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를 안 만났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아뇨, 아뇨, 전혀요!"
그의 부정이 너무 강해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런 심정일 때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니에요. 문화장벽이 견고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되, 제가 원하는 바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경우엔 완전한 성공보다는 작은 성공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걸 리아에게 배웠죠. 저한텐 그게 아주 힘든 일인데 그래도 노력해야죠. 리아는 저를 덜 고지식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 P423

디저트를 먹으면서는 리아의 사례와 이문화간 소아과 진료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빌이 말했다.
"어떤 상황이든 가장 약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여기선 바로 어린아이죠. 아이의 안녕은 부모의 신앙보다 중요해요. 부모가 반대하더라도아이한테 제일 나은 걸 해줘야 해요. 아이가 죽게 되면 20년 뒤에 부모의 신앙을 받아들일 건지 거부할 건지 결정할 기회도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죽고 나면 끝이죠."
"글쎄요."
수키가 못마땅한 듯 대꾸했다.
"당신은 직업상 그렇게 해왔겠죠."
빌이 대답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내 동생을 지키는 기분으로 그렇게 할 겁니다."
수키가 말했다.
"그건 횡포예요. 병이 영혼 때문에 생긴 것이라 믿어서 수술을 거부하는 가족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이가 수술을 받다 죽으면 영영 저주받을 게 확실하다고 믿는다면요? 게다가 죽음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면요? 어느 게 더 중요하죠? 삶인가요, 혼인가요?"
빌이 말했다.
"둘러서 말할 것 없죠. 당연히 삶이 먼저죠."
그러자 수키가 말했다.
"아니요. 혼이에요." - P457

아파트 안에서는 지전을 태워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보내고 있었다. 징소리가 울렸다. 치 넹의 말은 점점 더 빨리 내달렸다. 혼을 부르는 이는 이스트 12번가 쪽을 바라보며 계속 읊조렸다.

그대 어디 있는가?
그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우를 찾아갔는가?
누이를 찾아갔는가?
사촌을 찾아갔는가?
꽃을 보러 갔는가?
라오스에 있는가?
태국에 있는가?
하늘에 있는가?
햇님에게 가버렸는가?
달님에게 가버렸는가?
그대 집으로 돌아오시게.
어머니께 돌아오시게.
아버지께 돌아오시게.
누이에게 돌아오시게.
형제에게 돌아오시게.
나 그대를 부르노니!
나 그대를 부르노니!
이 문으로 들어오시게.
가족에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돌아오시게. - P474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화장을 했다. 그들은 오빠와 나에게 장례식을 열지 말아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검을 보지 말라는 엄한 유언을남겼다. 나는 나오 카오의 관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며(문상객들을 위해 쌓아둔 종이 냅킨을 썼다.)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우리 문화는 ‘건조‘하구나. 우리는 애도하는 법을 모른다. 우리는 감정이 드러나는 게 꼴사나울까 두려워하여 감정을 목구멍에서 붙든다.
그전에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면 나오 카오의 죽음은 나에게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는 마이가 다니는 UC데이비스에서 이 책에 대한 연설을 요청받았다. 나는 메이 잉과 널, 폐기를불러 모두가 패널로서 대화를 나누고 푸아와 나오 카오도 통역과 함께 참석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모든 게 내 생각대로 되었다. 푸아와 나오 카오는 마이가 400명의 청중 앞에서 열띠게 발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또 닐이 리아를 가족의 품에서 떼어내 위탁 가정에 맡기는 게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말할 때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달리 방법이 없었지만 그가 입힌 상처에 대해 미안하다는 얘기도 했다.
그 뒤 나오카오는 늙고 병든 모습으로 닐에게 다가갔다.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내가 리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의사들과 대화를 나눈 것은 모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푸아는 닐과 페기를 오래전에 잊었지만, 나오 카오는 그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상냥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나오카오는 닐과 눈을 맞추며(닐이 기억하기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딸의 통역을 통해 이제는 의사들이 리아에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닐에게 고맙다고 했다.
모두가 저녁 식사 자리로 향하기 전이었던 그 순간, 나는 15년 전 이책의 서문을 쓸 때 상상했던 것을 들었다. 바로 공통의 언어였다.
2012년 매사추세츠주 웨스턴에서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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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이주 물결이 끊어지는 게 아니었다. 가문끼리의 재결합은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같은 지역에 같은 성씨가 많으면 서로 더 많이 도움을 주고, 더 많은 문화 전통을 함께 행하고, 공동체가 더 안정되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2차 이주를 불안정과 의존의 증거로 보았다. 드와이트 캉커굿은 미국인의 억센 개인주의라는 이상과 몽족의 무리 내 상호의존이라는 이상의 간극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분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윤리는 수많은 방법으로 선전되고있다. 이를테면 식사 때 개인에게 한 벌의 식기를 주는 것, 아이들한테도 자기만의 공간이 중요하다고 인식시키는 것, "자기 식대로 하라."라는 광고 노래가 모두 그렇다. 반면에 몽족의 문화는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과도같다. 각자가 나누어진 부분을 돌이키고, 떠올리고, 되살리고, 재결합시키는 주제를 연주하여 하나의 총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 P324

