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박명원의 사행과 『열하일기』의 관계는 단지 후자가 전자의 활동내용을 반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박지원은 자료의 정리 및 편집 과정을 거쳐 1783년경 『열하일기』를 일단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열하일기』를 집필하면서 연행록의 일반적 형식인 일기체를 작품 전체에 걸쳐 채용하지는 않았다. 압록강을 건넌 1780년 음력 유월 24일부터 사신 일행이 열하에 갔다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팔월 20일까지만을 일기체로 썼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다양한 견문을 내용에 따라 여러 편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서울 출발에서 압록강 도강까지와 베이징을 떠나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은 아예 쓰지 않았다. 여행 과정의 견문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옮기기보다는 어떤 의도하에 견문을 취사선택하고 그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하는 방식을 취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여기서 열하에서 겪은 이야기의 텍스트화 과정, 즉 견문의 취사선택 및 구성plot에도 박지원의 어떤 의도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의도의 존재 여부 및 그 영향 여하는 텍스트 내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이로부터 텍스트 내부에서 벗어나 박명원의 사행 활동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는데, 문제는 박명원 일행의 활동을 살펴보려 할 때 『열하일기』보다 나은 자료가 존재하느냐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지는 까닭은 이렇다. - P155
건국 초부터 불교 배척을 구호로 내세웠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박명원 일행이 판첸과 같은 불교 승려, 그것도 중국이 아니라 티베트의 승려와 만났다는 사실을 왕조의 공식 기록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는 박명원 등이 판첸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아예 쓰지 않았다. 침묵으로 은폐를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국가가 은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폭로했다.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다른 기록에서는 판첸과의 만남 등을 은폐한 반면에 오직 박지원만이 어떠한 왜곡이나 은폐도 시도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썼다고 한다면, 『열하일기』 이외의 사료들은 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주장과 그 주장에 근거하여 전개된 논의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기록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가기록이 박명원과 판첸의 만남을 은폐했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조실록』의 해당 시기 기사들을 찾아보는 정도에서 조사를 멈춘 탓이다. 앞의 주장을 전개한 사람들은 ‘내 눈에 띄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 P157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처리해야 하는 급선무는 역시 칠순 진하 표문과 방물, 그리고 앞서 황인점 일행에게 베푼 청의 외교적 우대 조치 등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표문 몇 통을 청예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번 사행 임무의 성격상 약 2주 후에 열릴 만수절 당일의 축하의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가장 중대한 일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베이징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봤듯이 건륭제는 칠순 잔치를 열하에서 벌일 계획을 세우고는, 박명원 일행의 서울 출발 무렵인 음력 오월 21일에 이미 베이징을 떠나 줄곧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 박명원 일행으로서는 팔월 13일(1780년 9월 11일)의 칠순 만수절에 베이징의 청나라 관원들과 함께 멀리 열하의 황제를 향해 하례를 올리는 망하례에 참석하기만 하면 모든 임무가 완수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공식 일정도 딱히 없었다. 여행의 피로를 풀면서 이따금 여유롭게 관광을 다니는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청나라는 베이징과 열하 간에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인 연락 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1년에 몇 달씩이나 베이징을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팔월 1일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베이징의 예부는 늘 하던 대로 이 사실을 열하의 건륭제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건륭제는 조선에서 만수절을 축하하러 사신이 도착했다면 곧장 열하로 보냈어야지 왜 베이징에 붙잡아두었냐고 역정을 내면서 당장 열하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 P161
팔월 11일 짧은 알현을 마친 뒤에 박명원 등은 어전에서 물러나 대열에 서서 황제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기 중에 황제가 군기장경을 시켜, "너희 나라에서도 부처를 공경하는가? 사찰은 몇 군데 있는가? 관제묘關帝廟 또한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박명원은 "국속國俗이 본디 부처를 숭상하지 않으나, 사찰이라면 외방에 간혹 있기는 합니다. 관제묘는 성 밖에 두 곳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간 뒤 박명원은 숙소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또다시 생여주 1병을 내렸다. 건륭제가 난데없이 조선의 종교 생활에 대해 물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청에서는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을 관제묘라고 불렀는데, 박명원은 서울의 남관왕묘南關王廟와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들어 답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관우에 대한 종교적 숭배 여부도 화제였지만, 나중에 벌어진 일을 고려하건대 이날 관심의 초점은 역시 불교였다고 하겠다.「구월 17일 장계」에 따르면 박명원은 조선이 부처를 모시는 나라가 아님을 명확히 밝혔던 것이다. - P168
