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문제는 코네티컷 타협Conneticut Compromise 혹은 대타협 Great Compromise 이라고 하는 합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주별인구의 차이로 인한 정치적 대표성의 차별을 해소하는 한방편으로 상원의원의 수는 인구와 무관하게 모두 2명으로 동일하게 선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원과 하원이 동등한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이는 인구 대표성에 기초한 하원에서 어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상원에서 작은 주들이 힘을 합치면 인구가 큰 주의 전횡을 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견제와 균형, 이것이 미국의 시스템을 이루는 기저다. - P46

미국 대통령제가 이러한 특성을 기반으로 발명된 것이라면 내각제는 ‘진화‘에 의해 오늘날의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즉 내각제는 역사적인 진화의 소산이다. 내각제는 서구다.
국가에서 국왕과 의회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발전해왔다. 국왕의 자의적 지배에 대한 반발로 의회는 세금이나 인신구속 등의 사안에 대해 자신들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회의 영향력이 중대한 것이다. 이후 점차 의회가 국왕을 대신해서 통치를 담당하게 되었고, 내각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내각제, 의회제, 의원내각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내각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의회가 행정 권력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각제는 의회에서 선출한 권력이기에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해야만 행정권력을 장악할수 있다. 이처럼 의회 내에서 다수 세력을 확립할 수 있어야 행정 권력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각제는 권력 융합의 성격을 갖는다. 미국 대통령제가 입법부와 행정부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과 달리, 내각제는 입법부를 장악해야행정부를 장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여소야대는 드물며,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대립이나 갈등도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P47

그러나 이후 우리 정치의 역사는 이러한 견제받는 대통령에 대한 구상과 달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권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방향으로 이어져왔다. 이러한헌정 왜곡은 이승만 대통령 첫 임기 말인 1952년 7월 7일의 개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헌국회는 의원의 임기를2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 세력이 크게 줄어들고 만다.
한편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었기에 1952년 8월 5일 제2대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였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은 국회 내 다수를 차지하는 반이승만 의원들 때문에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하나의 사례를 들면, 1951년 11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국회에 보냈는데 표결 결과 찬성 14, 반대 143, 기권 1표로부결되었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된 것이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모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백골단‘, ‘땃벌떼‘ 등 깡패 조직들을 동원해서 관제 데모하는 것을 넘어, 국회 통근 버스를 헌병대를 동원해 끌고 가 야당 국회의원 10명에게 국제공산당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공포 분위기로야당 의원들을 압박했다. 이것이 바로 1952년 5월 25일에일어난 ‘부산정치파동‘이다.
국회의사당을 군과 경찰이 삼엄하게 에워싸고 또 대규모 관제 데모대가 시위를 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기립 표결로 통과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 연장을 위해 헌법을 강제적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을 동원한 것은 후에 군이 정치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 P51

그로부터 2년 뒤 또 다른 헌정 왜곡이 1954년 11월29일에 일어난다.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으로 불리는이 사건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핵심으로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재선에 의해 1차 중임할 수 있도록 했는데, 부칙으로 공포당시의 대통령의 경우는 1차 중임의 제한을 적용하지 않도록 해 사실상 이승만은 평생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 P54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국회가 해산되고 헌법의 기능이일시 중지되면서 국가의 통치를 위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최고통치기관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해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모두 장악하고 여기에 국회의 권한을 부여했다. 아울러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헌법재판소 규정은 효력 정지하도록 했다.
국민의 기본권은 혁명과업 수행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했다. 이전의 헌법 또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효력이 생기도록 했다.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실상 무한정의 권력을박정희에게 주도록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국회당시 한민당이라는 견제 세력이 있었지만 박정희는 누구에게도 견제받지 않고 통치 구조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61년 8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박정희는 정권이양시기 및 방법 등 중대 정책에 관해 명시한 성명서 ‘정권이양시기에 관한 성명‘을 통해 정부형태를 대통령 책임제로 한다는 내용을 명시한다.
이와 함께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위해 강력한 대통령제의 지지론자인 루퍼트 에머슨Rupert Emerson의 자문을 활용해 새로운 통치구조를 마련해갔다. 그러나 실제로 헌법심의위원회나 에머슨 교수는 주도적 역할을 하기보다 쿠데타 주축 세력이 의도하고 있는 정부 형태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대통령제를 복원하는 헌법 개정안을 1962년 11월 5일 의결 공고하고 12월 26일 국민투표를 통해 정식 공포한다.
이때부터 부통령제는 폐지된다. 부통령제의 폐지는 강력한 대통령제의 상징적 조치인데,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을 대신할 존재를 두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P59

