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에 꾸며 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진은 그 결점을 탐지했다.
"한 친구? 그래, 자네의 많은 친구들 중 한 명 말이지. 나를 불렀어야지."
"왜?"
"이 사진을 누가 찍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누군가는 그 사진을 찍어야 했다. 너무 놀라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만 부외자였어. 유전학 강사. 대단한 밤이었지. 모든 사람이퍼마셨고, 모두 파트너가 없었어.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자리였어."
진은 사진에서 얼굴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늘 남성들에게 집중했고, 로지의 어머니를 찾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진이 그녀를 가리켜 주자 알아보기 쉬웠다. 머리 색깔은 로지가 더 인상적이었지만, 붉은 머리를 포함해 닮은 점이 명백했다.
그녀는 아이작 에슬러와 제프리 케이스 사이에 서 있었다. 아이작 에슬러의 결혼식 사진에서처럼, 케이스는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버나뎃 오코너."
진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일랜드 인이었지."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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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언급했듯,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방침에 힘입어 조선산업 외에도 기계공업, 자동차공업 단지들이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 들어섰다. 박정희정권 초기였던 1960년대의 산업 정책은 경공업 활성화를 통해 자립 경제를 수립하는 것을 방향으로 삼았다. 이른바 수입대체 산업화로, 삼성이 초창기에 영위했던 비료, 섬유 등의 산업이 당시 주력 산업이었다. 국내 수요를 수입이 아닌 국산품제조를 통해 맞추면서 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IMF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을 통해 자금을 원조받다가상업 ‘차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면서 외화자금으로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경공업은 해외에서 자재를 수입해야만 했기 때문에 외화유출이 많았다.
국민국가의 재정 측면에서도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수출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 등으로 인해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도 어려워져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 돌파구로 마련한 것이 바로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었다. 정부는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 산업 등 총 6개 산업을 통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를 수립해 수출액 연간 100만달성을 목표하겠다고 선언했다. - P119

앞서 ‘암묵지‘와 ‘형식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작업장 엔지니어의 설계와 선박에 대한 지식은 주로 ‘암묵지‘,
즉 선배에게 전수받은 노하우에 가까웠다. 사내 교육훈련을통해 도면을 그리는 방법, 배의 특성에 대해 배웠지만 그것들을 자신의 새로운 지식으로 축적하고 이론적으로 검증하는것보다는 선배가 하는 방식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였던 셈이다. 하지만 랩실 엔지니어들은 공학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설계를 생각했다. 비록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으로 해양플랜트 설계를 익히고 있었지만, 그들은 프로젝트를 마칠 때마다 정확한 ‘히스토리‘를 구축해 ‘백서‘로 만들고싶어 했다. 백서를 토대로 다음번에는시행착오를 방지하고자 했다. 모든 지식을 사내에 축적할 수있는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실제 기록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후배들은 MSPMS Project나 프리마베라 Primavera 등의 스케줄링 프로그램을 통한 촘촘한 관리를 기대했으나, 그런 관리 방식은 모든 직무와 계층에 전파되기 힘들었다.
해양플랜트 프로젝트 한 기가 끝나갈 때가 되면 엔지니어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복수로 투입되었다. A 드릴십공정이 90% 정도 완료될 때쯤에, B 리그선 담당자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호선의 일정이 촉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런 방침은 엔지니어들을 이전 작업에서 익힌 모든 것들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으로몰아넣었다. 기록화는 흐지부지되기 일쑤였고, 신입사원이 다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선배의 경험이라는 암묵지뿐이었다. - P145

