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간에, 그것도 청나라의 일방적인 승전으로싱겁게(?) 끝난 전쟁이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1644년 이전, 즉 중원 정복 이전의 청나라 역사 연구에서 조선과의 관계 자체가 기껏해야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된 탓이 큰 것 같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주(主)‘, 몽고와의16) 관계가 ‘부(副)‘였다면, 조선과의 관계는 간혹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라면,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먼저 제거한 전쟁 정도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병자년에 한정해보자면, 정작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전쟁을 명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병자호란을 친정으로 치렀다. 배후에 명나라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을 비우고 조선에 출정한 셈이니, 종래의 인식으로는 이해 불가이다. 게다가 병자년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나라를 먼저 쳤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P40
그렇다면, 1636년경 청나라 팔기의 인구 총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입관 전 팔기의 인구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로 전하는 기록은 현재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팔기의 인구 조사 결과로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관으로부터 4년이 지난 1648년의 통계이다. 1648년의 인구 조사에서 팔기의 성인 남자 총수는 34만6,931명으로 집계되었다.34) 이 숫자를 토대로표준인구이론(Standard Population Theory)을 써서 전체 인구를 추산한 연구에 따르면, 1648년 팔기의 인구는 적게 잡아 130만 명, 많게 잡아 240만명으로 추정된다. 35) 명나라 말기 약 1.5억 명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중국 인구의 1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게다가 1648년의 성인 남자 34만6,931 명 가운데 전체의 약 63퍼센트에달하는 21만6,967 명은 자유민이 아닌 노복(奴僕)이었다. 만주어로 ‘아하(aha)‘라 불리던 노복들은 대부분 한인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군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따라서 1648년 팔기에서 갑병으로 차출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최대치는 12만9,964명에 그쳤다고 보아야한다. 성인 남자가 약 13만 명 있었다고 해서 이 모두를 실제 갑병으로 출정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1648년의 통계만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를 계산할 수 없다. 병자호란 무렵 팔기의 인구는 아마 입관으로부터 4년이지난 1648년의 인구보다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통계는 유념해둘 가치가 충분하다. 입관 전의 청이 결코 대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숫자로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농업 위주의 경제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 규모의 대리지표가 된다. 입관 전의 청은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명나라의 약 100분의 1에 불과한 소국이었다. - P46
16세기 말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할 무렵의 만주 땅은 단지 여진인들만의 세계가 아니었다. 만주의 남부와 동부는 여진인들의 영역이었지만, 서남부의 요동 지역은 명나라의 영토였다. 만주 서북부와 북부에는 흥안령(興安) 산맥의 동남 사면을 따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초원은 흥안령 산맥의 서북 사면과 고비(Gobi) 사막의 남북 지역과 더불어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지만, 옛날 몽고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 여전히 존재하여 ‘차하르‘라고불리던 유목민 집단의 수장이 그 지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르는 16세기중엽 세력이 악화되어 흥안령 산맥 동쪽 요하 상류의 초원 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620 년대에 이르러 대칸 릭단(Ligdan) [1588~1634년, 재위 1604~1634년이 초원의 재통일을 꿈꾸며 세력을 급속히 키웠고, 마침내 내몽고초원의 중심지였던 후흐흐트[和浩特]까지 점령했다. 지리적 근접성만 놓고 보더라도 누르하치가 일찍부터 여러 유목민 집단들과 적대적 또는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누르하치는일부 유목민 집단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혼인 등의 수단을 써서유목민 수장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1620 년대 후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이 패권 추구를 본격화하자, 홍타이지는 릭단과 적대 관계에 있던 유목민 수장들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홍타이지는 자기편으로 넘어온 유목민 수장들과 맹약을 체결하고 겹겹의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군사동맹의 파트너로 삼았다. 홍타이지의 동맹 집단들은 때로는 차하르, 때로는명나라에 대한 전쟁에 동참했다. 마침내 1634년 릭단이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차하르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1635년에는 릭단의 처자(妻子)들이 투항함으로써 홍타이지가 내몽고 초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 P52
따라서 외번몽고란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몽고 유목민 집단이었다고 할수 있다. 단,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모든 유목민이 전부 외번몽고가 된 것은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누르하치 시기에 일찌감치 복속하여 최종적으로 팔기만주에 편입된 유목민들도 있었다. 또한 1635년 홍타이지에 의해 팔기몽고로 조직된 사람들도 있었다. 외번몽고는 이들과 달리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이후로도 팔기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간 유목민 집단이었다. - P55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투입했느냐는 질문에 대한지금까지의 고찰 결과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봉고에서 약 1만 명을 우전 하에서 전 병력인 약 1만 명을 조선 침공에투입했고, 천우병과 천조병에 대해서는 상례보다 많은 약 1,900명의 동원을 요구했다. 따라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청나라 국내의 정규 병력은 약 2만2,000명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외번몽고 각 집단에 합계 1만2,000명 남짓의 갑병을 출전시키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병력까지 합해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총수는약 3만4,000명 정도였던 셈이다. - P56
그러나 청군 병력의 많고 적음에 대한 판단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병자호란 무렵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천조병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는 3만1,000~3만2,000 명 수준이었다. 병자호란에 참전한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 천조병의 총수는 약 2만2,000명이므로, 홍타이지는동원 가능 병력 총수의 약 70퍼센트를 조선 침공에 투입한 셈이 된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위한 사전 준비로 아지거의 약탈전을 벌인바 있다. 홍타이지가 이 약탈전에 투입한 병력의 총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의 규모로 보아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을 투입했을 터인데, 장거리 원정에서 귀환한 지 얼마 안 된 일반 갑병들을 재차 조선 원정에 출정시키기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또한 명나라와의 국경 및 수도 심양을 위시한 여러 요충지에 적지 않은 수의 수비 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하면, 홍타이지가 국내의 가용 군사 역량을 거의 전부 조선 침공에투입하는 총력전을 준비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앞두고 외번몽고 회맹을 개최하여 합계 약 1만2,000명의 병을 할당한 조치 또한 과거 만주와 몽고 간 군사동맹의 실태와 비교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홍타이지는 1629년 유목민 집단의 수장들과 체결한 맹약에서 명을 상대로 한 출병에는 각 집단이 100명씩의 병력을보내고, 차하르에 출병할 때에는 각 집단의 수장급 인사 전원이 참전하라고규정했다. 후자의 경우 파병 규모는 수장들의 성의(誠意) 여하에 맡겨져있었다.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사전에 각 집단의 파병 규모가 구체적으로정해졌다. 예컨대, 호수가 2,900가였던 한 집단은 936명의 병을 부담했는데, 이는 1629년의 맹약에서 규정한 부담의 아홉 배가 넘는 것이었다. 각 집단의 부담 수준은 집단마다 편차가 작지 않았지만, 전체 평균은 3.4~3.5가에 1명꼴이었다. - P58
