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은 경건하고도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헬렌은 벽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가쁘게 약간은 너무 빠르게 오르내렸다. 벤저민은 일부러 타일에 신발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자기가 왔다는 걸 알리려 했다. 헬렌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적막한 폐허와도 같았다. 무언가 망가지고 버려졌다. 존재가 소진되었다. 그녀의 눈은 벤저민을 보지 않았다. 그저 벤저민이 안쪽의 잔해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벤저민은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그을린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그녀가 무척 용감했다고, 잘해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미소 짓고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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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연구에서 선구자로 손꼽히는 사이먼 배런코언(Simon Baron-Cohen)에 따르면, 사람의 성향 파악에 이용할 수 있는 스펙트럼(차원)에는 사실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바로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이다. 공감 능력이란 "상대방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내고 나아가 거기에 적절한 감정으로 반응하려는 힘"을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논픽션보다 픽션을 더 좋아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공감 능력이 평균 이상인 사람일 것이다." 한편 체계화 능력은 "체계 안에 들어 있는 변수를 분석해내려는 힘, 나아가 어떤 체계에서 행동이 나타날 때 그것을 지배하는 숨은 규칙을 분석해내려는 힘"을 말한다. - P223

나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덕의 목록부터 분석해나가기시작했다. 덕이라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다. 전사 문화에 사느냐, 농경문화에 사느냐, 혹은 현대의 산업화 문화에 사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배우는 덕은 다르다. 물론 이런 덕들 중에도 겹치는 부분이 늘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그 의미를 따져보면 뉘앙스가다르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모두 자비를 이야기했어도, 그것들이다 같은 자비는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호의 · 공평성·충성심 같은 덕목들이 대부분의 문화에 나타나는 양상을 살피다 보면어느새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인간은 (미각수용체와 유사한) 저차원의 사회적 수용체를 누구나 몇 개씩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으로 특정한 사회적 사건을 다른 사건보다 더잘 알아채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를 미각에 비유해 설명하면 이렇다. 대부분 문화에는 그곳의 구성원들이 많이 마시는 단맛 음료가 한 가지 이상은 있다. 이런 음료는 보통 그 지방의 토종 과일로 만들어지는데, 산업화 국가의 경우설탕에 몇 가지 향을 섞으면 끝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망고주스, 사과 주스, 코카콜라, 환타 같은 음료에 저마다 수용체가 따로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때 작용하는 주된 수용체는 한 가지 (단맛 수용체)이고, 그것을 자극하기 위해각 문화에서 다양한 방법을 발명해낸 것이라고 생각해야 옳다." 이 대목에서 혹시 인류학자들은 에스키모에게는 그런 단맛 음료가 없다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에스키모에게 단맛 수용체가 없다는 뜻은 되지 않는다. 그저 에스키모는 최근까지만 해도 과일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요리에서 단맛 수용체를 거의 활용하지 않은 것뿐이다. 한편 영장류 동물학자들은 침팬지와 보노보 역시과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또 코카콜라를 한 모금 마시려고 실험실 과제를 열심히 수행한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맛수용체가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 한층 힘을 실어줄 뿐이다. - P232

