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혼란기에, 해방 후에 급속히 확산된 것은 민족을 의식하는국수주의적 사조였어요. 그런데 요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일제의 영향으로 보여요. 일본이 군국주의인데 일제 말기에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국수주의로 흘렀거든요. 그런데 일제시대 일본에서 주장하고 강조하던 국수주의를 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 쪽으로 돌린 것 같아요.
이걸 우리나라로 돌려서 국수주의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 선생님 말씀은 일반적인 상식과 다른 좀 뜻밖의 말씀인데요.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에 기반한 국수주의적 학문 태도가 해방 이후 우리의 국어 정책을 주도한 조선어학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국어 정책이 국수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이게 조선어학회의 해방 직후 언어 정책의 경향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해방과 동시에 석방된 조선어학회 중진들의 존재감,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조선어학회활동에 대한 기억은 조선어학회 주도의 국어 정책이 국수주의로 흐르는 데 기폭제가 됐어요. 대중은 이 학회의 운동에 전폭적인 존경과 공감을 표했고 활동에 대해서도 찬동하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 - P127

◆◆◆ 게다가 아무런 제한도 없이 독단으로 채택해서 보급시킨 규범인(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이후 제안된 한글 간소화에서 너무 어렵다고거센 도전을 받고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정부 규정이 되었죠. 이렇게이후 진행 과정과 결과를 보면 당시 조선어학회 중심의 국어 정책은당초의 존경과 공감에 비해 기대 이하였다고 하는 것이 조선어학회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국수주의적 태도에 따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해서 결과가 보잘것없었다는 것이죠? 선생님의 말씀은 민족 독립 운동의 후광이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국어 정책에 대한건강한 비판을 가로막았고, 그것이 국어 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건강한 비판을가로막아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 P128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실된 민족적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해방 직후에는 무엇보다 국어 회복 운동이 시급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심각한 탄압을 받으면서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진 조선어학회에서는 이러한 위상을 십분 활용하여 전국적 규모의 강습회를 열고국어 교사를 양성하며 일제 치하에서 이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좀더 보편적인 규범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어정책의 기본 골격을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 일소, 우리말 도로 찾기‘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해나가면서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일구어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 조선어학회의 행정, 재정 및 학술적 핵심 내용을 구성하는 데 특정인의 영향력이 지나친 측면이 있었고, 모든 정책들이 충분한 내적 고려 없이 조급하게 이루어진 측면이 있었음은 오늘날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반성해볼 측면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의 국어 정책이 남북으로 분리되어 정착하는 과정에 서로를 염두에두면서 규정을 통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나갔어야 함에도 여러상황상 남북 언어 규범의 분기가 점차 더 심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의 많은 언어 정책적 노력들은 그절실함과 진지함. 관심과 환대 속에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전개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활동의 의의, 장점과 문제점, 한계 부분을 나눠 함께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이 대담의 국어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135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이라는 국호는 국토의 일부인 남쪽만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이 국호가 내내 불만스럽습니다.
저는 ‘대한大韓‘에 대한 해석이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용어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습니다. 역사적 시점마다 깊은 검토 없이 ‘대한‘이라는 말을 수용한 당사자들의 무지한 소치를 저는 엄중하게 질타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제 중심의 입헌군주정부는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아주 계획적으로 황제의 국가, 제국이라고 부르게 했던 거예요. 우리나라를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중국과의 단절을 꾀했던 거라는 말이지요. 궁성 밖에는일본 군대가 지키고 있고, 낭인이 칼을 차고 왕궁에 들어가서 왕후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한 대한제국이 괴뢰정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제국과 황제라는 이름은 일본 침략자들이 우리에게 아주 그럴싸하게 붙인 거예요. 스스로 나라의 힘을 길러서 독립국을 자처하는 의미의 대한제국이었더라면 모르겠으나,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잖아요.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만, 그사람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했으니 그들도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지요.
도대체 왜 ‘대한‘이라는 말을 썼느냐 그 말이에요. 조선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면 멀리 단군조선, 고조선도 있으니 이 국호는 중국까지도 포괄이 됩니다. 그런데 1948년에 마침 북측의 국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돼버렸으니까 우리가 북쪽 명칭을 선호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당시에 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이라고 했던 거예요. 이 ‘민국‘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명칭에서 따온 것일 터인데, 장개석이라는 자가 중화민국을 망하게 만들어서 이 나라는 흔적도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대한‘이라는 명칭도 그렇고, ‘민국‘이라는 명칭도 저로서는 아주 마음에 안 들고 언짢은 점이 있습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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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사람들은 날 <수>라고불렀다. 나는 태어난 해는 알지만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알지못했기에 크리스마스를 생일로 삼았다. 나는 내가 고아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죽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석스비 부인의 아이였다. 그리고 아버지 역으로는 템스 강 근처 버러에 있는랜트 스트리트에서 자물쇠점을 하는 입스 씨가 있었다. - P11

