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후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은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완전해방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의 새 국가는 노동자 · 농민, 일체 인민대중을 위한 국가가 아니면 안 된다.
우리의 새 정권은 전 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잔재세력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봉건적 잔재세력과 반동적 ·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또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적 폭압 아래에서도 백절불굴하고 싸워온 투사들이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앞길에 가로놓여 있는 여하한 곤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모임은 다수결에 따라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하고 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했다.
<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 허헌 · 김규식 · 이관술 · 김구 · 김성수 · 김원봉 · 이용설·홍남표 · 김병로 · 신익희 · 안재홍·이주상. 조만식 · 김기용 · 최익한 · 최용달 · 이강국 · 김용암 · 강진 · 이주하 · 이계림 · 박낙종 · 김태준· 이만규 · 이여성 · 김일성 · 정백 · 김형선 · 이정윤 · 김점권 · 한명찬 · 유옥련. 이승엽·강기덕 · 조두원 · 이기석 · 김철수 · 김상혁 · 정태식 · 조동호 · 박문규 · 박광희 · 김세용 · 강병도 · 이순근 · 최무정 · 장가욱 정진태 ·이순금 · 이상훈 · 서중석. 정종근. 하필원 - P398

<정강>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
.
고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3. 우리는 세계 민주주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시정방침>1.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제도 즉시 폐기.
2.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농민에게 무상분배함.
3.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철도·항만·선박·통신기관 · 금융기관 및 기타 일체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4. 민족적 상공업은 국가의 지도하에서 자유경영을 함.
5. 공업의 급속한 발달을 위한 제 정책의 실시.
6. 언론·출판 · 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7. 18세 이상 남녀 인민민족반역자는 제외함)의 선거권의 향유.
8. 모든 특권을 말살하고 전인민의 절대 평둥.
9. 부인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동권.
10. 8시간 노동제 실시. 만 18세 이하의 소년노동 금지.
만 18세 이하의 청년·노인은 6시간제로
11. 최저임금제 확립,
12. 표준생활에 의한 최저생활의 확보.
13. 노동자·농민·도시 소시민의 생활의 급진적 향상.
14. 실업방지와 그 구제대책의 확립.
15. 평화산업의 신속한 복구와 생활필수품의 확보.
16. 생활필수품의 공정평등한 배급제도 확립.
17. 미곡 기타 일체 강제공출제의 폐지.
18. 징용 · 강제부역. 강제저금의 철폐.
19. 통화정책 및 물가안정대책의 확립.
20. 일체 공렴잡세(雜稅)의 철폐.
21. 고리대금업제도 철폐.
22. 부양·보건·위생·오락·문화시설의 대확충과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23. 일반대중의 문맹퇴치,
24.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제 실시.
25. 민족문화의 자유발전을 위한 신문화정책의 수립.
26. 국가공안대와 국방군의 즉시 편성.
27. 민주주의적 진영인 미국 · 소련·중국·영국과의 긴밀한 제휴를 위하여 노력하며 일체 외부세력의 내정간섭에 절대 반대함. - P402

이 갑작스러운 소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해서 근농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예정되었던 일도 아니며 더욱이 형님이 진심으로 마음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 즉 8월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정부를 수립하여놓으면 미군이 입성한 후에 그것이 기정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적 조직을 이용하여 과감한 항쟁을 시도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에서였다.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몽양은 8월 25일 ‘건준‘ 집행위원들에게 "우리가 할 일이 정부 조직이 아니고, 또 어떠한 기성세력을 형성하려는 것도 아니니.." 라고 똑똑히 말하였고, 바로 2일 전에는 ‘건준‘을 개편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 벽두 인사말 첫마디에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몽양은 이 대회에 대하여 충분한 계획이나 사전 복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수동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이 대회 추진력의 중심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공산당인 것이다. - P404

몽양은 미국인이 어떠한 중상의 말을 옮겨도 그 말을 재료로 조선사람을 평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몽양의 반대 인물을 들어 말할 때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원망이 있다는 뜻을 비치지 않았다. 이것이 몽양이 대인관계에서 스스로 가장 유의하는 점이다. 몽양은 언제나 "자민족 중상은 민족적 치욕을 자청하는 것이요, 자존심을 자상(傷)하는 일이다"고 말했었다.
실로 몽양의 8·15 이전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반항적투쟁이었고 8·15 이후의 투쟁은 미국인에 대한 민족적 자존심의 투쟁이었다. - P424

