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바라보듯 쓸쓸한 저 미소는 또 무언가. 그녀가 오로지 애커넌 씨 앞에서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애커넌 씨에게 알릴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말하는 순간 도리어 그 말을 입에 올린 자를 비천하게 만드는 종류의고약한 언술이 되었다. 권력자 앞에서만 평소에 없던 공손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태고부터 이어진 얄팍한 술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통하는 것을 보면 인류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리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지 않았다. - P84

소년처럼 고양된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더라도 애커넌 씨는 어떤 장면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해동은 시야가득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고, 해동이 생각하기로는 어디건일단 가난, 그 지겹고 두꺼운 가난의 더께가 사라져야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이 드러날 것 같았다. 실은 해동뿐 아니라 주변의 누구도 ‘가난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일단 끼니와 집세와 자식의 학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생각했는데, 그 너머에 무엇이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해동을포함한 모두는 전력을 다해 간절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 P96

생활 표면에 드러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은 다른 데 있었다.
애커넌 씨가 오래 망설인 것이 분명한, 그러나 일단 말하기로 결심한 이상 단호하게 불쾌함을 표시한 얼굴로 적어도 매주 이 회 이상머리를 감아달라, 회의에 동석할 때는 외투에 한국 음식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부탁한 그런 일들이 해동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의 가르침 아래 자라서 서양인들의 예의와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신했고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있었는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 문제 같은 것은 하루종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옷소매를 킁킁거리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자괴감이 들기는 했어도 감정의 격렬한 정도로 치자면 은근한 축에 속했다. 윤원섭이라는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대문형무소가 그 여자를 한겨울의 찬바람 속에 토해놓은 뒤로 해동은 옷자락에 마늘 냄새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지 하루종일 킁킁거리던 날들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울화와 창피함이 갈마들었고, 아무도 묻지 않은 그의 내심의 지지를 얻어 체결된 한일 협정이 갑자기 의심스럽게 보였다. 이 결정이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해방 이전, 아니 심지어 합방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일본과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잡는다는 건, 그들을 모욕하는 결정이 아니었는가? 이 협정으로 인하여 숨어 살던 윤원섭 같은 무리가 몰려나와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고 큰소리를 치게 된다면, 목표로 하였던 경제적 공동 번영을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세상일까? - P102

숙취로 인한 두통이 고민을 방해하였으나, 이 부분에서 해동은다소간 시간을 들여 깊은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원섭과 같은 죄지은 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어려운 시절 묵묵히 고난을 감수했던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이 부분에서 생각은 플리머스 자동차의 바퀴가 진흙 구렁에 빠져 헛도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헛되이 맴돌았다. - P103

저녁마다 쌀독을 긁는 늙은 어미들, 볼이 움푹 패도록 힘주어 꽁초의 마지막 연기를 빨아들이는 여윈 아비들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떠돌게 하는 그런 일들이 좀더 많이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엔과 정부에서 추구하는 것도 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이 모두 함께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인 것을 해동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해동의 내면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던 그 생각들이 윤원섭의 등장 이후 겨울바람을 만난 마른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 P104

