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날 나의 육아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꿀짱아에게 함께 사는 할머니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거대한 빈 구멍을 내가 인식한 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내 딸에게 꼭 필요한 어떤 것이 없다면, 내가 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꿀짱아의 엄마지만, 절반은 할머니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 P162
환한 웃음과 시무룩한 한숨 사이 정도에 불과한 할머니의 작은 감정 표현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마도 모종의 동화(同化) 과정이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그속상한 얼굴 정도로 마음이 잦아들고, 좋아서 깔깔대고흥분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또 그 환하게 웃고 있는얼굴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는 식이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정신없이 치달리던 내 감정의전류계는 할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좀 더 느긋하고 묵직해졌다.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좋고 나쁜 일이라는 게 대략 심상한 범주에 있을 때가 많고, 또는 심하게 너울 지는격랑을 만나더라도 내 마음은 어쨌거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좋은 일은 활짝 웃고 힘든 일은 한숨한번 쉬어 넘기는 할머니의 무심한 반응은 보이지 않게나에게 스며들어, 나는 웬만한 일에는 침착함을 유지할수 있도록 내 마음을 추스르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안정감은 내가 내 성격의 여러 면들 중에서 가장 다행스럽고 유용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이다. - P188
무심함은 그 중간 어디쯤의 기분 좋은 영역에 속한다. 그랬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다. 내가 더말한다면 기꺼이 들어줄 것이고, 내가 입을 다문다면 캐묻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수롭지 않게 잊어주는 것도 생각보다 좋다. 애써 잊은 나의상처를 굳이 꺼내 챙겨 묻는 배려는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 P190
할머니는 자기가 둔하고 어리석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남들의 평가 따위는 애초 그분에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상처를 알아채지만 헤집지 않는 것, 알면서도 모른체해주는 것,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민감함과 대범함 사이에 묘하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무심한 반응은 청천벽력 같은 큰일도 견딜 만한 작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있었고 할머니에게 그런 무심한 이해를 받고 나면 사납게 파도치던 내 마음은 거칠던 너울이 가라앉고 어느덧 평화로움 쪽으로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 P193
윤경아, 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기대와 격려는 무서운 거야. 사람들이 나에게 할 수 있다. 해낼 거라고 믿는다고 끝없이 기대와 격려를 퍼붓는다면 나는 너무 무서워질 것 같아. 나는 내가 약하고 능력 없는 사람인 걸알거든. 그런 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건 기대와 격려가 아니야.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딱 그걸 주셨어." 이후로 우리는 아빠가 주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지, 격려, 이해, 어느 한 단어로 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었다. 오랜 고민과 의논 끝에 우리는 그것이 ‘편안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차원 높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것. 부담 없는 편안함.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것, 훌륭하고 귀한 것을 해주는 것이 물질적 응원이라면 부담 없는 편안함은아이가 받은 것들을 가지고 마음껏 제 기량을 발휘할수 있도록 해주는 내면적 지원이다. - P201
할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챕터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내 몸에 늘어가는 주름살과 검버섯이 반갑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년의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프거나 두려울 것이 없다.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궁극의아름다움이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늙어감이 추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저 조촐해져가는 것임을 나는 안다. 가진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오로지 소리없는 함박웃음만으로 나의 남은 존재를 채워가는 것,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길이었다. 할머니가 남기신 흔적들을 찾으며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나는 혼자인지 함께인지 분간되지 않는 충만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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