이처럼 유신과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 강화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축소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부통령제는87년 개헌에서도 도입되지 않았다. 당시 노태우 쪽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이 대통령-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할 가능성 때문에 이에 부정적이었는데, 실상은 김영삼, 김대중 모두 자신이 부통령이 될 가능성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 역시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형태를 선호했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부통령제에 부정적이었다. - P72

사실 우리나라의 대통령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비서실, 내각, 집권당이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움직여야한다. 혼합형 대통령제로 만들어졌고 그 특성이 계속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집권당의 관계, 대통령과 내각, 곧 국무회의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대통령제에서 국회와의 관계는 미국과 같이 ‘입법부 대 행정부‘의 관계라기보다는 ‘정부-여당 대 야당‘이라는 형태로 이어져온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와 집권당이 상호 연계되고 비서실이 이러한 관계를 보조해주는 것이 한국형 대통령제의 작동 방식이었다. - P76

청와대 비서실의 규모와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는 것은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단임 대통령제라는 점이다. 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은 짧은 임기 내에 자신의 치적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싶어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관들에게 맡기거나 관료 조직에 의존하기보다 비서실을 통해 주요 정책을 직접 챙기면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두 번째 이유는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의 선거운동이 캠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해당 후보자의 이미지나 역량뿐만 아니라 소속되어 있는 정당이 투표 결정을 할 때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그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볼 때 당은 그 이전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우리 편과 다른 사람의 편으로 분열된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따라서 당에게 의존하기보다 ‘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선거 캠프를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리고 당선 후에는 정당보다 당선된 대통령과 개인적 관계를 맺은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캠프에 있는 이들은 당연히 청와대 비서실의 요직에 등용된다.
세 번째 이유는 관료제에 대한 불신이다. 과거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관료들이 보기에 대통령은 마치 대기업의 총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되면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5년 단임에 빈번한 정권 교체로 그와 같은 기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후임 대통령이 전임자의정책을 폐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임 정부의 핵심 정책을맡아 열심히 일한 것이 인사 평가 때 ‘전임 정부 사람‘, 심지어 ‘적폐‘로 몰려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국회나 언론이나 이익집단의 눈치를 봐야 할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라면 가능하면 복지부동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말 잘 안 듣는 관료제에 의존하기보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책을 이끌고 나가려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다. - P81

여기에 국가적으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장기적인 국가 과제의 설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의 대통령과 대통령 간의 관계가 ‘단절적‘이기 때문이다. 후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정책을 결코 이어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전임 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정책일수록, 다시 말해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예산을 투입한 정책일수록 후임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기 쉽다. 신임 대통령은 이전의 정권에 대한 ‘부정의 정치‘를 반복한다. - P92

