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 말을 들은 학생은 은재를 비롯한 서너 명뿐이었다.
스무 명은 엎드려 자고, 다섯 명은 이어폰을 꽂고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은 아무 제재도 하지 않았으며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충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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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발화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1991년 12월 전까지 50년 동안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트라우마로 보이던 것이 한국의 국가적 의식에서 존재감을갖게 되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은 한국사에서 은폐되었던 잔혹 행위를 폭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하거나 그런 터무니없는 행위가 일어났음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이는 옛 위안부여성의 침묵에 더욱 부채질을 했고, 이와 함께 이런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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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주, 양키 갈보. 서양 공주.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미군 노리개. UN 숙녀. 술집 여자. 유흥업소 여자, 위안부, 신세망친 여자. 위안부였던 여자. 한때 위안부라고 불렸던 여자. 위안부의 딸.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종종 한 가족 전체의 역사를 지배하는 단어들" "유령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언급 불가능한 단어들이다.‘ 문자 그대로
‘서양공주‘를 의미하는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대개의 경우 이는미군을 상대하는 매춘 여성을 일컫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정치적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왔다. 너무 많은 의미로 가득한이 단어는 그와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에게는 발화할 수 없는 ‘유령 같은phantomogenic 단어다." 수치심과 비밀을 통해 유령을 길러내는 그 과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양공주를 중심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속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미군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여성은 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미군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그들은 자신을 피하는 바로 그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하는 착실한 딸이자, 가족의 희망찬 미래를 짊어진 군인의 아내이며, 자신의 과거를 자식들에게 숨기며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이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하는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탄생한 인물이다. 결혼을 통해서든 매춘을 통해서든, 미국인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한인 여성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로 출현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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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하며 여성들을 성병 ‘치료 시설‘에 가두고 강제로 고용량의페니실린을 주사하여 때로는 쇼크,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함으로써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성들은 짐승처럼 수용되었고소위 치료를 받고 나면 두 팔이 원숭이처럼 옆으로 늘어졌기때문에 이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몽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통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하우스‘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당한 여성들을 기리는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천막농성이 78일째 되던 날과 313일째 되던 날 그곳을방문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활동가들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과 그후과가 20~30년 전만큼이나 오늘날에도 건재함을 상기시킨다.
트라우마로 얼룩진 자신들의 역사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옛기지촌 여성들에게, 동두천의 활동가들에게, 그리고 배회당하는 우리의 과거를 기리기 위해 연대하는 모든 공동체에 이 책을 바친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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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2023년 말 도서출판 동녘이 이 책을 한국어로 출간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건 15년 전이었고, 내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이 책의 모태가 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한건 25년 전인 시점이었다. 25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있었을 텐데 한국에서 이 책이 여전히 유의미할까 싶었다. - P9

나는 새로운 서사 쓰기라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건 절대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진실에 가까운역사다. 고통스럽고 추잡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에는 모든 버전의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있게 하는, 그리하여 다른 종류의 진실에 가까운역사-침묵당한 자들이 목소리를 찾고 지워진 자들이 가시성을획득하게 되는 역사로 이어지는 급진적인 개방성이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인정하지 않든, 사회 세계 social world는 유령에의해 세대를 가로질러 대물림되는 말해지지 않은 강력한 기억을통해 움직임을 얻는다.
내가 대학원생이던 시절 주류 사회학자들은 "경험적 근거가 전무하다"며 내 프로젝트를 일축했지만, 그로부터수십 년이 흘러 과학자들은 후성유전학 연구를 통해 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는 말로 내 주장을 뒷받침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 대학원생 시절 나는 가족의 트라우마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트라우마가 내 몸의 모든 세포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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