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은 대개 산성이었다.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과거의 전쟁 경험에서 얻은교훈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 조선은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의 경험을 통해 사방이 훤히 트인 평지에서 적의 강력한 기병과 정면 승부를벌여서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지의 성곽 또한 청군의 공격을 막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성 작전 능력을 갖추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성 작전 경험이 풍부했다. 조선은 정묘호란때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 동시에 조선은 산성이나 험준한 산악 지형의 전술상 이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그들과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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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각 지역에 산성을 신축·보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게다가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단지 전술상의 이점만 고려한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안전까지 시야에 넣은 것이었다. 이 또한 정묘호란 때 적의 살육과 약탈로 일반 백성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 P78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조선 조정이 오로지 산성 거점 방어전략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차 방어선이자 주력 방어선이었던 안주와 영변에는 유사시 성곽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간다는 입보入保 전략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 곳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영변의 철옹산성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지만, 안주성은 평지에 입지한 성곽이라 방어가 어려웠음에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 위치한 까닭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유림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안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겼던 것도 안주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야 조선이 세운 유사시 방어전략의 근간은 뭐니 뭐니해도 역시 조정의 강화도 파천播遷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각 지역 군민이 산성으로 입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조선 조정 또한 강화도로 입보한다는 구상이었다는 말이다. 강화도 파천의 목적은 물론 전쟁의 장기화였다. 즉, 조선의 방어전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구전持久戰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원정군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기마련이다. 특히나 조선이 구상한 강화도 거점 지구전 전략은 청의 원정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병 위주의 북방 민족에게 해상에 입지한 강화도는 공격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 P79

이처럼 정묘호란의 경우 인조는 적군이 황주까지 왔다는 소식에 파천을결정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강화도에 도착했다. 만약 병자호란 때에도 똑같이 움직일 요량이었다면, 일차. 이차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이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파천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병자년의 경우에는 아예 전쟁 발발을 기다릴 것 없이 일찌감치 강화도로 파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으므로, 황주마저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정묘호란의 사례를 참고하건대 단 사나흘의 말미만 확보하더라도 강화도로의 파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P81

청군이 안주에서 개성까지의 약 600리를 진군하는 데 걸린 시간은아무리 길게 잡아도 만 사흘을 넘지 않았던 셈이다. 평균적으로 파발마 속도의 절반을 상회하는 엄청나게 빠른 진군 속도였다.
청군의 가공할 침공 속도를 잇따라 전한 12~14일 사흘간의 장계에 문자그대로 패닉에 빠졌을 조선 조정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십이월 14일 오전 조선 조정은 겨우 빈궁을 비롯한 왕실 가족 등을 먼저 강화도로 떠나보냈을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숭례문까지 왔다가 적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오늘날의 은평구 역촌동]을 지나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강화도로 가기는 글렀다고 판단하여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인조는 이제야 막 얼음이 얼어 아직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한강의 얼음길을 허둥지둥 말을 타고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어둠이 깔린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그나마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최명길과 이경직(李景稷)이 단 한 명의 비장(神將)과 함께 홍제원으로 나아가 청군 측의 마푸타(Mafuta)[조선 기록의 ‘마부대(馬夫大)]와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벌어준덕분이었다. - P87

먼저 일차적 요인이다. 홍타이지가 세운 공격전략에서 개전 초기의 작전목표는 조선의 심장부인 서울을 곧바로 기습하여 인조를 서울 도성에 가두는 것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작전이었으므로 ‘전격 작전‘이라고 부를만하다. 이러한 전격 작전의 성패는 청군이 얼마나 빨리 서울에 도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진군 속도가 생명이었다. 진군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물이라는 자연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홍타이지가 엄동설한의한겨울이 오기를 기다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의주-서울의 대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던 조선군과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정묘호란 때처럼 중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서울 도착 시간이 늦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까? 홍타이지는 ‘통과 작전‘ 내지 ‘패싱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서울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작전이었다.
다음으로 이차적 요인이다. 전격 작전을 세운 홍타이지는 작전 목표의 실현을 위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청군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작전 목표가 자동적으로 달성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는 약 1,200리나 되는 거리였다. 만약 중간에 조선군이 청군의 진로를 가로막기라도 했다면, 서울의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는 데 필요한 며칠의 말미를 확보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게 진군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산성으로 입보한 탓에 대로를 질주하는 청군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89

