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초리에 입을 맞춘다‘는 표현에서 문자 그대로 드러나듯이 체벌을 받은 자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라는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을 짓밟으려는 기독교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더욱이 고통의 체험은 체벌로서만 의미가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모방으로서도 의미를 가졌다. 기독교 은둔자들은 고행을 통해서 예수가 몸소 견뎌야 했던 고통을 묵상하며 자신의 몸으로 같은 고통을 체험했다. 이런 자기 고행은 고귀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것으로서 대중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고, 일찍이 고대 말부터 그 사례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매질을 가하는 것이 주요 금욕적 고행수단으로 교회에서 공인된 것은 11세기의 일로 수도원 개혁자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 수도회 소속 페트루스 다미아니에 의해서였다.
고통의 추구가 쾌락의 추구와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기까지는1,000년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 구세주께서 채찍질을 견뎌내시지 않았던가?" 다미아니는 채찍질의 수행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론자들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도 매질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구세주를 닮고 싶다면 그들이 겪은 고통을 우리도 몸소 겪는 것 그 이상의 방법이 있겠는가? 물론 다미아니도 이런 영광스러운 선구자들의 경우에는 채찍질을 가한 것이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승리를거둔 세계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채찍질을 가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그저 막연히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모든 꿈과 교리는 헛될 뿐이었다.
다미아니의 자취를 따른 많은 문헌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육신은 꼭 나무토막 같아져야 할 것이니, 몸을 때리고 채찍질하라. 지팡이를 휘두르고 매질을 가하며 단련하라. 육신은 고통을 당하고 굶주림을 겪어야 하리니, 그런 다음에야 육신은 영혼에게 굴복하고 완벽한 형상을 갖출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목표 앞에는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을 수없었고 자제심이라든가 거리낌 같은 감정이 설 자리가 없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도 수치스럽지 않았으며, 떨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우는 모습을 들켜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땐 차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뭉쳐 있을 수만 있으면 어디로든 차를몰았다.
나는 늘 내 작은 볼보에 친구들을 태워 줬다. 무엇보다 그렇게하면 쿨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고, 운전하는 동안 친구들이 내가트는 음악을 꼼짝없이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좋았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항상 좁은 차 안에 빽빽이 포개 앉아 잔뜩 들뜬 마음으로 칼리지 애비뉴의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녔다. 대략 여섯 곡쯤 들으면 닿는 거리였다. 새로 만든 믹스 테이프를 끝까지 들을 요량으로 베이 브리지를 건너가 달랑 아이스크림만 사온 적도 있다. 한 친구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 우정을 표현하는 궁극의 행위라고나 할까- 돌아오던 어느 날 밤 880번도로 근처에서 24시 대형 마트를 발견하곤 한밤중에 메모장이나 속옷 같은 걸 사러 꼬박 30분을 운전하기도 했는데 그럴 가치는충분했다. 간혹 카세트테이프에서 긁히는 잡음과 함께 소리가 튀면 누군가 물었다. 이 노래 뭐야? 이미 수백 번은 들은 노래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듣는 그런 순간을, 나는 내내 고대했다. - P10

그 나이대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뭔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주차장에서 시간을 때우며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다음엔 어디로 갈지 궁리하곤 한다.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일어나고 있어서, 그곳으로 이끌어 줄 지도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 나이대에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일어나는 일들을 미처 다 기억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며 조바심치게 된다.
하루가 영원같이 느껴지고 1년이 지질학적인 한 시기 같다. 대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갔을 땐 어쩐지 이제는 전과 다른 침착함과 성숙함을 보여 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시절엔 늘 아주 들뜨거나 아주 가라앉았고 그도 아니면 세상 지루했다. 인류 역사상 그토록 지루해한 사람은 없었던 것마냥. 우리는 숨넘어갈 정도로웃어댔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알코올 중독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지경까지 술을 마셨다. 나는 내가 알코올 의존증일까 봐 늘 초조했다. 우리는 섬망 상태에 빠져 아주 늦게까지 밤을 새우며 온갖 이론들을 내놓았다. 그 정신으로 적어 놓을 생각까지는 못했다는 게 탈이었지만, 우리는 남은 평생 비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던 두고두고 회자될 사랑의 열병을 주기적으로앓았다.
한동안은 언젠가 자신이 유례없이 슬픈 이야기를 써나가게 되리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 P12

