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자작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노란 잎이 색종이처럼 날려왔다. 나는 위스키를 한모금 마셨다. 그런 저택에서 자라났다면 나도 그런 집을 그때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터였고, 마당의 삐걱거리는 그네 혹은 테라스 위의 으아리 덩굴, 지평선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풍만한 땅, 숲 뒤로 보일락 말락 하는 고속도로와도 그때보다 더욱 친숙해졌을 터였다. 저택의 색깔이 문득 내 핏줄 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햄든에서 그랬듯이 그 뒤로도 공상에 빠져들기만 하면 흰색, 빨간색, 파란색이 어우러진 소용돌이 속에서 맨 먼저 그 집이 떠오르고는 했다. 상아색, 코발트색, 밤색, 오렌지색, 황금색이 어우러지, 집, 하늘, 단풍나무같이 내 기억에 아로새겨진 사물의 윤곽은 점차 선명한 형상으로 자리 잡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떠오르고는 했다. 그러나 그날 찰스와 함께 메케한 연기 냄새를 맡으며 포치에 앉아있을 동안 그것은 기억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떠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눈앞에 있었으되,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 P166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면서 여행 가방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이 멍했다. 나는 멍한 상태에서 아무 편견이나 비판없이 거기에서 발은 인상을 머리에 새겼다. 한동안 이런 상태로 있다 보니 문득 어디에선가 물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대 옆에 있는 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창 아래로 1미터도 채 안 되는 곳으로 물이 흐르고있었다. 그 아래에는 조그만 댐이 있었고 그 댐 가까이에서는 거품이 날고있었다. 나는 손으로 유리창을 동그랗게 닦아내었다. 그제야 바깥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제야 실내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내 입김이 여전히하얗게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찬바람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n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가장자리가 시커멓게 찢어진 천장을 통해서, 푸른 하늘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재빠르게 흐르는 구름이 보였다. 나는 그 천장의 구멍 바로 아래, 그러니까 내 발밑을보았다. 먼지와 뒤섞인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인 모양은 천장의 모양과 아주 똑같았다. 눈은 내린 모습 그대로 가만히 쌓여 있었다. 눈 위에 자국이 있다면 그것은 외로운 발자국 몇 개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 발자국이었다. - P182

그들에게 줄 만한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대신 지겨운 눈 소식, 겨울의 아름다움,
고독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잔뜩 써서 보냈다. 나는 이따금씩 먼 곳에서 그런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내 삶을 어떤 식으로 상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했다. 내 편지가 묘사해내는 삶은 애착에서 벗어난 삶, 비인격적인 삶이었다. 따라서 포괄적인 삶, 반듯하게 정의되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대목대목이 공허해 보일 수도 있었다. 시기와 환경이 다를 뿐, 나 자신이 그렇듯이 내가 쓴 편지는 읽는 사람들에게 고타마 싯다르타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터였다.
나는 이런 편지들을 대부분 일을 시작하기 직전인 아침에 롤랜드 박사의 연구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관리인으로부터 나가달라는 소리를 들을때까지 어슬렁거리곤 하던 초저녁의 커먼스홀에서 썼다. 어떻게 보면 내삶 자체가 이 연구실과 도서관과 커먼스 홀처럼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공공장소를 전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남들의 삶터인 그런 공공의공간을 전전하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사람과 같았다. 한밤중에 기차역을 기웃거리면서, 지나다니는 승객들에게 20년 전의 심야열차 시간표를 묻던 유령이 있었다던가. 나 역시 그 유령처럼, 문이 닫힐 때까지, 관리인이 나가기를 요구할 때까지, 불이 켜진 곳, 온기가 있고 사람이 있고 대화가 있는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전전하다 밖으로 나서면 뼈를 뒤트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는 했다. 밖으로 나서면 빛도 온기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따뜻함을 누려본 적이 없다. -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