그 후 이승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는 자존자대적이요 독단적인 언사와 행동만 일삼았다.
11월 2일 천도교 회당에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
‘회‘를 조직하고 전형의원 7명을 뽑은 뒤 이 전형위원이 중앙위원 30명을 선출하여 통일독립을 강구케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런데 공산당의 박헌영이 이 결의안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 회장 안에 한민당 계열 인사를 다수 입장시켜 얻어진 결의안이므로 좋다수결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또 중앙협의회의 명의로 연합군에 보내는 메시지를 이승만이 기초하였는데, 국내외 독립투쟁은 거의 언급이 없고오로지 연합군의 힘으로만 해방되었으니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하여 몽양도수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청함을 받아 며칠 후 돈암장 이승만 처소로 갔다. 거기에는 송진우 - 백남훈 · 김동원·허정 · 원세훈 등 5명이 와있었고 안재홍은 위원이라는데 자리에 없었다.
몽양이 이승만에게 물었다.
"이 다섯 사람은 지방별이나 단체별이냐? 어째서 한민당에서만 5인을 뽑고, 게다가 나와 안재홍은 왜 가입시켰느냐?"
이승만은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렇지 않다. 저 5인이 한민당인 줄은 몰랐다."
몽양은 이승만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여러 차례 초당적 · 거족적 입장을 표방해왔었지만이와 같은 일당 편중의 위원 선발에는 당시 여론이 비등하였다. - P428

인민당(人民黨)은 1945년 11월 12일 경운동 천도교 회당에서 창당되었다. 건국동맹을 모체로 좌우 양익의 극단적인인사들만 제외한 양심적인 중간적 대중정당, 다시 말해서몽양의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정당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궁극의 목표는 무계급사회 실현에 있으나현실에서는 애국적인 자본가나 지주까지도 손을 잡아서 완전한 자주독립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조선에는 진보적 계급의식 계열의 한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과 같이 또한 민족의식 계열의 보수적인한 경향이 있는 것도 솔직히 시인해야 될 것이다. 이 양자는 반민주주의적 일제 잔재의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는상호 제휴해야만 된다. 이것은 현재 조선이 이러한 역사적 단계에 처하여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기성사회 범주에서 다른 사회 범주로 비약하자면 이에 필요한 모든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임에 비하여 우리 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농민·근로인텔리·소시민·양심적 자본가와 지주까지를 포함한 전인민을 대표하는 대중정당인 것이다. - P432

봉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모양이 8.15 직전까지 은거를가장하면서 지하운동을 하던 곳이다. 김용기 · 여운혁 등 이상촌 청년들은 8·15 전 지하운동과 해방 후 건국사업에 불철주야 애쓰는 모양을 이날 하루만이라도 평안히 모셔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정성에서 몽양 몰래 은근히 이 모임을 마련하였다. 아는 사람만 알고 공개적으로는 알리지도 않았고청첩도 내지 않았건만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김진우 · 이걸소 · 허규· 조동호 · 이만규 등 오랜 동지들과허헌 등 ‘건준‘ 사람들과 임시정부의 김원봉 등이 왔다.
여섯 살짜리 김무일 어린이가 제법 제스처를 써가며 "우리들을 귀엽다고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시는 몽양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 라고 축하 인사를 하자 그 깜찍함에 만좌는 탄성을 터뜨렸다.
몽양은 답사에서 "별로 이렇다 할 한 일도 없는 이 사람을 이렇게 회갑까지 차려주고, 또 건국사업이 바쁘신데도 모처럼 많이 찾아주신 데 대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회갑도 차려드리지 못했고…." 하며 울먹이자 사회자 김용기마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몽양 양친은 회갑 전에 별세했음 필자)
씩씩하고 아름다운 이 추억을 봉안 사람들은 오늘도 자랑스러운 전설처럼 간직하고 있다. - P446

미국 기자들은 질문으로 첫마디를 던져왔다.
"사람들이 당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본인의 소감은?"
몽양이 반문한다.
"당신들은 중국의 손문을 아는가?"
"안다."
"손문이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손문은 당시 외래 침략세력에 짓밟혀 있는 중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연로(連露)용공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한국은 현재두 사람의 외국 손님이 안방과 사랑방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해방자요 요인인 것이다. 미국을 끼고 소련은 나쁘다, 소련을 끼고 미국은 나쁘다고 말한다면 되겠는가? 고마운 두 손님을 잘 모시다가 하루바삐 두 손님을 모셔 보내고 우리 손으로 우리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한다.내가 소련에 대해서 말하면 미국을 좋아하는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고, 내가 미국 사람과 말했다 하면 소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친미주의자니 우익이니 말한다. 우리는 두 손님의 좋은 의견을 적절히 받아들여 5천 년 연면히 이어내려온 아름다운 강산에 이상적인 신생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다." - P447