실제로 병자년 사월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적접촉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병자년 사월 나덕헌과 이획을 사실상 추방할때, 홍타이지는 나덕현과 이획의 무례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 측이 형제 맹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며 강력히 비난하는 국서를 건넸다. 그러나 나덕헌일행은 황제를 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차마 조선 조정에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숙박했던 통원보(通遠堡)에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했고, 단지 국서의 내용을 베낀 장계를 서울로 보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조선은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접수를 일단 거부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전쟁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병자년유월, 조선 조정은 정묘년 이래의 맹약을 깬 적이 없다는 취지의 문서를 의주로 보내어 청나라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는 나덕현 일행이 장계로 보고한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청나라 측의 접수 거부로인해 문서의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인조는 ‘척화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심양에 역관(譯官)을 파견했다. 조선의 역관 일행은 병자년 시월 말 심양에 도착했지만, 청나라에서 접수를 거부한 탓에 가져간 문서도 전달하지 못하는 등 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정식 사신의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격론을 벌인 끝에 십이월 4일 추신사(秋信使) 박로가 서울을 출발했다. 그러나 박로가 서울을 떠난 십이월 4일은 홍타이지가 이미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한 뒤였다. - P90

조선에서도 만약 홍타이지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시기는 강물이 어는 결빙기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약탈을 하고 달아나는 여진인들의 행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경험한 바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의 병자년 십일월 기사만 보더라도 "얼음이 언 뒤"라면 언제 적의 침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조선 조정의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빙기에 전쟁을 벌이기로 한 홍타이지의 결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빙기 중에서도 언제였느냐가 문제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느냐, 아니면 한강의 결빙기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조선 전기 여진인들의 침공을 경계해야 했던 계절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다. 정묘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정묘년 정월 13일이었다.  이 날짜를 보고 그냥 요즘 달력의 ‘1월13일‘을 떠올린다면, 정묘년의 후금군 역시 한겨울에 쳐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정묘년 정월 13일은 1627년 2월 28일이었다. 정묘호란은 기본적으로 양력 3월에 진행된 ‘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단 압록강은 여전히 결빙기였기 때문에 후금군은 얼음길로 강을 건넜다. 하지만 적어도 대동강 이남의 강들은 이미 얼음이 녹은 뒤였다.
병자호란 때의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정묘호란 때보다 거의 두 달이 앞서는 1637년 1월 3일(병자년 십이월 8일)이었다. 한반도의 1월은 겨울의 한복판이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도 모두 얼어 있었다. 청군 선봉대가 서울에 도착한 병자년 십이월 14일에는 한강에도 얼음길이 열렸다. 그들이 겨우 엿새 만에, 그리고 이틀 뒤인 십이월 16일 청군의 증원 병력 두 부대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강이얼어 있었던 덕분이다. 홍타이지는 서울을 최단 시간에 직격하는 데 필요한 자연 조건이 형성되는 시기를 골라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 P93

홍타이지가 전쟁의 초기 판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승부수를 던진 것은 심양을 떠난 다음 날인 십이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홍타이지는 마푸타와 로오사(Loosa)에게 300명의 병력을 맡기면서, "상인을 가장하여 밤낮 없이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왕경(京) 성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300명은 ‘전봉(前鋒:gabsihiyan cooha)‘ 이라고 불리던 부대로 청군 중에서도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경무장의 최정예기병이었다. 로오사는 당시 전봉대신(前鋒大臣:gabsihiyan coohai amban), 즉 전봉 부대의 사령관으로, 일찍이 ‘숑코로 바투르(Songkoro Baturu)‘라는 일종의 전쟁 영웅 칭호를 받은 용맹한 장수였다. 조선의 기록에 ‘마부대‘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는 마푸타는 ‘용골대(龍骨大)‘, 즉 잉굴다이(Ingguldai)와 더불어 홍타이지의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길잡이역할을 겸해서 청군의 최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인다. - P95

그들의 진군 속도야 어쨌든 간에, 만약 십이월 14일의 조선 조정이 그날 서울에 들이닥치고 있던 청군이 겨우 수백 명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닉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군의 작전이 조선 조정의 착각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소수 정예의 전봉 병력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은밀하게 침투시킨 홍타이지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말이다. 요즘의 전쟁에 빗대자면, 홍타이지는 공수 부대를 안주에 낙하시킨 것과 다름이 없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 P99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전 초기 로오사 선봉대가 거둔 성과는 엄밀히 말해서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인조를 서울 도성에 묶어둔다는 당초의 작전 목표를 100퍼센트 실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오사 선봉대가 일단 인조의 발을 묶어두면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망을 구축한다는 것이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이었다. 서울 도성은 성벽의 대부분이 평지에 입지했으므로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일단 포위망을 구축한 뒤에 전 병력을 서울에 집결시켜 공격에 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다는 심산이었을것이다.
반면에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입지한 천혜의 요새였다. 성벽가까이 공성 장비를 가져다 대기조차 쉽지 않았다. 설사 전 병력이 집결한다고 해도 당장 공격해서 함락시키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대한 공성전은 자칫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인명 손실만 늘릴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남한산성처럼 공성 자체가 어려운 산악 요새에 대해서는 포위망을단단히 구축하고 수비 측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울 도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망 구축과 유지에는 서울 도성보다 훨씬 더많은 병력이 요구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홍타이지가 전쟁이 끝난 뒤 로오사에게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을 저지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을 물은 것도충분히 이해가 간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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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우리가 폭발물이면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기회와 행동력과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분노와 불안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냥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 누군가가 너에게 칼을쥐여준 셈이다. 누구였냐구? 그냥, 모두들.
틀 안에 들어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우리에게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정작 세상은 너무나 부주의하다. 우리가 깨지기 쉽다고 보호하다가도 상자 속에 넣은 다음에는 던져버린다. - P14

