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는 일이었다. 그래, 나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내육신은 다행스럽게도, 여자와의 만남이 나에게 안겨 주던 그죄 많고 덧없는 쾌락을 잊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그 여자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아, 내 영혼은 그 추억을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기는커녕 내 가슴은 창조의 광영을 입은 지복의 얼굴 앞에서 그렇듯이 쿵쾅거리기까지 했으니 이를 어쩔꼬.
이럴 수가 있는가! 저 자신의 육신을 죄인들에게 판, 저가련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고, 음탕하기도 한 여자, 제 육신을 내어 놓고 값을 쳐 받은, 제 자매들처럼 나약한 저 하와의딸이 저주스러웠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었다. 자꾸만 기이하고도 눈부신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내지성은, 그 여자가 죄악의 그릇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내 육신이 그 여자를 영광스러운 것의 그릇으로 느끼는 것을 어쩌랴! 그때의 내 느낌을 여기에 고스란히전하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죄악의 올가미에 걸린 채 문득그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쓸 수밖에는 없다. 내 지성은 아니라고 하는데도 내 가슴은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하던 그 형상이 불쑥 나타나 주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눈을 부려 일하는 농노들 무리 사이, 오두막 모퉁이와 창고 그늘을 살피게 한 것을 어쩌랴! 아, 나는 왜 여기에다 진실을 쓰려하지 않는가? 나는 왜 내 진실에다 너울을 씌우려 하는가! 나는 그 여자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보았 - P514

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렇다. 나는, 추위에 몸이 곱아진 참새가 피난처를 찾아 자리를 뜨는 바람에 가엾게 떨리는 마른가지에서도 그 여자를 보았고, 방황하는 내 앞을 지나면서우는 어린양의 울음소리에서도 그 여자의 음성을 들었다. 만물이 내 귀에다 대고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어했다. 동시에 나는다시 그 여자를 볼 수 없다는 것, 다시 그 여자 옆에 누울 수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도 나는그날 아침, 내 가슴을 채우던 그 환희의 순간을 마음으로 누리고, 비록 영원히 나와는 아득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여자를 내 마음으로 느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다른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 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巡幸)의 표징이된다. 그 서책에서 그렇듯이 그날 아침 내가 만난 만물은 나에게, 그날 주방의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싫지 않았다. 무슨까닭인가! 나는 비록 하찮은 존재이기는 하나, 세상을 향하여 창조주의 권능과 자비와 지혜를 증거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날 아침 만물은 나에게 그 여자의 모습을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비록 죄인이기는 하나 그 여자역시 위대한 창조의 이야기가 실린 서책의 한 장(章)이요, 우주가 음송하는 위대한 시편의 한 구절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여자 역시 한 자루 피리처럼 우주를 조화와 화음으로 채우는 하나님 뜻의 한 자락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으면서, 내 뉸앞에 보이는 만물의 형상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 원근의 풍경에서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탐닉했다. - P5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찬과

윌리엄 수도사와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검사하다가, 익사체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혀가 까맣게 변색되어 있는것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독극물 및 과거에 있었던 독극물도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수도원장에게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이야기, 성무 공과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 이야기가퍼져 수도원 전체가 벌집 쑤신 듯했다는 이야기, 수도사들의 면면에서는 공포와 슬픔과 당혹의 그림자가 엿보였고, 불목하니들은 성호를 그으면서 축귀(逐鬼)하느라고 주문을 외고다니더라는 이야기까지 조목조목 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날의 조과 성무가 정례에 따라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어쨌는지,
또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누구누구가 거기에 참석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윌리엄 수도사와 세베리노의 뒤만 따라다녔다.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수습하여 시약소 탁자에다 눕혀 둔 참이었다. - P4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바토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살바토레야말로 뚜렌느의 절름발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뚜렌느의 절름발이들은 마르티누스 성인의 시신을 몹시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마르티누스 성인의 은총이 이들 절름발이에 미치면서 절던 다리가 온전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면 절름발이들은 절던 다리가 온전해지는데 왜 마르티누스 성인의 은총을 두려워했을까? 이유인즉, 저는 다리가 수입원인데 다리가 온전해지면 그만 수입원이 온데간데없어지기 때문이란다. 절름발이들은 성인의 은총을 피하여 국경으로 도망쳤고, 성인의 은총은 이들을 쫓아 무자비하게(?) 성치 못한 다리를 낫게 해줌으로써 이들의 사악한 행위를 벌했다는 전설이다. - P359

