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때에 나는 겨우 열두살이었다.
어려서는 청진에 살았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의 단독주택에 살았다. 봄이면 마을 빈터의 마른 잡초들사이에서 한무리의 진달래들이 이 묶음 저 묶음 다투어 피어나 아침저녁 노을에 더욱 붉게 타오르고 드높은 동편 하늘가에 아직도 눈을 하얗게 얹은 관모산이 아랫도리를 안개 속에감추고 떠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크고 둔해 보이는 철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 주위로 작은 고깃배가 아련하게 통탕대는 발동소리를 내면서 느릿느릿 헤엄쳐다녔다. 그리고 갈매기들이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다물결 위의 햇빛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리며 역광 속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나는 항구의 사무실에서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거나 장에 간 어머니를기다렸다. 길을 벗어나 제법 가파른 언덕의 끝까지 나아가 쪼그려앉아 있던 것은 두 사람을 기다릴 겸하여 그냥 바다를 내다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 P7
산불이 일어나도 인근 마을에는 불을 끌 인력조차 제대로남지 않았다. 산불이 한번 번지면 일대의 산들이 모두 탈 때까지 사나흘 또는 닷새 이상 방치되었다. 울창한 숲들이 잿더미가 되고 나면 제각기 앞다투어 산에 올라가 제 땅 표시로 말뚝을 박고 타다 남은 나무등걸을 파헤치고 널따란 밭을 만들었다. 거기다 강냉이 감자나 콩을 심었다. 그렇게 화전갈이를 한사람들은 이듬해부터 살아남았다.
나는 두만강을 건너 내가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높은 곳에 올라서면 뒤를 돌아보았고, 멀고 가까운 산들이 연기를 올리며 타는 모양을 보았다.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외딴섬에 갇힌 사람들이 멀리 지나가는 배나 다른 땅에 구조를 해달라고 조난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연기는 적막한 하늘로 조용하고 불길하게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저 한밤의 헛것들이 몰려다닐 때 들리던 우웅우웅하던 소리가 온 대지에 깔려 있는 듯했다. - 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