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또한 사신 일행이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판첸이준 불상을 제외한 나머지 선물을 죄다 역관들에게 줘버렸다고 썼다. 그런데 역관들도 이를 마치 분뇨처럼 더럽게 여겼다고 한다. 역관들은 판첸의 선물들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부들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마부들조차 더러운 돈이라며 그 은으로는 술 한 잔도 사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깨끗하다면 깨끗할 것이나, 남의 풍속으로 보자면 촌놈의 어리석음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지원은 불상을 준 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지 않는 경직된 태도에 일침을 가하긴 했지만, 이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박지원이 기대한 것은 사신 일행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판첸의 선물에 관한 한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이었음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으리라. - P265

앞서 박명원이 1783년 여름까지도 1780 년의 봉불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듬해인 1784년 음력 시월에 박명원은 사은행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은행은 건륭제가 정조의 첫아들인 문효세자의 책봉을 흔쾌히 승인해준 데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특별 사행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사행에 수년 전 봉불지사 소동을 일으켰던 박명원이 임명되었건만 아무런 물의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박명원 자신도 1783년 여름과 달리 지난 과오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박명원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어 1785년 1월에 해당하는 정조 8년의 음력 십이월 11일에 베이징을 향해 떠남으로써, 봉불지사의 오명을 쓰며 물러나야 했던 외교 무대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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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도는 없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개한 박명원 변호론이 1783년 여름과 1784년 겨울의 차이를 낳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이 1780 년의 사행에서 돌아와 자료의 정리 및 편집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를 일단 탈고한 시점은 1783년경으로 추정되니 말이다. - P238

여기서 좀 ‘비딱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찰십륜포」의 이야기들이 정말 박지원이 강조한 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요즘으로 치면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 『열하일기』의 「찰십륜포」 등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두고 이렇게 ‘발칙한‘ 질문을 던진 경우는 아마도 없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부터는 몸소 목도한 바를 기록하였다는 박지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시시콜콜 따져볼 작정인데, 발칙하기로는 결론 역시 질문에 뒤지지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미리 밝혀두자면 이렇다.
「찰십륜포에 실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사실 ‘팔월 11일‘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 관람을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팔월 14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박지원은 두 사람의 만남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기껏해야 박명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역시 전해 들은 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박지원의 말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였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경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팔월 11일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한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곤란 불상 이야기‘ 바로 다음에 팔월 14일에 있었던 ‘건륭과 판첸의 만남‘에 대해 ‘전해 들은 바‘를 접속함으로써 박지원이 박명원을 위한 변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 P242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와 관련하여 유념할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박지원은 이날 숙소를 떠난 적이 없다. 12일 13일과 마찬가지로 종인 신분의 박지원에게는 입궐이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이날 오후에 있었다는 세 사신의 ‘대성전 배알‘은 구월 17일 장계」의 내용과 모순이다. 장계에 따르면 이날 삼사는 종일 궐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날 오후 삼사가 열하 태학의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를 배알했다는 「태학유관록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허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박지원이 삼사의 대성전 배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다분히 박명원 일행에 대한 봉불 혐의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를 모신태학에 6박 7일을 머물렀는데도 대성전 참배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박명원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셋째,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에서는 이날 사신의 동정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두드러진 활동이었던 불꽃놀이 구경 사실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찰십륜포」의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던 날짜를 밝히지 않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박지원이 팔월 14일의 일기에서 그날 박명원이 불꽃놀이를 구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찰십륜포에 묘사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 팔월 11일이 아니라 팔월 14일의 일이었음을 당장 파악했을 것이다.
또한 「찰십륜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만은 확실히 박지원이 목도한 바가 아니라 전해 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P247

그러나 박지원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태학유관록」의 팔월 14일 일기는 사신 일행의 불꽃놀이 구경 사실에 관하여 침묵했다. 아니, 그저 침묵만 지킨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박명원 등이 피서산장에서 불꽃놀이 등을 즐기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간대를 열하 태학의 대성전을 참배했다는 정황상 신뢰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채웠다. 불꽃놀이 자체가 주제인 「매화포기」에서도 박지원은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의 독자는 「찰십륜에 묘사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을 영락없이 팔월 11일의 일로 읽게 된다.
또한 박지원은 「찰십륜포」의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에서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 곧바로 "황제가 (피서산장) 후원에 매화포를 놓고는 사신을 불러 (피서산장으로 들어와서 보게 하였다."라고 썼다. 비록 자신이 박명원 등과 동행했다고 명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팔월 11일 오전 판첸을 만날 때부터 줄곧 박명원과 행동을 함께하는 박지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독자는 불꽃놀이 현장에도 박지원이 당연히 동석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불꽃놀이가 14일의 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없다. 14일에 박지원은 줄곧 태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48

또한 박지원은 여기에서 강하고 사나운 토번을 황제가 몹시두려워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서번西藩(문맥상 티베트)은 강하고 사나우나 황교를 심히 두려워하므로 황제가 그 법사를 우대한다고 하였다. 즉 박지원은 청이 판첸을 우대한 이유를 티베트의 군사적 위협 가능성에서 찾았다. 이는 박지원이 과거 토번 왕국이 당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였다는 역사의 기억을 호출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몽골·티베트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 부족을 노정한 것으로, 열하에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박명원 일행과 함께 베이징에 다녀온 노이점盧以漸(1720~1788)이 "몽골 사람들을 누르기 위해" 그들이 앙모하는 판첸을 특별히 초치招致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나, 1780년 연말에 동지사의 부사로 떠나 이듬해 귀국한 신대승 (1731~?)이 "몽골을 두려워해서" 건륭제가 판첸을 우대하였다고 보고한 것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 P255