「왜 유태인들을 죽인 겁니까?」내가 살바토레에게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살바토레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살바토레의 말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기독교인의 숙적이고, 그들의 재물은가난한 기독교인들로부터 긁어 들인 것이었다. 나는 살바토레에게, 영주와 주교들 역시 세수(稅收)와 십일조로 재산을늘이는데 재산을 늘인다고 해서 유독 유태인만 공격하는 것은 적을 제대로 짚어 내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말에 살바토레는, 마땅히 쳐부숴야 할 적은 영주와 주교일 것이나 그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좀 약한 적을 선택할 수도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옳거니, 평신도가, 부정적인의미로 <평신도>라고 불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평신도들에게는 이성이 없어서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인데, 이를 안 지방의 토호나 영주들은 이 빠스뚜로로부터 제 재산 - P362

이 유린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머지 슬며시 이 무리의 지도자들에게, 공격하여야 마땅한 부자는 오직 유태인 부자뿐이라는 생각을 주입했던 것이었다.
나는 살바토레에게, 대중에게 유태인을 공격하자는 생각을 주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살바토레는 내가 요구하는 정답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나는, 다수의 대중이 모이고 어떤 요구와 약속으로 들떠 버리면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무리는 그 말의 책임을 따지지 못하게 된다고 믿는다.
내가 알기로 비록 무리가 오합지중이었다고는 하나 그 지도자는 수도원이나 교구 부속 학교에서 공부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천한 농민이나 목동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번역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 자체는 토호나 영주의 언어와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무리의 지도자와 토호 및 영주는 한통속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리에게 유태인이 손쉬운 상대였던 것은, 교황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유태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적절한 비유가 못 될 것 같구나.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한다. 너무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맞기 때문에 강은 더 이상 제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즉, 강의 고유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主流)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것이다.」「제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강은 하느님의 도성이거나 의(義)의 왕국입니다. 이 강은 지복 천년의 땅으로 흐르나 불확실한 세상을 흐르기 때문에온전하게는 흐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강은 가짜 선지자와 진짜 선지자를 낳으면서 아마겟돈의 전쟁이 벌어질 대평원으로 흘러갑니다.」「거기까지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수세기 동안 우리 모듬살이의 몸이기도 했던 교회의 몸, 즉 하느님의 백성이 너무 비대하고, 그 관심하는 영역이 넓어져, 지나온 길에모든 나라의 찌꺼기를 운반하느라고 그 순수성을 상실했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삼각주의 지류는, 되도록 빠른 시간에 바다에 다다르는 순간, 즉 정화(淨化)의 순간에 이르려는 강의 기도(企圖)를 반영한다. 나는 비유를 통하여 너에게, - P373

강이 그렇지 않아도 온전하지 못한 판에 여기에 이단의 교파와 개혁의 운동이 가세하면서 아주 난마(亂)가 되고 말았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내 하잘것없는 비유에 힘으로강둑을 쌓으려 하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는 한 인간의모습을 덧붙여도 좋겠다. 삼각주의 지류 중에는 중간에서 막혀 버리는 것도 있고 인공의 운하를 통하여 다시 강에 이르는 것도 있고, 처음 그대로 흐르는 것도 있다. 무슨 까닭이더냐? 모든 것을 구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강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흐르는 것이다. 제 흐를 길을 제대로 알 수만 있다면, 이로써 제대로 흐를 수만 있다면 물의 일부를 잃은들 어떠랴.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내게는 비유로 말하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이 강 이야기는 잊어버리거라. 대신, 네가말한 그 많은 개혁 운동 세력은 5백 년 전에 태동하였다가 소멸되어 버리더니 근자에 들어 새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만 명심하여라.
그러나 이단의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이러한 개혁 운동세력의 이름이 등장합니다.」「그것은 사실이다. 이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발흥하고 그렇게 소멸하는 것이다」 - P374

네가 내 말귀를 알아먹었으니, 네 허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버림받은 문둥이는 모든 것을 저희들의 폐허로끌어들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버림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사악해진다. 사람들이 그들을 일러, 인간의 파멸을 바라는 - P379

