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도래할 위기의 원인이 단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 조선업에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외려 경쟁은 진정으로 글로벌하게 다가올 수 있다. 2017년 말, 조선 3사가 해양플랜트 1기 (FPSO)에 대한 입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수주 잔량이 줄어들어 먹거리가 갈급했기 때문에, 최저가, 즉 손익분기점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입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종 수주를 따낸 말레이시아조선소는 한국의 조선소들보다 20% 가깝게 싼 가격으로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싱가포르에 상주하는 유럽엔지니어링 회사 지부의 축적된 설계와 시공 경험을 가지고있는 엔지니어, 동남아 역내에 산업 인프라 투자를 지속하려는 싱가포르 정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조합이 예상치 못한 대항마로 나타난 것이다. - P289
중소형 조선소는 이제 중국뿐 아니라 더 싼 노동력을동원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 조선소들과의 경쟁에 내던져졌다. 선박 시장에 초활황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상, 중소형선박에서 가격의 우위를 가져가기는 어렵다. 중국처럼 국가가 대량으로 선박을 발주하거나 국가 내 물동량을 자국 선박으로만 운영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상 중소형 선박의 경쟁력은 좋지 않다.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를 위한 투자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여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업 노동자들이 적어도 인접한 중소기업으로 전환 채용될 수 있도록 보조해줄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이 조선산업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작 ‘동남권‘에 있는 ‘귀족 노동자‘들의 안위를챙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족노동자‘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이들을 위해 국가가 왜 세금을투입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귀족 노동자‘를 운운하며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일이다. 이는 산업의 거시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 P306
그러나 경남의 주력 산업인 조선산업, 기계산업, 자동차산업 등의 전방산업이 선전하지 않는 이상, 부품-소재-장비를 제작하는 이들의 수익이 자동화를 통해 혁신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른 행주 짜기‘가 체질이 된 원청-하청 관계 자체를 손보지 않는 이상 이들의 추가 수익은다음 해에 있을 원가 절감 압박 속에서 손쉽게 사라질 것이다. 이는 결코 조선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GDP의 12%이상을 담당하며 전체 국토의 주요 축을 구성하는 동남권 벨트의 모든 제조업이 비슷한 숙제를 안고 있다. ‘인더스트리4.0‘이라는 4차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었던 독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새로운 혁신의 기조는 기존 제조업, 특히 부품·소재·장비를 생산해 공급하는 중소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을 풀기 위해 시작됐다. 사물인터넷 IT, 자율주행차 등의 ‘신상품‘이아니라 기존의 산업들을 어떻게 더 잘 기능하게 할 것인지를쟁점화해야 한다. - P317
구조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흔히 몰락해봐야 변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몰락하지 않고도 변하고 성장하는 도시를 기대한다면 헛된 바람일까. 과거 조선소의 혁신은 노동자들이 모여 사소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이축적되면서 이루어졌다. 일하는 사람들의 그 감각이 여전히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거제는 실험대에 올라 있다. 거제가 모쪼록 노동과 삶을 훌륭히 아우를 수 있는 산업도시가 되길 바라본다. 현장에서 분투하는이들, 혁신을 위해 궁리하는 이들, 공동체를 다시 세워보려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내일을 꿈꿀 수 있으면 좋겠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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