팔월 11일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군기대신이 와서 조선에 사찰과 관제묘가 있는지 묻는 장면도 달리 읽힌다. 구월 17일 장계에는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팔월 9일 통역관의 질문 장면이나 팔월 10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군기장경이 와서 『열하일기』 에서와 마찬가지 질문을 던진 것을 황제를 알현한 후의 일로 소개했다. 알현 전과 알현 후로 갈리긴 하나 내용은 비슷한 장면이다. 그러나 문맥상 의미는 적잖이 다르다. 장계의 문맥에서 군기장경의 질문은 우연히 불쑥 던진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에『열하일기』의 「태학유관록은 이미 팔월 10일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데 더하여 황제 알현 전에 사찰과 관제묘에 대한 질문을 배치함으로써, 조선 사신을 판첸과 만나게 하려는 건륭제의 의지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야기 소재의 취사선택과 배치 · 구성에서 관찰되는 박지원의 비범한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열하일기』를 역사학적 사료의 비판 대상으로 올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순간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는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간접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뜻하지 않은 봉불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박명원과 그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 P289

박명원 일행이 사행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 돌아온 것은 1780년 음력 시월 27일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시월 28일에는 무림군 이당이 이끄는 사은사 일행이 서울을 떠났고, 그로부터 겨우 사흘 뒤인 십일월 2일에는 서유경 등 동지사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였다.
사은사 이당 일행은 세 통의 표문을 가져갔다. 첫 번째는 건륭제가 박명원을 통해 정조에게 보낸 비단 선물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밝힌 사은 표문이었다. 두 번째는 박명원 일행에 대한 각별한 우대에 감사한다는 표문이었고,
세 번째는 앞으로는 영원토록 사은방물을 보내지 말라고 한 황제의 조치에 사은하는 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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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에서 박명원 일행을 접견한 다음 날인 팔월 12일,
건륭제는 앞으로 조선에서 사은의 뜻을 밝혀야 할 때에는 표문만 보내고 방물은 일절 보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비추어 보자면, 황제가 정조에게 보낸 특별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표문에 방물을 보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은 방물을 보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에 감사한다면서 굳이 사은 방물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형상 황명을 거역하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정조는 별도의 자문을 준비하여 앞으로 영원토록 혜택을 입을 터이기에 단 한 차례라도 감사 표시는 해야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십이월 14일 이당 일행으로부터 표문과 방물을 접수한 청의 예부는 그다음날 정조가 보낸 별도 자문의 내용을 건륭제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십이월 22일에 이번에 보내온 사은 방물은 받지 말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챙겨온 방물을 다시 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물을 특별히 받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특별 선물로 안장을 갖춘 말과 비단 그리고 담비 가죽 등을 조선에 보내라고 하였다. 아울러 앞으로는 결코 사은 방물을 조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P267

결론적으로 1780년 건륭제의 칠순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파견한 세 차례의 사행은 정조 연간 대청 외교의 경향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정조는 분명 청나라를 상대로 자발적인 성의 표시를 반복했다. 만약 정조가 영조처럼 청을 조만간 망할지도 모르는, 또는 망해야 마땅한 오랑캐 국가로 여겼다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는 청을 사대 외교의 합법적 상대가 되는 대국 또는 적어도 우호적 관계를 다질 필요가 있는 이웃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는 일이었다. - P278

1782년 초의 반전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매년 빡빡한 공식 일정이 조선 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특별히 베푼 은혜로 간주되었다. 청의 예부는 매번 특별한 은혜의 내역을 문서로 만들어 조선에 알렸다. 조선의 국왕은 다음 동지사 편에 사은의 표문을 보내 특별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밝혔다 (방물은 1780년 건륭의 지시에 따라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 1782년 초에 이르러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청이 이제는 우리를 각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라며 매우 반겼다. 요즘으로 치면, 양국 외교 관계의 비약적인 증진 또는 격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서 밝히듯이 사실 이 문제는 단지 조선과 청 두 나라만의 관계 증진에 국한하여 접근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시각을 중시하여 문제를 조선의 대청 외교 관계라는 맥락에 국한해서 보자면, 건륭제의 조선 사신에 대한 ‘특‘은 일단 조선 국왕 정조의 ‘성의‘에 대한 화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90

황제께서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말로 국왕에게 돌아가서 안부를 물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직접 너희 나라 국왕이 세자를 얻었다는 자문을 보니 내 마음이 몹시 기뺐다."라고 하므로 저희는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화신의 안내로 원래의 반열로 돌아왔는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 있기도 전에 황제께서 먼저 세자라고 호칭하므로 좌우에서 호위하는 대신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외국 국왕의 득남 소식에 이토록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역사상 전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정조로서도 황제의 득남 축하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정조는 ‘특별히 사례하는‘ 뜻을 담은 문서와 방물을 준비하여, 황인점 일행과 함께 청에 갔다가 막 돌아오고 있던 박제가에게 발길을 돌려 문서와 방물을 들고 이미 베이징을 향해 떠난 동지사 일행을 뒤쫓아가게 하였다. - P299

종번宗藩의 대응 개념이라는 측면을 중시한다면 외번外藩이라는 말은 황족이 아니면서 왕작을 받은 모든 존재에게 쓸 수 있다. 조선의 국왕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을 외번의 하나로 꼽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동번東藩‘이라는 말은 조선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명·청의 황제들과 조선의 국왕들은 양국의 관계가 매우 친밀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쌍방 모두 조선을 가리켜 외번이니 동번이니 하는 말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였을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조선은 분명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청나라에는 절대로 외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외번이 존재하였다. 이들 ‘외국이 아닌 외번‘은 기본적으로 몽골 출신의 왕공 작위 소지자를 가리키는데, 그 기원은 청의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P302

청나라에서 외번이라는 말이 원래 ‘바깥 지방의 몽고tulergi goloi monggo‘라는 만주어의 번역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청 초의 외번은 곧 몽골 유목민 집단의 수령들을 의미하였다. 후금-청에 복속한 유목민들 중에는 청의 팔기八旗에 편입된 자들도 있었지만, 복속 이후에도 옛날과 다름없이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유목 생활을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깥 지방의 몽고‘였다. 홍타이지는 이들 집단의 수장들에게 황족과 마찬가지로 왕공의 높은 작위를 부여하여 우대하였고, 그들이 원래 거느리던 유목 집단에 대한 관할권도 인정해주었다. 몽골 왕공들은 왕공작위와 자기집단에 대한 관할권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여기에다가 앞서 말한 방식의 혼인을 통해 청 황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떤 학자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청 일대에 걸쳐 황실이 몽골 왕공의 딸을 며느리로 들인 것이 163회, 몽골 왕공의 아들을 사위로 삼은 것이 432회를 헤아릴 정도였다. - P307

