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또한 사신 일행이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판첸이준 불상을 제외한 나머지 선물을 죄다 역관들에게 줘버렸다고 썼다. 그런데 역관들도 이를 마치 분뇨처럼 더럽게 여겼다고 한다. 역관들은 판첸의 선물들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부들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마부들조차 더러운 돈이라며 그 은으로는 술 한 잔도 사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깨끗하다면 깨끗할 것이나, 남의 풍속으로 보자면 촌놈의 어리석음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지원은 불상을 준 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지 않는 경직된 태도에 일침을 가하긴 했지만, 이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박지원이 기대한 것은 사신 일행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판첸의 선물에 관한 한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이었음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으리라. - P265
앞서 박명원이 1783년 여름까지도 1780 년의 봉불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듬해인 1784년 음력 시월에 박명원은 사은행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은행은 건륭제가 정조의 첫아들인 문효세자의 책봉을 흔쾌히 승인해준 데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특별 사행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사행에 수년 전 봉불지사 소동을 일으켰던 박명원이 임명되었건만 아무런 물의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박명원 자신도 1783년 여름과 달리 지난 과오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박명원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어 1785년 1월에 해당하는 정조 8년의 음력 십이월 11일에 베이징을 향해 떠남으로써, 봉불지사의 오명을 쓰며 물러나야 했던 외교 무대로 복귀하였다. ••••••• 뚜렷한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도는 없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개한 박명원 변호론이 1783년 여름과 1784년 겨울의 차이를 낳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이 1780 년의 사행에서 돌아와 자료의 정리 및 편집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를 일단 탈고한 시점은 1783년경으로 추정되니 말이다. - P238
여기서 좀 ‘비딱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찰십륜포」의 이야기들이 정말 박지원이 강조한 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요즘으로 치면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 『열하일기』의 「찰십륜포」 등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두고 이렇게 ‘발칙한‘ 질문을 던진 경우는 아마도 없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부터는 몸소 목도한 바를 기록하였다는 박지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시시콜콜 따져볼 작정인데, 발칙하기로는 결론 역시 질문에 뒤지지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미리 밝혀두자면 이렇다. 「찰십륜포에 실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사실 ‘팔월 11일‘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 관람을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팔월 14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박지원은 두 사람의 만남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기껏해야 박명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역시 전해 들은 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박지원의 말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였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경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팔월 11일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한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곤란 불상 이야기‘ 바로 다음에 팔월 14일에 있었던 ‘건륭과 판첸의 만남‘에 대해 ‘전해 들은 바‘를 접속함으로써 박지원이 박명원을 위한 변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 P242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와 관련하여 유념할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박지원은 이날 숙소를 떠난 적이 없다. 12일 13일과 마찬가지로 종인 신분의 박지원에게는 입궐이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이날 오후에 있었다는 세 사신의 ‘대성전 배알‘은 구월 17일 장계」의 내용과 모순이다. 장계에 따르면 이날 삼사는 종일 궐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날 오후 삼사가 열하 태학의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를 배알했다는 「태학유관록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허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박지원이 삼사의 대성전 배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다분히 박명원 일행에 대한 봉불 혐의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를 모신태학에 6박 7일을 머물렀는데도 대성전 참배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박명원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셋째,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에서는 이날 사신의 동정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두드러진 활동이었던 불꽃놀이 구경 사실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찰십륜포」의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던 날짜를 밝히지 않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박지원이 팔월 14일의 일기에서 그날 박명원이 불꽃놀이를 구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찰십륜포에 묘사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 팔월 11일이 아니라 팔월 14일의 일이었음을 당장 파악했을 것이다. 