여러가지 대안이 제기되었디만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대안으로 하자는 주장이다. 5년 단임이든 4년중입이든 결국 마찬가지의 대통령제이기 때문이다. ‘제왕적‘이라는 대통령제가 4년 중임이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외에 4년 중임이 적절한 대안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또 있다.
4년 중임제는 사실 8년의 임기를 허용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재선에 실패한다면 4년 단임 대통령이 되고만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못한 경우다. 그리고 현실적으로중임을 허용하면 첫 번째 임기의 가장 큰 목표는 재선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재선을 위해서라면 첫 4년의 주요 정책은 인기영합적인 형태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 장기적국가 과제의 설정보다는 단기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인기영합적 정책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후 재선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4년은 퇴임을 향해서가고 있으므로 지금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지금처럼 정파적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4년 임기를 마친 후 현직 대통령이 다시 출마했을 때 과연 공정한 선거가 가능할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 P95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도권 정치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성장해오면서 경험을쌓고 검증을 받아온 인물보다는 정치적 경험을 갖추지 못한 제도권 정치 외부의 인물에게 더 호감을 갖기 쉽게 되었다. 더욱이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이미지 정치‘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TV 등을 통해 갖게 된 특정 유명인사에 대한 호감, 좋은 인상이 정치적 인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대중적 호감도는 언론사의 여론조사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치적 경험이 없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포퓰리즘populism 에 매우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 - P97

정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제도적인 기관이 바로 국회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자가 모여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모여 협의 및 논의하며 국정을 이끌고 나가는 방식이 대통령 혼자서 모든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의회 중심의 통치 형태, 내각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현실적으로 의회에만 힘을 실어주기 힘든상황이라면 대통령에게 중재적인 역할을 할 수있는 권한을 부여하되, 실질적인 통치는 국회에서 하는 시스템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의회가총리를 선출하여 내각을 구성하게 하고 의회에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각제적 속성을 갖지만, 대통령이 총리 지명이나 법률안 거부권, 혹은 의회해산권 등 총리와 내각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부여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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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와 나디아가 그다음 주, 함께 듣는 수업이 끝난 뒤에 구내식당에서 마침내 커피를 마셨을 때 사이드는 그녀의거의 모든 것을 가리는 보수적인 검은 옷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기도를 안 한다면서 그건 왜 입어요?"
두 사람은 거리의 성난 교통량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2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의 휴대전화는 협상을 시도하는 두 무법자의 무기처럼 그들 사이에 화면을 아래로 향한채 놓여 있었다.
나디아는 빙긋 웃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커피 잔으로 얼굴 아래쪽을 가린 채 말했다.
"남자들이 나한테 까불지 않게요"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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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의 옥중동지요 의형제요 은인이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무력 양성을 주장 실천했다. 그런데 교회 재정관계로 박용만이 이승만을 성토하자, 이승만은 박용만이 평화스러운 미주땅에서 무력 운운한다면서 그를 중상 모략타도하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1918년 3월에 발표한 「시국소감」에서 다음처럼 적고 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오기 전까지는 국민회의 기상이 상쾌하였고, 동포들의 염치와 양심이 아름다워서 안으로 화기가 있고 밖으로 각국 사람의 칭송이 있더니, 오늘의 정세는 동포가 있는 곳마다 싸움인데 호소할 곳이 없고, 외국인들의 치소를 받아서 대외신용이 몰락되었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를 살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것이다. 이승만이 글로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실제는 경우와 공론을 멸시하며, 말로는 도덕을 부르고 행실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교(交)하며, 동포를 대하여서는죽도록 싸우자고 파쟁을 기탄없이 조장하니 이것은 자기의 조그만 지위를 보존하려고 동포로 하여금 서로 충돌하여 망운을 초래케 하는 행동이다.

박용만은 끝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와 국민이 있으면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 - P501

1925년 3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상해 임시정부의정원의 탄핵 내용을 알아보자.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 내용>
탄핵 제안자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곽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강창재, 강경신, 나창현, 김현구,
임득산, 채운개
탄핵 피고자 : 대한민국 임시 대통령(결석)
탄핵 심사자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사법위원
탄핵 심판 내용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행동을 감행하였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책임자 자격이 없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탄없이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켜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법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임시헌법 제4장 제21항에 의하여 탄핵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이승만의 범과 사실>
(1)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임시 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행정을 집정하지 않았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2)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으로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표하여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의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에 반항하였다.
(3)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그 직업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가지고 임시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생각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정신을 말살하였다.
(4)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미주에 앉아서 구미위원부로하여금 재미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리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하지 않아서 재정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5) 임시 대통령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정부를 고립상태로 만들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 파쟁을 계속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 P503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던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은 이들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서도 이를 방조 내지 교사하였고, 사건 이후에도 축소조작 수사로 이들의 범죄사실을 은폐해주었다. 분단과 대립의 역사 속에 숨겨져온 몽양 암살사건의 진상과 그 배후를 암살자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여운형 암살 배후에 노덕술 있었다