조선 3사의 서울 진출은 바로 이런 ‘인재‘들을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인력 유출‘에 대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지책 정도로 볼 수 있다. 거제도 근무를 시켜도 거제도 사람이 되지 않고 기어이 셔틀버스를 타고 매주 상경하는 일만 없었어도 이런 방법까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선박 설계전성기, 특히나 중형 선박 전성기 때만 해도 딱히 그렇게 할필요는 없었다. 현장에서 기술을 숙련하는 것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중요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LNGC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처럼 연구개발과 정교한 기본설계가 필요한 선박이 등장하면서부터 ‘똑똑한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는 점점 증가했다. 해양플랜트에 집중하던 시절에는 아예 조선 3사 사이에 우수한 공대 출신을 ‘입도선매하려는 경쟁이불불을 지경이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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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세계 경영을 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인프라와 강선steel vessel 건조를 통해 1950년대까지 조선산업을 이끌었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은 상대적 저임금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1970년대 유럽이 쥐고 있던 조선산업의 패권을 아시아로 가져온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상대적 저임금이라는 이점 외에도 다양한 혁신을 통해 세계를 제패했다. 일본은 우선 용접을 재발견했다. 리벳이라는 나사를 통해 강판을 조이는 방식이 아닌, 용접을 통해 강판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대형 도크장에서 크레인을 활용한 탑재 방식을 활용해 공정 속도와 효율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도요타 Toyota 자동차의생산 혁신 기법으로 유명한 적기 납기(JIT, Just-In-Time)나 미세 작업 관리를 도입해 이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1990년대 세계 조선산업의 패권을 획득한 한국의 강점은 무엇이었을까. 임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산업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저임금 노동이 유리하게 작용한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기술 면에서도 세계를제패했다. 일본의 블록 탑재 공법을 향상해 블록의 대형화와모듈화를 이끌었다. 또한 옥외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던 작업들 중 선행 작업들을 실내 공장으로 옮겨왔을 뿐 아니라 자동화와 기계화를 달성했다. 야드 공간을 많이 잡아먹는 블록들을 외부 블록 공장에서 조립을 마쳐 운송해 최종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생산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 P45

해양플랜트 붐이 일었던 2000년대 중반부터 거제로이주한 젊은 엔지니어들과 사무직들은 2010년대에 새로 조성한 아주동에 자리를 잡았다. 거제를 처음 방문해 장승포를 돌아다니다보면 1970~1980년대를, 옥포를 다니다 보면1990~2000년대를, 아주동과 고현, 수월과 장평을 돌아다니면 2010년대를 느낄 수 있다. 장승포, 옥포의 식당들 다수가부서 회식을 할 수 있는 좌식 룸을 보유하고 있다면, 아동의식당들은 4인이 앉아서 오붓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개인주의를 탑재한 20~30대들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에서 ‘회사가족들‘과 끈끈한 연대를 맺고 살던 시대에서, 그런 회식이 싫어 삼삼오오 모여 개인으로 조용히 살아가려는 시대로 넘어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 P49

산업도시 거제의 기적을 만든 또 다른 주인공은 노동운동이다. 1987년 8월 10일, 대우조선에 초대 노동조합 집행부가 결성되었다. 노동자들은 조회나 두발 단속같이 신변을단속하는 행위나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 조기 출근을 하는 것,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 등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시정을 요구했다. 또한 단결권 인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연이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성장한 기업이 민주노조 운동을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우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대우조선의 노조 탄압은 이석규, 박진석이라는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당시 노동조합 담당 변호사는 16대 대통령 노무현이었고, 진상규명위원회의 변호사는 19대 대통령 문재인이었다.) - P53

작업복은 ‘중공업 가족‘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언젠가 상사에게 물었다. "왜 퇴근하고도 작업복을 입나요? 현대중공업) 다니는 친구는 퇴근하면 다들 사복 입는다던데?" 그 상사는 "야, 나가면 다 우리 식구고 얼마나 좋냐?" 하고 답했다. 나도 곧 작업복이 더 편해졌다. 작업복을 입고 소개팅에 나갔고, 데이트를 할 때도 어색하게 느끼지 않게 됐다. 잦은 회식과 직원들을 ‘우리 식구‘라고 부르는 문화에 저항했지만, 곧 ‘식구‘에 뿌듯함을 느꼈다. - P59

이처럼 ‘대우 가족‘ ‘현대 가족‘ ‘삼성 가족‘은 어느 날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가족‘들은 공동체에 대한 노동자들의 생각과 더불어 회사의 적극적인 기업문화 활동을통해 주조되었다. 비슷하게 벌고 정년을 보장받는 모든 직원들은 사택이나 근처 아파트에 살고, 그룹의 계열사가 생산하는 비슷한 자가용을 비슷한 시기에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직원들은 일련의 동질성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중공업 가족이되어갔다. 대우조선이 운영하는 대우초등학교, 거제중학교,
거제고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아빠와 똑같은 식단으로 식사한다. 웰리브라는 자회사가 야드와 학교에 동시에 급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P65

