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 맨 앞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포승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현관에 들어와 서서 응접실 의자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더니 또 우르르 나갔다. 그 청년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며, 지금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인데 그의 허위 자백을 받아 사건을 조작하려고 해도 그가우리 집에 온 사실이 없어서 내부 묘사를 못하니까 현장 답사를 시킨 것이었다. 고문에 굴복해서 허위 자백을 하고 법정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한 또 한 사람이 정년이다. 광주사태 배후조종 자금의 금액을 정하는 단계에서 수사관이 했다는 말이다.
"학생이 1,000만 원을 받았다면 너무 많지. 그러니까 500만 원을 받은것이다. 잘 기억해두어라. 500만 원이다."
정동년이 출옥하여 양심선언을 하며 폭로한 말이다. 왜 정동년인가. 그들이 가택수색을 해서 가져간 방명록에서 종이 한 장을 통째로 사용해 호기롭게 서명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남편은 부재중이었으며 그리고 더욱이 학생들은 만나지 않던 때였다. 우리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85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후 그가 사죄하러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다.
처음에는 ‘국기문란 사건이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내란 음모 사건‘으로, 다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발전했다. 오직 김대중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나리오의 변화 과정이었다. 공소장은 13만 자로, 낭독하는 데만 6시간 20분이 걸렸다. 6명의 검찰관이 교대로 했다. 우리는 처음에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줄 알았는데 유독 남편에게만 국가보안법이 추가되었다. 내란 음모는 법정형의 상한이 무기징역이므로 사형 죄명이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수괴‘로 꾸며낸 것이 바로 ‘한민통의장‘이었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한민통‘ 미국 지부를 만들고 일본지부를 결성하려던 차에 납치당해 끌려왔던 것이다.  - P214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눈물로 기도하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매만지면서 나마저 무너져선 안된다고 마음을 다졌다. 9월 13일 남편의 최후진술이다.

작년 11월 5일 박 대통령의 국장을 집에서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는데 아직도 내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박 대통령의 죽음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 ••• ) 나는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것입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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