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시기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거려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해야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에 대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감기가 들지 않고는 절대로 코를 안 흘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딴 아이도 안흘렸다. 그래서 학교나 유치원 갈 때 가슴에 손수건 매다는 습관까지 없어져 버렸다. 나도 이제는 요즘 아이들이 코를 안 흘리는 걸 이상해하는 대신 그땐 왜 그렇게 코를 흘렸는지를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 P13

한 번 출타하시면 며칠 만에 돌아오실 적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가장 큰 낙이었다. 사랑마루는
울타리 없는 바깥마당에 면해 있었다. 아래윗간으로 나누어진 사랑채는 마루도 길어서 가운데 기둥이 있었다. 그 가운데 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고 앉아 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바라볼수가 있었다. 
흰옷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초가지붕마다 뿜어 올린 저녁연기가 스멀스멀 먹물처럼 퍼져길과 논밭과 수풀과 동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워버려, 마침내 잿빛 하늘을 인 거대한 한덩어리가 되었을 때도 흰옷 입은 사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것은 잘 분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다들 흰옷을 입었다.
특히 송도 나들이를 갈 때는 때도 안 묻은 고운 흰옷으로 호사를했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와 딴 사람이 헷갈리지 않았다. - P19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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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은
‘나‘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꽃이 없으면 열매가 없고, 열매가 없으면 씨도 없다. 그러니 시작은 ‘꽃‘이었을까, ‘씨‘였을까. 씨가 없으면 꽃이 없고, 꽃이 없으면 열매도 없고, 열매가 없으면 씨도 없다는 순서로 갈 수도있다. 꽃에서 시작됐을 거라 믿는 근거는 단순하다. 예쁘니까. 예뻐서 눈길을 끄니까 눈길이 가면 마음길이 따르고 마음길이 이르면 발길이 닿는다. 내가 꽃을 보고, 꽃도 나를 본다. 나와 나의 꽃은 부디 서로를 봐야 한다. 꽃은 나에게 반응react 이 아니라 응답response 을 기다린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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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 봉투에는 배달지 주소가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발신인의 주소는 없고 노르웨이 우체국 소인만 찍혀 있었다.
박물관 직원이 봉투를 뜯어보니 편지는 없고, 빨간색, 검은색, 주홍색 깃털이 지퍼백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직원 몇 명이 모여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중 한 사람이 지퍼백을 들고 한적한 박물관 복도를 한참 걸어갔다. 시료에 담긴 빅토리아 시대의 조류 표본을 지나고, 알과 뼈, 멸종된 생물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 다원이 수집한 핀치새, 한때 월리스의 새들이 있었던 캐비닛을 지나 파이로데루스 스쿠타투스라고 표시된 캐비닛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큐레이터가 서랍을 당기자 범죄 증거물이라고 적힌 봉투가 보였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온 우편물을 서랍에 넣고 캐비닛 문을 조용히 닫았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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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은 체포되기 전까지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기 어려웠던적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눈을 못 마주치겠다.‘ 그런 생각을 일부러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판결을 앞두고 있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죠. ‘아, 눈! 눈을 못 마주치겠어!" 에드윈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우스꽝스럽게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에드윈이 말을 계속했다. "자폐증이있는 사람들을 보면 틱 같은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의자에 앉으면 손을 계속 비비게 되더라고요."
에드윈이 갑자기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의자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자폐아처럼 보이는 반복적인 동작 같은 거 있죠? 어느새 저도 의자에 앉으면 앞뒤로 의자를 막 흔들고, 눈도 못 마주치고……. 그게 증상이니까요."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는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자신의 필요에 맞는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 P290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행위도 정당화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터 파머는 나라에서 보호하는 사자를 사냥감으로 되어온 가이드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에드윈은 자기가 물건을 훔쳐 나온 곳은 개인이 아니라 기관이고, 그 기관은 이제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아니므로 큰 문제가되지 않는다고 했다. 롱은 그저 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플라이를 배우는 같은 대학생으로서 에드윈이 그렇게 비싼 가죽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갖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플라이 타이어들보다 육식이 환경에는 더 나쁜 것이 아닌지 의아해했다. 플라이 타이어들은 자기들이 가진 가죽이나 깃털이 박물관 것이 아닌지 걱정하면서도 큐레이터들이 주장하는 사라진 가죽의 개수는 허수에 불과하다며 양심의 가책을 덜었다.
나는 누군가는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주기를 바랐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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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했던 소련이먼저 우주 개발에 뛰어든다. 전후 소련과 미국은 언제 전쟁이 터져도이상하지 않은 냉전 시대에 돌입했는데, 소련은 미국보다 군사력이 떨어졌고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졌다. 이때 소련 지도부의 눈에 띈 것이 바로 장거리 발사체다.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곧바로 타격할 수 있다면 미국과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이후 미국과 각을 세운 나라들은 이 전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심지어 북한조차),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코뇰로프가 세계 최초로 대륙간탄도 미사일(ICBM)을 개발하자, 소련은 이 기술에 자국의 미래가 달렸다고 보고 전력을 몰빵한다. 장거리 미사일과 우주 로켓은 달라 보이지만 같은 기술이다. 우주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이용해 장거리 미사일도 쉽게 개발할 수 있다. - P231