진화한 인지 모듈은, 예를 들어 뱀 감지 장치나 얼굴 인식 ••••••그종種의 조상 대에 역경 혹은 기회를 동반했던 일련의 현상에 대한 적응이다. 이 인지 모듈은 주어지는 유형의 자극이나 입력값, 예를 들면 뱀 혹은얼굴에 대한 정보를 처리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을 도덕적 ‘미각 수용체‘의 모습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었다. 사회생활 속에서 오랜 시간 위협과 기회를 접하며 거기에 적응한 결과가 아마 도덕적 미각수용체일 것이었다. 이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특정 종류의 사건(잔혹한 행동이나 무례한 행동)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이 순간의 직관적 반응, 어쩌면 특정 종류의 감정(동정심이나 분노)까지 일으키는 것일 터였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문화적 학습과 문화적 다양성을 설명하는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스페르베와 허슈펠드에 따르면, 모들을 자극하는 동인은 본래적(original) 동인과 통용적(current) 동인 두가지이다. 본래적 동인은 모듈이 설계될 당시의 목표물을 가리킨다(즉, 뱀 감지 모듈의 경우 뱀의 전체 집합이 본래적 동인이다). 한편 통용적동인은 우연하게라도 모듈을 자극하게 되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을 말한다(따라서 실제 뱀을 비롯해 장난감 뱀, 구부러진 막대기, 두꺼운 밧줄 등 잔디에 서 눈에 띄면 우리를 놀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여기에 속한다). 모듈은 실수 없이 정확하지는 않아서, 다른 동물이 실수하는 점을 이용해 속임수를 발달시키는 동물도 많다. 예를 들면, 꽃등에라는 곤충은 몸통에 노란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발달시켰는데, 이 때문에 언뜻 보면 말벌과 비슷하다. 그래서 말벌 피하기 모듈이 있는 일부 새들은 꽃등에는 피하고 잘 잡아먹지 않는다.
이렇게 어떤 모듈을 자극하는 통용적 동인은 문화에 따라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하는데, 그 사실을 알면 도덕성이 왜 문화에따라 차이가 나는지도 일부 설명된다. 예를 들면, 지난 50년간 서구사회 사람들은 동물들이 갖가지 고통을 당할 때 동정심을 느끼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 반면,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구토감을 덜 느끼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이런 통용적 동인은 단 30년 만에도 변화를 보일 수 있다. 물론 유전자 진화를 통해 모듈의 설계 자체가 바뀌어 그 본래적 동인까지 바뀌는 데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야겠지만말이다. - P235

• 도덕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각과 비슷하다(일찍이 홈과 맹자도 그런 비유를 한 바 있다).
•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한 가지 수용체‘를 지닌 도덕으로, 이것이 무엇보다 강력히 와 닿는 사람들은 체계화 능력은 높고 공감능력은 낮을 가능성이 크다.
•도덕에 대한 흄의 접근법은 다원주의적이고 감성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현대 도덕심리학에는 공리주의나 의무론보다 이런 접근법이 더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흄의 구상을 복원하려는 첫걸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른 마음이 지니고있는 다섯 가지 미각 수용체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 우리는 모듈성 개념을 통해 선천적 수용체에 대한 사고를 전개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선천적 수용체가 일으키는 초기의 다양한 인식, 그리고 그것이 문화 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하는 양상도 살펴볼 수 있다.
• 바른 마음의 미각 수용체가 될 좋은 후보로는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다섯 가지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론이 별로 값어치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하나쯤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전이 일어나는 순간은그런 이론들이 경험적 증거를 통해 검증되고, 뒷받침되고, 수정될 때이며, 특히 그 이론이 쓸모 있다고 판명이 날 경우 발전은 더욱 의미있어진다. 이를테면 같은 나라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려 서로 다른도덕 세계에 사는 것처럼 상대편을 보다가 어떤 이론을 통해 서로를이해하게 되었다면, 그 이론은 꽤 쓸모 있다고 할 수 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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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마지막 주, 맨해튼 중심가의 영향력 큰 금융업자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에서 거래하는 아마추어 주부에이르는 대부분의 투기꾼들이 오직 자신의 감각과 가차없는 의지 말고는 감사할 대상이 없는 성공의 주체였다가, 그들의 몰락에 유일한 책임이 있는, 결함이 있는데다 부패하기까지 한 시스템의 피해자가 되기까지는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수 하락, 공포라는 전염병, 비관주의에 떠밀리는 매도의 광기, 마진 콜에 대한 광범위한 응답 불능••• 결국 공황으로 이어진 침체를 일으킨 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버블을 키우는 데 일조했던 사람 중누구도 그 버블이 꺼진 것에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거의 자연재해와 가까운 규모의 재난을 당한, 아무 죄 없는 사상자였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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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캣  ‘티핑포인트‘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어떤 변화가 걷잡을 수없이 급속하게 발생하는 시점. 그런데 기후위기의 측면에서 보면 지구는 지금 티핑포인트에 근접해 있다고 해요. 그다음에 기후위기는 이제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어요. 완전히 막을 수는 없고, 멸망을 늦추는 정도만 가능하다는 거죠. 지금 당장 지구상의 모든 석탄발전소를 다 끄고 온실가스를 완전히 배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구의 온도는 상승할 거예요. 근데 석탄발전소는 계속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도 전기 쓰면서 그냥 살고 있잖아요. 지금과 같은 삶을 영위해서는 절대 기후위기를 늦출 수 없어요. 그리고 늦추는 방법이 있다 해도 사람들이 그걸 원할지가 확실치 않아요. 왜냐하면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니까요. - P258