이밖에 피로인의 총수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정축년 삼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나, 심양에서 도망치는 피로인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심양장계(瀋陽狀啓)』의 정축년 팔월 19일 기록 등은 최명길의 "50여만 명"이나 나만갑의 "60만 명"이사실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만갑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조선 출신 노예만 해도 "60만 명"에 달했던 심양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1590년대 햇수로 7년이나 지속되었던 왜란 기간에 발생한 피로인의 숫자가 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마당에, 겨우 두 달의 전쟁에서 50만 명 또는 60만 명의 피로인이 발생했다는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최명길의 50여만 명은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를 명에 알리는 문서에 등장하는 숫자이다. 명나라에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동기에 추동된 과장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말은 ‘수가 많다‘ 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수사적 관용구이다.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표현인 것이다. - P61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심양의 남문 밖에 쌓은 제단으로 나아가 먼저 하늘에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이때 읽은 축문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이 "조선을 정복하고 몽고를 통일했으며 옥새를 획득했기에 "존호를 받는다고밝혔다. 아울러 명나라가 여전히 적국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감히 "존호" 를 칭할 수 없어 거듭 고사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천의 의식을 마친 홍타이지는 이어서 "수존호례(受尊號禮)", 즉 존호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홍타이지는 이 의식을 위해 따로 쌓은 단에 올라 자리를 잡았고, 좌우로 서열에 맞추어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그를 향해 삼궤구고두의 예를올렸다. 이어서 조선 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 등 세 가지 위업을 다시강조하면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선포했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가 존호를 받으면서 내건 명분은 ‘조선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이었다. 몽고 통일과 옥새 획득은 차하르 정복의 업적을 가리키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복‘은 그렇지 않다. ‘조선 정복‘이란 정묘호란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비록 조선이 수세에 처한 상황이었을지라도 쌍방의 맹약으로 화의가 성립함으로써 끝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자신이 이미 조선을 정복했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홍타이지가 "인성황제"라는 존호를 받은 의식, 편의상 앞으로 ‘황제 즉위식‘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장엄한 의례를 거행하던 현장에는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마침 심양에 와 있던 나덕현과 이확을 ‘황제 즉위식‘에 데려와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두 사람은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목숨을 걸고 거부함으로써 한바탕의 ‘소동‘을 야기했다. 두 사람의 저항은 항마디로 장엄한 ‘황제즉위식‘에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 P65
여기서 ‘절화교서‘는 아니었다고 치더라도 나덕현과 이확의 의례 참여 거부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역시 조선이 전쟁을 자초했다고 말할 수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당시의 조선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국력 쇠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병자년의 시점에서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는 절대 수용 불가였다. 단지 대명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을지라도 병자년의 명나라가 여전히 대국으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무렵의 명나라는 멸망을 코앞에 둔 처지였으니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무슨 대수이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청의 입관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홍타이지조차도 명이 곧 멸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644년 청에게 입관의 기회를제공한 이자성(李自成)의 북경 점령은 문자 그대로 돌발 사태였다. - P66
어느 쪽이 문제였는지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홍타이지야말로 애초에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홍타이지의 존호는 논의 당초 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였다. 병자년의 전년인 을해년 십이월 말 홍타이지가 이제 존호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하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차하르 정복과 옥새 획득이었다. 그런데 존호를 칭하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홍타이지가 돌연 "조선국의 왕은 (나의) 형제가 되어 있다. 그에게 상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조선 왕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존호 문제가 홍타이지에 의해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존호를 바치는 대열에 조선의 왕을 동참시키자는 발상을 내놓은 장본인은바로 홍타이지였던 것이다. 정묘년의 맹약은 어디까지나 형제처럼 잘 지내자는 것이었다. 인조에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맹약 파기 행위였다. 인조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절화교서‘를 내세우며 조선이 맹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늘에 고했지만, 정작 ‘절화교서‘ 가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칭제‘ 과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일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이 자신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은 일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P68
여기서 홍타이지가 자신의 ‘희망사항‘ 때문에 굳이 조선을 끌어들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까닭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자년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도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가 내세운 명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원 11일의 장엄한 의식은 기껏해야 ‘미완의 황제 즉위식‘에 그치고 만 셈이다. 이왕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가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정묘년의 ‘조선 정복‘은 사실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조선이 ‘배신‘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그는 ‘배신‘의 증거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절화교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배신‘을 주장한 이상, 홍타이지로서는 ‘조선 정복‘을 위한 전쟁 발동이 당위이자 필연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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