8월 12일 그야 어쨌든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사신 일행이 황제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궁정 행사에 조선 사신이 참석한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는 점이다. 비단 선물을 하사하라는 명령도 특별한 것이었다. 수천 리에 달하는 여로를 왕래하는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로 으레 주는 선물 외에 따로 비단을 챙겨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70
열하에서의 일정을 모두 소화한 박명원은 팔월 20일 베이징으로 돌아오자마자 청 예부의 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르면, 조선의 사신이 청에 체류하는 동안에 작성된 외교문서는 모두 귀국하는 사신 편에 맡겨 발송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부가 관례를 무시한 채, 심지어는 박명원에게 알리지도 않은채 세통의 외교문서를 바로 조선으로 발송해버렸다. 이것들은 청의 예부와 조선의 국왕이 주고받는 자문咨文이라고 불리는 문서 양식을 취한 것이었다. 예부의 외교문서 무단 발송에 박명원이 항의를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부는 이들 문서가 열하에서 자신이 조선에 어떤 혜택을 베풀었는지를 속히 알리기 원하는 황제의 뜻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의 항의를 일축하였다. - P173
세통의 내용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번에 조선에서 황제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한다고 보낸 표문·방물 등을 모두 접수하되, 앞으로 황제가 베푼 은혜에 감사한다는 취지로 보내는 사은 표문에는 영원토록 방물을 딸려 보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이 팔월 12일에 있었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다(이하이 자문은 「사은방물정지자문으로 지칭). 두 번째는 당시 열하의 행재, 즉 피서산장에서 근무하던 예부의 관원들이 조선 사신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황제에게 전후 세 통의 상주문을 올렸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는데, 청의 예부는 조선에서도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 상주문 세 건의 원문을 베껴 자문에 첨부하였다(이하 이 자문은 「상주내용통지자문」으로 지칭), 이들 상주문에는 각각에 대한 황제의 간단한 답변이 적혀 있었는데, 황제의 답변 날짜는 각각 팔월 9일, 팔월 10일, 팔월 12일이었다. 세 번째는 열하에서 황제가 조선의 국왕에게 특별한 상물을 하사한 데 대하여 조선의 사신들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정문을 올렸음을 황제에게 아뢰었고, 팔월 14일에 황제가 ‘알았다‘라고 답하였음을 알리는 자문이었다(이하 이 자문은 [조선사신감사자문]으로 지칭) - P174
「상주내용통지자문」의 세 번째 상주문은 예부가 조선 사신 일행을 데려다가 판첸을 알현하게 했으며 판첸이 사신 일행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었음을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니, - P176
두 번째로 유념할 점은 박명원의 「구월 17일 장계」에 판첸과의 만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신 접견을 마친 뒤 황제가 군기장경을 통해 조선의 불교 사찰과 관제묘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열하일기』 연구자들이 조선은 왕조의 공식 기록에서 침묵이라는 수단으로 박명원 일행과 판첸의 만남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박지원만은 왕조가 은폐를 기도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폭로했다고 생각한 것도 실은 구월 17일 장계」의 ‘침묵‘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생각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번째는 앞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박명원이 구월 17일 장계」의 말미에서 선래군관에게 이 장계를 맡겨 보낸다고 하면서 ‘별단別單‘한 건을 따로 작성해서 올린다고 말한 사실이다. 사신의 별단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공개가 될지언정 작성 당시에는 국왕에게 직접 보내는 비밀 보고서를 가리키는데, 이 별단의 존재에 유념해야... - P178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란 불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생들은 박명원 일행을 봉불지사奉佛之使라고 규탄하였다. ‘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었기에 붙여진 말이었겠지만, ‘부처 또는 불교를 받드는 사신‘이라는 뜻도 되니 박명원은 배불의 나라 조선에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처지가 된 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는 가운데 십일월 12일, 부사였던 정원시가 이 일은 한 번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고 하면서 불상을 받아 온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원칙을 지킨 비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정사였던 박명원 역시 일이 부득이했음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벌을 청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안은 굳이 잘잘못을 따져 처벌을 논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에게 안심하라고 일렀다. - P185
『정조실록』 정조 4년 구월 17일 조의 금불 관련 기사는 날짜 오류가 분명하므로 고려 대상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 기사를 제외하면,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금불의 처리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정원일기 시월 23일 기사의 대화 장면이다. 정조가 "황제가 보낸 금불은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역관 한 사람을 정해서 "영변寧邊 향산香山의 정결한 장소"로 보내자는 것이 조정의 공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정조는 서둘러 사신 일행에게 알림으로써 "절대로 그것이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시월 27일, 몇 달 만에 만난 정조와 박명원의 대화에서도 금불은 주요 화제였다. 정조가 물었다. "황제가 보낸 금불은 과연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박명원이 꽤 길게 답하였다.
저들 나라彼國에서는 남의 장수를 기원할 때 반드시 금불을 서로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금불을 보낸 것도 전하를 위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 본래 의도이나, 제가 오는 길에 영변의 향산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역관 한 명을 시켜 향산의 정결한 사찰로 보냈습니다. 박명원은 금불을 서울로 가져오는 길에 정조가 시월 23일에 하달한 명령을 접하고는 묘향산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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