생활보호대상자가 된 것을 비난하는 것만큼 몽족을 화나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몽족이라면 누구나 ‘약속‘이란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그것은 라오스내전 당시 CIA 요원들이 서면 또는 구두로 했던 계약으로, 미국인을 위해 싸워주면 인민군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불리해질 몽족을 도와주겠다고 한약속이었다. 몽족은 불시착한 미국인 조종사를 목숨 걸고 구했고 미국인의 폭격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감내하며 ‘미국의 전쟁‘을 도왔기때문에 살던 나라를 탈출해 미국에 오면 영웅 대접을 받으리라 기대했다.
몽족 대부분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 배신은 미국 비행기가 롱티엥에서 장교들만 구출해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고 간 일이었다. 두 번째 배신은 태국 난민캠프에서 미국으로 오고 싶어 한 몽족이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이었다. 세 번째 배신은 자신들이 참전 용사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배신은 미국인들한테 "복지 기금 잡아먹는다."라는 비난을듣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배신은 그들에 대한 복지 혜택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 것이었다. - P330

알고 보니 타오 씨는 빌이 그로부터 3년 동안 줄줄이 만나야 했던 우울한 동족 환자 행렬의 시작이었다. 빌은 그의 심각한 ‘고향‘ 상실증을 규명하면서 문제의 본질까지 파고들었다. 사회 관습뿐만 아니라 새소리도, 나무나 꽃도, 공기 냄새도, 땅의 질감도 전부 다른 미국에 사는 몽족에게 향수의 아픔은 더 가혹한 것일 수 있었다. 몽족 시인인 두아 허는 「내 나라를떠나는 애통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린 일출의 새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일몰에 뛰어다니던 메뚜기를 기억한다.
우린 나뭇잎에 떨어지던 굵은 빗방울 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긴팔원숭이 수컷 우는 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파인애플, 바나나, 파파야 과실수들을 기억한다.
우린 우리처럼 서로 소리 지르던 올빼미들을 기억한다. - P335

나이 많은 몽족 어른들이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그들은 우히 밭, 우리 땅이라는 의미의 ‘페이 루 테이초(peb lub tebchaws)‘라 부른다.) 전쟁 이전의 라오스다. 전쟁 당시 라오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대부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다른 모든 스트레스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과도한 사별의 부담이었던 것이다. 보스턴에 ‘인도차이나인 정신 치료 병원‘을 설립하는 데 공헌한 정신과 의사 리처드 몰리카는 전쟁과 그 여파로 몽족 난민들이 살인이나 고문 같은 ‘중대한 외상적 사건‘을 평균 열다섯 건 정도 경험했음을 알게되었다. 몰리카는 그런 환자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심리적 현실은 꽉 차 있기도 하며 텅 비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꽉 차 있으며,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경험에 대해서는 ‘텅 비어 있지요."
과거의 충격이나 갈망으로 ‘꽉‘ 차 있는 몽족은 옛 정체성으로 인해 현재의 위협을 대처하는 게 특히 어렵다.  - P337