1946년 5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은 공위재개에는 관심도 없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실천작업을 표면화했다. 남한 각지 순회 중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드디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 처음으로 남한 단독정부수립 제일성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 6. 3.)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송남헌, 『해방 30년사』,
까치, 1985) - P450

이보다 앞서 몽양은 1946년 11월 24일 박헌영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남조선노동당 결당식에 초대된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배를 타고 출범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과 같은 배를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도 배에 태워 여러분의 뒤를 따라가려 하고 있다. 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과 같이 있다는 것을 이 마당에서 다시 한 번 명백히 하며 여러분의 새출발을 축하한다." - P462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랭던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인도에서 국제회의가 열리는데 여운형을 한국대표단의 단장으로 추천했으니 곧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몽양과 랭던은 전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상호 우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몽양은 간디의 수제자요, 인도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쳐온 인도 수상 네루를 은근히 존경하고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몽양은랭던의 제의를 선선히 수락하고 다음으로 예정된 부산 강연을 중지하고 상경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보니 좌익 전체가 모양의 인도행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우익진영에서도인도행을 극력 저지하려는 기세가 드세었다.
우익측이 반대하는 이유는 뻔했다. 몽양이 인도 국제회의에 가는 길에 워싱턴에까지 들러 미국정부 요로의 인사들을만나보고 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면, 남한 정치무대에서몽양은 확고부동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생각때문이었다.
한편 좌측의 주장을 보면, 모양을 국제회의에 보내려고하는 것이 다름 아닌 미군정이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그렇게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사람을 몽양에게 보내어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만일 모양이 인도행을 강행한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저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몽양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무렵, 즉 3월 17일 밤에 계동집 담을 넘어 들어와서 몽양 침실 아궁이에 시한폭탄을 넣고 도주한 자가 있었다. 이것이 폭발하는 바람에 구들장이 모조리 뒤집히고 집이 두칸이나 무너졌다. 다행히 몽양은 다른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P466

이렇게 현장 조직이 되어 있었고, 경찰도 이 사실을 알고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론에 쫓긴 경찰이 자기들을 체포하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경찰과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을 지휘한 사람은 신동운이었습니다. 그 이상의배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동운은 일본 해군의 예과(항공병학교) 출신으로 7월 23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할 텐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이 신동운을 윽박질렀다.
"좋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한 명밖에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또 무슨 조건인가?"
"범인 한 사람을 내어놓기는 하되 우리들끼리 기념사진을찍은 후 데려가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경찰은 사진사까지 동원했고, 범인은 한지근한 명만을 연행해갔다.
또한 김두한의 회고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백의사사원 자격은 이북에서 월남한 동포로 북한 괴뢰정권에서 가장 심한 학대를 받은 유족들로만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나는 남한 사람으로단 한 사람의 고문이었다. 백의사는 결사대를 뽑았다. 당시18세의 한지근 군이 선발되었다. 여씨를 사살하기 전날 밤나는 한 군에게 권총을 수교하고 악수를 했다. 일본장교용권총 한 자루를 내어주고 넘버를 내수첩에 적어놓았다. 얼마 후 나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에게 불려갔다. 그분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어주라고 했는데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19세라던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李炯)으로 나이는 21세, 고향은 평북 영변으로 20일전월남했었다. (『월간조선』,
「정치테러리스트 김지웅, 1982년 12월호)신동운은 함남 홍원태생으로, 해방 후 오정방(일본 관동군 특무, 8·15 후 건국청년회장)을 비애국자라고 저격한 장본인이다. 1974년 김홍성 등이 한지근의 공범이라고 자수했을 때 자기의 공을 가로채는 자들이라고 분개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었다. 소생 후 침례교 목사가 되어 광신적으로활동하다가 1982년 봄에 사망했다. 그는 생존시 하나님이자기의 담력을 길러주기 위하여 테러 행위를 하게 하였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모양 살해범의 교사자임을 공언했다고 한다. 그는 대한에서 ‘한‘을, 안중근에서 ‘근‘을 따와 이필형을 한지근(根智根)으로 개명해줬다고 말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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