청의 황제가 외번 왕공에게 ‘연반조근‘ 의무를 부과하다
청 황제와 외번 왕공의 끈끈한 관계는 단지 혼인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더라도 멀리 초원으로 떠난 뒤 죽을 때까지 친정나들이를 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그 딸이 낳은 외손주 역시 외가를 찾지 않는다면, 혼인 관계 및 그로 인해 형성된 혈연관계는 실질적인 의미를 잃기 십상이다. ‘Out of sight, out ofmind‘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은 자주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옛날 한이나 당의 황제들이 주변 이민족의 수장들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데에는 이 같은 원리도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의 황제들은 외번의 왕공들을 자주 만나 유대를 확인하고 강화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년 연말연시의 ‘조근‘이었다. 조근이라는 말은 원래 제후가 주기적으로 주나라 천자의 조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근이라는 개념 자체는 중국의 역사에서 낯선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외번의 조근‘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초원 유목민 집단 수장들의 정기적인 조근은 과거 명과 같은 한인 왕조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청조 고유의 제도이자 전통으로 이해된다. - P308

이처럼 건륭제는 조선에만 사상 초유의 특은을 베푼다는 혐의가 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바꾸어 말하자면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베푼다는 일시동인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3대 연회의 문호를 외국 사신들에게 개방하였다. 이제 매년 연말연시 베이징의 황성과 원명원을 무대로 거행되던 3대 연회의 의미는 종래의 외번 왕공들을 위한 잔치라는 데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3대 연회는 이제 국내의 무슬림 벡과 금천의 토사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까지 포함하는, 말하자면 천하 만국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건륭의 ‘성세‘를 기념하고 즐기는 연례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 P325

홍경모의 발언과 같은 친청 언설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북학 담론이 문자화되어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1780 년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사조가 더욱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1780 년대 이후 조선 사인들의 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듯하다.
1780년대 이후 대청 인식의 변화를 두고,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명나라 숭정제의 비극적 최후로부터 약 150년이나 지난 때이므로 오랑캐 침략자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상의 한쪽 측면만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청나라가 그들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혈통이 아니라 덕의 유무를 따져야 한다는 논리와 정확히 공명하고 있다. 치욕과 분노의 기억은 세월의 침식으로 소실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실된 기억의 빈자리에 이처럼 적극적인 친청 언설이 저절로 들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청나라 하면 오랑캐 침략자라며 이를 갈던 조선에서, 1830년경 홍경모의 경우처럼 정치적 정당성을 온전하게 갖춘 ‘대공지정‘의 정치체로 청을 찬미하는 언설이 등장하게 만든 토대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지금까지 살펴본 1780년대 이후 건륭제가 추진한 정치적 기획이 직접 또는 간접의 효과를 거둔 결과로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 - P333

홍경모가 연행을 경험한 도광 10년경은 건륭제의 기획이 이미 50년 가까운 실천의 역사를 쌓은 때였다. 조선의 관료들은 동지사의 세 사신만 헤아려도 연인원로 1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건륭제의 기획을 몸소 경험한 것으로 계산된다. 청조의 환대와 청궁정의 화려함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조선의 사인들은 자신들의 견문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글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 적어도 연행을 경험한 인사들과 그들의 견문을 공유한 주변 사람들의 대청 인식은 친청의 색채를 점점 더 짙게 띠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잘못이 없다면, 금천의 토사들을 두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면 반드시 (자신들의 견문을 )서로 서로에게 알리고 이야기해서 한마음으로 향화向化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 건륭제는, 비록 청나라는 역사 속의 모든 왕조처럼 멸망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획이 모두 헛된 노력에 그친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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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17일 장계」에는 불상은커녕 사신 일행이 판첸을 만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니 박명원 귀국 이전 사신 일행과 판첸의 만남 및 문제의 불상에 관한 조선 조정의 사실 인식은 오로지 팔월 20일 예부가 발송한 자문 중 「상주내용통지자문」에 첨부된 세 번째 상주문에 근거한 것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 상주문에는 박명원 일행이 봉불지사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게 만들 만한 문구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불상을 황제가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묘향산에 안치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박명원 일행에 대한 봉불지사 혐의 제기를 무시하였다. 정조는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 수수와 관련하여 상주내용통지자문」외에 별도의 추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박명원이 올린 ‘별단‘에서 찾을 수 있다. - P191

그때의 사실은 모두 별단의 보고를 통해 이미 말씀드렸으니, 지금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여 전하의 귀를) 시끄럽게 더립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비록 식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단은 반드시 배척해야 함은 대략 알고 있으니, 그 어찌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받아 올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놀라고 의심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던 때를 당하여 저들이 황제의 명으로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어찌 감히 황제의 명을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예부가 불상 등 여러 종류를 열거하며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쓴 선물 목록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그것이 과연 황제의 명에서 나온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조는인용자]

박명원은 이어서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상 문제를 두고 청의 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이러다가는 자칫 국왕에게 누를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상소는 ‘황제가 보낸 금불‘이란 곧 판첸이 준 불상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주지만, 이 내용을 팔월 20일 예부가 발송한 「상주내용통지자문의 내용과 결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예부 관원들이 판첸을 만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름 아닌 ‘황제의 명‘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박명원은 어쩔 수 없이 판첸을 만났고, 그로부터 불상까지 받았다. 박명원은 판첸과의 만남 이후 예부가 사신 일행과 판첸의 만남 그리고 불상 선물 등에 관한 사실을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쓴 것을 확인하였다. 이 상주문은 곧 「상주내용통지자문의 세 번째 첨부 상주문을 가리키는데, 아마도 박명원은 팔월 20일 예부의 자문 발송에 항의할 무렵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문 내용을 직접 확인한 박명원은 예부 관원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정말 ‘황제의 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즉 물리적으로 불상을 자신에게 건넨 것은 판첸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은 황제가 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 P192