"여운형은 우리가 제거했다. 까놓고 얘기해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은 빨갱이 아니었나. 몽양이 누군가, 몽양은 평양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람이다. 당시 몽양의 인기는 대단했다. 몽양이 종로 YMCA에서 강연을 끝내고 길을 걷는데 길 건너편에 가던 사람들까지 몰려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저렇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 왜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되고 2년밖에 못 살아도그 정돈데 만일 그가 6·25 때까지 살았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몽양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면 후회는 없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터리에서의 몽양 여운형 암살당시 제2 저격수로 일제 99식 권총을 겨눴던 김훈(서울 거주)의 회고담이다. 몽양 암살자들 가운데는 그 외에도 사후확인조로 현장에서 저격 성공 여부를 확인했던 김영성, 유용호가 서울에 살아 있으며, 행동 총책이었던 김홍성도 현재 오산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장택상 · 노덕술 등경찰 수뇌가 사건 전모를 알면서도 제1 저격수 이필형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축소조작함으로써 구속되지 않은 채오늘날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 P509

미소공위 미측 대표단의 일원이고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미측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로버트 키니는 뒷날의 회고담에서 "미군정은 중도파를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고 하여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한 이유를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를 몰랐을 리 없는 몽양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오히려 그 의도를 역활용해보자는 생각을가졌던 것 같으며, 평양에 전후 세 차례나 다녀온 주요 목적도 남로당의 좌우합작 반대 움직임에 대응하여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북로당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남북을 통틀은 실질적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양의 이러한 태도는 미군정 당국에는 불만을 샀다. 몽양 사망 직후인 47년 8월 하지는 웨드마이어와의 대담에서
" 여운형은 죽을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 그는 흰백합이 아니라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다. 우리는 정치적 평온을 위해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그는 우리에게 질 것을 약속하고 오히려 이겨버렸다"라고 몽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몽양에 대한 평가가 다를수밖에 없다. 물론 모양의 노선이 모두 다 정확하고 몽양이한 일이 다 옳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좌우를 고집하지 않고 민족을 앞세워 어떻게 해서든지 통일을이룩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몽양이 걸었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의 노선을 새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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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일상에서 만나는 한국 정치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큰 기대감 속에 선출된 대통령은 얼마 지나고 나면 실망과 원망의 대상으로 바뀌고,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눈앞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집착한다.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그것들이 해결될 기미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굳건한 정치적 기득권 구조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들은그들의 답답함을 표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 P11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 ‘국무총리제‘를 채택하는데,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국무총리제였던 임시정부의 통치 형태는 얼마지나지 않아 대통령제로 바뀌는데,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에서도집정관총재로 선임되었고, 이때 국무총리총재로는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이승만은 대외 활동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신 집정관총재를 ‘President‘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결국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무총리를 정부 수반으로 하던 통치 형태로부터 9월 11일 ‘임시 대통령‘을 두는 대통령제로 정체를 바꾸게 되었다. - P23

이후 1925년 4월 7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은 다시 개정되어 ‘국무령제‘로 바뀐다. 1919년 9월 이승만의 주장에 따라 대통령제로 개정되었지만, 1919~1925년 사이에 이승만은 겨우 6개월 정도 상해에 머물렀을 뿐이다. 또한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이 이승만의 외교 활동비로 집행되면서 송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임시정부 측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과거 이승만이 미국의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던 것도 논란이 되었다. 이 때문에 1925년 3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되었다. 그 이후 4월 7일개헌을 통해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바뀌게 된다. - P25