또한 「찰십륜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만은 확실히 박지원이 목도한 바가 아니라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P247
그러나 박지원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는 사신 일행의 불꽃놀이 구경 사실에 관하여 침묵했다. 아니, 그저 침묵만 지킨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박명원 등이 피서산장에서 불꽃놀이 등을 즐기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간대를 열하 태학의 대성전을 참배했다는 정황상 신뢰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채웠다. 불꽃놀이 자체가 주제인 「매화포기」에서도 박지원은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의 독자는 「찰십륜에 묘사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을 영락없이 팔월 11일의 일로 읽게 된다. 또한 박지원은 「찰십륜포」의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에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 곧바로 "황제가 (피서산장) 후원에 매화포를 놓고는 사신을 불러 (피서산장으로 들어와서 보게 하였다."라고 썼다. 비록 자신이 박명원 등과 동행했다고 명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팔월 11일 오전 판첸을 만날 때부터 줄곧 박명원과 행동을 함께하는 박지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독자는 불꽃놀이 현장에도 박지원이 당연히 동석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불꽃놀이가 14일의 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없다. 14일에 박지원은 줄곧 태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48
또한 박지원은 여기에서 강하고 사나운 토번을 황제가 몹시두려워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서번西藩(문맥상 티베트)은 강하고 사나우나 황교를 심히 두려워하므로 황제가 그 법사를 우대한다고 하였다. 즉 박지원은 청이 판첸을 우대한 이유를 티베트의 군사적 위협 가능성에서 찾았다. 이는 박지원이 과거 토번 왕국이 당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였다는 역사의 기억을 호출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몽골·티베트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 부족을 노정한 것으로, 열하에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박명원 일행과 함께 베이징에 다녀온 노이점盧以漸(1720~1788)이 "몽골 사람들을 누르기 위해" 그들이 앙모하는 판첸을 특별히 초치招致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나, 1780년 연말에 동지사의 부사로 떠나 이듬해 귀국한 신대승 (1731~?)이 "몽골을 두려워해서" 건륭제가 판첸을 우대하였다고 보고한 것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 P255
팔월 11일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군기대신이 와서 조선에 사찰과 관제묘가 있는지 묻는 장면도 달리 읽힌다. 구월 17일 장계에는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팔월 9일 통역관의 질문 장면이나 팔월 10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군기장경이 와서 『열하일기』 에서와 마찬가지 질문을 던진 것을 황제를 알현한 후의 일로 소개했다. 알현 전과 알현 후로 갈리긴 하나 내용은 비슷한 장면이다. 그러나 문맥상 의미는 적잖이 다르다. 장계의 문맥에서 군기장경의 질문은 우연히 불쑥 던진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에『열하일기』의 「태학유관록은 이미 팔월 10일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데 더하여 황제 알현 전에 사찰과 관제묘에 대한 질문을 배치함으로써, 조선 사신을 판첸과 만나게 하려는 건륭제의 의지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야기 소재의 취사선택과 배치 · 구성에서 관찰되는 박지원의 비범한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열하일기』를 역사학적 사료의 비판 대상으로 올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순간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는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간접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뜻하지 않은 봉불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박명원과 그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 P289
