피질에 있는 수백만 뉴런이 담당하는데, 여기에서 신경 기능은 경험과 훈련, 교육 등의 자극에 수용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단히 가변적이다. 하측두피질의 뉴런은 시지각 일반을 위해 진화했지만, 다른 목적(그 가운데가장 두드러지는 목적이 읽기 기능)에 동원되기도 한다. - P90

 그래서 문자의 형태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윤곽 집합의 닮은꼴로 정선되어 기존의 사물 인지 기제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문화적 도구인 문자는 하측두피질 신경이 선호하는 일련의 형태를 이용하도록 진화했다. 드안느는 말한다. "문자의 꼴은 아무렇게나 선택된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뇌가 표기 체계의 설계를 얼마나 제약하는지, 문화상대주의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영장류의 뇌는 아주 제한된 수의 문자꼴 집합만 받아들인다." 
이는 ‘윌리스 문제‘를 푸는 우아한 해법이다. 실로 여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쓰기와 읽기의 기원은 진화 과정의 직접적인 적응으로 이해할수 없다. 그것은 뇌의 가소성에 달린 문제다. 한 사람의 짧은 일생에서조차 경험, 즉 경험선택은 자연선택만큼이나 강력한 변화의 매체가 된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진화를 통한 발전보다 수십만 배 빠른 시간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개인적 발전을 막기는 커녕 그러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우리의 문자는 신이 개입해서 준 선물이 아니라 문화적 발명품이요.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경의 속성을 새로이 영리하게 창조적으로 이용하게 만드는 문화선택의 결과다. - P92

얼굴 인식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며, 대다수는수천 명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고 군중 속에서 잘 아는 사람의얼굴을 쉽게 찾아낸다. 그러한 구분에는 특수한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며, 이 기술은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영장류에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얼굴 실인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뇌의 가소성, 즉 결함이 있거나 손상된 뇌 부위의 기능을 뇌의 일부 혹은 시스템이 대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얼굴 실인증이나 지형 실인증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며, 보통은 나이가 든다고 약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얼굴 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비상한 수완과 창조적 전략을 발휘하여 그러한 결함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이하게 생긴 코나 수염, 안경 혹은 의복 형태 따위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다. 얼굴 실인증을 겪는 많은 사람이 목소리나 자세 혹은 걸음걸이로 사람을 인식하는데, 물론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제자일 것으로 예상하고, 사무실에서 마주친 사람이면 직장 동료일 것으로예상하는 등) 맥락에 따른 예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전략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도 발동하여 증세가 심하지 않은 얼굴 실인증 환자들은 자신의 얼굴 인식 능력이 실제로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의식하지 못해서 (예를 들면 머리카락이나 안경 같은 부수적 단서를 제거한 사진 테스트 등의) 검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 P109

이처럼 대뇌피질이 등위적이라는 생각이 우세하다가 1860년대에 폴브로카의 연구가 나오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브로카는 표현성 실어증을겪었던 많은 환자를 검시하여 모든 시신의 손상 부위가 좌측 전두엽에 국한됨을 입증했다. 1865년에 브로카는 "우리는 좌반구로 말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로써 뇌가 균질하며 미분화적이라는 생각은 사라진것으로 보인다.
브로카는 좌반구 전두엽의 특정 부위에서 ‘말을 담당하는 운동 중추‘를 찾아냈다고 여겼는데, 오늘날 브로카 영역이라고 부르는 부위다. 이것이 ‘위치 파악‘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새 장을 열었고, 신경 및 인지 기능과 뇌의 특정 중추와의 순수한 상관관계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경학은 성큼 전진하여 각종 ‘중추‘를 찾아낸다. 브로카가 말을 담당하는운동 중추를 찾아낸 데 이어, 베르니케는 말을 담당하는 청각 중추를, 데제린은 말을 담당하는 시각 중추를 찾아냈다. 이는 전부 언어 반구인 좌반구에 있으며, 우반구에서는 시지각 중추를 찾아냈다. - P113