다시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스 씨가 말했다. 「모두챙겼나? 그럼 이제 조용히 있어라, 얘들아, 움직이지 말도록.
수. 우리 아가, 네가 문을 열어 주면 어떻겠니?
나는 다시 석스비 부인을 보았고,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문으로 가서 빗장을 열었다. 문이 너무나 급작스레 열리며 나를 세게 쳤기에 필은 누군가 어깨로 문을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필이 벽에 몸을 딱 기대고 칼을 꺼내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문이 활짝 열린 것은 단지 바람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면서, 촛불 절반이 꺼지고 화로에 불꽃이 일어나고 내가 펼쳐 놓은 카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복도에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만 옷을 입고,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가죽 가방이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남자의 창백한 뺨과 구레나룻이 보였지만, 눈동자는 모자그늘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수! 수 맞지? 맙소사! 널 보려고 40마일이나 왔어. 날 여기계속 세워 둘 거야? 추워 죽겠어!」그제야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비록 1년 넘게 보지 못했지만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랜트 스트리트에 오는사람은 백 명에 한 명도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리버스 또는 딕 리버스 또 어떤 때는 리처드 웰스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석스비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누가 온 거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말한 이름이기도 했다.
「젠틀먼이에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진짜 신사들이 직접발음할 때처럼 제대로 발음하지 않고, 생선에서 뼈 발라내듯 적당히 발음을 발라내고 <제먼>이라고 불렀다. - P33

그리고 어쨌든, 부인이 옳았다. 마침내 내가 한몫 잡을 기회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젠틀먼을 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하겠어요. 하지만 2천이 아니라 3천 파운드에요. 그리고 만약 그 숙녀가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아 집으로 돌려보내더라도, 어찌되었듯 백 파운드를 주세요. 고생한 대가로요.」젠틀먼은 생각에 잠기며 망설였다. 당연히, 쇼였다. 잠시 뒤,
젠틀먼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젠틀먼은 내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껄껄거렸다.
존이 얼굴을 찡그렸다. 「일주일 안에 수가 틀림없이 울며 돌아온다는 데 걸겠어.」 존이 말했다.
「벨벳 드레스를 입고 돌아올 거야.」 내가 대답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장갑을 끼고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은화가 가득 찬 가방을 들고 말이야. 그러면 넌 날 아가씨라고 불러야 할걸. 그렇죠, 석스비 부인?」
존은 침을 뱉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 혀를 뽑고 말겠다!
「내가 직접 뽑아 주지! 내가 말했다.
어린애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린애였다! 아마 석스비 부인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으로는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고뇌가 서려 있는듯했다. 나는 하마터면 부인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할 뻔했다.
아마 부인은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이제야 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다음어떤 무섭고 음침한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 P52

유리창에는 갓 얼은 눈꽃이 피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손가락을 얹고 얼음을 녹여 더러운 물로 만들었다. 입스 씨의 휘파람 소리와 데인티의 발 구르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지만, 내앞에 펼쳐진 버러의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리에는 내가있는 곳 같은 창가 몇 군데에서만 희미한 빛이 보였고, 사륜마차 불빛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던졌다. 그리고 누군가 추위를 헤치고 그림자처럼 빠르고 어둡게 달려왔다가 역시 재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저곳에 살고 있을 모든 도둑과, 도둑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집, 다른 거리, 런던의 더 밝은 부분에서자신들의 삶을, 낯설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보통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커다란 집에 사는 모드 릴리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나를 몰랐다. 나도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몰랐다. 그 여자는 데인티 워런과 존 브룸이 우리 집 부엌에서 폴카를 추는 동안 내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몰랐다. - P72