불상에 대한 이처럼 상이한 이해는 판첸과의 만남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 갈린 듯하다. 박명원 일행의 목적지는 원래 베이징이었다. 그들의 열하행은 황제의 진노에 따른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허둥지둥 길을 서둘러 도착한 열하에서 일행은 ‘황제의 명‘을 칭하는 예부 관원들의 요구에 못 이겨 판첸을 만났다. 만남이 진짜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인지 긴가민가했지만, 늦어도 팔월 20일까지는 예부가 서울로 발송했다고 하면서 보여준 상주내용통지자문』의 내용을 통해서 정말 그런 ‘황제의 명‘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급박하게 펼쳐졌다. ‘황제의 명‘을 칭했을 뿐 판첸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박명원으로서는 그저 모든 것을 황제의 뜻으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사은사 일행의 경우는 박명원 일행에 비해 사태를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여유가 있었다. 건륭제가 박명원 일행을 난데없이 판첸과 만나게 한 이유는 국왕을 포함한 조선 조정에 일종의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따라서 박명원 일행의 귀국 직후 베이징으로 떠난 사은사일행이 그 이유를 탐문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사은사 일행의 서장관은 귀국 후에 탐문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였다.

작년 가을 황제가 열하에 있을 때 번승蕃僧[판첸을 지칭]과 이야기하다가 (화제가) 외국의 일에 미쳤습니다. (그때 황제는 조선이 예의를 두터이 숭상하고 인물과 의관衣冠 또한 볼 만하다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진하사[박명원을 지칭] 일행이 마침 그때 베이징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신으로 하여금 나아가 (판첸을) 만나게 한 것은 대개 번승에게 과시誇示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은사 일행이 탐문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었다. 1781년 음력 삼월 2일 정조는 막 귀국한 사은사 일행에게 이렇게 물었다. "황제가 작년에 사신을 불러 판첸을 만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문물을(판첸에게)과시하며 자랑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러한가?"
사은사 일행의 답변은 "저 사람들彼人의 전하는 바가 그와 같았습니다."라는 것이었다. - P195

사은사 일행은 전년 팔월 열하에서 벌어진 상황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나름의 조사를 거쳐 건륭제가 박명원 일행을 판첸과 만나게 한 것이 기본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판첸의 불상 선물이 황제와는 무관한, 종교적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었음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기엔, 사은사 일행의 보고가 진실에 더 근접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1780년의 박명원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황당하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한 까닭에 오해와 오판의 ‘함정‘에 빠졌고, 급기야는 봉불지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1783 년 여름에 박명원이 1780년 사행 때의 과오를 이유로 정조에게 사신 임명 철회를 요청한 일을 언급하였다. 1781년 봄에 귀국한 사은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박명원의 오해와 오판이 드러났다면, 1783년에 박명원이 말한 자신의 과오에는 불상을 받들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더하여 뒤늦게 드러난 오해와 오판도 응당 포함되었으리라. - P197

그러나 박명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부의 무단 ‘첨개添改‘
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박지원이 (나)에서 예부가 무엇을 더하고 고쳤는지를 애써 밝힌 것도 이들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박지원은 정문 원본의 "특별히 소방을 (은택으로) 적신 것이 미천한 저희 배신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를 예부가 멋대로 "특별한 선물로 국왕과 배신들 및 종인 등에게 비단과 은을 내리시었습니다."로 고치고 "삼가 마땅히 나라로 돌아가 국왕에게 아뢰겠습니다."에 문구를 첨가하여 "삼가 마땅히 나라로 돌아가 국왕에게 아뢰어, 따로 표문을 갖추어 감사를 표하도록 하겠습니다."로 수정하였음을 적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조정에 외교적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원본에서 박명원은 황제가 미천한 배신에 불과한 자신들에게까지 선물을 준 사실을 언급하고, 귀국하면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겠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예부는 선물 사여 대상에 국왕을 추가하고 국왕이 별도로 표문을 갖추어 사은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실제로 조선 조정은 예부의 자문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동지사에게 사은사 임무를 추가로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은 자문에 인용된 사신의 정문 내용에 맞춘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박명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예부의 수정으로 인해 사신의 권한을 벗어난 월권, 심지어는 군주의 특권을 침해하는 참월의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신하가 자기 명의로 제출하는 문서에 국왕이 비단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도 분수를 넘어서는 일인 터에 심지어 응당 국왕이 결정해야 할 사은 표문 발송을 제멋대로 약속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 P218

둘째, 예부가 첨가한 "성스러운 스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축복의 은택에 흠뻑 젖을 수 있었습니다."는 박명원 일행의 봉불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가 불교 승려, 그것도 머나먼 이역에서 온 오랑캐에게 ‘성스럽다‘, ‘우러러 바라보다‘, ‘축복의 은택‘ 등과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언이었다. 만약 이런 말들이 정말 박명원의 붓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봉불 혐의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유죄‘가 될 터였다.
한편, 박명원의 정문 원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문단이었던 까닭에 예부의 첨개 사실을 고발하는 (나)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장이지만, 인용문 (가)에 보이는 판첸을 절하며 뵈었다. 즉 ‘배견拜見‘했다는 구절도 길이는 짧지만 의미는 심각한 부분이다. 구월 17일 장계에서 판첸과의 만남 자체에 대한 언급을 피했던 박명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가 판첸에게 절을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기독교 원리주의를 설파하여 명성을 얻은 목사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을 만큼의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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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비클린은 언론과 학계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FC에 힘입어 자폐증이 "재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초기 주장은 오래도록 자폐증을 면밀히 연구해온 사람들에 의해 부정당했다. FC가 허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비클런의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비클런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94년 많은 동료심사저널에 FC가 허구임을 입증한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자, 잘 수행된 FC와 그렇지 않은 FC는 나르나는 과거 주장을 다시 들고 나와그 연구들의 방법론을 공격했다. 또한 자신이 FC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주장했는지 분명히 하려고 했다. 연합통신 Associated Press 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이 똑똑하다거나 FC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명석하다고 떠든게 아닙니다. 제 주장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말할 것이 없다는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 P510