"종묘를 지키시는 누대 선왕의 혼백이 두려운 일이로다. 짐은 하지 못할 일이니 공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시아버지 고종도 곤란한 일들이 닥치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곤했다. 이제 대신들의 손아귀에 옥새가 들어가면 돌이키지 못할일이 벌어질 것을 황후는 깨달았다. 황후에게는 어린아이의 충동적인 민첩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황후는 숨어 있던 병풍 뒤에서 뛰쳐나가 이제 막 남편 황제에게서 내무대신 이완용의 손으로 건네지려던 어보를 낚아채 방을 빠져나왔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후 역사의 벽에 그녀의 일생을 음각하게 되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몇 발짝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매우 짧은 복도 한 개에 불과했던 도피 이후 더이상 갈 길을 잃어 그녀는 아무데로나, 문이 열리는 아무 방으로나 달려들어가 어보를 치마폭 아래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굼벵이 같기도 하고 태아 같도 한, 동그랗게 웅크린 등짝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분기였다. 머리를 세 바퀴 두른 무거운 달비가 바닥에 나뒹굴어 황후의 속머리가 드러났고, 가채에 꽂힌 떨잠이 바들바들 떨렸다.
먼저 달려온 사람은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었다. 그는 옥새를 품고 엎드린 큰딸을 보고 어쩔 줄 몰랐다.
"황후마마, 어보를 이리 주옵소서. 국가의 대사이고 양국 황제간의 조약이니 마마께서 나서실 일이 아니오이다."
윤택영은 긴장하여 혀가 목구멍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소리를냈다. 황후는 고개를 저을 뿐 친정 아비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온 대신과 각료들도 차마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때에, 윤덕영이 동생인 윤택영의 어깨를 밀치며 재촉했다.
"무엇하느냐, 얼른 빼앗지 않고?"
하지만 원래 성격이 유했던 윤택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황후마마, 황후마마를 되될 뿐이었다. 형인 윤덕영은 동생의 그런 답답함을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염병할! 내 혹여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려해 너를부르지 않았느냐! 에잇, 저리 비켜라!"
치마 속에 옥새를 숨긴 황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사람은 윤덕영뿐이었다.
윤덕영은 황후를 벌렁 나자빠뜨린 후, 그 치마속을 뒤져서 옥새를 빼앗아 들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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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6년이 시작된 지 며칠 안 된 한겨울, 그들은 서대문형무소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던 것은 진짜로 그 여자의 얼굴이 궁금했다거나 그녀를 맞이할 때 얼굴을 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 서 있으려니 눈알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고,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이 다 얼어붙은 것처럼 침묵뿐인 시간 속에서, 그늘진 철문으로부터 몇발짝 떨어진 양지에 옹기종기 모여선 초라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발을 동동거리다가 무심결에 나온 말, 말하자면 괜한 말이었다. - P9

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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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 나의 육아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꿀짱아에게 함께 사는 할머니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거대한 빈 구멍을 내가 인식한 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내 딸에게 꼭 필요한 어떤 것이 없다면, 내가 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꿀짱아의 엄마지만, 절반은 할머니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 P162

환한 웃음과 시무룩한 한숨 사이 정도에 불과한 할머니의 작은 감정 표현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마도 모종의 동화(同化) 과정이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그속상한 얼굴 정도로 마음이 잦아들고, 좋아서 깔깔대고흥분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또 그 환하게 웃고 있는얼굴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는 식이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정신없이 치달리던 내 감정의전류계는 할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좀 더 느긋하고 묵직해졌다.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좋고 나쁜 일이라는 게 대략 심상한 범주에 있을 때가 많고, 또는 심하게 너울 지는격랑을 만나더라도 내 마음은 어쨌거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좋은 일은 활짝 웃고 힘든 일은 한숨한번 쉬어 넘기는 할머니의 무심한 반응은 보이지 않게나에게 스며들어, 나는 웬만한 일에는 침착함을 유지할수 있도록 내 마음을 추스르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안정감은 내가 내 성격의 여러 면들 중에서 가장 다행스럽고 유용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이다. - P188

무심함은 그 중간 어디쯤의 기분 좋은 영역에 속한다. 그랬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다. 내가 더말한다면 기꺼이 들어줄 것이고, 내가 입을 다문다면 캐묻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수롭지 않게 잊어주는 것도 생각보다 좋다. 애써 잊은 나의상처를 굳이 꺼내 챙겨 묻는 배려는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 P190

할머니는 자기가 둔하고 어리석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남들의 평가 따위는 애초 그분에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상처를 알아채지만 헤집지 않는 것, 알면서도 모른체해주는 것,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민감함과 대범함 사이에 묘하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무심한 반응은 청천벽력 같은 큰일도 견딜 만한 작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있었고 할머니에게 그런 무심한 이해를 받고 나면 사납게 파도치던 내 마음은 거칠던 너울이 가라앉고 어느덧 평화로움 쪽으로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 P193

윤경아, 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기대와 격려는 무서운 거야. 사람들이 나에게 할 수 있다. 해낼 거라고 믿는다고 끝없이 기대와 격려를 퍼붓는다면 나는 너무 무서워질 것 같아. 나는 내가 약하고 능력 없는 사람인 걸알거든. 그런 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건 기대와 격려가 아니야.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딱 그걸 주셨어."
이후로 우리는 아빠가 주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지, 격려, 이해, 어느 한 단어로 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었다. 오랜 고민과 의논 끝에 우리는 그것이 ‘편안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차원 높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것. 부담 없는 편안함.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것, 훌륭하고 귀한 것을 해주는 것이 물질적 응원이라면 부담 없는 편안함은아이가 받은 것들을 가지고 마음껏 제 기량을 발휘할수 있도록 해주는 내면적 지원이다.  - P201