이민자의 자녀에게는 자신도 부모님도 모두 동화되어 가는 중이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나도 세월이 흐른 후 깨달았다. 어머니와 내가 이 매장 저 매장을 훑고 다니며 찾던 것은 가능한미래였다는 걸, 우리 둘 다 똑같은 패션과 트렌드에, 또 몇몇 언어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늦은 밤 아버지와 음반 매장에 다녀오던 그 나들이의 근본적인 목적은 통달이 아니라 발견이었다는 걸. 훗날 나는 완전한 동화란 움직이는 지평선을 향한 경주임을깨달았다. 동화의 이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억양은 어떻게 해도 완벽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계약으로 묶인 타협점이었다. 동화는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문제 그 자체였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나 고대에도 책은 그리 희귀한 상품은 아니었다. 잘 훈련된 노예가 방을 가득 채운 숙련된 필사가들에게 큰 소리로 원고를 읽어주면, 그들의 손에서 많은 수의 사본이 한꺼번에 생산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만 권의 책이 제작되고 또 수십만 권의 사본이 만들어져 세상으로 팔려나갔다.
상당히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주된 문화적 고민거리 중 하나는 이 끝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수많은 책을 대체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 쌓여 있는 책들의 무게로 신음하는 선반 위에 어떻게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수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많은 책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이것들이 언젠가는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번창하던 책 산업이 느닷없이 덜컥 종말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오랜 시간에 걸쳐 책 산업을 거대한 종말로 이끈 힘이 축적된 결과였다.
결국 한때는 견고해 보였던 것이 사실은 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영원할 것만 같던 것도 순간의 일이었을 뿐임이 밝혀졌다. 필사가 집단이 이와 같은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은 점점 일거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졌을 것이다. 필사작업의 대부분이 중단되었다. 간신히 화재를 피한 책들은 구멍 난 썩은 지붕 사이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에 조금씩 글자가 지워졌다. 그리고 남겨진 책들에는 벌레들이 "시간의 이빨로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나 벌레들은 이 거대한 소멸의 물결 속에서 가장 하찮은 일꾼이었을 뿐이다. 책 선반을 통째로 부수면서 한순간에 수많은 책을 한 줌의 먼지와 재로 만든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포조와 동료 책 사냥꾼들이 뭔가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이는 정말 행운이었다. - P110

히파티아의 죽음은 한 뛰어난 인물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포조가 발견한 문헌의 바탕에 깔려있던 지적 전통 전체에 대한 인상적인 조종(弔鐘)이었다.  모든 문헌, 모든 학문, 모든 사상을 집대성하겠다는 꿈을 담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더 이상 보호를 받는 시민사회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도서관이 사실상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세월이 계속되었다.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위대한 고전 문화의 유산도 실질적으로 흔적도 없이사라지게 되었다.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중대한 파괴행위가 있었다면, 분명히 어딘가에는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이 대체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이오?‘ 하고묻는다면, 빠른 속도로 이들을 집어삼켰을 전란의 화마와 오랜 시간에걸쳐 천천히 비밀스럽게 움직였을 책벌레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대답은 적어도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히파티아의 운명과 같았다. - P118