「부인 목이 매달리면 아플까요?」내 머리를 쓰다듬던 부인의 손이 멈췄다. 이윽고 부인은 다시좀 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인이 말했다.
「목 주위 밧줄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 같구나. 좀간지럽지 않을까 싶어「간지러워요?」「따끔따끔하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부인의 손이 여전히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닥이 열리면요?」 내가 물었다. 그땐 뭔가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부인이 다리를 움직였다. 「아마 경련이 있겠지. 부인이 인정했다. 바닥이 열리면 말이야.」나는 호스몽거 레인에서 교수형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던생각을 했다. 그 사람들은 어김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사람들은 흡사 꼭두각시 원숭이 인형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죽음은 빠르게 찾아온단다.」 부인이 말했다. 「내생각에는 그렇게 빠르기 때문에 고통은 금방 사라질 거 같구나.
그리고 여자를 목매달 때는, 너도 매듭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수, 좀 더 빨리 죽을 수 있게 매듭을 매어 주잖니?」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들고 왔던 초를마루에 세워 놓아, 촛불이 아래에서 부인 얼굴을 비췄고, 때문에 부인 뺨이 부풀어 보이고 눈은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몸을떨었고, 부인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벨벳 위로 세게 문질렀다.
이윽고 부인은 머리를 기울였다. 「입스 씨 누이가 다시 정신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부인이 말했다. 자기 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 지난 15년 동안 어머니를 찾았지. 불쌍한 영혼 같으니. 나는 저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다. 수. 죽을 땐 무엇보다도빠르고 깔끔하게 죽고 싶어」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찡긋했다.
부인의 말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때때로 부인이 단지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한 건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 P75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으로 다가가 발로 문을 차 닫았다.
그리고 벽난로 앞으로 가 손을 녹였다. 랜트 스트리트를 떠나온 뒤로 충분히 몸이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모드가 보았던 거울을 보며 일어나 얼굴과 주근깨 난 두 뺨과이를 들여다보았다. 혀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손을 문지르며 낄낄댔다. 모드는 젠틀먼이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젠틀먼에게 완전히 빠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3천 파운드를 잘 포장한 뒤 내 것이라고 써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구속복을 든 의사가 정신 병원 정문에서 모드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드를 만난 뒤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던것도 다소 억지스러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왜 그런지 꼭 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드가 나가고 나자 집은 전보다 더 어둡고 조용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에서 재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창이 흔들리고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으로 다가갔다. 외풍이 지독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턱에 자그마한 빨•간 모래주머니를 놓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모래주머니는 모두 젖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모래주머니에 손을 대어보니 손가락에 녹색이 묻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몸을 떨며 바깥 경치를 보았다. 이런 것도 경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바깥에는 평범한 풀밭과 나무뿐이었다. 검은 새 몇 마리가 잔디에서 벌레를 찍어 내고 있었다. 어느 쪽이 런던일까 궁금해졌다. - P108

모드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춥다고 했다. 자기가 겁에질려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이번에도 내가 자기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드는 다음 날 저녁에도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녁에도 그랬다. 「괜찮아?」 모드가 내게 물었다. 아그네스는늘 괜찮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메이페어에서는 앨리스 부인과 함께 잔 적이 없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여주인과 하녀가 여자아이들처럼 같이 자다니, 보통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모드와 내가 함께 자는 게 보통이었다. 모드는 그뒤 악몽을 꾸지 않았다. 우리는 자매처럼 함께 잤다. 정말로 자매 같았다. 나는 언제나 언니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젠틀먼이 돌아왔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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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LU 내부는 이렇게 오붓했다. 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살풍경이 펼쳐졌다. 재생산의 자유를 현실에서 구현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증진단은 임신이라는 문제를 일련의 성차별 사건들과 결부시키는 데 있어 난관에 직면했다. 우선 남성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고, 여성이 공군에 입대하거나 살림을주도할 수 있다고 해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쪽은 오직 여성이다. RBG와동료들은 임신 역시 평등 또는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라는 사실을, 여성으로서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법관들에게 확신시켜야 했다. 더 급진적으로는 여성이 임신을 원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재생산에 있어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결코 평등을 누릴 수없다는 사실을 대법원이 인정하기를 바랐다. 이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 다시말해 임신 상태의 유지로 인한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의미했다. - P89

RBG는 1977년 이런 말을 했다. "여성이 임신을 하면, 안락의자에 앉아서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동안 남편이 안팎으로 매사를 거들어줄 것이라고 흔히들 짐작합니다. 글쎄요. 이런 소송의 원고들은 남편이 없는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조만간 태어날 아기를 알아서 부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얼마건 간에, 임신한 여성은 사회생활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RBG는 임신한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것은 성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오직 여성의 신체만이 섹스를 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고, 그 때문에 오직 여성만이 이를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그는 임신을 사유로 명예제대증대신 일반제대증을 받은 여성 군인의 변호사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군에서 명예롭지 못하다고여기는 측면은 ‘임신 자체‘가 아니라 성행위다. 성행위를 하려면 두 사람이 필요한데, 성관계를가졌다는 이유로 전역해야 하는 남성(혹은 아마도 마찬가지로 여성)은 아무도 없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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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 P7