할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챕터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내 몸에 늘어가는 주름살과 검버섯이 반갑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년의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프거나 두려울 것이 없다.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궁극의아름다움이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늙어감이 추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저 조촐해져가는 것임을 나는 안다. 가진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오로지 소리없는 함박웃음만으로 나의 남은 존재를 채워가는 것,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길이었다.
할머니가 남기신 흔적들을 찾으며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나는 혼자인지 함께인지 분간되지 않는 충만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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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리적으로 자물쇠는 바꿀수 있다. 화학 성분이 다른시스템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화학물질의 기능은 자물쇠와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느냐, 또 정보를 지닌 메시지가 오고나서 어떤 파급효과가 생기느냐에 달린 것이지 다른 요인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으로 분산된 책임을 생각할 때자물쇠를 바꾸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미 너무 많은 정보 처리내용과 정보저장 방식이 이 특정한 물질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이루는 재료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다. 정리하자면 마음에서 물질은 두 가지 요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는 속도고 또 하나는 신경계 곳곳에 변환기와 실행기가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말고는 달리 중요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 P132

마음이 물리적 기제나 매질의 화학성분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이런 물리적 기제가 해야 하는 작업을 해 내기 위해서는 마음도 자신이 다스리는 기존의 몸과 소통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엄연한 생물사적(生物史的) 사실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없다. 기능주의는 이런저런 물질의 ‘내재적 속성‘을 강조하는 생기론이나 신비주의를 비웃는다. 위스키에 어리석음이 없듯이 아드레날린에도 분노와 공포가 없다. 위스키와 아드레날린이라는물질 자체는 가솔린이나 이산화탄소처럼 마음과는 무관하다. 위스키나 아드레날린의 이른바 ‘내재적 속성‘은 이런 물질의 능력이더 큰 기능계의 성분으로 기능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 P133

자아는 도무지말을 안 들어먹은 몸이라는 꼭두각시를 부려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인과 비슷하다고 본 데카르트의 시각은 그럴 때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몸은 내가 숨기려는 비밀을 얼굴을 붉히거나손을 떨거나 땀을 흘려서 기어이 드러낸다. 내가 아무리 내숭을 떨어도 몸은 지금은 토론이나 벌일 때가 아니라 성욕을 채워야 마땅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반란을 획책한다. 이보다 더 속이 터지고 담달한 것은 마음 같아서는 섹스를 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마음이 갖은 추파를 다 떨어야하는 경우다.
그런데 몸에도 마음이 이미 있다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 몸 하나에 마음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 때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몸에 바탕을 둔 원시 마음은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시키는 과업을 묵묵히 수행했지만 상대적으로 느리며 무디다. 지향성도 근시안적이고 쉽게 속아 넘어간다. 세상과 치밀하게 겨루려면 더 빠르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더 나은 미래를만든다. - P139

간단한 학습 모델들을 그것이 등장한 역사적 순서대로 나열하면 관념 연합론(associationism), 행동주의(behaviorism), 연결주의(connectionism)가 되겠는데 이것을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ABC 학습이라고 부르자. 대부분의 동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ABC 학습능력이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꾸준히 환경의 조련을 거친 덕분에 행동을 알맞게 고치거나 다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현실성과 세부 조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그런 조건 형성과 조련 과정이 신경세포로 짜인 네트워크 안에서 기적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떻게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훌륭한 모델들이 나와 있다.
생명체가 목숨을 이어 가려면 형태를 인식하고 대상을 구별하고 일반화하며 운동을 역학적으로 제어하는 다양한 목표를 완수해야 하는데 ABC 네트워크는 그 점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이네트워크는 효율적이고 알차고 견고한 실행력을 가졌고 웬만한오류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줄 안다.
후손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자연선택에 의한 솎아내기와 다듬기(선천적회로)와 개체 안에서 나중에 발생하는 솎아내기와 다듬기(경험이나 훈련의 결과로 재구축된 회로)를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없다고 지적한 스키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이 네트워크는 보여 준다. 여기서 선천성과 후천성은 한 치의 틈새도 없이 꽉 맞물린다.
하지만 ABC 네트워크가 아직 해내지 못하는 인지 과제가 있다는 날카로운 비판도 있다. 훈련의 결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인지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 P149

