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포조가 보기에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그가 보기에 수도원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힘든 자들을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약골,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자식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상인은 아둔하거나 무기력한 자식을 그곳에 내다버렸고 농부는 자기 힘으로 먹일 수 없는 남아도는 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곳을 이용했다.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들은 초창기의 좀더 금욕적이던 시대의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 딸린 정원이나 밭에서 최소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조가 판단하기에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게으름뱅이였다. 수도원의 두꺼운 외벽 뒤에 사는이 기생충들은 기도말만 웅얼거리며 수도원의 방대한 소유지를 경작한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입으로 살아갔다. 교회는 유력한 대지주였으며 종종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귀족보다도 더 부유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세속적인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유 토지의 소작문제나 그 밖의 권리나 특혜에 대해서 강한 목소리를 냈다. 독일 북부힐데스하임에 주교가 새로 선임되었을 때, 신임 주교는 교구의 도서관을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서고 대신 무기고로 안내를 받았는데, 벽에 걸린 창과 전투용 도끼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주교의 권리로 얻은, 그리고 주교로서 당신이 지켜야 할 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부유한 수도원의 구성원들이 이런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흐릿한 빛 속에 앉아 가만히 수입을 헤아리고 있노라면,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도-때로는 야만적인 힘을 써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 P50
이미 초기 수도원 회칙에서부터 수도사들이 해야 할 노동의 구분은 가시화되어 있었다.ㅜ프랑스의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성 페레올루스(530-581)의 「회칙」에 따르면 "쟁기를 손에 쥐고 땅에 설 수 없는 자는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잡고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붙들고 쓸 수 없는 자는 쟁기라도 잡아야 했다). 드물게 뛰어난 능력-다른 수도사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름답고 명료한 손글씨로 정확하게 필사하는 능력을 갖춘 수도사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게르만족 전통이 있는 지역과 아일랜드에 존재했던 ‘속죄배상금(Wergeld)‘은 죽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살인에 대한 배상비용에 차별을 두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뛰어난 필사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있다. 평범한 촌부를 죽인 경우 배상금은 200실링으로 책정되었다. 낮은계급의 성직자는 300실링이었으며, 만약 그가 살해되던 때에 미사를 올리는 중이었다면 400실링으로 올랐다. 그리고 폭력의 행사로 필사가가살해된 경우,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배상금이 책정되었다. 생명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시대에 필사가에게 이렇게 높은 배상금이 지불된 것은 독서를 명하는 회칙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원이 필요한 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힘든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수도원 도서관도 고대 로마 제국의도서관이나 당시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존재했던 도서관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의 오랜 세월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책이나마 모을 수 있었던것은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고 불린 궁극의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를 하던 작업 공간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수도원에 자리가 생기는 대로 작업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설령 한기에 손가락이 곱아드는 곳이더라도 최소한 빛은 잘드는 곳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필사 목적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고 건축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중한 책을 수집하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훌륭한 수도원마다 깨끗한 유리창이 갖춰진 방을 준비하고 많게는 30명의 수도사가 한꺼번에 같이 앉아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들은 개인 책상에 앉아서 필사를 했고 때로는 그들의 집중을 돕기 위해서 책상 사이에 칸막이까지 설치되었다. - P52
결국 고대 사상을 담은 책들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양피지의 놀라운 내구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 책 사냥꾼이라면 잘 알고있었던 것처럼 제아무리 강한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반드시 생존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종종 칼, 브러시, 헝겊조각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세네카, 루크레티우스의 글이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다. 이런 작업은 분명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었겠지만, 실제로 자신이 지우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필사가가 있었다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원본의 잉크가 좀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면, 이런 작업을 거친후에도 여전히 지우려고 했던 원래 문헌의 내용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키케로의 「국가론(Dere publica)』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다. 우정에 관해서 논한 세네카의 서한을 필사한 단 하나뿐인 사본도 6세기 후반에 필사된 「구약성서」 아래에서 해독되었다. 이처럼 이상하게 글자가 중첩된 상태로 발견된 문헌들을 ‘다시 긁어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부른다. 고대의 몇몇 주요 작품들은팔림프세스트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알려지지 못했을 것도 있다. 그러나 중세의 그 누구도 수도사에게 필사한 글의 행간에 있는 글을 읽으라고권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58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포조가 한 다른 발견에의해서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중요성은 곧 퇴색하고 말 것이다. 위에 언급한 책들보다 더 오래된 작품으로 기원전 50년경에 저술되었으며,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철학자가 쓴 이 장관시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유명한 백과사전 「사물의 본성들에 관하여(De rerum naturis)』와 너무나 유사한 제목이다. 그러나 이 중세 수도사의 작품이 따분하고 관습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포조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가 동료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열심히 읽었던 오비디우스키케로 등 여러 다른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언급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조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도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용된 한두 줄의 토막글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조는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문장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곧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포조가 그 책을 풀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스스로 알고있었는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 - P66
로마 귀족은 헬레니즘 문화에 무절제하게 열광하는 것을 결코 존경받을 만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그리스어에 능통하거나 그리스 예술을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일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견지하곤 했다. 그러나 신전을 비롯한 로마의 공공장소를 근사하게 장식했던 것은 실상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점령지로부터 약탈해온 우아한 그리스 조각상들이었다. 전장을 누비는 로마 장군들의 빌라 역시 귀한 그리스 꽃병이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런 석조나 토기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로마에 침투해 있던 그리스 문명의 이기(利器)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바로 책이었다. 군사국가답게 로마가 수집한 첫 대량 도서 역시 승전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이었다. - P78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유적의 발굴조사에서는 기부자를 기념하는 명관들과 함께 조각상, 필기용 책상, 파피루스 두루마리 보관용 선반, 번호가 매겨진 책장이 발견되었다. 이런 책장들은 양피지를 묶어 만든 책이나 점차 두루마리의 대체제로 떠오르던 코덱스 형태의 책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또한 도서관 벽 위에 휘갈겨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도서관이 오늘날의 공공도서관과 여러모로 비슷한 모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서관은 공공자산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물론, 도서관은 어떤 모습이어야한다는 우리의 관념도 수천 년 전 로마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P81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복잡한 문제를 혼자 고민하는 ‘고독한천재‘를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적 삶‘ 하면 떠오르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자신만의 비밀 은거지에 머물면서 모든 것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데카르트나 조용히 렌즈를 갈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던 파문당한 스피노자의 모습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지식인의 이상형의 변화는 문화적 특권에 일어난 의미심장한 변화에기초하고 있다. 변화는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초기 기독교인은 은둔생활을 하며 의도적으로 이교도가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이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사막에서 생활한 성 안토니우스(250-356) 나 좁은 기둥에 올라앉아 수도했다는 성 시메온(390-459)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현대의 연구가 밝혔듯이, 이들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이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종종 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이미지 혹은 그들 주변에 유행하게 된 이미지는 사회성이 배제된 극단적인 고립의 이미지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는 이것은 낯선 것이었다. 물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용한 환경과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므로, 그리스, 로마의 시인과 철학자도 주기적으로 시끄러운 세상사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지향했던 이미지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을 다른 양치기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또다른 양치기로 묘사했다. 철학자는 스스로를 종종 며칠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는 긴 대화를 주고받는 자로 묘사했다. 일상의 산란함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완전히 고립된 자기만의 작은 공간으로 물러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친구들과 정원에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은 곧 단체생활에의 참여를 의미했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 선택한 활동은 앞선 시대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대화였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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