"고 선상님을 잘 알그마요."
그제야 어머니의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P21

 아버지가 최 약방의 꼬임에 넘어가 한약을 먹는 바람에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열일곱의 나는 믿었다. 그 무렵 읍내 오거리에서 최약방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환갑 넘어 눈도 안 좋았을 그는 스스로 지은 약을 먹고 개안한 것인지 눈이 나보다 밝아, 저 멀리서•나를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나롤 이 세상에 불러낸 원흉을 일별도 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에게 동생이 하나뿐이었다는 걸,
일찍 어머니를 잃어 그가 업어 키운 아들 같은 동생이었다는 걸, 그 동생이 아버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용돈 쥐여주며 귀여워했을 조카였던 셈이다. 그 마음 쌩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 P28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건대 늘 그랬다. 유관순 언니보다두해 먼저 태어난 할머니가 1991년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지로 향하는 상여를 뒤따를 때도, 유품을 정리할 때도, 그 유품 속에서 닳을까봐 헝겊에 꿰매놓은 자신의 소학교 졸업사진을 발견했을 때도, 아버지는 아래윗집 살던 할머니와 오며가며 인사나 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무수한 죽음을 목도했다. 보급투쟁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왔더니 동지들의 시신이 목 잘린채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아버지는 예의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덤덤하게 말했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3

박선생도 아버지만큼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났다. 긴아•침나절이 무료하여 신문도 직접 받을 겸 허물없는 친구도볼 겸 배급소로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박선생이 구독하는 조선일보를 빼앗아 후루룩 일별했다. 그러고는 박선생에게 휙 집어던졌다.
"이런 반동 신문을 멀라고 아깐 돈 주고 보는 것이여!
한겨레로 바꿔 이번 기회에 펭상 교련선상 함시로 민족통일의 방해꾼 노릇을 했으믄 인자라도 철이 나야 헐 것아니냐!"
"니나 바꽈라. 뽈갱이가 뽈갱이 신문 본다고 소문나먼 경을 칠 텡게."
두 노인네는 매일 아침 투닥거리며 늘그막을 보냈다.
신문을 들고 집에 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 앞에서 평생 교련선생 한 놈이 조선일보만 본다고 박선생 흉을 보았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이라 어느 날 짜증이 나서물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놀아요?"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신문을 촥 펴면서 말했다.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 P46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는 친하지 않기도 했다.
오빠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왔을 때처럼 오빠는 휘적휘적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허리춤에서 엉덩이까지 어른 주먹 몇개는 들락거릴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 P85

국화꽃 한송이를 제단에 올린 아이는 가만히 서서 아버지 영정 사진을 응시했다. 조문이 처음인 듯했다.
"절할래요? 두번 절하면 돼요."
아이가 시킨 대로 두번 절을 올렸다. 나와의 절은 생략했다. 절을 올리고 난 아이가 쓱 얼굴을 훔쳤다. 나는 모르는 둘만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냥 가려는 아이를 한갓진 안쪽 접객실 테이블로 이끌었다.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라면 응당 그러했을테니.
"우리 아버지랑 친했나보다."
아이가 콜라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나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알았을 테고 아버지 방식대로 위로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 P140

