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에 광주항쟁 3주년을 기해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 전 총재가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1980년 5.17 계엄령 이후 야당 정치인의 투쟁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는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시킨 깃발이 되었다. 목숨을 담보한 23일간의 단식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서 신민당이 탄생했다. 우리는 김영삼 씨의 단식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6월 4일 70여 명의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의 듀폰 서클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 등의 팻말을 만들어 시위했다. 피켓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한국 대사관과 국무부, 백악관으로 이어지는 가두에서 시위를 했다. 남편은 6월 9일 자 <뉴욕 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했다. 김영삼 씨의 단식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조야의 여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문동환, 뉴욕의 임정규, 로스앤젤레스의 김상돈, 샌프란시스코의김재준 목사가 각각 그 지역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조직을 만들어 교포들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모국의 민주화 운동을 원했다. 또 8월 12일에는 김재준 목사 송별 만찬이 있은 후 김영삼 씨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P247

정부는 2월 12일 총선 전에 있을 그의 귀국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서울에서 안기부전 단장이 워싱턴으로 날아왔다. 총선 전에는 귀국을 절대 허용할 수 없으며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청와대 정무비서관도 귀국하면 다시 구속될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뉴욕 타임스> 기자가이 말을 전하면서 그래도 귀국할 것이냐고 전화를 했다. 그래도 귀국한다고 하니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런 이후 ‘제2의 아키노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이슈로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굉장한 반응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미국 정부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남편을 초청해국무부 직원 200여명 앞에서 강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안전 귀국보장과 전 대통령 방미 안건을 연계하는 무언의 압력이었던 셈이다. 그즈음전 대통령의 두 번째 미국 방문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노 상원의원이 공항에서 사살(1983.8.21) 당한 일이 생생했을 때이므로, 20여명의 저명인사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그와의 동행을 자원했다. 하원의원 2명(에드워드 페이건Edward Feighan, 토머스 폴리에타Thomas Foglietta), 카터 행정부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 퍼트리샤 데리언 Patricia Derian 과 전직 대사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퇴역 해군 대장, 세계변호사협회 회장, 대중 가수, 목사 등등이 자원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기자단이 동행 취재를 했다.
우리는 1985년 2월 6일 정든 워싱턴을 떠나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1박을하고 8일 낮에 귀국했다. 《뉴스위크》지는 커버스토리로 선정해 ‘폭풍의 귀국Storming Homecoming‘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우리 일행은 일반 승객과 함께줄을 서서 입국 심사를 받기로 약속했다. 공항 빌딩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복 경찰이 뛰어나와 우리 내외만 떼어 끌고 가려 하자 동행인들은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결사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는모습을 동행 기자들이 고스란히 기록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부끄러운시절의 한 풍경이다. 특히 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 데리언 여사가 많은 폭행을 당했다. 자신의 차관보 사무실 문에 ‘김대중을 구출하자‘라는 스티커를 붙여놓았던 데리언은 남편을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 자문위원으로 추천하는 등 많은 도움과 격려를 해준 열렬한 지지자였다.
우리는 결국 일행과 격리되어 커튼이 쳐진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워졌다. 동교동 집은 공사할 때 두르는 가림막에 에워싸여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귀환이었다. 2년 3개월 만의 착잡한 귀환이었다. 2만여 명의 환영 인파가 마중을 나왔다는데 우리는 한 명도 못 보았다. 우리 대신 동행한 인사들이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니 정말 감사하고 잘된 일이었다. - P251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할지 모른다는 루머도 떠돌았다. 1986년 가을 아시안 게임 후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훗날의기록을 보면 이는 사실이었다.

11월 2일 장세동 부장이 또다시 전 대통령의 지침을 전달했다. 전 대통령의 구상은 11월 8일 토요일 저녁 11시에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자정을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비상조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군에서 죽이기로 했으니 정계에서 은퇴시키고 재수감과 외국행을 택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 같은 계엄 선포와 비상조치안이 나온 배경에는 10월 28일 일어난 전국 26개 대학 학생들의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이 있었다. 농성 나흘째 무려 1,274명의 학생을 연행해 구속한 학생운동 역사상 최다 구속을 기록한 사건이다. 그들은 그만큼 ‘사형수 김대중‘이 대통령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동안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다.
"만일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선제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고심하던 남편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희생을 두고 볼 수 없다며 11월 5일 제안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의외의 곳에서 화답이 왔다. 그즈음 서독을 방문 중인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남편의 불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대중 씨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내가 차기 대선 후보를 양보하겠다."
그 후 남편은 ‘불출마 선언‘을 뒤집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김영삼씨의 ‘대선 후보 양보‘ 기자회견은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을 재는 잣대는 처음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상조치설의 디데이는 조용히 지나갔다. 김대중이 불출마 선언을 해서인지 아니면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책을 골라 쌓아놓았다.
"내가 감옥에 가거든 이 책들을 차입해주오."
남편은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 - P262

5.18 광주민중항쟁 7주년 기념 미사가 거행되던 5월 23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의미심장한 미사 강론에 이어 7주기 및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나자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명의의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수사 내용이 조작되었습니다. 그를 직접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의해 짜여졌고 또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한 장의 성명은 국민의 의분을 폭발시켰다. 종교계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비롯한 재야의 각계각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일민주당은 손을 잡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를 5월 27일 창립했다. 해방 후 최대 조직이었다. 국본은 고문으로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김영삼 민주당 총재, 연금 중인 김대중 상임고문을 선임했다. 국본은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씨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절차를 진행하려는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 날짜에 맞추어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를기획했다. ‘6.10 대회‘의 정식 명칭은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였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했다.
국민들은 국본의 행동지침을 따랐다.
청년들은 최루가스가 안개처럼 자욱한 거리를 질주하고 여성들은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이들을 응원했다. 그런가 하면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리며 달렸다. 전국의 교회와 사찰은 타종으로써 참여했다. ‘독재타도‘, ‘호헌 철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었다. 사무실의 직장인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빌딩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손수건 등이 꽃잎처럼떨어졌다. 길거리의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무료로 나눠 주었다.
가정주부들은 김밥으로 시위대를 격려했다. 영호남이 하나로 외쳤으며 남녀노소가 한 몸이었다. 해방 후 우리에게 그 같은 대동제를 지낸 날이 또 있었을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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