서로마 제국의 최후는 길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찾아왔다.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조용히 퇴위한 476년, 제국은 마침내 붕괴했다. 속주들을 차례로 탈취한 게르만족에게는 글을 읽고 쓰는 전통이없었다. 공공건물과 귀족의 빌라를 차지한 야만인들이 학문과 지식을 배척하며 잔혹하게 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물질적 자취를 보존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을 리도 없다. 빌라의 옛 소유주들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여 머나먼 농장으로 보내졌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짐을 꾸리며 책을 우선순위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정복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므로 혹여 그중에 글을 아는 자가 있다고 해도 굳이 이교도가 남긴 고대 문헌에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전쟁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에 비하면, 베수비오 화산은 고대 유산에 훨씬 더 자비로웠던 셈이다. - P119

기독교는 특별히 에피쿠로스 사상을 사악한 위협으로 생각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이 사멸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기독교적 이념의 기본 구조가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에는 항상 끝이 있다. "그[에피쿠로스]는 만약에  고통이 작은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되고, 만약 고통이 극심한 것이더라도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고난과 고통의 영원한 지속을 믿는 것이라고 맞섰다. 다른 한 기독교 교부는 이렇게 썼다.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완전히 파괴한다." 신의 섭리가 없어지면, "세상은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의 논객들은 에피쿠로스와 그 신봉자들에 대항하여 조롱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 경우에 이교 신들의 희화화는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신에게 희생 제의를 바치는 신앙을 철저하게 배하고 모든 고대 신화를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상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재정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합리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절제하는 삶을 사는 사도의 모습이 아니라 시끌벅적하고 자제라고는 모르는 팔스타프(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풍지적인 성격의 인물로 허풍이 심하고 방탕하다/역주) 같은 인물이어야만 했다.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물체는 해와 달인데, 인간이나 물가의 날벌레, 모래알과 마찬가지로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에는 상위 범주도 없으며 원자 간의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체(天體)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진공(眞空, void)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움직임도 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천체는 단순히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며, 원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서, 천체를 구성하는 원자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원리를 따른다.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 - P95

 "쾌락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라고 했을 때 에피쿠로스는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는 편지글 중 하나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방탕하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네." "생각 없이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면서……육욕적인 사랑에 탐닉하고…… 산해진미로 풍성한 호화로운 식탁을 즐기는것" 같은 욕망을 채우려는 과열된 시도는 쾌락을 지속시키는 열쇠인 마음의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너무나 끔찍한 악덕으로고통 받고 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책 중 하나에서 신봉자인 필로데모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작 가장 필수적인 욕망들은 마치 본성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하곤 한다." 쾌락으로 이끄는 가장 필수적인 이 욕구들은 대체 무엇인가? 필로데모스는 계속한다. "신중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는, 용감하고 온화하고 관대하게 살지 않고는, 벗을 사귀고 인류를 사랑하지 않고는" 쾌락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 P99