박명원 일행이 사행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 돌아온 것은 1780년 음력 시월 27일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시월 28일에는 무림군 이당이 이끄는 사은사 일행이 서울을 떠났고, 그로부터 겨우 사흘 뒤인 십일월 2일에는 서유경 등 동지사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였다. 사은사 이당 일행은 세 통의 표문을 가져갔다. 첫 번째는 건륭제가 박명원을 통해 정조에게 보낸 비단 선물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밝힌 사은 표문이었다. 두 번째는 박명원 일행에 대한 각별한 우대에 감사한다는 표문이었고, 세 번째는 앞으로는 영원토록 사은방물을 보내지 말라고 한 황제의 조치에 사은하는 표문이었다. •••••• 열하에서 박명원 일행을 접견한 다음 날인 팔월 12일, 건륭제는 앞으로 조선에서 사은의 뜻을 밝혀야 할 때에는 표문만 보내고 방물은 일절 보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비추어 보자면, 황제가 정조에게 보낸 특별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표문에 방물을 보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은 방물을 보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에 감사한다면서 굳이 사은 방물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형상 황명을 거역하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정조는 별도의 자문을 준비하여 앞으로 영원토록 혜택을 입을 터이기에 단 한 차례라도 감사 표시는 해야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십이월 14일 이당 일행으로부터 표문과 방물을 접수한 청의 예부는 그다음날 정조가 보낸 별도 자문의 내용을 건륭제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십이월 22일에 이번에 보내온 사은 방물은 받지 말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챙겨온 방물을 다시 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물을 특별히 받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특별 선물로 안장을 갖춘 말과 비단 그리고 담비 가죽 등을 조선에 보내라고 하였다. 아울러 앞으로는 결코 사은 방물을 조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P267
결론적으로 1780년 건륭제의 칠순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파견한 세 차례의 사행은 정조 연간 대청 외교의 경향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정조는 분명 청나라를 상대로 자발적인 성의 표시를 반복했다. 만약 정조가 영조처럼 청을 조만간 망할지도 모르는, 또는 망해야 마땅한 오랑캐 국가로 여겼다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는 청을 사대 외교의 합법적 상대가 되는 대국 또는 적어도 우호적 관계를 다질 필요가 있는 이웃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는 일이었다. - P278
1782년 초의 반전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매년 빡빡한 공식 일정이 조선 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특별히 베푼 은혜로 간주되었다. 청의 예부는 매번 특별한 은혜의 내역을 문서로 만들어 조선에 알렸다. 조선의 국왕은 다음 동지사 편에 사은의 표문을 보내 특별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밝혔다 (방물은 1780년 건륭의 지시에 따라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 1782년 초에 이르러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청이 이제는 우리를 각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라며 매우 반겼다. 요즘으로 치면, 양국 외교 관계의 비약적인 증진 또는 격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서 밝히듯이 사실 이 문제는 단지 조선과 청 두 나라만의 관계 증진에 국한하여 접근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시각을 중시하여 문제를 조선의 대청 외교 관계라는 맥락에 국한해서 보자면, 건륭제의 조선 사신에 대한 ‘특‘은 일단 조선 국왕 정조의 ‘성의‘에 대한 화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90
황제께서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말로 국왕에게 돌아가서 안부를 물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직접 너희 나라 국왕이 세자를 얻었다는 자문을 보니 내 마음이 몹시 기뺐다."라고 하므로 저희는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화신의 안내로 원래의 반열로 돌아왔는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 있기도 전에 황제께서 먼저 세자라고 호칭하므로 좌우에서 호위하는 대신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외국 국왕의 득남 소식에 이토록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역사상 전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정조로서도 황제의 득남 축하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정조는 ‘특별히 사례하는‘ 뜻을 담은 문서와 방물을 준비하여, 황인점 일행과 함께 청에 갔다가 막 돌아오고 있던 박제가에게 발길을 돌려 문서와 방물을 들고 이미 베이징을 향해 떠난 동지사 일행을 뒤쫓아가게 하였다. - P299
종번宗藩의 대응 개념이라는 측면을 중시한다면 외번外藩이라는 말은 황족이 아니면서 왕작을 받은 모든 존재에게 쓸 수 있다. 조선의 국왕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을 외번의 하나로 꼽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동번東藩‘이라는 말은 조선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명·청의 황제들과 조선의 국왕들은 양국의 관계가 매우 친밀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쌍방 모두 조선을 가리켜 외번이니 동번이니 하는 말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였을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조선은 분명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청나라에는 절대로 외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외번이 존재하였다. 이들 ‘외국이 아닌 외번‘은 기본적으로 몽골 출신의 왕공 작위 소지자를 가리키는데, 그 기원은 청의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P302