2016년 거제, 그리고 그 몇 년 전 울산에 구조조정의 여파가 몰아닥쳤을 때 그녀들은 전체 인적 구조조정의
‘숫자‘를 맞추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1,000명이 넘는 여성 사무보조직들은 부지불식간에 회사를 등지게 된다.
<밥.꽃.양>(2001)이라는 독립영화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바 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이 벌어질 때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을 지키기 위한 대가로 당시까지 직영으로운영하던 식당을 외주화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해고당했다. 이들은 남성들처럼 ‘생계 부양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땐뽀걸즈‘였다가 사무보조로 취업해 10년을 넘게 회사를 다닌 여성노동자들도 같은 이유로 2015년 명예퇴직했다. 2000년대 초중반 농협에서도 부부가 직원이면 둘 중 여성 노동자가 명예퇴직으로 내몰렸다. - P92

하지만 개인주의자로 자란 젊은 세대의 청년들은 그런문화가 낯설기만 하다. 언젠가 "거리에 나가면 다 우리 식구들인데 얼마나 좋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을피해 숨을 데 하나 없이, 하루를 온전히 회사 사람들과 보내는 것도 모자라 퇴근 후 늦은 밤까지 함께 있어야 하는 문화.
퇴근하고 혼자 커피 한잔을 하며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공부를 하는 ‘샐러던트의 자리는 없고, 회사 상사에게서 벗어나 다른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과 편하게 ‘뒷담화‘를할 수 있는 소박한 술자리도 갖기 어렵다. 서울에서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었던 익명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본인의 의지로 그런 ‘단순한 삶‘
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런 삶에 함께 동참할 사람, 즉 중공업 가족의 반려자가 될 상대를 찾기 어렵다는 또 다른 난관이기다리고 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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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의 아침은 언제나 국민체조와 함께 시작된다. 아침 근1무는 8시부터이지만, 조선소 사람들의 아침은 7시에 시작된다. 조선소 각 구역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 종일착용한 안전벨트 · 안전화 · 안전모를 챙긴다. 7시 45분, 국민체조 음악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따라 하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안전 구호를 외친다. "철저한~ 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 좋아! 안전!"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도크로, 안벽으로 향한다. 소리가 야드를 채우기 시작한다.  - P9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몇 년 후 거제도에서 올라온 후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거제도에 있는 대우 조선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아니, 무슨 촌스럽게 아빠가 다니는 회사 이름까지 말할까?‘하고 비웃는 마음이들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사실 당시 대우조선은 굉장한 실적을 내고 있었고 조선업은 초호황기의 복판에 있었다. "거제도에서는 개가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고 자란 스무 살짜리가 그 부의 정도를 체감할 수는 없었다. 대공장이나 조선소를 영위하는 산업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리도 없었다. 그들을그저 시골 출신으로 분류하려고 하는 폭력적인 시선을 나역시도 갖고 있었던 셈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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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PM 2:00, ‘바리스타스‘요."
나는 다시 확인했지만, 과부하 때문에 일시적으로 머릿속 스케줄에 접근할 수 없었다.
"당신 최고예요." 로지가 말했다.
그녀의 어조는 이것으로 자기가 할 말이 끝났음을 암시했다.
이번에는 내가 표준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로 화답할 차례였다. 분명히 떠오르는 한 가지는 그저 ‘당신 최고예요.‘를 반사하는 것이었지만, 나조차도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내가유전학 전공이라는 형태로 최고이기 때문에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심사숙고할 수 있었다면 그냥 ‘안녕‘이나 ‘다음에 봐요‘하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사숙고할 겨를이 없었다.
때맞춰 응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상당했다.
"나도 당신 좋아해요."
강당 전체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매끄럽게 잘하셨어요." 앞줄에 앉은 한 여학생이 말했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 P107

"나 이 노래 알아요!"
로지가 웃었다.
"모른다면 그건 당신이 화성에서 왔다는 증명의 완결판이겠죠"
그 노래를 틀어 놓고 아름다운 여성이 모는 빨간 포르셰를 타고 다시 도시로 돌진하면서, 다른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컨버터블 지붕이 고장 나서 올릴 수가 없었을 때 그 감정이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발코니 식사‘ 뒤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또 로지가 자기 전화번호를 쓴 다음 경험했던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가까이 있지만 접근할 수 없는 다른 세계, 다른 삶.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새-티스-팩-션(Sat-is-fac-tion)」(1965년 록 그룹 롤링 스톤스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옮긴이).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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