아무리 쾌락이 가장 절제되고 사려 깊은 언어로 정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쾌락이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적인 주장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여타 이교도나 그들의 대척점에 있던 유대인은 물론이고 후일의 기독교인 모두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충격을 받았다.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신과 조상들에 대한 경배는 어쩌고? 가족과 도시, 나아가서는 국가에 대한 봉사는? 성실하게 법과 명령을 따르는 것은? 덕이나 신을 따르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혐오의 형태를 수반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쾌락의 추구를 최고의 선으로 보는 에피쿠로스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가 직접 자신의 사상을 가르쳤던 때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의 사상이 던진 충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존슨의 작품과 같은 졸렬한 모조품 안에서 비틀린 에너지를 발산하며 살아남았다.
이런 모조품의 뒤에는 반쯤 숨겨진 공포가 자리한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사실은 호소력 있는 목표이며 충분히 인간의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원칙으로 성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성공한다면, 사회를 지탱하는 희생, 야망, 사회적 지위, 규율, 신성함 등으로 대표되는 유서 깊은 다른 원칙들 전체가 그 원칙들이 봉사해온 사회기관들과 함께 거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쾌락의 추구라는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을 괴이하고 관능적인 방종으로 몰고 갔던 것은―성,
권력, 돈, 때로는 존슨의 예에서처럼) 얼토당토않게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사치스러운 미식 같은 것에만 목을 맨다고 묘사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도전을 막기 위함이었다.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나 포조가 보기에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그가 보기에 수도원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힘든 자들을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약골,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자식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상인은 아둔하거나 무기력한 자식을 그곳에 내다버렸고 농부는 자기 힘으로 먹일 수 없는 남아도는 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곳을 이용했다.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들은 초창기의 좀더 금욕적이던 시대의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 딸린 정원이나 밭에서 최소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조가 판단하기에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게으름뱅이였다. 수도원의 두꺼운 외벽 뒤에 사는이 기생충들은 기도말만 웅얼거리며 수도원의 방대한 소유지를 경작한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입으로 살아갔다. 교회는 유력한 대지주였으며 종종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귀족보다도 더 부유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세속적인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유 토지의 소작문제나 그 밖의 권리나 특혜에 대해서 강한 목소리를 냈다. 독일 북부힐데스하임에 주교가 새로 선임되었을 때, 신임 주교는 교구의 도서관을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서고 대신 무기고로 안내를 받았는데, 벽에 걸린 창과 전투용 도끼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주교의 권리로 얻은, 그리고 주교로서 당신이 지켜야 할 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부유한 수도원의 구성원들이 이런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흐릿한 빛 속에 앉아 가만히 수입을 헤아리고 있노라면,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도-때로는 야만적인 힘을 써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 P50

 이미 초기 수도원 회칙에서부터 수도사들이 해야 할 노동의 구분은 가시화되어 있었다.ㅜ프랑스의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성 페레올루스(530-581)의 「회칙」에 따르면 "쟁기를 손에 쥐고 땅에 설 수 없는 자는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잡고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붙들고 쓸 수 없는 자는 쟁기라도 잡아야 했다). 드물게 뛰어난 능력-다른 수도사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름답고 명료한 손글씨로 정확하게 필사하는 능력을 갖춘 수도사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게르만족 전통이 있는 지역과 아일랜드에 존재했던 ‘속죄배상금(Wergeld)‘은 죽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살인에 대한 배상비용에 차별을 두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뛰어난 필사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있다. 평범한 촌부를 죽인 경우 배상금은 200실링으로 책정되었다. 낮은계급의 성직자는 300실링이었으며, 만약 그가 살해되던 때에 미사를 올리는 중이었다면 400실링으로 올랐다. 그리고 폭력의 행사로 필사가가살해된 경우,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배상금이 책정되었다.
생명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시대에 필사가에게 이렇게 높은 배상금이 지불된 것은 독서를 명하는 회칙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원이 필요한 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힘든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수도원 도서관도 고대 로마 제국의도서관이나 당시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존재했던 도서관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의 오랜 세월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책이나마 모을 수 있었던것은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고 불린 궁극의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를 하던 작업 공간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수도원에 자리가 생기는 대로 작업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설령 한기에 손가락이 곱아드는 곳이더라도 최소한 빛은 잘드는 곳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필사 목적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고 건축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중한 책을 수집하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훌륭한 수도원마다 깨끗한 유리창이 갖춰진 방을 준비하고 많게는 30명의 수도사가 한꺼번에 같이 앉아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들은 개인 책상에 앉아서 필사를 했고 때로는 그들의 집중을 돕기 위해서 책상 사이에 칸막이까지 설치되었다. - P52