또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시기에는 상대의 정보를 정확하게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찰의중요성은 미국과 소련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미국은 유럽과 터키 등의 미군기지에서 정찰기를 띄워 소련 깊숙이 침투해 정밀 사진을 찍었다. 1960년 미국의 U-2 정찰기가소련 본토 한가운데서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만 놓고 보면 정찰기를 격추한 소련의 승리지만, 전체 과정을 보면 미국의 승리다. 미국은 원할 때 얼마든지 소련을 정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련은 미국 본토를 정찰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 가까이에 소련의 우방국이 없어 정찰기를 띄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비대칭은 소련에 엄청난 공포감을 줬고, 이 공포감은 정찰위성을 만들어 우주에서 미국을 살핀다는 계획까지 이어진다. - P232

소련 붕괴 후 우주과학, 수학, 기초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해외로 빠져나갔다. 공산권 학자들은 자유 진영과의 교류 없이 수십년간 독자적으로 지식을 쌓고 있었다. 이들이 자유 진영으로 퍼지자학문의 새로운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또한 소련제 무기와 로켓이이 시기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제3세계에 퍼져나갔다. 당시 러시아가얼마나 처절했느냐면, 항공모함을 고철값만 받고 팔 정도였다. 보통무기를 다른 나라에서 살 때는 제약이 많다. 가격도 비싸고,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분해나 수리를 금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진 러시아는 푼돈과 생필품에 무기와 기술을 팔아치웠다.
우리나라도 이때 소련제 무기를 많이 구입했고, 이를 분해하며 열심히 공부한 덕에 90년대부터 성능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물론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은이제 중동과 남아시아에 무기를 수출하는 국가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지역에 무기를 파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 P264

한국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가 정책으로 인터넷 인프라를 전국에 보급했다. 덕분에 자타가 공인하는 IT 강국인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ICT는 미국보다 2년 정도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른 국가가 발전하는 동안 한국이 정체된 건 그놈의 공인인증서부터 언어까지 (사용량이 적은 언어는 아무래도 데이터 수집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전문가들은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은 것도 그중 하나로 꼽는다. 전국에 처음 고속 인터넷이 깔렸을 때, 기업과 공공기관은 온갖 서비스를 인터넷을 통해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데이터가 쏟아졌지만, 그중에서 당장 필요한 데이터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눈에 남은 데이터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늘 되는대로 닥치는 대로 효율적으로(?) 일해온 한국은 당연히 남는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고 날려버렸다. 보관하는 것도 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데이터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한국은 ICT 발전이 정체되었다가 뒤늦게 다시 따라가고 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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