잠깐 정신나간 듯 방황의 시기를 보낸 보인턴은 FC에 관한 문헌들을 보다 깊게 읽었다. 그리고 촉진자가 얼마나 쉽게, 그렇게 하고있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스스로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깨달았다. 불가능하게 들리지만 그 사실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입증되었다. 논문들을 읽으면서 보인턴은 위튼 가족에게 큰해를 끼쳤다는 죄책감과 함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베시가 목소리를 갖기를 간절히 바란 나머지 그녀는 단어들이 메시의것이기를 절박하게 염원했던 것이다. 나머지 부분, 즉 베시의 가정생활에 대한 추잡한 환상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93년학기가 끝날 때쯤 보인턴은 상사들에게 FC에 관한 마음이 바뀌었음을 알리고, 교육청에 FC를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교육청은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 P511

그날 밤 보인턴은 <20/20>에서 미시간주 웨스트 블룸필드westBloornfield에 사는 웬드로우wentrow 가족의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자신이 FC로 인해 참담한 일을 겪은 지 15년 후, 그들 가족 역시 자폐증으로 말을 못하는 열네 살 난 딸 에이슬린Aislinn에게 촉진자를 고용할 예산을 마련해달라고 지방교육청에 민원을 넣었던 것이다.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합의가 폭넓게 이루어졌음에도 더그 비클런은 여전히 시러큐스 대학에서 FC를 가르쳤고, 드러나지 않지만 FC를 열렬히 지지하는 소수의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FC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너무 포괄적이며, 실제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음을 무시한 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정식으로 인정받는 치료법의 주변부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촉진자와 가족들은 이 방법에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내며 스스로를 강화하는 하위문화를 형성했다.
- P513

하지만 희망어린 환상은 심지어 FC를 지지하다가 큰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조차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줄리언 웬드로우는 딸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부당한 비난을 받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수감되었음에도 FC에 대한 신념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나중에 마지못해 신념을 버리기는 했지만 FC가 사실이며 딸이 정말로 자기와 대화를 나눈다고 믿었을 때 경험한 기쁨을 생각하면 자신이 치른 희생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실제로 딸이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아이를 얼마나 다르게 대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표현해야 할 모든 말을 듣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내면 어디엔가 정상적인 아이가 있다는 꿈은 그렇게 강력했다. - P515

편의상 두 진영을 "병합파"와 "세분파"라고 하자. 로나 윙과 한스 아스퍼거가 아스퍼거 증례들과 레오 카너의 증례들을 구분하기보다 비슷하다고 봐야 할지,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을 때도 양진영 사이의 긴장이 나타났다. 아스퍼거는 자신의 증례와 카너의 증례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중후군을 보았다고 믿었다. 이 점은 두고두고 기억할 만하다. 양쪽 어린이를 중요한 차이점에 따라 별개의 집단으로 나눠야 한다고 고집한것으로 보아 그는 전형적인 세분파다. 반면 윙은 진정한 병합파로가벼운 자폐적 행동을 보이거나, 여러 가지 자폐적 행동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자폐적 행동의 핵심 기제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작동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녀는 "스펙트럼" 모델을 개발했다. 현재는 철저한 병합적 해석이 폭넓게 인정되며, 심지어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런 생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한때를 풍미했던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스펙트럼이란 생각도 많은 단점이 있다. 향후 과학적 연구를 통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자폐적 행동들이 알고 보니 환경이나 유전이나 기타 다양한원인들로 인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생각의 추는 언제라도다시 세분파 쪽으로 기울 수 있다. 암 연구를 비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암"이란 말은 오래도록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종양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다양한 암들이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병이며, 각기 고유한 특성과 고유한 생물학적 과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결국 모두가 세분파의 길로 갈수밖에 없었다. 자폐증 역시 근본적으로 다른 다양한 병들일지 모른다. 알고보니 각기 고유한 유전적 "지문"을 지닌 채 서로 거의 관련이 없는 다양한 자폐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이란 개념은 설명 능력을 상실한 채 더 이상 자폐증에 관한 대화에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 P522

 위장관 문제, 수면 문제, 경련, 식품 과민성 등 신체적 증상과 자폐증이 뒤섞인 도브 같은 아이에게교육 기반 치료법은 시간낭비일 뿐이란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존과 포샤는 도브가 신체적인 기능이상을 겪고 있으며, 그것이 아이의 뇌도 침범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차원에서 도브의 자폐증에 관해 상의할 전문가를 찾을 수 없었다. 행동분석가들은 그런 측면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정신과 의사나 소아과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자폐증의 근본원인이 기질적, 즉 신체에 생긴 생물학적 문제라는 사실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했지만, 신체에 초점을 맞춰 치료를 제공하는사람은 없었다. 의과대학에서도 그런 치료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치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돌팔이나 사기꾼 빼고는 그런 치료를 한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 P531

 런던 부부의 이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연구자들이 자폐증에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뿌려진 ‘종잣돈"이 결실을 맺고, 거기 주목한 다른 지원기관이 뛰어든 것이었다. 선순환이 시작된 것 같았다. - P549

존과 포샤는 마침내자폐증 유전연구교환소 Autism Genetic Research Exchange AGRE 라는 명칭으로 본격적인 DNA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자폐증의 유전암호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력에 감탄한 수많은 가족이 삽시간에 등록을 마쳤다. 새롭게 교육받은 ADI평가자가 각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 몇 시간씩 가족을 면담했다. 면담 결과는 방문 과정을 통째로 기록한 오디오 및 비디오 테이프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보내 분석했다. 자폐증이 확진되면 에드베리가 나타났다. 장시간의 기차여행과 운전에도 그는 언제나 그랬듯 특유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온 가족의 혈액을 채취했다. 손상되지 않게 포장하여 영구 보존 장소인 동부 러트거스 대학세포 보관소(Cell Repository) 에 도착한 모든 혈액 검체는 게놈 선별검사와 함께 "불멸화" 과정을 거쳤다. "불멸화"란 혈액을 구성하는 세포를 복제한 후 증식시켜 원래 세포와 정확히 동일한 복제세포를 무한정 공급하는 과정이다.
서둘러 진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초로 지원한 150 가족의유전자를 채취하여 보관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이미 다른 250 가족이 대기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결국 연간 100만 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국립보건원에서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더 많은 외부 연구자금을 자폐증 연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변함없는 목표였다. 그 정도의 재정지원을 얻어냈다는 것은 품질관리라는 어려운 관문을 돌파했다는 뜻이었다.
과학계 역시 확신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 P553