그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임시정부의 내부 조직도 변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 10월 9일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에 의해 정부 형태는 ‘주석제‘로 바뀐다. 이때부터 국무위원회는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주석, 국무위원은 임시의정원에서 선임하며 임시의정원에 대해 책임을 지게 했다. 이전의 임시약헌에서 주석은 호선했지만 1940년 개정된 임시약헌에서 주석은 임시의정원에서 3년임기로 선출하도록 했으며, 임시정부를 대표할 뿐 아니라국군을 통솔하는 등 주석에게 강화된 권한을 부여했다.
제27조 국무위원회의 주석의 직권은 다음과 같다.
1. 국무위원회를 소집한다.
2. 국무위원회의 회의 시에 주석이 된다.
3. 임시정부를 대표한다.
4. 국군을 통감한다.
5. 국무위원의 부서로 법률을 공포하고 명령을 발한다. - P27

다음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안이 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결정된 신탁통치에 가장 격렬한 반대를 가한 것은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이었다.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인 신익희의 이름으로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자, 경찰, 상인 들은 파업하라는 포고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던 소련과 달리 남한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미군정 입장에서는 마치 쿠데타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미군정은 자신들 이외의 어떠한 형태의 권력기관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이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가 반탁과 관련한 포고령을 내리자, 이후 이들의 관계는 매우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신탁통치는 좌익과 우익 간의 이념적 대립이 본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한편으로는 우파 진영 내에서 반탁의 움직임을 통해 정치적인 경쟁자들이 하나의 틀 안에 모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 P32

그러자 이승만은 헌법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 이틀 전 21일 오후 내각책임제 헌법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심각한 정치적 협박이었다. 당시 이승만이 국민들 사이에서 지니고 있던 정치적 권위와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빠진 새 정부의 출범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좌파는 물론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 김규식 등의 중도파가 단독 정부 수립에 불참한 상황에서 이승만마저 참여를 거부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측은 이승만의 요구를받아들이기로 하고 인촌 김성수의 집에 모여 내각제로 되어 있는 헌법의 초안을 대통령제로 수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정안은 순수한 의미의 대통령제가 아니었다. 수정된 헌법은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혼합형적 특 ㆍ성을 보였다.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고, 내각제적 요소인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국회의 국무원 불신임권한은 삭제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에서 4년으로 줄였고 중임을 허용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각각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며, 국무원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기타의 국무위원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중요 국책을 의결하도록 했다.
••••••
또한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행정 각부 장관 또한 국무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행위는 문서로 하며 모든 문서에는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 또한 1944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같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규정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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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후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은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완전해방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의 새 국가는 노동자 · 농민, 일체 인민대중을 위한 국가가 아니면 안 된다.
우리의 새 정권은 전 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잔재세력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봉건적 잔재세력과 반동적 ·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또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적 폭압 아래에서도 백절불굴하고 싸워온 투사들이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앞길에 가로놓여 있는 여하한 곤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모임은 다수결에 따라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하고 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했다.
<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 허헌 · 김규식 · 이관술 · 김구 · 김성수 · 김원봉 · 이용설·홍남표 · 김병로 · 신익희 · 안재홍·이주상. 조만식 · 김기용 · 최익한 · 최용달 · 이강국 · 김용암 · 강진 · 이주하 · 이계림 · 박낙종 · 김태준· 이만규 · 이여성 · 김일성 · 정백 · 김형선 · 이정윤 · 김점권 · 한명찬 · 유옥련. 이승엽·강기덕 · 조두원 · 이기석 · 김철수 · 김상혁 · 정태식 · 조동호 · 박문규 · 박광희 · 김세용 · 강병도 · 이순근 · 최무정 · 장가욱 정진태 ·이순금 · 이상훈 · 서중석. 정종근. 하필원 - P398