유령의 무리라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인간의 모듬살이로부터 소외된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아시고 먼저 그들에게로 가시어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하신 것이다. 버림받은 자가 그 육신을 온전하게 회복하여야 하느님의 백성이 변용(容)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를 말씀하시지만 제가듣기에는 두 가지의 버림받은 자들이 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단적인 개혁 운동가들은 문둥이 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무리라고 하는 것은, 일련의 동심원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무리가 가장 조밀하게 분포하는 곳이 있고, 이에 연접하는 외변이 있는 것이다. 문둥이는 소외의 상징과 같은 것.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이 점을 미리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문둥이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도와주는 데 그쳤다면 그것이야 여느 박애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분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셨다. 성인께서 새들에게 설교하셨다는 이야기. 혹 들은 적이 있느냐?」「네, 참으로 아름다운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가녀린 피조물과 함께하신 성인을 받들어 섬기고 있습니다.」허나 네가 들은 이야기는 잘못 전해진 것이야.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라면 근자에 들어 교단이 윤색해서 퍼뜨린 것이거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도시의 시민들과 행정관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시다가 그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걸 아시고는 묘지로 가시어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 까치, 매 같은 육식조를 상대로 설교를 시작하시었다.」

「사부님,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밖에서 장서관을 보시고 이렇듯이 수수께끼를 풀어 내시는 사부님께서 안에서는 풀어 내시지 못했으니까요.」「하느님께서 세상을 아시는 것도 이와 같을 거야. 만드시기 전에 그분 뜻으로 이리저리 재셨을 터이니... 그러나 우리는 이 안에 살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나서 보았기 때문에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일 게다.」「밖에서 보아야 사물을 꿰뚫어 보기에 용이하다는 말씀이신지요?」「예술이 창조한 것은 그렇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 일을 이룬 장인의 마음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피조물은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마음과 비슷한 장인의 마음이빚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410

다른 서책을 펼쳤다. 히스파니아에서 만들어진 서책인 것같았다. 색채가 몹시 강렬해서 붉은 색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요한의 묵시록이었다. 펴고 보니 전날 밤에 본 것과 똑같은 <물리에르아믹타 솔레>, 즉 <태양을 입은 여자> 그림이 보였다. 그러나 전날 밤에 본 것과 똑같은 책은 아니었다. 우선 채식부터가달랐다. 채식에는 여성의 형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그려진 여자의 얼굴과 가슴과 허벅지를 우베르티노수도사와 함께 보았던 성모상에 견주어 보았다. 선(線)은 달랐지만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나는 형상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몇 쪽을 더 넘겨 보았다. 다른 여자, 바빌론의 창부가 나왔다. 나는, 앞의 여자는 미덕의 용기, 뒤의 여자는 악덕의 그릇...... 이런 생각을 하다말고는 화들짝 놀랐다. 내 내부가 근질거리면서 흥분이 내몸을 스멀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교회에서 보았던 성모상이 아름다운 마르게리타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내가 저주를 받았구나....... 내가 미치고 말았구 - P451

내가 하느님을 모독했던 것일까? 했다면 그때였을까? 지금일까? 죽음에 대한 미켈레 수도사의 열망, 그를 태우는 불길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정체 모를 황홀, 여자와 함께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육체적인 결합에의 욕망, 약간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저 더할 나위 없는 부끄러움, 그리고 영원의 삶이라는 명분 아래 성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갔던 저 파멸에의 욕망 사이에 닮은 데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의미가 무궁한 사상(事象)을 단순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일까? 학자 중의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사는, 소박한 웅변의 형태가 되어 있으면 되어 있을수록, 언어를 떠난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은유는 그 참뜻을 그만큼 쉽게 드러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꽃에의 사랑과 심연에의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은유일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랑이 죽음의 사랑, 죄악에의 사랑을 은유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 사자와 뱀이,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유가 될 수도있고 악마의 은유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교부(敎父)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러한 상징과 은유를 해석할 수 없다는데 있다. 나를 괴롭힌 것은, 내 영혼이 순종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권위auctoritas>가 내게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의심의 불길이 나를 태우고 있었던 것은, 불길이 영원한 진리의상징으로 보이기도 하고 나를 파멸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 P463