대부분의 경우 자폐 어린이는 익사나 심한 경력에 의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 NAAR은 슬픔에 빠진 가족들을 세심하게 위로하면서도 향후 세대 어린이들을 위해 늦지 않게 장기기증을 제안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하나의 프로토콜로 만들었다. 조직은행에 대한소문이 자폐공동체에 널리 퍼지자 기증 신청자가 크게 증가했다. 하버드 뇌조직자원센터 Harvard Brain Tissue Resource Center 내에 위치한 자폐증 뇌조직은행은 이내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어 이전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연구들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P555

루스 설리번이 옳았다. <레인맨>은 자폐증의 서사를 영원히 바꾸었다. 자폐인의 진정한 어려움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본절대 다수에게 그것은 여전히 타인의 급박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이후 대중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고, 동시에 전반적으로 자폐인의 모습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분명 진보였다. 자폐증이란 세계에서 최초로 배출한 스타인 레이먼드 배빗 Raymond Babbitt 이 가공의 인물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페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 P578

그랜딘은 청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부모들은 그녀의 경험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침내 자신들을 오랫동안 절망에 빠뜨렸던 언어를 유창하게 통역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았다. 질문이 쏟아졌다. 왜 우리 아들은 하루 종일 뭔가를 돌리고 있을까요? 왜 조금만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걸까요? 왜 저와 눈을 맞추지 않을까요? 그랜딘이라고 모든 질문에 답할 수는없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폐증을 겪는 사람이 삶을 어떻게느끼는지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소리에 민감하다고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철로에 몸이 묶인 채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촉각도 극도로 예민해 어떤 옷감이 피부에 닿으면 너무 까끌거려 실제로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는지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강렬하다고 할 정도로 친밀한 대화였다.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도있었다. 그날은 그랜딘에게도 삶의 전환점이었다. 이제 그녀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폐인이었다. 곧 미국 전역의 자폐 단체에서 강연 예약이 줄을 이었다. 1988년에는 미국자폐협회(전미 자폐어린이협회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사진으로 초청받았다. 자폐 당사자로는 최초였다. 설리번은 매년 공적 생활이 더해질수록 그랜딘이 대중강연을 눈에 띌 정도로 편안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적재적소에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1990년대에 영국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는 뇌의 신경연결이 비전형적인 사람들의 다양한 양상을 그린 저서에 그랜딘을 등장시켰다. 그는 그녀가 때때로 "화성의 인류학자처럼 느껴진다고한 말에 매혹되었다. 그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에 관해쓴 《뉴요커 > 기고문과 나중에 발표된 저서의 제목으로 쓸 정도였다. 1995년 그랜딘은 두 번째 책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를 출간했다. 당사자의 시각으로 기술된 이 책은 어머니의 헌신에 힘입어 과학자이자 강연가이자 작가이자 자폐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인물로 성장한 소녀의 수기다. - P582

이런 불길한 숫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국적 유행이란 주장에 좀 이상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별로 변화폭이 너무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인접한 주끼리도 자폐증 유병률이 전혀 달랐다. 2002년 연방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앨러배마주의 유병률은 대략 어린이 1만 명당 3명이었던 데 반해, 조지아주는그 두 배가 넘었다. 두 주는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공간이라 할 수없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그 강마저 주 경제 전체에 걸쳐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미네소타주와 아이오와주는 지도상에 그어진 선 하나로 구분될 뿐이지만, 2012년 미네소타주에서 보고한 유병률은 이웃한 주의 열 배가 넘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잘 알았다. 공중보건당국이 아니라 교육당국에서 자폐증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장애인교육법에는 자폐인에 대한 표준적 정의를 명시했지만, 특수교육 서비스를 받을 자격을 판정하는 기준은 각 주 교육부의 재량으로 남겨두었다. 이에 따라 각 주마다 독자적인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는데, 포함된 항목은 적게는 다섯 개부터 많게는 열일곱 개로 천차만별이었다. DSM의 특정 버전에 실린 진단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IDEA 정의를 이용하는 주도 있었고, 몇몇 주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적용했다. 정신과전문의나 공인된 임상심리학자의 진단을 요구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주도 많았다. 임상적 진단과 보건서비스 필요 판정은 전혀 동일한 의미가 아니었고, 때때로 부모와 교장, 특수교육 교사들이 협의해서 서비스 제공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다루는 데이터 자체가 일관성이 없는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숫자들은 "진정한 유병률을 드러낸다기보다 사회과학자들의 용어로 소위 "행정적" 유병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보건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자폐인의 숫자를 산정한다는것은, 비유컨대 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기내식을 주문한 사람의 숫자를 보고 승객 중 채식주의자가 몇 명인지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했을 때 진정한 "유병률"을 왜곡시킬 수많은 요인이 존재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자폐증의 행정적 유병률은 너무나 다양한 인자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한 집계상 오류나 계산 오류부터행동을 관찰하여 진단을 내리는 방식 고유의 주관성에 이르기까지그야말로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할 수 있다. - P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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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박명원의 사행과 『열하일기』의 관계는 단지 후자가 전자의 활동내용을 반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박지원은 자료의 정리 및 편집 과정을 거쳐 1783년경 『열하일기』를 일단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열하일기』를 집필하면서 연행록의 일반적 형식인 일기체를 작품 전체에 걸쳐 채용하지는 않았다. 압록강을 건넌 1780년 음력 유월 24일부터 사신 일행이 열하에 갔다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팔월 20일까지만을 일기체로 썼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다양한 견문을 내용에 따라 여러 편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서울 출발에서 압록강 도강까지와 베이징을 떠나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은 아예 쓰지 않았다. 여행 과정의 견문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옮기기보다는 어떤 의도하에 견문을 취사선택하고 그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하는 방식을 취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여기서 열하에서 겪은 이야기의 텍스트화 과정, 즉 견문의 취사선택 및 구성plot에도 박지원의 어떤 의도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의도의 존재 여부 및 그 영향 여하는 텍스트 내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이로부터 텍스트 내부에서 벗어나 박명원의 사행 활동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는데, 문제는 박명원 일행의 활동을 살펴보려 할 때 『열하일기』보다 나은 자료가 존재하느냐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지는 까닭은 이렇다. - P155