일부 연구자는 얼굴 실인증이 있는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일장소를 인식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얼굴과 장소인식을 관장하는 영역이 각기 따로 있으면서도 인접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두 기능 모두 하나의 구역에서 관장하는데, 한쪽은 얼굴에 치중하고 다른 쪽은 장소에 치중한다고 믿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신경심리학자 엘코논 골드버그는 대뇌피질 안에 정해진 기능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추 혹은 신경 구성 단원이 장착되어 있다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위 피질 기능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영역이 있어서 경험과 훈련에 의해 계발된 기능이 그 경사를 따라 합치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저서 《내 안의CEO, 전두엽The New Executive Brain) [한국어판, 시그마프레스, 2008]에서 뇌가 기능적 단원들의 집합이라면 유연성과 가소성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므로 진화론적으로 단원[모듈] 원리에서 경사 원리로 이동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골드버그는 단원성(정해진 기능, 입력분과 출력분이 정해져 있는 책들의조합)이 시상의 특성일 수는 있지만, 대뇌피질은 경사 구조에 가까워서 1차 감각피질에서 연합피질로, 그리고 무엇보다 최상위에 있는 전두피질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현저해진다고 주장한다. 단원성과 경사성은 서로를 보완하는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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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둘러치고 거리를 떼어놓는 것은 불의의 감정 폭발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가끔 철없이 달려들어 제 부모들 품으로 안겨들때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병을 앓아도 부모 제 부모니까."
"원장님 말씀대로 이 섬 안에서는 모든 일이 입으로 말해지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에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게 오히려 상식이 되고 있는 편이구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그렇다는 게요."
원장은 면회 대열에 눈을 주고 있으면서도 상욱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흰 늘 저 아이들에게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병보다도 이 병은 전염성이 약하므로 너희들은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아무것도 다를 데가 없는 떳떳한 어린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 아이들은 직원들 자녀들이 다니는 고개 너머 국민학교로는 등교를 못합니다. 뿐입니까. 이 보육소의 분교에서마저도 건강한 선생은 수업을 맡아주러 오시는 분이 없습니다. 보육소의 미감아 교실 선생님은 거의 모두가 음성 병력자들뿐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좀 기분 문제가 있을 테니까." - P51

분홍색이나 벚꽃 소식이란 이 병이 얼굴 근처에 첫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자주 그 벚꽃의 분홍색을 볼 수 있는 데서 연유한 말이었다. 분홍색이나 자주색은 병이 나은 다음까지도 눈두덩 같은 데에선 평생을 두고 떠나가주지 않는 이 병 고유의 색조라 할 수 있었다. 섬사람들은 누구나 그 절망스런 분홍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는 무슨 인연인지 붉은 황토색이 많았고, 봄만 되면 그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섬을 뒤덮었다. 육지 사람들은 봄이 되면 떼지어 섬으로 와서 이 붉은 섬을구경하고 돌아갔다. 황톳길과 벚꽃과 그 벚꽃의 분홍색이 원색의 그림자처럼 곱게 점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분홍색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누구나 분홍색을 저주했다. - P54

" 그 사람들은 오늘 낮 원장님을 뵙기 전에 벌써 열 번 이상이나 그곳에 서서 새 원장이 숨겨 가지고 온 주원장의
동상을 보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만 오면 주원장의 동상을 새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나 원장이 섬을 떠나고 나면 섬에 남는 것은 배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공을 하고 간 쪽이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
"그들은 결국 그런 식으로 어느 원장에게서나 똑같은 주정수 원장의 연설을 듣게 되었고, 그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그들은 열 번 이상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아까 이 섬 전체가 온통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런 불신과 배반이야말로 바로 그 수많은 주정수의 동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그 사람들은 아마 원장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그자들은 또 한번 그 주정수의 연설을 들으면서 원장님에게서 그의 동상을 찾으려 하고 있었을게 틀림없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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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과 복학 조치는 그동안 금압되었던 총학생회 부활로 불붙었다. 학원가는 3월에 학생회를 구성했다. 4월에 교내에서 ‘교련 철폐‘, ‘유신 어용 교수 퇴진‘ 등 학내 민주화 투쟁을 하고 5월엔 거리로 나섰다. 13일 밤 학생들이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14일은 정오부터 전국의 대학 교문이 활짝 열려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선 광화문으로 수만 명이 진출했다. 대학의 교문을 굳게 지키던 전경들이 일제히 사라지는가 하면 인천 지역 대학생들의 서울 진입을 막던 경찰이 오히려 이들을 도심으로 유도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15일 오후에 서울역 광장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여 연좌했다. 서울역 광장으로 향하는학생들은 ‘5·16 장례 대행진‘, ‘5·16 사형집행‘, ‘썩은 언론 규탄한다‘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었다. 대학생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오랜 반감을 볼 수있는 현수막이었다.
권력 내부의 모든 정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민들은 학생들의 움직임의 배경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저 다소 불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늦어지긴 했지만 국회 개회일인 5월 20일을 기다렸다.
그즈음 신군부는 검열로 언론을 장악하고 일본발 정보인 ‘남침설‘과 ‘휴전선에서의 총격전‘ 등을 유포하면서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도와온 자국민들에게 어서 한국을 떠나라는 긴급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정치권은 그저 자제를 호소했다. 신현확 총리의 정치 일정 단축 성명과 시민들의 냉담함, 그리고 군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에 각 대학의 학생 대표들은 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이 서울역 회군 결정은 비판을 받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지만 그때 만약 10만여 학생들이 서울역을 사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광주사태‘가 아닌 ‘서울사태‘가 일어나고 신군부 등장이 저지되었을까? 때로 매우 궁금해지는 역사의 한 고비가 아닐 수 없다. - P197

국민연합의 문익환목사, 이문영 교수, 예춘호 의원이 15일 동교동을 방문했다. 앞서 7일 성명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없자, 문익환 목사가 2차 성명서를 만들고 한완상 교수 모친 상가에서 검토를 거친 후 우리 서명을 받으러 온 것이다. 성명서 중 행동강령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계엄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므로 계엄군은 상부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없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고, 무기를 놓고 방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는 해머를 놓고 공장을 나와라.
모든 상인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5월 20일 서울은 장충단공원, 지방은도청과 시청으로 모여라.