<정강>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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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3. 우리는 세계 민주주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시정방침>1.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제도 즉시 폐기.
2.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농민에게 무상분배함.
3.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철도·항만·선박·통신기관 · 금융기관 및 기타 일체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4. 민족적 상공업은 국가의 지도하에서 자유경영을 함.
5. 공업의 급속한 발달을 위한 제 정책의 실시.
6. 언론·출판 · 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7. 18세 이상 남녀 인민민족반역자는 제외함)의 선거권의 향유.
8. 모든 특권을 말살하고 전인민의 절대 평둥.
9. 부인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동권.
10. 8시간 노동제 실시. 만 18세 이하의 소년노동 금지.
만 18세 이하의 청년·노인은 6시간제로
11. 최저임금제 확립,
12. 표준생활에 의한 최저생활의 확보.
13. 노동자·농민·도시 소시민의 생활의 급진적 향상.
14. 실업방지와 그 구제대책의 확립.
15. 평화산업의 신속한 복구와 생활필수품의 확보.
16. 생활필수품의 공정평등한 배급제도 확립.
17. 미곡 기타 일체 강제공출제의 폐지.
18. 징용 · 강제부역. 강제저금의 철폐.
19. 통화정책 및 물가안정대책의 확립.
20. 일체 공렴잡세(雜稅)의 철폐.
21. 고리대금업제도 철폐.
22. 부양·보건·위생·오락·문화시설의 대확충과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23. 일반대중의 문맹퇴치,
24.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제 실시.
25. 민족문화의 자유발전을 위한 신문화정책의 수립.
26. 국가공안대와 국방군의 즉시 편성.
27. 민주주의적 진영인 미국 · 소련·중국·영국과의 긴밀한 제휴를 위하여 노력하며 일체 외부세력의 내정간섭에 절대 반대함. - P402

이 갑작스러운 소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해서 근농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예정되었던 일도 아니며 더욱이 형님이 진심으로 마음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 즉 8월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정부를 수립하여놓으면 미군이 입성한 후에 그것이 기정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적 조직을 이용하여 과감한 항쟁을 시도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에서였다.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몽양은 8월 25일 ‘건준‘ 집행위원들에게 "우리가 할 일이 정부 조직이 아니고, 또 어떠한 기성세력을 형성하려는 것도 아니니.." 라고 똑똑히 말하였고, 바로 2일 전에는 ‘건준‘을 개편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 벽두 인사말 첫마디에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몽양은 이 대회에 대하여 충분한 계획이나 사전 복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수동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이 대회 추진력의 중심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공산당인 것이다. - P404

몽양은 미국인이 어떠한 중상의 말을 옮겨도 그 말을 재료로 조선사람을 평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몽양의 반대 인물을 들어 말할 때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원망이 있다는 뜻을 비치지 않았다. 이것이 몽양이 대인관계에서 스스로 가장 유의하는 점이다. 몽양은 언제나 "자민족 중상은 민족적 치욕을 자청하는 것이요, 자존심을 자상(傷)하는 일이다"고 말했었다.
실로 몽양의 8·15 이전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반항적투쟁이었고 8·15 이후의 투쟁은 미국인에 대한 민족적 자존심의 투쟁이었다. - P424

그 후 이승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는 자존자대적이요 독단적인 언사와 행동만 일삼았다.
11월 2일 천도교 회당에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
‘회‘를 조직하고 전형의원 7명을 뽑은 뒤 이 전형위원이 중앙위원 30명을 선출하여 통일독립을 강구케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런데 공산당의 박헌영이 이 결의안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 회장 안에 한민당 계열 인사를 다수 입장시켜 얻어진 결의안이므로 좋다수결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또 중앙협의회의 명의로 연합군에 보내는 메시지를 이승만이 기초하였는데, 국내외 독립투쟁은 거의 언급이 없고오로지 연합군의 힘으로만 해방되었으니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하여 몽양도수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청함을 받아 며칠 후 돈암장 이승만 처소로 갔다. 거기에는 송진우 - 백남훈 · 김동원·허정 · 원세훈 등 5명이 와있었고 안재홍은 위원이라는데 자리에 없었다.
몽양이 이승만에게 물었다.
"이 다섯 사람은 지방별이나 단체별이냐? 어째서 한민당에서만 5인을 뽑고, 게다가 나와 안재홍은 왜 가입시켰느냐?"
이승만은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렇지 않다. 저 5인이 한민당인 줄은 몰랐다."
몽양은 이승만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여러 차례 초당적 · 거족적 입장을 표방해왔었지만이와 같은 일당 편중의 위원 선발에는 당시 여론이 비등하였다. - P428