건국 초부터 불교 배척을 구호로 내세웠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박명원 일행이 판첸과 같은 불교 승려, 그것도 중국이 아니라 티베트의 승려와 만났다는 사실을 왕조의 공식 기록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는 박명원 등이 판첸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아예 쓰지 않았다. 침묵으로 은폐를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국가가 은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폭로했다.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다른 기록에서는 판첸과의 만남 등을 은폐한 반면에 오직 박지원만이 어떠한 왜곡이나 은폐도 시도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썼다고 한다면,
『열하일기』 이외의 사료들은 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주장과 그 주장에 근거하여 전개된 논의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기록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가기록이 박명원과 판첸의 만남을 은폐했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조실록』의 해당 시기 기사들을 찾아보는 정도에서 조사를 멈춘 탓이다. 앞의 주장을 전개한 사람들은 ‘내 눈에 띄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 P157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처리해야 하는 급선무는 역시 칠순 진하 표문과 방물, 그리고 앞서 황인점 일행에게 베푼 청의 외교적 우대 조치 등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표문 몇 통을 청예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번 사행 임무의 성격상 약 2주 후에 열릴 만수절 당일의 축하의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가장 중대한 일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베이징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봤듯이 건륭제는 칠순 잔치를 열하에서 벌일 계획을 세우고는, 박명원 일행의 서울 출발 무렵인 음력 오월 21일에 이미 베이징을 떠나 줄곧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 박명원 일행으로서는 팔월 13일(1780년 9월 11일)의 칠순 만수절에 베이징의 청나라 관원들과 함께 멀리 열하의 황제를 향해 하례를 올리는 망하례에 참석하기만 하면 모든 임무가 완수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공식 일정도 딱히 없었다. 여행의 피로를 풀면서 이따금 여유롭게 관광을 다니는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청나라는 베이징과 열하 간에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인 연락 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1년에 몇 달씩이나 베이징을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팔월 1일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베이징의 예부는 늘 하던 대로 이 사실을 열하의 건륭제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건륭제는 조선에서 만수절을 축하하러 사신이 도착했다면 곧장 열하로 보냈어야지 왜 베이징에 붙잡아두었냐고 역정을 내면서 당장 열하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 P161

팔월 11일
짧은 알현을 마친 뒤에 박명원 등은 어전에서 물러나 대열에 서서 황제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기 중에 황제가 군기장경을 시켜, "너희 나라에서도 부처를 공경하는가? 사찰은 몇 군데 있는가? 관제묘關帝廟 또한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박명원은 "국속國俗이 본디 부처를 숭상하지 않으나, 사찰이라면 외방에 간혹 있기는 합니다. 관제묘는 성 밖에 두 곳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간 뒤 박명원은 숙소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또다시 생여주 1병을 내렸다.
건륭제가 난데없이 조선의 종교 생활에 대해 물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청에서는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을 관제묘라고 불렀는데, 박명원은 서울의 남관왕묘南關王廟와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들어 답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관우에 대한 종교적 숭배 여부도 화제였지만, 나중에 벌어진 일을 고려하건대 이날 관심의 초점은 역시 불교였다고 하겠다.「구월 17일 장계」에 따르면 박명원은 조선이 부처를 모시는 나라가 아님을 명확히 밝혔던 것이다. - P168

8월 12일
그야 어쨌든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사신 일행이 황제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궁정 행사에 조선 사신이 참석한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는 점이다. 비단 선물을 하사하라는 명령도 특별한 것이었다. 수천 리에 달하는 여로를 왕래하는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로 으레 주는 선물 외에 따로 비단을 챙겨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70

열하에서의 일정을 모두 소화한 박명원은 팔월 20일 베이징으로 돌아오자마자 청 예부의 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르면, 조선의 사신이 청에 체류하는 동안에 작성된 외교문서는 모두 귀국하는 사신 편에 맡겨 발송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부가 관례를 무시한 채, 심지어는 박명원에게 알리지도 않은채 세통의 외교문서를 바로 조선으로 발송해버렸다. 이것들은 청의 예부와 조선의 국왕이 주고받는 자문咨文이라고 불리는 문서 양식을 취한 것이었다.
예부의 외교문서 무단 발송에 박명원이 항의를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부는 이들 문서가 열하에서 자신이 조선에 어떤 혜택을 베풀었는지를 속히 알리기 원하는 황제의 뜻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의 항의를 일축하였다. - P173

세통의 내용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번에 조선에서 황제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한다고 보낸 표문·방물 등을 모두 접수하되, 앞으로 황제가 베푼 은혜에 감사한다는 취지로 보내는 사은 표문에는 영원토록 방물을 딸려 보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이 팔월 12일에 있었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다(이하이 자문은 「사은방물정지자문으로 지칭).
두 번째는 당시 열하의 행재, 즉 피서산장에서 근무하던 예부의 관원들이 조선 사신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황제에게 전후 세 통의 상주문을 올렸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는데, 청의 예부는 조선에서도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 상주문 세 건의 원문을 베껴 자문에 첨부하였다(이하 이 자문은 「상주내용통지자문」으로 지칭), 이들 상주문에는 각각에 대한 황제의 간단한 답변이 적혀 있었는데, 황제의 답변 날짜는 각각 팔월 9일, 팔월 10일, 팔월 12일이었다.
세 번째는 열하에서 황제가 조선의 국왕에게 특별한 상물을 하사한 데 대하여 조선의 사신들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정문을 올렸음을 황제에게 아뢰었고, 팔월 14일에 황제가 ‘알았다‘라고 답하였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다(이하 이 자문은 [조선사신감사자문]으로 지칭) - P174

「상주내용통지자문」의 세 번째 상주문은 예부가 조선 사신 일행을 데려다가 판첸을 알현하게 했으며 판첸이 사신 일행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었음을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니, - P176