청나라에서 외번이라는 말이 원래 ‘바깥 지방의 몽고tulergi goloi monggo‘라는 만주어의 번역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청 초의 외번은 곧 몽골 유목민 집단의 수령들을 의미하였다. 후금-청에 복속한 유목민들 중에는 청의 팔기八旗에 편입된 자들도 있었지만, 복속 이후에도 옛날과 다름없이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유목 생활을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깥 지방의 몽고‘였다. 홍타이지는 이들 집단의 수장들에게 황족과 마찬가지로 왕공의 높은 작위를 부여하여 우대하였고, 그들이 원래 거느리던 유목 집단에 대한 관할권도 인정해주었다. 몽골 왕공들은 왕공작위와 자기집단에 대한 관할권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여기에다가 앞서 말한 방식의 혼인을 통해 청 황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떤 학자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청 일대에 걸쳐 황실이 몽골 왕공의 딸을 며느리로 들인 것이 163회, 몽골 왕공의 아들을 사위로 삼은 것이 432회를 헤아릴 정도였다. - P307
청의 황제가 외번 왕공에게 ‘연반조근‘ 의무를 부과하다 청 황제와 외번 왕공의 끈끈한 관계는 단지 혼인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더라도 멀리 초원으로 떠난 뒤 죽을 때까지 친정나들이를 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그 딸이 낳은 외손주 역시 외가를 찾지 않는다면, 혼인 관계 및 그로 인해 형성된 혈연관계는 실질적인 의미를 잃기 십상이다. ‘Out of sight, out ofmind‘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은 자주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옛날 한이나 당의 황제들이 주변 이민족의 수장들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데에는 이 같은 원리도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의 황제들은 외번의 왕공들을 자주 만나 유대를 확인하고 강화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년 연말연시의 ‘조근‘이었다. 조근이라는 말은 원래 제후가 주기적으로 주나라 천자의 조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근이라는 개념 자체는 중국의 역사에서 낯선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외번의 조근‘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초원 유목민 집단 수장들의 정기적인 조근은 과거 명과 같은 한인 왕조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청조 고유의 제도이자 전통으로 이해된다. - P308
이처럼 건륭제는 조선에만 사상 초유의 특은을 베푼다는 혐의가 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바꾸어 말하자면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베푼다는 일시동인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3대 연회의 문호를 외국 사신들에게 개방하였다. 이제 매년 연말연시 베이징의 황성과 원명원을 무대로 거행되던 3대 연회의 의미는 종래의 외번 왕공들을 위한 잔치라는 데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3대 연회는 이제 국내의 무슬림 벡과 금천의 토사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까지 포함하는, 말하자면 천하 만국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건륭의 ‘성세‘를 기념하고 즐기는 연례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 P325
홍경모의 발언과 같은 친청 언설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북학 담론이 문자화되어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1780 년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사조가 더욱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1780 년대 이후 조선 사인들의 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듯하다. 1780년대 이후 대청 인식의 변화를 두고,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명나라 숭정제의 비극적 최후로부터 약 150년이나 지난 때이므로 오랑캐 침략자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상의 한쪽 측면만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청나라가 그들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혈통이 아니라 덕의 유무를 따져야 한다는 논리와 정확히 공명하고 있다. 치욕과 분노의 기억은 세월의 침식으로 소실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실된 기억의 빈자리에 이처럼 적극적인 친청 언설이 저절로 들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청나라 하면 오랑캐 침략자라며 이를 갈던 조선에서, 1830년경 홍경모의 경우처럼 정치적 정당성을 온전하게 갖춘 ‘대공지정‘의 정치체로 청을 찬미하는 언설이 등장하게 만든 토대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지금까지 살펴본 1780년대 이후 건륭제가 추진한 정치적 기획이 직접 또는 간접의 효과를 거둔 결과로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 - P333
홍경모가 연행을 경험한 도광 10년경은 건륭제의 기획이 이미 50년 가까운 실천의 역사를 쌓은 때였다. 조선의 관료들은 동지사의 세 사신만 헤아려도 연인원로 1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건륭제의 기획을 몸소 경험한 것으로 계산된다. 청조의 환대와 청궁정의 화려함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조선의 사인들은 자신들의 견문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글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 적어도 연행을 경험한 인사들과 그들의 견문을 공유한 주변 사람들의 대청 인식은 친청의 색채를 점점 더 짙게 띠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잘못이 없다면, 금천의 토사들을 두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면 반드시 (자신들의 견문을 )서로 서로에게 알리고 이야기해서 한마음으로 향화向化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 건륭제는, 비록 청나라는 역사 속의 모든 왕조처럼 멸망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획이 모두 헛된 노력에 그친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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