미어캣  일단 경의선공유지 활동 당시에는 저도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뭘 많이 공부했거나 깊이 고민했던 게 아니라, ‘이 공간은 다 같이 쓰는 공간이어야 한다, 누군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만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커먼즈‘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공공재, 공공자원이라는뜻이에요. 우리가 다니는 도로도 커먼즈고, 어떻게 보면 지구도 커먼즈죠, 옛날 시골에는 그런 공공재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마을 공용 어장이라든가, 우물 같은 것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썼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협동해서 그곳을 가꾸고, 여기까지만 소비하자, 이만큼은 아끼자, 그런 약속을 하는 거죠. 그런데 도시에는 그런 공간이 많지않아요. 사람들이 이용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그 공간을 돌보는 주체도 되는 그런 공간이 드물어요. 한국에서는 네 거와 내 거를 구분하는, 그러니까 사유재산이라는 감각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잖아요. - P259

근데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는 우리의 주장이 너무나 급진적인 거죠. 경의선공유지를 다룬 칼럼이나 기사가 나오면 댓글에 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너네들 땅도 아닌데 왜 점거하냐, 남의 땅을 왜 너희가 사적으로 소유하냐." 이 부분을 많이 고민했지만 아직은 설득하기가 힘들다는 걸 실감했어요.
그렇지만 경의선공유지 같은 공간을 방치하면 권리를 다퉈볼 만한 시민의 공간이 다 사라지거든요? 예를 들어 지하철역도 다 국유지예요. 근데 그 공간을 민간 개발 하라고 대기업에 주면 백화점 세우고 마트 만들잖아요. 국유지인데도시민이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죠. 돈을 내야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거예요. 모든 시민이 출입 가능한 공공도서관 같은 장소가 생기는 대신, 소비자만 들어갈수 있는 가게가 생기는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이. - P260

미어캣  그러니까요. 그런데 탄소중립을 한다고 단순하게 탄소 쓰는공장 다 닫자는 게 아니에요. ‘기후정의‘라는 개념이 있어요. 기후위기에 정의롭게 대응을 해야 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석탄발전소의 노동자들은 발전소가 문을 닫으면 일자리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교육 지원 같은 걸 통해서 다른친환경에너지나 재생에너지 분야로 재취업을 할 수 있게끔제도를 만들라고 요구해야 해요. 우리는 그와 관련된 요구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데 정부 정책이나 현재 통과된 녹색성장기본법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석탄발전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이런 요구를해도 혜택은 정규직에게만 돌아가고, 비정규직은 계약이 끝나면 끝이에요. 바로 실업자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우리가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생산방식을 친환경으로 바꾸는 데서 끝나면 안 돼요.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죠. 소비 자체를줄이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하고요.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 ‘수리권‘을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어요. 물건을 수리해서 오래오래 쓸 수 있게 하자는 거예요. 또 로컬, 지방에서 생산이이뤄지게끔 하자는 주장도 있고요.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이렇게 하나의 사회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해요.
근데 정부에서는 그런 고민 없이 ‘탄소중립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친환경 사업 하는 기업들한테 돈 줘서 키우자‘ 이런 식인 거예요. 실질적인 변화는 없이, 겉모습만그럴듯하게 녹색으로 칠해버리는 거죠. 포털에 ‘그린뉴딜‘을 검색하면 그린뉴딜 관련주가 떠요. 환경 이슈가 또다시 경제성장에 이용되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 P265