재야는 이제 국민들이 궐기할 차례라고 생각해 서둘렀다. 성명서를 검토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인이지 혁명가가 아닙니다. 계엄군에게 상부 명령을 받지 말라는 것은 내란 선동으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20일 국회가 열려 계엄 해제결의를 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를 보고 행동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랜 토론과 조정 끝에 성명 내용은 일반 국민들의 요구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결정했다. ‘계엄령 철폐‘, ‘전두환 · 신현확 퇴진‘으로후퇴했다. 그리고 날짜도 국회 소집 이후인 22일로 늦춘 성명서를 가지고돌아가던 그분들의 실망한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김대중은 염려가 너무 많아. 너무 소심해.‘
그분들의 뒷모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 소심증과 염려증이 여러 목숨을 구했다. 김대중에 대한 편견과 오해 중에 가장 일반적인게 강경하고 과격하다는 것인데 내가 보는 그는 지나치리만큼 신중한사람이다. 혹독한 군사독재정권에서 일관되게 신념을 지키며 투쟁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 같은 자기 절제 덕분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 P199

5월 16일, 서울 거리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그는 김영삼 총재와 동교동에서 회동했다. ‘계엄 해제‘, ‘정부 주도 개헌 반대‘ 등 6개 항에 걸친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공화당도 계엄령 일부 해제에 대해서는 공조를 약속했다. 17일 전국의 대학학생회장단도 이화여대에서 모여 마라톤 회의 끝에 학원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시각이었다. 신군부는 국회가 열리기 전 주말을 디데이로 정했다. 그들은 체포할 명단을 작성하고 체포조로 보안사와 수경사 군인들을 집결시켰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결의하면 바로 무장해제를 당할 신군부는 중동을 방문중인 최규하 대통령을 하루 앞당겨 급거 귀국하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16일 밤 11시에 청와대에서 대책 회의를 했다. 그다음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 18일 0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제외되었던 제주도를 포함시킨 것만 달랐다. 여기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라는 근사한 이름을 달았다.
이렇게 1980년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1968년 둡체크Dubtek 정권의 인간적 사회주의를 짓밟은 소련의 탱크를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서울의 봄‘은 ‘프라하의 봄‘처럼 짧았다. 모두 잠시 신기루를 본 것이었다.
‘빼앗긴 봄‘ 이후에 찾아온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 P200

발표 직후, 5월 17일에 집을 수색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와서 남편의 내의와 책 몇 권을 달라며 동행을 요구했다. 나는 혹시 면회를 시켜주려나 하고순진하게 기대했다. 그러나 그 동행은 군 검찰로 심문을 당하러 가는 길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계엄사는 7월 4일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완벽한 허구요, 소설이었다. "김대중과 추종자들은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해서 대학생들을 선동하려 했다. 대중을 규합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한 이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라는 발표문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공산주의자이며 광주항쟁의 배후조종자라는 것이었다. 보도를 접한 나는 그래도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잠시 안도했다.

‘미국의 소리‘에서는 계속 놀라운 뉴스를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김대중에 관한 혐의가 그대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면 최고 사형까지 처하게 될 것이다."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서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렸다.  - P203

정작 그가 광주항쟁 소식을 들은 것은 6월 28일 남산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였다. 사정은 이랬다.

40여 일 취조로 심신이 극도로 혼미한 상태에서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그날 합동수사본부 수사단 이학봉 단장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난번에 각서를 썼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협력하면 대통령직 외에 어떤 직책이라도 주겠다. 협조하지 않겠다면 우린 살려줄 수 없다. 재판은 요식행위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사흘 후에 다시 올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 정보부 직원이 신문을 한 무더기 가져왔다. 광주 사건이 실린 신문이었다. 사망자 수를 보고 기절했다. 혈압이 치솟아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나를 지지해준 젊은이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나를 그토록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족을 배반할 수 없었다. 죽어서 살자고 결심했다. 사흘 후 그가 왔다.
"협력할 수 없다. 죽음이 곧 삶이다."
그는 이틀 후 또 왔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성질을 내며 돌아갔다. 이같은 회유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군교도소장이 빙빙 돌며 기색을 살폈다.
"왜 자꾸 내 주변을 도는지 알겠는데 헛수고입니다. 나는 죽기를 각오했소."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 <김대중 자서전>에서 - P204

나는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는다. 광주에서 살상을 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결코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린 광주를 배반할 수 없었다. 만약 그때 거듭된 고난으로 지쳐서 집요한 회유에 굴복하고 협력했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루해졌을까. 나역시 그런 남편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그를 헌신적으로 도운 것은 단지 내가 그의 배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한참 후에 말했다.
"나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소. 해외로 나가 가족들과 조용히살까 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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