두 번째로 유념할 점은 박명원의 「구월 17일 장계」에 판첸과의 만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신 접견을 마친 뒤 황제가 군기장경을 통해 조선의 불교 사찰과 관제묘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열하일기』 연구자들이 조선은 왕조의 공식 기록에서 침묵이라는 수단으로 박명원 일행과 판첸의 만남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박지원만은 왕조가 은폐를 기도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폭로했다고 생각한 것도 실은 구월 17일 장계」의 ‘침묵‘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생각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번째는 앞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박명원이 구월 17일 장계」의 말미에서 선래군관에게 이 장계를 맡겨 보낸다고 하면서 ‘별단別單‘한 건을 따로 작성해서 올린다고 말한 사실이다. 사신의 별단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공개가 될지언정 작성 당시에는 국왕에게 직접 보내는 비밀 보고서를 가리키는데, 이 별단의 존재에 유념해야... - P178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란 불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생들은 박명원 일행을 봉불지사奉佛之使라고 규탄하였다. ‘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었기에 붙여진 말이었겠지만, ‘부처 또는 불교를 받드는 사신‘이라는 뜻도 되니 박명원은 배불의 나라 조선에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처지가 된 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는 가운데 십일월 12일, 부사였던 정원시가 이 일은 한 번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고 하면서 불상을 받아 온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원칙을 지킨 비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정사였던 박명원 역시 일이 부득이했음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벌을 청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안은 굳이 잘잘못을 따져 처벌을 논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에게 안심하라고 일렀다. - P185

『정조실록』 정조 4년 구월 17일 조의 금불 관련 기사는 날짜 오류가 분명하므로 고려 대상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 기사를 제외하면,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금불의 처리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정원일기 시월 23일 기사의 대화 장면이다.
정조가 "황제가 보낸 금불은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역관 한 사람을 정해서 "영변寧邊 향산香山의 정결한 장소"로 보내자는 것이 조정의 공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정조는 서둘러 사신 일행에게 알림으로써 "절대로 그것이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시월 27일, 몇 달 만에 만난 정조와 박명원의 대화에서도 금불은 주요 화제였다. 정조가 물었다. "황제가 보낸 금불은 과연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박명원이 꽤 길게 답하였다.

저들 나라彼國에서는 남의 장수를 기원할 때 반드시 금불을 서로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금불을 보낸 것도 전하를 위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 본래 의도이나, 제가 오는 길에 영변의 향산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역관 한 명을 시켜 향산의 정결한 사찰로 보냈습니다.

박명원은 금불을 서울로 가져오는 길에 정조가 시월 23일에 하달한 명령을 접하고는 묘향산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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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자작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노란 잎이 색종이처럼 날려왔다. 나는 위스키를 한모금 마셨다. 그런 저택에서 자라났다면 나도 그런 집을 그때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터였고, 마당의 삐걱거리는 그네 혹은 테라스 위의 으아리 덩굴, 지평선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풍만한 땅, 숲 뒤로 보일락 말락 하는 고속도로와도 그때보다 더욱 친숙해졌을 터였다. 저택의 색깔이 문득 내 핏줄 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햄든에서 그랬듯이 그 뒤로도 공상에 빠져들기만 하면 흰색, 빨간색, 파란색이 어우러진 소용돌이 속에서 맨 먼저 그 집이 떠오르고는 했다. 상아색, 코발트색, 밤색, 오렌지색, 황금색이 어우러지, 집, 하늘, 단풍나무같이 내 기억에 아로새겨진 사물의 윤곽은 점차 선명한 형상으로 자리 잡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떠오르고는 했다. 그러나 그날 찰스와 함께 메케한 연기 냄새를 맡으며 포치에 앉아있을 동안 그것은 기억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떠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눈앞에 있었으되,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 P166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면서 여행 가방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이 멍했다. 나는 멍한 상태에서 아무 편견이나 비판없이 거기에서 발은 인상을 머리에 새겼다. 한동안 이런 상태로 있다 보니 문득 어디에선가 물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대 옆에 있는 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창 아래로 1미터도 채 안 되는 곳으로 물이 흐르고있었다. 그 아래에는 조그만 댐이 있었고 그 댐 가까이에서는 거품이 날고있었다. 나는 손으로 유리창을 동그랗게 닦아내었다. 그제야 바깥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제야 실내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내 입김이 여전히하얗게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찬바람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n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가장자리가 시커멓게 찢어진 천장을 통해서, 푸른 하늘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재빠르게 흐르는 구름이 보였다. 나는 그 천장의 구멍 바로 아래, 그러니까 내 발밑을보았다. 먼지와 뒤섞인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인 모양은 천장의 모양과 아주 똑같았다. 눈은 내린 모습 그대로 가만히 쌓여 있었다. 눈 위에 자국이 있다면 그것은 외로운 발자국 몇 개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 발자국이었다. - P182

그들에게 줄 만한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대신 지겨운 눈 소식, 겨울의 아름다움,
고독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잔뜩 써서 보냈다. 나는 이따금씩 먼 곳에서 그런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내 삶을 어떤 식으로 상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했다. 내 편지가 묘사해내는 삶은 애착에서 벗어난 삶, 비인격적인 삶이었다. 따라서 포괄적인 삶, 반듯하게 정의되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대목대목이 공허해 보일 수도 있었다. 시기와 환경이 다를 뿐, 나 자신이 그렇듯이 내가 쓴 편지는 읽는 사람들에게 고타마 싯다르타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터였다.
나는 이런 편지들을 대부분 일을 시작하기 직전인 아침에 롤랜드 박사의 연구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관리인으로부터 나가달라는 소리를 들을때까지 어슬렁거리곤 하던 초저녁의 커먼스홀에서 썼다. 어떻게 보면 내삶 자체가 이 연구실과 도서관과 커먼스 홀처럼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공공장소를 전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남들의 삶터인 그런 공공의공간을 전전하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사람과 같았다. 한밤중에 기차역을 기웃거리면서, 지나다니는 승객들에게 20년 전의 심야열차 시간표를 묻던 유령이 있었다던가. 나 역시 그 유령처럼, 문이 닫힐 때까지, 관리인이 나가기를 요구할 때까지, 불이 켜진 곳, 온기가 있고 사람이 있고 대화가 있는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전전하다 밖으로 나서면 뼈를 뒤트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는 했다. 밖으로 나서면 빛도 온기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따뜻함을 누려본 적이 없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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