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는 일이었다. 그래, 나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내육신은 다행스럽게도, 여자와의 만남이 나에게 안겨 주던 그죄 많고 덧없는 쾌락을 잊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그 여자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아, 내 영혼은 그 추억을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기는커녕 내 가슴은 창조의 광영을 입은 지복의 얼굴 앞에서 그렇듯이 쿵쾅거리기까지 했으니 이를 어쩔꼬. 이럴 수가 있는가! 저 자신의 육신을 죄인들에게 판, 저가련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고, 음탕하기도 한 여자, 제 육신을 내어 놓고 값을 쳐 받은, 제 자매들처럼 나약한 저 하와의딸이 저주스러웠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었다. 자꾸만 기이하고도 눈부신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내지성은, 그 여자가 죄악의 그릇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내 육신이 그 여자를 영광스러운 것의 그릇으로 느끼는 것을 어쩌랴! 그때의 내 느낌을 여기에 고스란히전하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죄악의 올가미에 걸린 채 문득그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쓸 수밖에는 없다. 내 지성은 아니라고 하는데도 내 가슴은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하던 그 형상이 불쑥 나타나 주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눈을 부려 일하는 농노들 무리 사이, 오두막 모퉁이와 창고 그늘을 살피게 한 것을 어쩌랴! 아, 나는 왜 여기에다 진실을 쓰려하지 않는가? 나는 왜 내 진실에다 너울을 씌우려 하는가! 나는 그 여자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보았 - P514
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렇다. 나는, 추위에 몸이 곱아진 참새가 피난처를 찾아 자리를 뜨는 바람에 가엾게 떨리는 마른가지에서도 그 여자를 보았고, 방황하는 내 앞을 지나면서우는 어린양의 울음소리에서도 그 여자의 음성을 들었다. 만물이 내 귀에다 대고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어했다. 동시에 나는다시 그 여자를 볼 수 없다는 것, 다시 그 여자 옆에 누울 수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도 나는그날 아침, 내 가슴을 채우던 그 환희의 순간을 마음으로 누리고, 비록 영원히 나와는 아득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여자를 내 마음으로 느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다른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 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巡幸)의 표징이된다. 그 서책에서 그렇듯이 그날 아침 내가 만난 만물은 나에게, 그날 주방의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싫지 않았다. 무슨까닭인가! 나는 비록 하찮은 존재이기는 하나, 세상을 향하여 창조주의 권능과 자비와 지혜를 증거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날 아침 만물은 나에게 그 여자의 모습을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비록 죄인이기는 하나 그 여자역시 위대한 창조의 이야기가 실린 서책의 한 장(章)이요, 우주가 음송하는 위대한 시편의 한 구절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여자 역시 한 자루 피리처럼 우주를 조화와 화음으로 채우는 하나님 뜻의 한 자락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으면서, 내 뉸앞에 보이는 만물의 형상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 원근의 풍경에서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탐닉했다. -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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