담. 뭐가 좋냐면요. (웃음) 상대방을 설득하는 수완도 성별화되어 있는데, 여성들이 터득한 설득의 기술은 무시당할 때가 많잖아요. 훈련해서 얻은 기술로 인정되기보다는 기질이나 천성으로 생각하고요. 나긋하고부드러운 태도를 가지는 건 모욕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죠. 실제로 그런 태도가 여자들한테 강요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그래서 같이 싸우는 여자들한테도 전문가로 보이려면,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예쁘게 말하지 말라고 얘기하게 되죠.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저는 이것도 기술로, 힘으로 인정됐으면좋겠어요. 예쁘게 말하는 건 약자의 습속이고 수치스러운 거라고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예쁘게 말할 줄 안다는 게 얼마나 유용할 때가 많은데요. 그리고 아무나 못해요. "같이 놀아요~" 수준의 너스레를 어떻게 아무나 하겠어요. - P272

미어캣  네, 저는 다양성 굉장히 좋아합니다. 획일화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어요. 통일하는 것, 획일화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러니까•••.

담, 유리 (기다림)

미어캣  저는 사회의 어떤 문제점은 거기서 생겨나기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유리  밀려나게 되는 것들이 반드시 생기고요.

미어캣 "왜 넌 달라?" 이러면서 평균이나 규격을 정하거나,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이 깔끔하게 하자는 말에서시작되는 거라고도 생각해요. 서로 좀 달라도, 그대로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는 사회가 좋지 않나 하고요. - P276

그러므로 익숙한 의심을 잘 개어 부엌 한쪽에 밀어두고, 목소리와 자세를 가다듬고, 안주인다운 태를 갖추어 한 번쯤 이렇게도 말해본다. "나는 아주 멋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슴속에서 진주알같이 뽀얀 기쁨이 설핏 빛나고, 내 얼굴은 약간 일그러진다. 원래 긍지란 조금 아린 느낌을 동반하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상을 치운다. 다시, 손님을 맞을 시간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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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성적 추론 능력을 가진 개인도 한 가지에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입장(보통 직관적인 이유로 갖게 되는 입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잘도 찾아낸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이성적 추론을 하는 과정에서 선하고 개방적이고 무엇보다 진실을 중시할 거라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개인적 이해나 평판의 문제가 얽힌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그런 개인을 모아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면, 즉 일부가 추론 능력을 활용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꺾는다 해도 개개인모두가 공동의 연대 혹은 공동의 운명을 느껴 서로가 적정선을 지키며 상호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면, 결국에 그 집단에서는 훌륭한 추론 능력이 사회 체계의 창발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찾기를 목표로 하거나(첩보 기관이나 과학계) 훌륭한 공공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입법부나 자문위원회) 집단 혹은 기관에서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훌륭한 사고가 아니라 훌륭한 행동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합리주의를 손에서 놓고 직관주의를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 P180

•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염려한다. 물론 이런 염려는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는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 의식적 추론은 마치 대통령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공보관처럼우리의 모든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 우리 안에 있는 공보관의 도움을 받아 종종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 잘못을 너무도 잘덮어 가리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잘못이없다고 믿는다.
• 이성적 추론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있으면 갖은 수를 써서 그것에 도달하게 해준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도 될까?"라고 묻고, 무엇을 믿고 싶지 않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라고 묻는다.
•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개인보다 집단을 염두에두고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우리가 팀을 지지하고 팀에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활용한다. - P181