포퍼 생물은 어떻게 행위를 걸러낼까? 물망에 오른 여러 행동을 몸이라는 심판대 앞에 세운 다음 아무리 낡고 근시안적일지언정 몸 안에 쌓인 지혜를 활용한다. 몸이 구역질, 현기증, 공포, 전율 같은 전형적 반응을 보이면서 저항하면 이것은 문제의 행동이썩 좋은 길이 아님을 뜻한다. 이것은 동전 던지기보다는 신뢰도가 높은 신호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가 뇌의 회로를 다시 깔아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안을 깡그리 제거하여 다시는 그런 가능성이 떠오르지 못하게 하는 방식보다는 그런 가능성이 떠오를 때마다 강한 부정적 충동이 일어 그것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확률을 아주 낮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토대가 되는몸 안의 정보는 유전 명령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체득한 경험일수도 있다. 아기는 유리 위로 기어가는 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가진다. 아기의 눈에는 유리 밑의 절벽이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가앞에서 아무리 어르고 꼬드겨도,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었는데도 아기는 뒤로 물러나며 겁을 낸다. 조상의 경험이 아기에게 안전한 쪽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낯선 음식을 먹인 다음 바로 토하는 약을 주사한 쥐는 그 다음부터 전에 먹고 토한 적이 있는 음식과모양이나 냄새가 비슷한 음식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이 경우에는 쥐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안전한 쪽을 선택하도록 만든 정보를 얻었다. 아기가 무서워하는 유리가 실제로는 안전하며 쥐가 꺼리는 낯선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어떤 여과장치도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덤벼드는것보다는 안전하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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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자라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 ‘사랑한다‘
는 할머니의 소박한 어휘 사전에 등재되지 못한 낯선 단어였다.
그러므로 나는 많은 육아 현인들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다가도 "사랑한다고 말하라"라는 말에는 할머니처럼 눈길을 낮추고 입을 삐쭉 내밀어 의구심을 표현한다. 할머니는 이런 식으로, 말이 아니라 미세한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대가였다. - P3

하찮은 일에도 무척이나 골몰하여 긴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 먼지들 사이에 만일개미가 한두 마리 섞여 있었다면? 그것은 더욱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방으로침입해 들어온 개미에 놀라서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개미! 하고 외쳤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침묵 속에서 손가락질만 했을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도 개미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할머니 특유의 놀라는, 또는 놀라는 척 장단을 맞추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방에 개미가 들어온 것이 그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청결이나 위생의 문제는 아니었고 내가그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할머니가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은 할머니가 그 중요함에 동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동의하는 것이 또한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극도로 만족해서 다시 느긋하게 뒹굴거리면서, 떠다니는 먼지와 노란 햇살, 콩댐 장판,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개미와 날파리 같은 사소한 것들에 지치지도 않고 골몰했다. - P48

가끔 야단을 맞을 때도 있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편식에 대체로 관대했다. 어린 시절에 하도 안 먹었더래서 이 정도라도 먹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했던모양이다. 낯가림도 편식도 하염없는 관용 속에 스르르사라져 소멸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오히려 부모님이발본색원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게 사라졌다. 나는 이제 누구보다 맛의 세계를 즐기는 못 먹는 음식이 거의없는 식도락가가 되었다.
핵인싸에 식도락가, 그것은 어린 시절 낯가림과 편식대마왕이던 내 모습을 보면 상상해내기 어려운 미래였지만,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나는 서서히 그런 사람이되어갔다. 곰곰 생각해보았을 때 그 과정의 가장 큰 동력은 관용이었다. 야단맞지 않고 자책하지 않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저 잘 먹고 잘 노는 사람이 멋있어보이는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관용이 함께하지 않았던 몇 가지 다른경우들이 생각났고, 그런 일들은 내 안에 생채기를 남기며 훨씬 일이 부드럽게 풀리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 P55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큰일이 아니구나. 괜찮구나. 세상은 여전히 좋은 곳이구나. 나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병아리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기억이다. 할머니는 내 기억의 시초부터 오늘까지 늘 그런 식으로 존재했다. 그분은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거나 큰소리를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나를 둘러싸고 괜찮다고, 예쁘다고,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했다.
내가 방을 따로 쓰겠다고 문을 잠가버렸던 사춘기의그날, 할머니는 몹시 상심한 얼굴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막내 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할머니는비통하게 맞이했다. 섭섭하지만 원래 그런 법이라고, 오랫동안 혼자 마음을 달래셨을 것이다.
나는 매몰차게 할머니를 떠나고 무심결에 잊었다가 중년의 어느 날 고통과 슬픔으로 흐느끼면서 오래된 방문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할머니가 가득 채워놓은 평화와 사랑을 발견했다. - P66