인민당(人民黨)은 1945년 11월 12일 경운동 천도교 회당에서 창당되었다. 건국동맹을 모체로 좌우 양익의 극단적인인사들만 제외한 양심적인 중간적 대중정당, 다시 말해서몽양의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정당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궁극의 목표는 무계급사회 실현에 있으나현실에서는 애국적인 자본가나 지주까지도 손을 잡아서 완전한 자주독립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조선에는 진보적 계급의식 계열의 한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과 같이 또한 민족의식 계열의 보수적인한 경향이 있는 것도 솔직히 시인해야 될 것이다. 이 양자는 반민주주의적 일제 잔재의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는상호 제휴해야만 된다. 이것은 현재 조선이 이러한 역사적 단계에 처하여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기성사회 범주에서 다른 사회 범주로 비약하자면 이에 필요한 모든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임에 비하여 우리 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농민·근로인텔리·소시민·양심적 자본가와 지주까지를 포함한 전인민을 대표하는 대중정당인 것이다. - P432

봉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모양이 8.15 직전까지 은거를가장하면서 지하운동을 하던 곳이다. 김용기 · 여운혁 등 이상촌 청년들은 8·15 전 지하운동과 해방 후 건국사업에 불철주야 애쓰는 모양을 이날 하루만이라도 평안히 모셔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정성에서 몽양 몰래 은근히 이 모임을 마련하였다. 아는 사람만 알고 공개적으로는 알리지도 않았고청첩도 내지 않았건만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김진우 · 이걸소 · 허규· 조동호 · 이만규 등 오랜 동지들과허헌 등 ‘건준‘ 사람들과 임시정부의 김원봉 등이 왔다.
여섯 살짜리 김무일 어린이가 제법 제스처를 써가며 "우리들을 귀엽다고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시는 몽양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 라고 축하 인사를 하자 그 깜찍함에 만좌는 탄성을 터뜨렸다.
몽양은 답사에서 "별로 이렇다 할 한 일도 없는 이 사람을 이렇게 회갑까지 차려주고, 또 건국사업이 바쁘신데도 모처럼 많이 찾아주신 데 대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회갑도 차려드리지 못했고…." 하며 울먹이자 사회자 김용기마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몽양 양친은 회갑 전에 별세했음 필자)
씩씩하고 아름다운 이 추억을 봉안 사람들은 오늘도 자랑스러운 전설처럼 간직하고 있다. - P446

미국 기자들은 질문으로 첫마디를 던져왔다.
"사람들이 당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본인의 소감은?"
몽양이 반문한다.
"당신들은 중국의 손문을 아는가?"
"안다."
"손문이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손문은 당시 외래 침략세력에 짓밟혀 있는 중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연로(連露)용공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한국은 현재두 사람의 외국 손님이 안방과 사랑방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해방자요 요인인 것이다. 미국을 끼고 소련은 나쁘다, 소련을 끼고 미국은 나쁘다고 말한다면 되겠는가? 고마운 두 손님을 잘 모시다가 하루바삐 두 손님을 모셔 보내고 우리 손으로 우리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한다.내가 소련에 대해서 말하면 미국을 좋아하는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고, 내가 미국 사람과 말했다 하면 소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친미주의자니 우익이니 말한다. 우리는 두 손님의 좋은 의견을 적절히 받아들여 5천 년 연면히 이어내려온 아름다운 강산에 이상적인 신생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다." - P447

