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을 둘러치고 거리를 떼어놓는 것은 불의의 감정 폭발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가끔 철없이 달려들어 제 부모들 품으로 안겨들때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병을 앓아도 부모 제 부모니까."
"원장님 말씀대로 이 섬 안에서는 모든 일이 입으로 말해지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에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게 오히려 상식이 되고 있는 편이구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그렇다는 게요."
원장은 면회 대열에 눈을 주고 있으면서도 상욱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흰 늘 저 아이들에게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병보다도 이 병은 전염성이 약하므로 너희들은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아무것도 다를 데가 없는 떳떳한 어린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 아이들은 직원들 자녀들이 다니는 고개 너머 국민학교로는 등교를 못합니다. 뿐입니까. 이 보육소의 분교에서마저도 건강한 선생은 수업을 맡아주러 오시는 분이 없습니다. 보육소의 미감아 교실 선생님은 거의 모두가 음성 병력자들뿐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좀 기분 문제가 있을 테니까." - P51
분홍색이나 벚꽃 소식이란 이 병이 얼굴 근처에 첫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자주 그 벚꽃의 분홍색을 볼 수 있는 데서 연유한 말이었다. 분홍색이나 자주색은 병이 나은 다음까지도 눈두덩 같은 데에선 평생을 두고 떠나가주지 않는 이 병 고유의 색조라 할 수 있었다. 섬사람들은 누구나 그 절망스런 분홍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는 무슨 인연인지 붉은 황토색이 많았고, 봄만 되면 그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섬을 뒤덮었다. 육지 사람들은 봄이 되면 떼지어 섬으로 와서 이 붉은 섬을구경하고 돌아갔다. 황톳길과 벚꽃과 그 벚꽃의 분홍색이 원색의 그림자처럼 곱게 점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분홍색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누구나 분홍색을 저주했다. - P54
" 그 사람들은 오늘 낮 원장님을 뵙기 전에 벌써 열 번 이상이나 그곳에 서서 새 원장이 숨겨 가지고 온 주원장의
동상을 보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만 오면 주원장의 동상을 새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나 원장이 섬을 떠나고 나면 섬에 남는 것은 배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공을 하고 간 쪽이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
"그들은 결국 그런 식으로 어느 원장에게서나 똑같은 주정수 원장의 연설을 듣게 되었고, 그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그들은 열 번 이상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아까 이 섬 전체가 온통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런 불신과 배반이야말로 바로 그 수많은 주정수의 동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그 사람들은 아마 원장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그자들은 또 한번 그 주정수의 연설을 들으면서 원장님에게서 그의 동상을 찾으려 하고 있었을게 틀림없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