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자라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 ‘사랑한다‘ 는 할머니의 소박한 어휘 사전에 등재되지 못한 낯선 단어였다. 그러므로 나는 많은 육아 현인들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다가도 "사랑한다고 말하라"라는 말에는 할머니처럼 눈길을 낮추고 입을 삐쭉 내밀어 의구심을 표현한다. 할머니는 이런 식으로, 말이 아니라 미세한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대가였다. - P3
하찮은 일에도 무척이나 골몰하여 긴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 먼지들 사이에 만일개미가 한두 마리 섞여 있었다면? 그것은 더욱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방으로침입해 들어온 개미에 놀라서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개미! 하고 외쳤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침묵 속에서 손가락질만 했을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도 개미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할머니 특유의 놀라는, 또는 놀라는 척 장단을 맞추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방에 개미가 들어온 것이 그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청결이나 위생의 문제는 아니었고 내가그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할머니가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은 할머니가 그 중요함에 동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동의하는 것이 또한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극도로 만족해서 다시 느긋하게 뒹굴거리면서, 떠다니는 먼지와 노란 햇살, 콩댐 장판,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개미와 날파리 같은 사소한 것들에 지치지도 않고 골몰했다. - P48
가끔 야단을 맞을 때도 있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편식에 대체로 관대했다. 어린 시절에 하도 안 먹었더래서 이 정도라도 먹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했던모양이다. 낯가림도 편식도 하염없는 관용 속에 스르르사라져 소멸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오히려 부모님이발본색원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게 사라졌다. 나는 이제 누구보다 맛의 세계를 즐기는 못 먹는 음식이 거의없는 식도락가가 되었다. 핵인싸에 식도락가, 그것은 어린 시절 낯가림과 편식대마왕이던 내 모습을 보면 상상해내기 어려운 미래였지만,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나는 서서히 그런 사람이되어갔다. 곰곰 생각해보았을 때 그 과정의 가장 큰 동력은 관용이었다. 야단맞지 않고 자책하지 않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저 잘 먹고 잘 노는 사람이 멋있어보이는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관용이 함께하지 않았던 몇 가지 다른경우들이 생각났고, 그런 일들은 내 안에 생채기를 남기며 훨씬 일이 부드럽게 풀리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 P55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큰일이 아니구나. 괜찮구나. 세상은 여전히 좋은 곳이구나. 나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병아리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기억이다. 할머니는 내 기억의 시초부터 오늘까지 늘 그런 식으로 존재했다. 그분은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거나 큰소리를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나를 둘러싸고 괜찮다고, 예쁘다고,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했다. 내가 방을 따로 쓰겠다고 문을 잠가버렸던 사춘기의그날, 할머니는 몹시 상심한 얼굴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막내 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할머니는비통하게 맞이했다. 섭섭하지만 원래 그런 법이라고, 오랫동안 혼자 마음을 달래셨을 것이다. 나는 매몰차게 할머니를 떠나고 무심결에 잊었다가 중년의 어느 날 고통과 슬픔으로 흐느끼면서 오래된 방문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할머니가 가득 채워놓은 평화와 사랑을 발견했다. - P66
그러고보니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자라는 온갖 비뚤빼뚤한 모습을 모두 ‘예쁘다‘고 요약했고 분투하는 모숨은 ‘장하다‘고 했다. 어른이건 아이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입술을 삐죽이며 ‘별나다‘고 했다. 더 나쁘면 ‘고약하다‘였다. 할머니가 사용했던 어휘들이 수적으로 적은 반면 매우 정확하고 강력한 일관성이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할머니가 나를 야단칠 때 쓴 말도 싱거웠다. "착한 사람이 왜 그러나." 더 어릴 때 진이 빠지도록 잠투정을 한 끝에 들은 말이 "예쁜 사람 왜 그러나"였던 것처럼 사춘기에 이르러 온갖 심술을 다 부리고 듣는 말도 겨우 그거였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부연 설명 없이, 할머니는 엄한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 착한 사람이 왜 그러냐고묻고 끝이었다. 야단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할머니가 내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표시, 그뿐이었다. - P79
살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만큼 많은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깊이 뉘우친 순간들은 분명 고함치고 화내고모욕하거나 박탈하고 처벌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나를효과적으로 야단쳤던 사람들은 아주 조용하게 마음의평정을 유지했으며, 짧게 훈계하는 가운데 나의 감정선을 긍정적으로 노크했다. 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자존심이 강한 나에게 그런 일은 사실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대학원의 그선배와 할머니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타인에 의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지점들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선배나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해낼 때면 전혀 애쓰거나 공들인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 P85
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너무 놀라자빠질 지경이었는데, 우는 아이 앞에서 저런~이라고말하고 ‘버틴다‘고 표현하는 것도 정말이지 이해할 수없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내가 무언가를 버텨냈다고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상담에서 ‘버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념이야. 상담학 교과서에 보면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이 ‘정서적 지지가 되어주고 버틴다‘라고 되어 있어. 나는 그걸 글로 배우고 외웠지만사실은 버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그날 저런,이라고 말하고 가만히 있는 동안 버틴다는 게 뭔지 이제 알겠다 싶은 기분이었어. 아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거야. 그게 버티는 거였어." - P124
나는 엄마가 내 몫으로 공들여 가꾼 기름진 푸른 목장을 마다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바늘구멍 같은 빈틈을 찾아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일은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라는 격언의 중요한 예화로 꼽힐만할 것이다. 나는 그 일을 몸소 겪었고, 꿀짱아에게도분명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꿀짱아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의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낯선 터전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젊은이가 낯선 세계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은 비극이나 위험이 전혀 아니며 이 세상을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축복이다. 그러니 내가꿀짱아의 미래에 대해 별다른 계획과 준비를 하지 않는것은 역설적으로 꿀짱아가 뿌리 내릴 터전을 더욱 넓게해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설이>>의 뒤표지에 쓰인 문장을 보면서 크게 당황하고, 이미 서점에 나온 책의 표지를 이제 와서 바꿀 수는없는 일이라고 얼른 체념했지만 특유의 집착으로, 그렇다면 어떤 단어로 바꾸는 것이 가장 좋겠는가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원점으로 돌아왔다.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인 부모, 그것은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진심이었던 것이분명했다.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 P142
또한 나는 웃고 있는 얼굴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휴대폰 게임이라도 하면서 웃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아예 웃음이 말살된 단계에 이르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는 한심하고 생각이 없어서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웃는 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려 애쓰는 중이다. 그에게 지금웃을 수 있는 일이라곤 휴대폰 게임밖에 없지만, 천천히 회복되면 다른 기쁨들을 찾아내려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사이 몇 년이 흐를 수도 있다.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다른 기회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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