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은 이승만의 옥중동지요 의형제요 은인이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무력 양성을 주장 실천했다. 그런데 교회 재정관계로 박용만이 이승만을 성토하자, 이승만은 박용만이 평화스러운 미주땅에서 무력 운운한다면서 그를 중상 모략타도하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1918년 3월에 발표한 「시국소감」에서 다음처럼 적고 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오기 전까지는 국민회의 기상이 상쾌하였고, 동포들의 염치와 양심이 아름다워서 안으로 화기가 있고 밖으로 각국 사람의 칭송이 있더니, 오늘의 정세는 동포가 있는 곳마다 싸움인데 호소할 곳이 없고, 외국인들의 치소를 받아서 대외신용이 몰락되었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를 살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것이다. 이승만이 글로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실제는 경우와 공론을 멸시하며, 말로는 도덕을 부르고 행실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교(交)하며, 동포를 대하여서는죽도록 싸우자고 파쟁을 기탄없이 조장하니 이것은 자기의 조그만 지위를 보존하려고 동포로 하여금 서로 충돌하여 망운을 초래케 하는 행동이다.
박용만은 끝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와 국민이 있으면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 - P501
1925년 3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상해 임시정부의정원의 탄핵 내용을 알아보자.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 내용> 탄핵 제안자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곽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강창재, 강경신, 나창현, 김현구, 임득산, 채운개 탄핵 피고자 : 대한민국 임시 대통령(결석) 탄핵 심사자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사법위원 탄핵 심판 내용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행동을 감행하였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책임자 자격이 없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탄없이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켜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법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임시헌법 제4장 제21항에 의하여 탄핵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이승만의 범과 사실> (1)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임시 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행정을 집정하지 않았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2)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으로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표하여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의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에 반항하였다. (3)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그 직업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가지고 임시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생각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정신을 말살하였다. (4)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미주에 앉아서 구미위원부로하여금 재미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리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하지 않아서 재정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5) 임시 대통령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정부를 고립상태로 만들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 파쟁을 계속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 P503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던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은 이들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서도 이를 방조 내지 교사하였고, 사건 이후에도 축소조작 수사로 이들의 범죄사실을 은폐해주었다. 분단과 대립의 역사 속에 숨겨져온 몽양 암살사건의 진상과 그 배후를 암살자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여운형 암살 배후에 노덕술 있었다
"여운형은 우리가 제거했다. 까놓고 얘기해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은 빨갱이 아니었나. 몽양이 누군가, 몽양은 평양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람이다. 당시 몽양의 인기는 대단했다. 몽양이 종로 YMCA에서 강연을 끝내고 길을 걷는데 길 건너편에 가던 사람들까지 몰려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저렇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 왜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되고 2년밖에 못 살아도그 정돈데 만일 그가 6·25 때까지 살았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몽양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면 후회는 없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터리에서의 몽양 여운형 암살당시 제2 저격수로 일제 99식 권총을 겨눴던 김훈(서울 거주)의 회고담이다. 몽양 암살자들 가운데는 그 외에도 사후확인조로 현장에서 저격 성공 여부를 확인했던 김영성, 유용호가 서울에 살아 있으며, 행동 총책이었던 김홍성도 현재 오산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장택상 · 노덕술 등경찰 수뇌가 사건 전모를 알면서도 제1 저격수 이필형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축소조작함으로써 구속되지 않은 채오늘날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 P509
미소공위 미측 대표단의 일원이고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미측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로버트 키니는 뒷날의 회고담에서 "미군정은 중도파를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고 하여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한 이유를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를 몰랐을 리 없는 몽양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오히려 그 의도를 역활용해보자는 생각을가졌던 것 같으며, 평양에 전후 세 차례나 다녀온 주요 목적도 남로당의 좌우합작 반대 움직임에 대응하여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북로당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남북을 통틀은 실질적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양의 이러한 태도는 미군정 당국에는 불만을 샀다. 몽양 사망 직후인 47년 8월 하지는 웨드마이어와의 대담에서 " 여운형은 죽을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 그는 흰백합이 아니라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다. 우리는 정치적 평온을 위해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그는 우리에게 질 것을 약속하고 오히려 이겨버렸다"라고 몽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몽양에 대한 평가가 다를수밖에 없다. 물론 모양의 노선이 모두 다 정확하고 몽양이한 일이 다 옳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좌우를 고집하지 않고 민족을 앞세워 어떻게 해서든지 통일을이룩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몽양이 걸었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의 노선을 새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 P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