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언급했듯,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방침에 힘입어 조선산업 외에도 기계공업, 자동차공업 단지들이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 들어섰다. 박정희정권 초기였던 1960년대의 산업 정책은 경공업 활성화를 통해 자립 경제를 수립하는 것을 방향으로 삼았다. 이른바 수입대체 산업화로, 삼성이 초창기에 영위했던 비료, 섬유 등의 산업이 당시 주력 산업이었다. 국내 수요를 수입이 아닌 국산품제조를 통해 맞추면서 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IMF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을 통해 자금을 원조받다가상업 ‘차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면서 외화자금으로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경공업은 해외에서 자재를 수입해야만 했기 때문에 외화유출이 많았다.
국민국가의 재정 측면에서도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수출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 등으로 인해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도 어려워져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 돌파구로 마련한 것이 바로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었다. 정부는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 산업 등 총 6개 산업을 통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를 수립해 수출액 연간 100만달성을 목표하겠다고 선언했다. - P119

앞서 ‘암묵지‘와 ‘형식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작업장 엔지니어의 설계와 선박에 대한 지식은 주로 ‘암묵지‘,
즉 선배에게 전수받은 노하우에 가까웠다. 사내 교육훈련을통해 도면을 그리는 방법, 배의 특성에 대해 배웠지만 그것들을 자신의 새로운 지식으로 축적하고 이론적으로 검증하는것보다는 선배가 하는 방식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였던 셈이다. 하지만 랩실 엔지니어들은 공학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설계를 생각했다. 비록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으로 해양플랜트 설계를 익히고 있었지만, 그들은 프로젝트를 마칠 때마다 정확한 ‘히스토리‘를 구축해 ‘백서‘로 만들고싶어 했다. 백서를 토대로 다음번에는시행착오를 방지하고자 했다. 모든 지식을 사내에 축적할 수있는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실제 기록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후배들은 MSPMS Project나 프리마베라 Primavera 등의 스케줄링 프로그램을 통한 촘촘한 관리를 기대했으나, 그런 관리 방식은 모든 직무와 계층에 전파되기 힘들었다.
해양플랜트 프로젝트 한 기가 끝나갈 때가 되면 엔지니어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복수로 투입되었다. A 드릴십공정이 90% 정도 완료될 때쯤에, B 리그선 담당자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호선의 일정이 촉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런 방침은 엔지니어들을 이전 작업에서 익힌 모든 것들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으로몰아넣었다. 기록화는 흐지부지되기 일쑤였고, 신입사원이 다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선배의 경험이라는 암묵지뿐이었다. - P145

조선 3사의 서울 진출은 바로 이런 ‘인재‘들을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인력 유출‘에 대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지책 정도로 볼 수 있다. 거제도 근무를 시켜도 거제도 사람이 되지 않고 기어이 셔틀버스를 타고 매주 상경하는 일만 없었어도 이런 방법까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선박 설계전성기, 특히나 중형 선박 전성기 때만 해도 딱히 그렇게 할필요는 없었다. 현장에서 기술을 숙련하는 것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중요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LNGC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처럼 연구개발과 정교한 기본설계가 필요한 선박이 등장하면서부터 ‘똑똑한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는 점점 증가했다. 해양플랜트에 집중하던 시절에는 아예 조선 3사 사이에 우수한 공대 출신을 ‘입도선매하려는 경쟁이불불을 지경이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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