첫 욕조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휘장에 가려진 마지막 욕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옆에는 옷가지가 떨어져있었다. 등잔불에 얼핏 보기에는 욕조의 수면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등잔불이 바닥을 비추었을 때는 벌거벗은 시체 그림자가 하나 일렁거렸다. 우리는 시체를끌어올렸다. 베렝가리오였다. 사부님은, <익사자의 얼굴이란 이런 것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시체는 형편없이 붙어 있었다. 사타구니 돌기만 없었다면 영락없는 여자의 몸이었다. 털 오라기 하나 없는 몸은 그만큼 희고 연해 보였다. 몸이 떨려 왔다. 사부님이 시신을 축복할 동안 나는 성호를 그렸다. - P4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에게는 그런 괴이한 사건이 수도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까닭인즉, 수도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바로 학문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고, 수도원 장서관이란곧 천상의 예루살렘이자,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와 하데스의 변경에 가로놓인 지하 세계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모두 장서관에, 장서관의 규칙과 금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서관과 더불어, 장서관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그들 모두가 때가 이르기만 하면 장서관의 철통같은 방어막에 반기를 들 음흉한 꿈을 품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어째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되며, 이런 사람들이 어째서 자기네 장서관 비밀에 접근하는 자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는 지적인 해갈에의 유혹이 있었고, 지적인 긍지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단을 세운 분들이 상상했던 필사사(筆寫士) 수도사들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필사사 수도사들은 하느님의 뜻에 갇혀 의미도 모르는 채 그저 베끼고, 기도하듯이 쓰고, 쓰는 듯이 기도했을 뿐이다. 이 수도사들이 왜 필사사의 본분을 벗어났던가? 이것이 어찌 우리 베네딕트 교단만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보냐.
대체 와니 수도원장은 언감생우리 - P3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듣는 모든 것은 불완전한 번역이다. 나의 귓속에서는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세계가 대화하고 서로 얽힌다.
내 마음은 반발한다. 소리는 소리일 뿐 아닌가? 나는 뚫린 귀로 세상과 연결되어 주변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있지 않나?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세상의 번역이며 모든 번역가에게는 나름의 재능, 오류, 견해가 있다. 진료실에 앉아 그래프의 스파이크를 응시하면서 달팽이관 털세포의 재잘거림을 본다. 해석의 숨겨진 사슬을 일부나마 대면한다. 외부의 소리에서 내부의 지각에 이르는 경로의 단계 하나하나에서 우리 몸은 편집하고 왜곡한다.  - P49

고리 중에는 우리 달팽이관의 범위릂벗어난 것도 많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기껏해야 약 20~2만 헤르츠(음파가 1초 동안 진동하는 횟수)에 불과하다. 일부 고래와 코끼리는 최저 14헤르츠까지 들을 수 있으며 비둘기는 최저 0.5 헤르츠까지도 듣는다. 쇠돌고래는 최고 14만 헤르츠까지 들으며 일부 박쥐는 최고 20만 헤르츠까지도 듣는다.개는 최고 4만 헤르츠, 고양이는 최고 8만 헤르츠까지 듣는다. 생쥐와 쥐는 최고 9만 헤르츠로 재잘대고 노래한다. 동물이 듣는 가장 낮은소리가 내 발이고 가장 높은 소리가 내 정수리라면 우리 인간이 듣는 소리는 내 발바닥 피부 바로 위에서 등산화 맨 위까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포유류와 비교하자면 인간과 우리의 영장류 사촌들은 좁디좁은 청각 세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셈이다.
뇌운(雲), 바다 폭풍, 지향(地)‘, 화산이 노래하고 신음할 때는 한결같이 최저 10분의 1헤르츠의 음파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너무 낮아서 우리 귀로는 감지할 수 없다. 이렇게 낮은 소리는 수백 킬로미터를이동하며 바다, 하늘, 땅의 움직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리들을 들을 수 없기에 지평선 너머에서 무엇이 요동치는지 알지 못하는 소리 세계에서 살아간다.
주파수 범위의 반대쪽 끝에서도 비슷한 제약이 작용한다. 고주파는 공기 중에서 금세 약해지며 짧은 거리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곤충의 새된 노랫소리, 박쥐의 울음소리,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식물의 잎맥을 따라 물이 졸졸거리는 소리는 우리의 귀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 한계에는 뼈아픈 구석이 있다. 세상이 말을 건네고 있는데도 우리의 몸은 주변의 소리를 대부분 듣지 못하니 말이다.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