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17일 장계」에는 불상은커녕 사신 일행이 판첸을 만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니 박명원 귀국 이전 사신 일행과 판첸의 만남 및 문제의 불상에 관한 조선 조정의 사실 인식은 오로지 팔월 20일 예부가 발송한 자문 중 「상주내용통지자문」에 첨부된 세 번째 상주문에 근거한 것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 상주문에는 박명원 일행이 봉불지사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게 만들 만한 문구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불상을 황제가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묘향산에 안치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박명원 일행에 대한 봉불지사 혐의 제기를 무시하였다. 정조는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 수수와 관련하여 상주내용통지자문」외에 별도의 추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박명원이 올린 ‘별단‘에서 찾을 수 있다. - P191

그때의 사실은 모두 별단의 보고를 통해 이미 말씀드렸으니, 지금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여 전하의 귀를) 시끄럽게 더립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비록 식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단은 반드시 배척해야 함은 대략 알고 있으니, 그 어찌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받아 올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놀라고 의심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던 때를 당하여 저들이 황제의 명으로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어찌 감히 황제의 명을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예부가 불상 등 여러 종류를 열거하며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쓴 선물 목록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그것이 과연 황제의 명에서 나온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조는인용자]

박명원은 이어서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상 문제를 두고 청의 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이러다가는 자칫 국왕에게 누를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상소는 ‘황제가 보낸 금불‘이란 곧 판첸이 준 불상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주지만, 이 내용을 팔월 20일 예부가 발송한 「상주내용통지자문의 내용과 결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예부 관원들이 판첸을 만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름 아닌 ‘황제의 명‘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박명원은 어쩔 수 없이 판첸을 만났고, 그로부터 불상까지 받았다. 박명원은 판첸과의 만남 이후 예부가 사신 일행과 판첸의 만남 그리고 불상 선물 등에 관한 사실을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쓴 것을 확인하였다. 이 상주문은 곧 「상주내용통지자문의 세 번째 첨부 상주문을 가리키는데, 아마도 박명원은 팔월 20일 예부의 자문 발송에 항의할 무렵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문 내용을 직접 확인한 박명원은 예부 관원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정말 ‘황제의 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즉 물리적으로 불상을 자신에게 건넨 것은 판첸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은 황제가 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 P192

불상에 대한 이처럼 상이한 이해는 판첸과의 만남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 갈린 듯하다. 박명원 일행의 목적지는 원래 베이징이었다. 그들의 열하행은 황제의 진노에 따른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허둥지둥 길을 서둘러 도착한 열하에서 일행은 ‘황제의 명‘을 칭하는 예부 관원들의 요구에 못 이겨 판첸을 만났다. 만남이 진짜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인지 긴가민가했지만, 늦어도 팔월 20일까지는 예부가 서울로 발송했다고 하면서 보여준 상주내용통지자문』의 내용을 통해서 정말 그런 ‘황제의 명‘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급박하게 펼쳐졌다. ‘황제의 명‘을 칭했을 뿐 판첸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박명원으로서는 그저 모든 것을 황제의 뜻으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사은사 일행의 경우는 박명원 일행에 비해 사태를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여유가 있었다. 건륭제가 박명원 일행을 난데없이 판첸과 만나게 한 이유는 국왕을 포함한 조선 조정에 일종의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따라서 박명원 일행의 귀국 직후 베이징으로 떠난 사은사일행이 그 이유를 탐문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사은사 일행의 서장관은 귀국 후에 탐문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였다.

작년 가을 황제가 열하에 있을 때 번승蕃僧[판첸을 지칭]과 이야기하다가 (화제가) 외국의 일에 미쳤습니다. (그때 황제는 조선이 예의를 두터이 숭상하고 인물과 의관衣冠 또한 볼 만하다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진하사[박명원을 지칭] 일행이 마침 그때 베이징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신으로 하여금 나아가 (판첸을) 만나게 한 것은 대개 번승에게 과시誇示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은사 일행이 탐문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었다. 1781년 음력 삼월 2일 정조는 막 귀국한 사은사 일행에게 이렇게 물었다. "황제가 작년에 사신을 불러 판첸을 만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문물을(판첸에게)과시하며 자랑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러한가?"
사은사 일행의 답변은 "저 사람들彼人의 전하는 바가 그와 같았습니다."라는 것이었다. - P195

사은사 일행은 전년 팔월 열하에서 벌어진 상황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나름의 조사를 거쳐 건륭제가 박명원 일행을 판첸과 만나게 한 것이 기본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판첸의 불상 선물이 황제와는 무관한, 종교적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었음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기엔, 사은사 일행의 보고가 진실에 더 근접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1780년의 박명원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황당하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한 까닭에 오해와 오판의 ‘함정‘에 빠졌고, 급기야는 봉불지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1783 년 여름에 박명원이 1780년 사행 때의 과오를 이유로 정조에게 사신 임명 철회를 요청한 일을 언급하였다. 1781년 봄에 귀국한 사은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박명원의 오해와 오판이 드러났다면, 1783년에 박명원이 말한 자신의 과오에는 불상을 받들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더하여 뒤늦게 드러난 오해와 오판도 응당 포함되었으리라. - P197

그러나 박명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부의 무단 ‘첨개添改‘
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박지원이 (나)에서 예부가 무엇을 더하고 고쳤는지를 애써 밝힌 것도 이들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박지원은 정문 원본의 "특별히 소방을 (은택으로) 적신 것이 미천한 저희 배신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를 예부가 멋대로 "특별한 선물로 국왕과 배신들 및 종인 등에게 비단과 은을 내리시었습니다."로 고치고 "삼가 마땅히 나라로 돌아가 국왕에게 아뢰겠습니다."에 문구를 첨가하여 "삼가 마땅히 나라로 돌아가 국왕에게 아뢰어, 따로 표문을 갖추어 감사를 표하도록 하겠습니다."로 수정하였음을 적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조정에 외교적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원본에서 박명원은 황제가 미천한 배신에 불과한 자신들에게까지 선물을 준 사실을 언급하고, 귀국하면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겠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예부는 선물 사여 대상에 국왕을 추가하고 국왕이 별도로 표문을 갖추어 사은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실제로 조선 조정은 예부의 자문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동지사에게 사은사 임무를 추가로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은 자문에 인용된 사신의 정문 내용에 맞춘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박명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예부의 수정으로 인해 사신의 권한을 벗어난 월권, 심지어는 군주의 특권을 침해하는 참월의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신하가 자기 명의로 제출하는 문서에 국왕이 비단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도 분수를 넘어서는 일인 터에 심지어 응당 국왕이 결정해야 할 사은 표문 발송을 제멋대로 약속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 P218

둘째, 예부가 첨가한 "성스러운 스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축복의 은택에 흠뻑 젖을 수 있었습니다."는 박명원 일행의 봉불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가 불교 승려, 그것도 머나먼 이역에서 온 오랑캐에게 ‘성스럽다‘, ‘우러러 바라보다‘, ‘축복의 은택‘ 등과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언이었다. 만약 이런 말들이 정말 박명원의 붓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봉불 혐의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유죄‘가 될 터였다.
한편, 박명원의 정문 원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문단이었던 까닭에 예부의 첨개 사실을 고발하는 (나)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장이지만, 인용문 (가)에 보이는 판첸을 절하며 뵈었다. 즉 ‘배견拜見‘했다는 구절도 길이는 짧지만 의미는 심각한 부분이다. 구월 17일 장계에서 판첸과의 만남 자체에 대한 언급을 피했던 박명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가 판첸에게 절을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기독교 원리주의를 설파하여 명성을 얻은 목사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을 만큼의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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