"아니여. 나가 맹근 누룽지가 자네 것보담 시배는 크거든, 우리 아리가 누룽지라면 환장을 허잖아."
아닌디, 누룽지 안 줘도 아빠가 최곤디, 잠결에 중얼거했고 아버지는 하하, 밤하늘이 시끌적하게 웃어젖혔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경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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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께서는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한국인 관리들이 속죄의뜻으로 해방 후 돈을 모은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한글학회 측 기록에따르면 "이 돈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이 일본에 바치기로 되어 있던 ‘국방헌금‘ 82만 원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당시 들으셨던 "속죄의 뜻으로 돈을 모았다"는 말은 일제에 국방현금으로 기부했다는 것 자체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데에서 만들어진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돈이 조선어학회에 기부된 계기는 선생님 말씀대로 조선어학회에 대한 대중적 신망이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해방 이후 시급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 <한글>과 <우리말본>이라는책이 당시 어떤 용도로 쓰였기에 이렇게 기증받은 돈으로 맨 먼저 이책들을 발간하게 되었을까요? 이 두 책 모두 최현배 선생께서 저술한것으로, 《한글>은 1942년에 간행한 훈민정음 연구서이고, 《우리말본>은 1937년에 간행한 문법서였는데요. 그만큼 당시 최현배 선생님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 책들은 일제 말기에 자비출판 형식으로 출판됐는데, 책이두껍고 또 디럭스판이어서 책 모양만 봐도 일제 때로서는 아주 묘하고 귀한 책이었죠. 해방이 되니까 모두들 그걸 보려고 하고 심지어 사다가 집안에 장식품처럼 꽂아 놓는 사람도 많고, 또 나도 이런 걸 가지고 있다 하고 자랑도 할 겸 해서 이 책들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최현배 선생 개인을 보고 샀다기보다는 책모양을 보고 샀다고 해야겠죠. - P87

◇◇◇ ‘조선어학회는 해방이 되자, 재건되어 당시 긴급한 국어 회복에지대한 중책을 다했다‘. 이렇게 평가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 실정을보면, 국민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한글은물론 우리말도 거의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학회가 서둘러 전개한 국어강습회, 또 검정 시험을 통한 국어 강사 양성은 시기적으로 봐서 아주 시급한 과업이었어요. 이런 사업은보통 기관에서는 해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것을 조선어학회에서 조기에 완수했던 거지요. 그런 점에서 ‘학회가 참 훌륭한 일을 했고,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 P89

◆◆◆ 그러니까 다 짐작하다시피, 일제시대의 공용어는 일본어였죠. 당시 공용어가 일본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기관에 가든지 일본말로해야 되고, 또 일본말로 신고를 해야 되고, 문서도 일본말로 작성해야한다는 뜻이죠.
그러다가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선포했어요. 미군정 기간이 1945~1948년인데, 이 기간 동안 공용어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대치됐어요.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문 것 같은데 그거는 미군 사령부의 포고령에 나오니까 확실합니다. 다만 학교에서의 교훈 용어, 즉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말은 "조선어로 한다", 이렇게 돼 있었어요. "모든 학교에서 영어로 가르쳐라"가 아니었으니까일반 사람이 공용어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아마 그런 점 때문인것 같아요.

<맥아더 포고령 제1호) 5조 언어에 대한 규정(1945년 9월)Proclamation No. 1 / To the people of Korea: Article V/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 모든 목적을 위한 공식 언어는영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사이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한 모호함과 부동한점이 있을 때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 P102

규범 정책을 보면, 1930년대에 논쟁이 치열했던 한글파의 조선어학회 ‘어원 표기 맞춤법‘과 정음파 혹은 박승빈파라고도 하는 조선어학연구회의 ‘표음주의 표기법‘ 사이의 논의는 조선어학회의 위력에의해 없던 일처럼 되었어요. 검토의 여지도 없이 당당해진 조선어학회의 안으로 결정되었던 거예요. 오늘날 맞춤법이 어려운데, 이것을좀 쉽게 가공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이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글 맞춤법((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말함)이라는 게 조선어학회가 일제시대에 만든 건데, 어원 표시를 해요. 이 어원 표시라는 게 일정한기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얼음‘ 하면 ‘얼다‘에서 왔으니까 ‘ㄹ‘ 받침을 해서 ‘얼음‘이라고 쓰고, 밭에 주는 ‘거름‘은 ‘거‘하고‘름‘으로 소리 나는 대로 써요. 그것도 ‘걸다‘에서 왔는데 ‘거름‘이라고 할 적에는 정신 바짝 차려서 ‘ㄹ‘ 받침을 쓰면 안 되고 소리 나는대로 ‘름‘으로 써야 되거든요. 우리 같은 전공자는 이런 거 다 문제없이 찾아보거나 다 가려서 쓸 수 있는데, 일반 사람은 ‘얼음‘은 ‘ㄹ‘ 받침을 밝혀 적고, ‘거름‘은 소리 나는 대로 쓴다. 이걸 외워야 되니까, 참 이게 문제거든요.
물론 이 표기법이 두 종류가 있어서 학문용, 학자용이 따로 있으면아무 상관없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여기에대해 검토할 기회가 싹 없어져서 그게 아쉽다. 그런 얘기지요. 앞으로우리가 국어 문제에서 해야 될 것은 맞춤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거는 어디까지나 전공자하고는 무관한 거예요.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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