1946년 5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은 공위재개에는 관심도 없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실천작업을 표면화했다. 남한 각지 순회 중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드디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 처음으로 남한 단독정부수립 제일성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 6. 3.)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송남헌, 『해방 30년사』,
까치, 1985) - P450

이보다 앞서 몽양은 1946년 11월 24일 박헌영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남조선노동당 결당식에 초대된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배를 타고 출범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과 같은 배를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도 배에 태워 여러분의 뒤를 따라가려 하고 있다. 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과 같이 있다는 것을 이 마당에서 다시 한 번 명백히 하며 여러분의 새출발을 축하한다." - P462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랭던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인도에서 국제회의가 열리는데 여운형을 한국대표단의 단장으로 추천했으니 곧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몽양과 랭던은 전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상호 우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몽양은 간디의 수제자요, 인도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쳐온 인도 수상 네루를 은근히 존경하고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몽양은랭던의 제의를 선선히 수락하고 다음으로 예정된 부산 강연을 중지하고 상경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보니 좌익 전체가 모양의 인도행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우익진영에서도인도행을 극력 저지하려는 기세가 드세었다.
우익측이 반대하는 이유는 뻔했다. 몽양이 인도 국제회의에 가는 길에 워싱턴에까지 들러 미국정부 요로의 인사들을만나보고 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면, 남한 정치무대에서몽양은 확고부동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생각때문이었다.
한편 좌측의 주장을 보면, 모양을 국제회의에 보내려고하는 것이 다름 아닌 미군정이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그렇게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사람을 몽양에게 보내어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만일 모양이 인도행을 강행한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저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몽양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무렵, 즉 3월 17일 밤에 계동집 담을 넘어 들어와서 몽양 침실 아궁이에 시한폭탄을 넣고 도주한 자가 있었다. 이것이 폭발하는 바람에 구들장이 모조리 뒤집히고 집이 두칸이나 무너졌다. 다행히 몽양은 다른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P466

이렇게 현장 조직이 되어 있었고, 경찰도 이 사실을 알고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론에 쫓긴 경찰이 자기들을 체포하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경찰과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을 지휘한 사람은 신동운이었습니다. 그 이상의배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동운은 일본 해군의 예과(항공병학교) 출신으로 7월 23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할 텐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이 신동운을 윽박질렀다.
"좋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한 명밖에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또 무슨 조건인가?"
"범인 한 사람을 내어놓기는 하되 우리들끼리 기념사진을찍은 후 데려가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경찰은 사진사까지 동원했고, 범인은 한지근한 명만을 연행해갔다.
또한 김두한의 회고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백의사사원 자격은 이북에서 월남한 동포로 북한 괴뢰정권에서 가장 심한 학대를 받은 유족들로만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나는 남한 사람으로단 한 사람의 고문이었다. 백의사는 결사대를 뽑았다. 당시18세의 한지근 군이 선발되었다. 여씨를 사살하기 전날 밤나는 한 군에게 권총을 수교하고 악수를 했다. 일본장교용권총 한 자루를 내어주고 넘버를 내수첩에 적어놓았다. 얼마 후 나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에게 불려갔다. 그분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어주라고 했는데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19세라던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李炯)으로 나이는 21세, 고향은 평북 영변으로 20일전월남했었다. (『월간조선』,
「정치테러리스트 김지웅, 1982년 12월호)신동운은 함남 홍원태생으로, 해방 후 오정방(일본 관동군 특무, 8·15 후 건국청년회장)을 비애국자라고 저격한 장본인이다. 1974년 김홍성 등이 한지근의 공범이라고 자수했을 때 자기의 공을 가로채는 자들이라고 분개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었다. 소생 후 침례교 목사가 되어 광신적으로활동하다가 1982년 봄에 사망했다. 그는 생존시 하나님이자기의 담력을 길러주기 위하여 테러 행위를 하게 하였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모양 살해범의 교사자임을 공언했다고 한다. 그는 대한에서 ‘한‘을, 안중근에서 ‘근‘을 따와 이필형을 한지근(根智根)으로 개명해줬다고 말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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