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과 파커의 입을 통해 도덕 세게의 궤적이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는 믿음은 부정의에 맞선 싸움을 위한 크고 예언자적인 외침이 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섭리론 믿음이 약자들에게는 희망을, 강자들에게는 오만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자유주의의 감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민권의 도덕적 긴급성에 대한 감각이 냉전 이후 자족적인 승리주의 감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 P96

힐러리 클린턴의 불운이랄까. 사회적 상승에 관한 담론은 2016년 그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그녀를 누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이야기나,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트럼프는유세 기간 중 이 구호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또한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런 이야기를 일절 안 했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한 거친 발언을 내놓으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위대함의 비전은,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활발한 공적 담론을 일으켰던 능력주의적 기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플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해 초 영국에서 예상을 깨고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선거는 복합적 이벤트이므로 어떤 일이 투표자의 표를 이끌어 냈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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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맞은편에 많은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손톱은 잘려나가고 엔진 오일로 새까맸으며, 손마디는 벗겨지고, 옷에서는 주유소 내 먼지와 땀, 휘발유 냄새가 났다. 바비는 재혼한후에도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홀아비 같았다. 그는 잘랄라바드의 사탕수수밭과 파만의 정원을 그리워했다. 자기 집에 들락거리던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소르 시장의 소란스런 길을 걷고 싶어했다. 자기와 아버지를 알고 있는, 같은 조상과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했다.
내게는 미국이 과거를 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바바에게 미국은, 과거를 애도해야 하는 곳이었다.
- P196

그런데 지금 그런 소라야의 어머니가, 감추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희망을 드러낸 눈빛으로,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로 간절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는 그이유 하나로 그 동안 누려왔던 권력에 나는 진저리가 났다. 장군의 눈빛을 통해 장군의 생각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의 아내는 눈빛으로 많은 것을 드러냈다. 이 문제가 무엇이건, 이 문제 때문에 적이 생긴다 해도 그녀가 내 적이 될 가능성은 전혀없을 것 같았다.
- P226

"이 주 후에 전화 드릴 거예요."
‘의심이 간다‘는 말을 듣고서 어떻게 2주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의사에게 따지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밥을 먹고, 일하고,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의사는 그런 말을 해주고 나를 집으로 보낼 수 있을까?
서류를 받아서 그것을 제출했다. 그날 밤 바바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담요를 폈다. 그것을 기도용 깔개 삼아 바닥에 머리를 수그리고 카불에서 율법 선생님 때문에 강제로 외웠지만 반쯤 잊어버린 코란 구절을 낭송했다. 과연 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하진 못했지만 신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제는 율법학자가, 그의 믿음과 확신이 부러웠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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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네가 그 돈을 훔쳤니? 아미르의 시계를 훔쳤니?" 하산이 귀에 거슬리는 희미한 목소리로 한마디로 대답했다.
"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휘청거리고 가슴이 쿵하며 내려않았다. 사실을 털어놓으려다가 그것이 나를 위한 하산의 마지막 희생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만약 하산이 아니오, 라고대답했다면 바바는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하산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바가 하산의 말을 믿는다면 내가 혐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저지른 짓이 드러날 것이다. 바바가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산의 행동을 통해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하산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골목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을. 내가 그곳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어쩌면 마지막으로 나를 구해주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 어떤 사람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그에게 내가 숨은 적이며 호수 속의 괴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런 희생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 나는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며 도둑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기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사실을 다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곧 끝난다는 사실이 기뻤다. 바바가 그들을 쫓아낼 것이고 조금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나는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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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돌려보니 하산의 새총이 눈앞에 있었다. 하산이 넓은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고무줄 한가운데에는 호두만한 돌덩이가 장전되어 있었다. 하산은 새총으로 아세프의 얼굴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힘을 줘서 고무줄을 잡아당기느라 손이 떨리고 구슬 같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솟고 있었다.
"제발 우리를 내버려두세요. 도련님."
하산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세프를 ‘도련님‘ 이라고불렀다. 상하 계급구조 안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렇게 뿌리 깊게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나는 잠시 동안 생각해보았다.
아세프가 이를 갈았다.
"그거 내려놔라. 어미도 없는 하자라인 주제에."
"제발 그냥 가주세요, 도련님."
- P67

나는 카불의 겨울이 좋았다. 밤에 창문에 떨어지는 눈 소리와 검은 고무장화 아래서 오도독거리는 눈 소리 때문에 겨울이 좋았다. 찬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당과 거리를 획 지나갈때면 따뜻한 난로가 있어서 겨울이 좋았다. 더 중요한 이유는,
겨울이 되어 나무들이 꽁꽁 얼고 거리가 얼음으로 덮이면 바바와 나 사이의 냉랭함이 조금은 녹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와 바바 사이를 조금 호전시켜주는 존재는 연이었다. 바바와 나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다른 존재 영역에서 살았다. 그 영역 사이의 종잇장만큼 얇은 교차점이 바로 연이었다.
- P77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진짜 재미는 연이 잘릴 때 시작되었다. 연이 잘리는 순간 연 쫓는 아이들이 활약했다. 바람에날려간 연 주변을 떠돌던 아이들은 마침내 들판에 나선형으로 떨어지거나 누군가의 마당이나 나무나 지붕에 떨어질 때까지 연을쫓아갔다. 추격전은 상당히 격렬했다. 연을 쫓는 수많은 아이들이 떼 지어 거리로 몰려들어서 언젠가 책에서 읽은 것처럼 황소들을 피해 달려가는 스페인 사람들처럼 서로 밀치며 나아갔다.
어느 해에는 이웃에 사는 한 아이가 연을 잡으러 소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소나무 가지가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는 바람에 9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등을 다친 그 아이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아이는 떨어지면서도 절대 연을 놓치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연을 쫓는 아이가 연을 손에 넣으면 그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규칙이 아니라 관습이었다.
연을 쫓는 아이들이 가장 탐내는 상품은 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진 연이었다. 그것은 영광의 트로피였고 손님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벽난로 위에 진열해놓을수 있는 대단한 장식품이었다. 하늘에서 연이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 두 연이 남았을 때, 연을 쫓는 아이들은 이 상품을 차지할 채비를 갖췄다. 아이들은 제일 먼저 출발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뛸 채비를 갖추고 근육을 긴장시킨 채, 모두 목을 때고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시작되고 마지막 연이 잘리는 순간 아수라장이 시작되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연을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하산이야말로 지금까지 보아온 연 쫓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마치 몸속에 나침반 같은 것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항상 연보다 먼저 연이 떨어질 곳으로 가서 연을 기다리는걸 보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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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1975년의 춥고 흐렸던 어느 겨울날, 나는 열두 살 나이에 지금의 내가 되어버렸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무너져가는 진흙 담장 뒤에 웅크리고 서서 얼어붙은 시냇가의 골목길을 엿보던 그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과거에 대해, 과거를 묻어버릴 방법에 대해 떠들어대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엉터리이다. 아무리 깊이 묻어둬도 과거는 항상 기어나오게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난 26년 동안 인적 끊긴 그 골목길을 줄곧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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