WEIRD권 사람들에게서는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여럿 발견되는데, 다음과 같은 간단한 일반화 속에서 포착해볼 수 있다. 즉, WEIRD의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관계보다는 별개의 사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의 자아개념이 동아시아인에 비해 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나는 ~이다(혹은 ~하다)"라는형식으로 문장 20개를 작성하라고 하면, 미국인은 자신이 가진 내적인 심리 특성 (행복하다. 외향적이다. 재즈에 관심이 있다)을 열거할 가능성이 더 높은 반면, 동아시아인들은 자신의 역할과 관계 (아들이다, 남편이다. 후지쓰의 직원이다)를 열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차이는 피상적 차원에만 그치지 않으니, 심지어 시각적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 과제 중 ‘도형 안에 선 긋기‘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 들어가면 피험자들은 먼저 내부에 선이 하나 그어진 정사각형을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페이지를 넘기면 원래 정사각형보다 크거나 작은 정사각형이 있으나 안은 텅 비어 있다. 그 안에다 이전 페이지의 도형과 똑같은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이 피험자의 과제인데, 절대치를 맞추거나(즉, 새로운 도형의 크기는 무시하고 선의 길이를 똑같이 몇 센티미터로 맞춘다) 혹은 상대치를 맞추는 식이다(도형 크기에 따라 길이 비율을 맞춘다). 이 과제를 수행해보면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절대치를 맞추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이들의 눈에는 선이 독립적 사물로 인식되고, 따라서 그것이 별개로 기억에 저장되기때문이다. 반대로 동아시아인들은 상대치를 맞추는 과제에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동아시아인들은 자동적으로 부분 간의 관계를 먼저 인식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인식에 이런 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전체적 사고를 하는 데 반해 (전체 맥락및 부분 간의 관계를 보는 사고방식), WEIRD권 사람들은 좀 더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초점이 되는 대상을 해당 문맥에서 따로 떼어내 그것을 어떤 범주에 집어넣은 후, 그 범주에 적용되는 사실은 그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는 사고방식).‘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칸트와 밀 이래로 WEIRD 권 철학자들이 왜 대체로 개인주의적이고 원칙 지향적이고 보편주의적인 도덕 체계를 내놓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율적 개인들이 모인 사회를 다스리려면 그런 도덕이 필요할 수밖에없는 것이다. - P190

그러나 비WEIRD권 사회에 살면서 관계 · 맥락·집단·제도를 인식할 확률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을 보호하는 일에만 그렇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때에는 좀 더 사회중심적인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데, 개인들의 요구보다 집단과 기관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 관심사가 피해와 공평성의 원칙만 바탕으로 해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와 공평성 말고도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도덕적 관심사가 더 있을 것은 물론, 이런 사회는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도덕적 덕목도 추가로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관심사와 덕목들이 바로 2부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그와관련한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이 나오는데,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 P192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슈웨더가 오리사에서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발전시킨 새로운 도덕성 이론이었다(그 내용은 1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슈웨더는 그 연구를 발표하고 나서 동료들과 함께 그동안 모은 600여 개의 인터뷰 기록을 계속분석했다. 그 결과 도덕의 주제가 크게 세 가지 군(群)으로 나뉜다는것을 알아낸 그들은 거기에 각각 자율성의 윤리, 공동체의 윤리, 신성함의 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각 윤리는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 중요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 P194

