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본토의 일본인이 조선에 있는 일본인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제국주의의 사무원과 앞잡이는 식민지 주민을 억누르기 위해 고용된 것이요.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태도가 본토에 있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도쿄에서 사귄 많은 일본인들에게 호감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1919년에 혁명적 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무정부주의자가 주요한 급진세력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공산주의운동이 주도권을 잡았다.
일본인은 아주 좋은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일본 공산당원은 정직하고, 강인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열적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몸을 바친다. 나는 내가 잘 아는 일본인을 정말로 좋아한다. 중국에서는 반식민지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운동에서조차도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일본 공산주의운동에는 이런경향이 조금도 없다. 중국인과 달리 일본인은 조선인이나 그밖의 외국인 동지들을 절대로 구별하지 않으며 정말로 국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 P114

학생 1,000명을 포함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6,000명이 살해되었고, 중국인도 600명 이상 피살되었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은 한창 전후 경제위기의 고비에 있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지배계급은 1918년의 쌀폭동에 필적할 만한 폭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농민뿐만 아니라 지진으로 생계가끊긴 공장노동자들도 가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수를 치고 일본 민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지배계급은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인 테러행위를 재빨리 결행하였다. 정부는 국민들의 분노를 정부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국민들의 주의를 다른 곳에 쏠리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 P116

1923년의 사건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일본의 중요한 정치가는 그 배반적인 학살 후에 극동의 어느 민족도 더는 일본이 보이는 거짓 ‘우호‘에 속지 않을 것을 깨달았고, 자기들이 한 짓거리에 당황했다. 조선은 하나의 실례로서 다른 모든 민족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사상을 열심히 선전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구호를 열광적으로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일본군국주의로 발전한 반동적 운동도 그 해의 공포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모든 조선인에게 커다란 정치적 영향을 끼쳤고, 중요한 정치적 재편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족주의운동이 급진화되었고 소극적인 대일우호 감정까지도 깨끗이 씻겨버렸다. 조선 팔도 어디를 가든지 1923년의 대학살로 일본에서 자기 친척이 살해당한 가족을 볼 수가 있다.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는 너무나 격렬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와 협력하자고 할라치면 언제나 1923년의 일을 끄집어낸다. 그들에게 믿어도 괜찮은 일본인도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 P118

1923년 이후 많은 학생과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고 중국으로 갔다. 2년 동안은 일본으로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은 제국주의와 반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중국의 협력을 구하게 되었다. 학생 대부분이 중국혁명을 위해서든 조선을 위해서든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27년에 국민당이 반동으로 돌아서자 중국으로 가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27년 이후 일본 유학생이 평균 2,000~3,000명은 되었을것이다. 중국은 문화수준이 낮고 교육받은 조선인을 필요로하는 일자리가 없었으며,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지독히 힘들었다. 또 가족도 없고 도움 받을 만한 곳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혁명 활동이나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인은 심지어 끼니를 잇는 것조차 어려웠다. - P120

나는 계급적인 증오, 민족적 증오, 개인적 증오, 국가 간의 증오를 수없이 봤다.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잔인함이 더는 도덕적 가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승리에 자극되었고 패배로 각성하였다. 그러나 승리를 얻기위한 수단으로서 잔혹성은 긍정한다. 잔혹성을 띠지 않는 어떤 역사적 변혁이 일어난다면 커다란 감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나는 청년시절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깡그리 떨쳐내버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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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찬이 아니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도 사전 편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는 영구히 모든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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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일강을 향하여 ‘국제정의‘ 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버렸을까? 나는 분개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  - P56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 목이 매여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 P60

내가 체험한 인생살이의 큰 윤곽을 그려볼 때,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얻어낸 패배의 연속일 뿐이며, 앞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춰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것이다. - P67

학생들은 와! 하고 함성을 터뜨렸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껑충껑충 뛰어올랐고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선생님께서 무슨말씀을 더 하시는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국민 전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윌슨 대통령은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또한 모든 나라와 모든 인민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대통령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국민이 버티고 서 있다. 일본이 조선을 노예화하는것을 미국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독립과 민주주의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우리는 무기를 든다거나 폭력을 써서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거부될수가 없다.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만세! 만세!"
우리는 만세삼창을 외쳤다.
"정말로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을 도와줄까요?" 하고 우리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 P87

사형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률상의 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위운동 참가자들이 "우리는 단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을 뿐,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하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조선의 법률로는 사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법에 의하면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대신에 거리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뛰어난 일본인 특유의 전문수법인가!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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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나
리영희

나와 님 웨일즈의 『아리랑(Song of Ariran)』 과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60년 봄이었다. 훗날 장지락(張志樂)으로 본명이 밝혀진 주인공, ‘어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처음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에 지울 수 없는 크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 · 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했을 때는 ‘김산(金山)‘을 찾았다. 그는 내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나에게 빛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곤 했다.
- P6

서장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옌안(延安)에서였다. 그곳에 머물러있던 1937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루쉰(魯迅)도서관에서 영문책자를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불과 이러저러한 몇 권의 책만이 대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여름 내내 모든 종류의 책과 잡지를 수십권씩이나 빌려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많은 책을 빌려가고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당시 나로서는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몹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중화소비에트에 파견된 조선대표입니다. 지금군정대학(軍政大學)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 P26

일본은 화려하기는 하지만 그림엽서류의 디자인처럼 약간은 인공적이다. 반면에 조선은 순수하고 자연적이다. 일본이 소리(音)의 나라 - 게다짝 소리, 토막토막 끊어지는 발음, 오가는 교통수단들의 소음, 미닫이 창이나 문을 끊임없이 여닫는소리, 조그마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놓는 소리 등등 - 라면 조선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끊임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거나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 스스럼 없고 태평하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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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것은 비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18세기 런던에서 별처럼 빛났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클럽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렇게 불려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지나치기에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들의 기여가 너무 커 왠지 아쉬움도 남는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있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중요한 하나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기여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벗‘이 되는 것이다. 선술집인 터크즈 헤드 태번(Turk‘s Head Taverm)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생긴 다른 클럽들과 달리, 이 클럽은 클럽 소유의 아지트가 없었다. 그래서 클럽 회원들은 런던의 평범한 선술집에서 만났다. - P18

어느 날 존슨은 옥스퍼드에서 쾌활한 척 생활했던 나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서도 존슨만의 재치가 돋보였다. 이를 두고 보즈웰은 "마음속에 슬픔을 품은 그는 사람들 앞에서 명랑하게 행동했다.
그의 유쾌하고 떠들썩한 웃음은 부상당한 군인과 죽어가는 군인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전쟁터에서 울려 퍼지는 드럼과 나팔 소리 같았다."고 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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