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라 사람들이 애커넌 씨 앞에서 부리는 주책에 대한 이런당혹스러움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게다가오늘의 부끄러움은 이전까지 느꼈던 것과 격이 다르게 진폭이 컸다. 오늘 황후의 영전에서 머리채를 붙잡고 뒹군 여자들이나 애커넌 씨의 바지 속 물건의 크기를 눈으로 가늠하고 있는 남자들은 시골 무지렁이들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 나라의 최상류층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날 부리는 추태는 대한민국이라는나라가 가질 수 있는 품격의 상한선이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고 하는 최종적 선고인 것 같았다. - P207
해동은 진형의 형제자매들이 거의 서울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고모의 장례를 위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동의 아버지가 뒤집어쓴 모욕을 해명하기 위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해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모의 상가에 모여 앉은 이 자리가 말하자면 양가의 상견례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고모는 시신이 되어 땅에 묻히기 전, 고모의 육신이 이 땅에 머무는 마지막 순간에 해동의 부모로서 상견례에 함께했다. 그 미미한 연결이 해동을 기쁘게 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더라도 해동에게는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 P244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세상을 뒤바꾼 두 번의 전쟁과 왕조의 절멸과 윤덕영의 그 모든악명으로도 그것을 뒤흔들지 못했다. 저택은 그의 눈앞에 확실히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인쇄기처럼,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꿋꿋하고 기세로운 그 저택의 힘에 기대어 오히려 윤덕영과 그 후손들은 부활을 꿈꾸었다.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 P248
"잘 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데다 심어야 한다." 산자락 아래쪽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진만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 문 그는 몸짓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훌륭한 일꾼이었다. "저기 길 옆에, 동사무소에서 나무 심으라고 벌여놓은 데, 그런데다 심으면 아무리 잘 심어도 자랄 수가 없다. 높은 사람들 보기에 나무 심은 티가 금방 나니까 거기다 심으라고 하지만, 저렇게 흙이 얕고 언덕바지가 가팔라서 물도 금방 새는데 어떻게 묘목이버텨." "그럼 저건 헛일이군요." "순서가 있지 순서가 저런 데에 나무가 서려면 씨앗부터 천천히 자라야 해. 이렇게 산 안쪽에 그나마 흙이 좋은 데부터 나무가서야지. 그러면 나중에 저렇게 박한 땅에도 씨앗이 떨어져서 자라겠지. 하지만 지금 저기다가 나무를 세우려고 하면 되지도 않는단말이야. 뭐든지 제대로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이네." - P263
아니면 이대로 무너져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해동은 어느 쪽을 바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은 나라의 것 같기도. 유엔의 것 같기도, 윤원섭의 것 같기도 했다. 친일파의 자손이 빌붙은 썩어빠진 집이기도 했고 세상에 다시 없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지붕이 사라지고 유리창이 다 깨졌지만 벽과 기둥과 뾰족탑은여전히 멀쩡하게 튼튼했다. 자신만만한 윤원섭과 그녀를 둘러싼 실력자들을 보면 이곳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저택이 화재를 이기고 더 훌륭하게 복구될 것을 기뻐하기엔 그녀가 꼬나문양담배와 그녀에게 아첨하는 무리가 괘씸했다. 그렇다고 저택이 사라져 아예 없어진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까 타고 온 택시운전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사자와도 같은 이 저택을 싹 쓸어 없애버릴지, 복구할지. 그런데저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저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까이에서 눈으로 본 지금 그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고 싶었다. - P274
저편 버드나무 아래에서 붉어진 눈으로 저택을 보고 있는 어멈과영감을 보았지만 멈추어 따로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사업이 잘 풀리면 찾아와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인생에 다시없이 빛나는 무대였던 이곳을 축복도 저주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할 때였다. 해동은 언커크 언덕을 내려왔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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