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산업 내부 사람들과 바깥 사람들의 온도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계약 구조, 특히 대금결제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박 계약은 계약금을 받고 공정에 따라 대금을 고객사에게 지급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상적인 대금 지급 비율로 계약금 20%를 먼저 받고나머지 80%를 주요 공정 이벤트가 진행될 때마다 나머지 네번에 걸쳐 20%씩 나눠 받는 것이 통상적이다. 계약 이후에는, 설계를 마친 후 시작하는 강재 절단식 때 20%, 탑재를 시작할매 20%, 진수식 때 20%, 인도할 때 20%를 받아 100%를 채운다. 물론 100%를 선금으로 받는 것이 가장 좋지만, 조선업계에서는 20%씩 나눠 받는 것이 관례로 정착되어 있다. 공정만계획대로 진행되면 자재 대금 지급이나 사내협력업체 기성(공정 진행비) 정산 등에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자재구매 절차나 나머지 예산 역시 이런 계약 방식에 맞춰 짜여져있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이러한 표준 대금 결제절차가 헤비테일 방식으로 바뀌면서 조선소 운영이 까다로워졌다. 헤비테일 방식은 수주 계약 시 20%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계약 방식과 동일하지만, 주요 공정 이벤트마다 대금을 지급받지 않고 마지막 인도 시에 80%를 한꺼번에 받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P262
2007년 말 1조 원이었던 대우조선의 보유 현금은 공정지연이 심화됨에 따라 계속 줄어들었다. 2008년에는 4,000억원가량의 현금이 줄었고, 2010년, 2012년, 2014년에도 수천억원이 줄어들었다. 그사이 부채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결국대우조선은 2015년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1조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했지만, 또 한번의 공정 지연으로 2016년에도 1조 원이상의 현금이 줄어들게 된다. 현금이 감소하니 당장 자재 및 부품업체, 하청에 대금 결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들어오는돈만으로는 채무의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악전고투는 장기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 P264
한국 조선산업이 겪은 위기는 조선산업을 영위했던 나라들이 모두 겪었던 일이다. 사회과학에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 사회, 기업, 개인 등의 선택이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현재의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의미이다. 조선산업을 영위했던 나라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각기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성공하거나 실패했다. 여러 조선산업 패권국들의 공통점과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한국 조선산업과 산업도시 거제의 현상태를 파악하고 미래의 대안을 도출하는 데도움을 줄 수 있다. - P278
같은 시기인 1970~1990년대에 한국 조선업은 설비투자에 끊임없이 매진했다. 조선업이 국가가 주도하는 중화학공업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데다, 은행에서 저리로 차입해경영하는 게 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외 차관으로, 1980년대부터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은행과 종금사의 차입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짓고, 설비를 끊임없이 보강했다. 공법 차원에서는 블록 대형화가 추진되었다. 작은 블록들을 도크에서 용접으로 합할 경우 도크 공정 자체가길어지게 되는데, 블록들을 선행 탑재 공장에서 미리 크게 만든 뒤 도크에서 최종 탑재만 하는 방향을 실현해 도크 회전을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조선소의 지반이 약하거나 대형 크레인이 부족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일본 조선소, 그리고그 이전의 영국 조선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일본 조선업계는 건설하는 데 수천억 원이 드는 큰 도크를 지었다가일감이 줄어들면 산업이 지탱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으나, 한국은 달랐다. 국가와 재벌, 그리고 관치금융의 힘을 통해 ‘불도저식‘ 도크 대형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또한 바다의 선대(도크)에서 배를 건조하고 선대를 바다로 가라앉혀배를 진수시키는 플로팅도크(floating dock, 부유식 도크) 개발에도 성공한다. 물론 이러한 설비투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조선산업의 세계적인 호황‘ 덕택이었다. 중국이 경제를 개방하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팽창의 단계를 밟게 되면서 물류량 자체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해상 운송이 늘어나면서 많은 선박들이 필요해졌다. - P284
조선산업을 팽창으로 이끈 호황은 더 이상 찾아보기어렵다. 이제 ‘저성장, 저소득, 저수익률‘을 뜻하는 ‘뉴 노멀 new normal‘이 경제 상황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몇 년 전부터 조선 3사는 수주계약 시 종종 CEO와 노동조합위원장을 동행시키고 있다. 노조위원장은 주문주 앞에서 품질 보장과 납기 준수를 약속한다. 노동자들은 사측과는 싸울 수 있어도 고객과는 싸울 수 없다. 계약을 하는 자리에서 주문주는 노조위원장의 확실한 눈도장을 받아낸다. 쟁의 때문에 납기가 늦어지면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투쟁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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