"아이가 그렇게 큰 걸 보면 부모가 엄청 잘 돌본 게 틀림없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식물인간이 되면 바짝 말라서 뼈하고 가죽만 남거든요. 제가 본 열일곱 살짜리 애는 네 살짜리만 해보였어요."
닐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띠로 리아를 업고 진료실에 올 때마다 리아는 언제나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빈틈없는 모습이었어요. 정말 흠 하나 잡을 데가 없었지요. 대단히 인상적이었어요."
페기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백인 부모보다 아이한테 잘했어요. 백인 부모였다면 아이를 당장 시설로 보냈을 거예요."
푸아와 나오카오는 왜 진료실 의료진들이 입원 당시 의료진들보다 훨씬 더 잘 대해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딸은 분명히 변했지만 부모로서 그들의 행동은 변한 게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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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대표되는 미국의 과시적 이상을 더 유지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것은 공통의 국민 정체성을 위해 이민자들에게 본인들의 문화를 감•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정신인 ‘여럿이 하나 된다.‘가 뜻하는 바에 따르려고 말이다.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미시건주 디어본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는 이민 노동자들에게 무료이면서 의무적인 미국화 수업을 했다. 영어 외에도 작업 방식이나 개인위생, 식사 예절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민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운 문장은 ‘나는 훌륭한 미국인입니다.‘였다.
졸업식 때 그들은 거대한 나무 솥 앞에 모였고 강사들은 길이가 3미터인 국자로 젓는 시늉을 했다. 학생들은 각각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자기네 말로 노래를 부르며 한쪽 문을 통해 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 반대쪽에서 나올 때는 모두 양복과 넥타이 차림으로 미국 국기를 흔들고 미국국가를 불렀다.
포드 자동차 회사의 ‘도가니(melting pot)‘에서 나온 유럽 이민자들이미국에 온 것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족이 미국에 온 것은 19세기 중국을 떠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동화에 ‘저항‘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자크 르모안이 본 바와 같이 "그들이 우리가 사는 여러 나라로 온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즉 몽족의 민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라오스에서 몽족의 정체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있었다면 조상들이 끝까지 중국에서 버티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라오스에 남아 있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주는 언제나 문제 해결의 방편이었지 매이기를 싫어하는 충동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 P304

몽족은 관료를 별로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족 속담에 ‘호랑이를 만나면 죽는 법이고, 관료를 만나면 털리는 법이다.란 말이 있을정도다. 인도차이나계 난민들의 적응 문제를 다룬 한 연구에서 몽족 응답자들은 ‘전쟁의 기억‘이나 ‘가족과의 이별‘보다 ‘미국 기관과의 갈등‘을 더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또한 VOLAG 중에는 종교 단체와 관련된 곳이 많아 몽족 난민들은 개신교 목사들과 접할 경우가 많았는데, 목사들은 당연히 무속적 정령신앙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난민을 지원하는 미네소타의 한 목사는 어느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을 여기로 데려와서 먹이고 입히기만 하고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두는 건 죄악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들이 개종하길 바라십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개종 작업은 당장 부작용을 일으켰다. 몽족의 정신건강 문제를 다룬한 연구에 따르면 이 목사가 소속된 종교 단체의 지원을 받은 난민들은 다•른 난민들에 비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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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부부가 전후 체험을 얘기해주던 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마나 힘드셨겠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많이 슬펐지. 하지만 라오스를 떠나올 때만 해도 사는 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리아가 프레즈노에 가서 더 심해진 때처럼슬프진 않았지."
처음에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3년 동안 푸아와 나오 카오는 라오스에서 아이 셋을 잃었다. 또 총탄과 지뢰와 불의 장벽을 헤쳐나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살던 마을과 나라를 떠나기까지 했다. 제일 아끼는 아이가 치명적인 병을 앓는다 한들 어찌 그때보다 더 나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폭력도, 기아도, 결핍도, 망명도, 죽음도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적어도 그들이 알고 이해할 수있는 비극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일어난 일은그 영역 바깥의 것이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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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외에도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파고들려는 여러 미디어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히로시마 폭격 20주년을 맞던 1965년에 NBC는 원자 폭탄사용 결정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체트 헌틀리가 해설자를 맡았고, 오펜하이머의 7월 16일트리니티 실험에 대한 회고와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제 나는 죽음이되었다. 세계의 파괴자")을 낭송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어가존슨 대통령이 소련과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시작해야 한다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파이프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이미 20년이나 늦었습니다∙∙∙∙∙∙.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877

그들의 대화가 철학적인 주제로 넘어가면서 오펜하이머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모건은 그가 그 단어를 거의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동의하며, 그것은 "종교적인 개념을 초월적인 존재에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사용할 수 있는 세속적인 장치"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싶군요. 나는 윤리적인 질문들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명료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폭탄을 만들 때 역시 나를 강하게 지배했지만 말이지요.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묘사하면서 ‘책임감‘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선택과 행동, 그리고 선택들이 해소될 수 있는 긴장과 관련된 말입니다. 나는 지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행동에 대한 제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없이는 의미 있는 책임감도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스스로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지식, 부, 여가는모두 우리가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 P885

호크네스트 만의 오두막집은 허리케인에 휩쓸려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 P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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