결국 고대 사상을 담은 책들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양피지의 놀라운 내구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 책 사냥꾼이라면 잘 알고있었던 것처럼 제아무리 강한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반드시 생존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종종 칼, 브러시, 헝겊조각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세네카, 루크레티우스의 글이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다. 이런 작업은 분명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었겠지만, 실제로 자신이 지우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필사가가 있었다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원본의 잉크가 좀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면, 이런 작업을 거친후에도 여전히 지우려고 했던 원래 문헌의 내용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키케로의 「국가론(Dere publica)』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다. 우정에 관해서 논한 세네카의 서한을 필사한 단 하나뿐인 사본도 6세기 후반에 필사된 「구약성서」 아래에서 해독되었다. 이처럼 이상하게 글자가 중첩된 상태로 발견된 문헌들을 ‘다시 긁어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부른다. 고대의 몇몇 주요 작품들은팔림프세스트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알려지지 못했을 것도 있다. 그러나 중세의 그 누구도 수도사에게 필사한 글의 행간에 있는 글을 읽으라고권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58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포조가 한 다른 발견에의해서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중요성은 곧 퇴색하고 말 것이다. 위에 언급한 책들보다 더 오래된 작품으로 기원전 50년경에 저술되었으며,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철학자가 쓴 이 장관시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유명한 백과사전 「사물의 본성들에 관하여(De rerum naturis)』와 너무나 유사한 제목이다. 그러나 이 중세 수도사의 작품이 따분하고 관습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포조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가 동료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열심히 읽었던 오비디우스키케로 등 여러 다른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언급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조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도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용된 한두 줄의 토막글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조는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문장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곧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포조가 그 책을 풀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스스로 알고있었는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 - P66

로마 귀족은 헬레니즘 문화에 무절제하게 열광하는 것을 결코 존경받을 만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그리스어에 능통하거나 그리스 예술을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일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견지하곤 했다. 그러나 신전을 비롯한 로마의 공공장소를 근사하게 장식했던 것은 실상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점령지로부터 약탈해온 우아한 그리스 조각상들이었다. 전장을 누비는 로마 장군들의 빌라 역시 귀한 그리스 꽃병이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런 석조나 토기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로마에 침투해 있던 그리스 문명의 이기(利器)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바로 책이었다. 군사국가답게 로마가 수집한 첫 대량 도서 역시 승전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이었다.  - P78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유적의 발굴조사에서는 기부자를 기념하는 명관들과 함께 조각상, 필기용 책상, 파피루스 두루마리 보관용 선반, 번호가 매겨진 책장이 발견되었다. 이런 책장들은 양피지를 묶어 만든 책이나 점차 두루마리의 대체제로 떠오르던 코덱스 형태의 책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또한 도서관 벽 위에 휘갈겨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도서관이 오늘날의 공공도서관과 여러모로 비슷한 모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서관은 공공자산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물론, 도서관은 어떤 모습이어야한다는 우리의 관념도 수천 년 전 로마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P81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복잡한 문제를 혼자 고민하는 ‘고독한천재‘를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적 삶‘ 하면 떠오르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자신만의 비밀 은거지에 머물면서 모든 것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데카르트나 조용히 렌즈를 갈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던 파문당한 스피노자의 모습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지식인의 이상형의 변화는 문화적 특권에 일어난 의미심장한 변화에기초하고 있다. 변화는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초기 기독교인은 은둔생활을 하며 의도적으로 이교도가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이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사막에서 생활한 성 안토니우스(250-356) 나 좁은 기둥에 올라앉아 수도했다는 성 시메온(390-459)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현대의 연구가 밝혔듯이, 이들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이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종종 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이미지 혹은 그들 주변에 유행하게 된 이미지는 사회성이 배제된 극단적인 고립의 이미지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는 이것은 낯선 것이었다. 물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용한 환경과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므로, 그리스, 로마의 시인과 철학자도 주기적으로 시끄러운 세상사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지향했던 이미지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을 다른 양치기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또다른 양치기로 묘사했다. 철학자는 스스로를 종종 며칠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는 긴 대화를 주고받는 자로 묘사했다. 일상의 산란함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완전히 고립된 자기만의 작은 공간으로 물러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친구들과 정원에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은 곧 단체생활에의 참여를 의미했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 선택한 활동은 앞선 시대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대화였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