자율성의 윤리에서는 사람들이 더마다의 욕구• 필요• 애호를 지닌 자율적 개인이라는 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욕구• 필요• 애호를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인권·자유·정의 같은 도덕 개념이 발달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서로의 계획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윤리가 바로 이 자율성의 윤리이다. 자율성의 윤리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피터 싱어(Peter Singer)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들은인간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을 때에만 정의나 인권의 가치를 인정한다)."칸트나 콜버그 같은 의무론자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이들은 전체의복리가 손상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와 인권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양의 일상적인 사회를 걸어 나와 보면, 사람들이 쓰는 도덕적 언어에는 두 가지가 더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의 윤리인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사람이란 가족·팀·군대·회사·부족·나라 등 자신보다 더 큰 실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자신보다 큰 이 실체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총합을 넘어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존재하는 것이자 진정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실체 내에서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 의무 · 위계질서·공경·명성 · 애국심 등의 도덕적 개념이 발달한 사회가 많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거나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이기적이고 위험한 사람으로 비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분명 탄탄히 짜인 사회 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사회제도와 공동의 실체를 허물어뜨리고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성함의 윤리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사람이란 한순간 머물다 가는 존재로, 몸은 그릇이요 그 안에는 신성한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을 단순히 의식을 좀 더 갖춘 동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며, 따라서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몸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전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가 생닭을 가져다 성행위를 할 경우, 설령 그 일이 어떤피해도 끼치지 않고 그 누구의 인권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이자 창조주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우주의 신성한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거룩함과 죄악, 순결과 오염, 고결과 타락등의 도덕적 개념을 발달시키는 사회가 많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통속적인 서구 사회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이 방탕이자 향락, 나아가 인간의 저급한 본능에 대한 칭송과 다름없다. - P195

더불어 나는 슈웨더의 이론을 가져다 (내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내놨던 정당화 근거들을 분석해보았다. 이론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학생들은 거의 자율성의 윤리만을 도덕성의 언어로 삼아 이야기한 반면, 다른 집단(특히 노동자 계층 집단) 사람들은 공동체의 윤리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고, 신성함의 윤리도 좀 더 이용하고 있었다." - P197

그보다 이곳의 도덕적 세계에서는 개인보다 가족이 사회의 기본단위가 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곳 사람들은 한 무리의 큰 가족(하인도 포함하여)에 속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이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평등이나 개인의 자율성 같은 것은 떠받들어야 할 가치가 못 되었다. 그보다는 노인·신·손님을 깍듯이 모시고, 아랫사람을 보호해주며, 자기 역할에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공동체의 윤리가 무엇인지는 슈웨더의 책을 통해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난생처음 그것을 몸으로 실감한 것이 인도에서였다. 사회 구성원의 의무를 강조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집단에 봉사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도덕적 규약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물론 볼썽사나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더러 권력자라고 해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기 힘을 남용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랫사람(특히 여자)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윗사람 마음이 죽 끓듯 바뀌면 여지없이 저지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야 나는 처음으로 고향의 도덕성에서 발을 빼볼 수 있었다. 그 발을 인도에 디디고 공동체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자율성의 윤리를 바라보니, 이제 자율성의 윤리에는 개인주의가 너무 지나치고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도에 머물렀던 세 달 동안 나는 미국인을 만날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투를보니 영락없는 미국인이었다. "이봐요, 당신이 저 사람한테 말좀해줘요. 이 짐칸은 내 자리 쪽에 있으니까. 이걸 쓸 권리는 나한테 있다고." 순간 내가 다 민망했다. - P200

당파심에 의한 분노에서 해방되자 홀가분한 것이 참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그렇게 화가 나지 않으니 옛날처럼 의분에 차서 어떻게든 "우리가 옳고 그들은 틀렸어"라고 결론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게는 새로운 도덕 매트릭스를 탐험할 여유가 생겼고, 그것들 하나하나도 나름의 지적 전통에 의해 지탱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1991년 슈웨더는 문화심리학이 가진 깨달음의 힘을 다음과 같은글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한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 P212

도덕 매트릭스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지만, 그것은 다른 매트릭스가 가진 논리(심지어 다른 매트릭스의 존재까지도)를 못 보게하는 면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 이상의 도덕적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느낀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회를 운영하는 정당한 틀도 하나 이상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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