그러고보니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자라는 온갖 비뚤빼뚤한 모습을 모두 ‘예쁘다‘고 요약했고 분투하는 모숨은 ‘장하다‘고 했다. 어른이건 아이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입술을 삐죽이며 ‘별나다‘고 했다.
더 나쁘면 ‘고약하다‘였다. 할머니가 사용했던 어휘들이 수적으로 적은 반면 매우 정확하고 강력한 일관성이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할머니가 나를 야단칠 때 쓴 말도 싱거웠다.
"착한 사람이 왜 그러나."
더 어릴 때 진이 빠지도록 잠투정을 한 끝에 들은 말이 "예쁜 사람 왜 그러나"였던 것처럼 사춘기에 이르러 온갖 심술을 다 부리고 듣는 말도 겨우 그거였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부연 설명 없이, 할머니는 엄한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 착한 사람이 왜 그러냐고묻고 끝이었다. 야단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할머니가 내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표시, 그뿐이었다. - P79

살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만큼 많은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깊이 뉘우친 순간들은 분명 고함치고 화내고모욕하거나 박탈하고 처벌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나를효과적으로 야단쳤던 사람들은 아주 조용하게 마음의평정을 유지했으며, 짧게 훈계하는 가운데 나의 감정선을 긍정적으로 노크했다. 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자존심이 강한 나에게 그런 일은 사실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대학원의 그선배와 할머니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타인에 의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지점들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선배나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해낼 때면 전혀 애쓰거나 공들인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 P85

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너무 놀라자빠질 지경이었는데, 우는 아이 앞에서 저런~이라고말하고 ‘버틴다‘고 표현하는 것도 정말이지 이해할 수없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내가 무언가를 버텨냈다고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상담에서 ‘버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념이야. 상담학 교과서에 보면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이 ‘정서적 지지가 되어주고 버틴다‘라고 되어 있어. 나는 그걸 글로 배우고 외웠지만사실은 버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그날 저런,이라고 말하고 가만히 있는 동안 버틴다는 게 뭔지 이제 알겠다 싶은 기분이었어. 아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거야. 그게 버티는 거였어." - P124

나는 엄마가 내 몫으로 공들여 가꾼 기름진 푸른 목장을 마다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바늘구멍 같은 빈틈을 찾아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일은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라는 격언의 중요한 예화로 꼽힐만할 것이다. 나는 그 일을 몸소 겪었고, 꿀짱아에게도분명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꿀짱아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의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낯선 터전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젊은이가 낯선 세계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은 비극이나 위험이 전혀 아니며 이 세상을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축복이다. 그러니 내가꿀짱아의 미래에 대해 별다른 계획과 준비를 하지 않는것은 역설적으로 꿀짱아가 뿌리 내릴 터전을 더욱 넓게해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설이>>의 뒤표지에 쓰인 문장을 보면서 크게 당황하고, 이미 서점에 나온 책의 표지를 이제 와서 바꿀 수는없는 일이라고 얼른 체념했지만 특유의 집착으로, 그렇다면 어떤 단어로 바꾸는 것이 가장 좋겠는가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원점으로 돌아왔다.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인 부모, 그것은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진심이었던 것이분명했다.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 P142

또한 나는 웃고 있는 얼굴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휴대폰 게임이라도 하면서 웃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아예 웃음이 말살된 단계에 이르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는 한심하고 생각이 없어서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웃는 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려 애쓰는 중이다. 그에게 지금웃을 수 있는 일이라곤 휴대폰 게임밖에 없지만, 천천히 회복되면 다른 기쁨들을 찾아내려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사이 몇 년이 흐를 수도 있다.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다른 기회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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