이사 때만 해도 그렇다. 거의 이삼 년에 한 번씩 엄마와 둘이서 수많은 이사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남자 어른이 없다는 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종이상자 속에 꼬박꼬박 모아온 나의 전 재산중 지폐만 모조리 없어져버린 일, 이삿짐 트럭이 내 자전거를 그대로 싣고 가버린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점심값을 요구하거나 사다리 비용 같은 걸 흥정할 때 으레 엄마한테 반말을 하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쩔쩔매게 만드는 짓궂은 아저씨들이 적지 않았다. 짐을옮기다 말고 욕실에 들어가서 웃통을 벗고 머리를 감는 아저씨도봤다. 또 엄마와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 경비 아저씨들은 유난히 참견하고 잔소리를 하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들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무례한가 생각하곤 했다.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친절도 속으로는 크게 다를 것 없었고.
물론 좋은 아저씨들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나 다 부당한 취급을받았을 때의 기억이 더 안 잊히고 오래가는 거 아닌가.
만약 남자 어른이 있는 집이었다면, 엄마가 열시 넘어까지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싱글맘이 아니고 깐깐한 주부 스타일이었다면, 그리고 우리 집이 오십 평쯤 되는 큰 집이었다면,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화분이나 양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 P40

-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엄마가 내게 알려주고 싶은 건, 그러니까 인생의 쓴맛인가. 예방주사를 놓듯이? 그래도 이건…… 미리부터 너무 겁먹는 거 아냐?
엄마는 모르고 있다. 몇년전부터 내가 엄마의 충고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있다는 걸. 내 방으로 들어가선 엄마와 다른 생각을 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간에는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내 안의 뭔가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것이 때로 고독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것을 말이다.
늦은 밤, 식탁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엄마와 내방 거울 앞에 서 있는 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의 고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모두 다 그런 것일까. - P47

다섯 살 때였던가.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원피스를 사와서 내게 입히고, 뭘 하든 기왕이면 예뻐야 한다며 머리핀도 꽂아주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날리며 들뜬 표정으로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놀이터를 한 바퀴 돌고 그네와 미끄럼틀을한 번씩 탄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뿐이었다. 그뒤로 다시 그 원피스를 입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이웃 아줌마들에게 놀림은 당했던 것 같다. 고추가 떨어진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 한 번의 경힘은 너무나 상쾌하고 신기해서 마치 우주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있다.
나만 그럴까. 누구나 한번쯤 그런 옷을 입어보고 싶을 수 있는 거아닌가.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흉내로 해소되기도 한다고 엄마도 말한 적 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가지 다른 본성이 섞여있다는 사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면서.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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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달 소집에 꼭 와야 하나요?"
"행정부에서 정한 의무사항입니다. 프랑스의 모든 실업자들은 매달 약속한 날에 나와야만 합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계속 이어간다.
"당신 역시 우리를 소집하는 게 의무인가요?"
"네. 만약 우리가 정한 날짜, 정한 시각에 사람들을 소집하지 않으면, 컴퓨터에 경고가 뜨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제재를 받게 됩니다. 우리 할당분이 올라가고 평가 점수는 추락한답니다."
또다시 침묵이 일고, 그 침묵의 깊이가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고있다는 느낌을 준다. 원래 한 상담원이 맡는 구직자들은 60명인데, 어떤 대행사들은 180 명 이상을 맡고 있다. 이 지역만 해도 4천 명이상의 구직자들 서류가 밀려 있는 형편이다. 제대로 보조를 맞출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그녀는 그 상담원에게 몸을 구부리며 말한다.
"참 안되셨군요. 잘해보세요." - P310

마르그리트가 저녁에 일하는 곳에서 ㅡ 만약 그곳이 맞다면ㅡ그녀를 만나보려고 하루 종일 시간 가는 것만 기다리며 보낸다. 마침내 나는 텅 빈 사무실에 도착한다. 멀리 어느 층에서 카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지나 그녀를 찾아간다.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녀와 맞닥뜨린다.
복도의 회색 네온 불빛 아래서 웃고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진정한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이 반가움이 사라질 순간을 가능한 한 최대한 늦추기 위해 나는 그녀를 붙잡고 끝없이 안부를 물어댄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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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빌 부인은 우리가 오늘 일로 얼마나 받을지 물어볼 엄두를내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이 주근깨가 난,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계산을 해봤다. 쉬발 블랑에서 매번 최소한 5시간은 작업하는데ㅡ때때로 그 이상-계약서상으로는 단지 3시간 15분만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마티유 사장이 우리에게했던 말, 즉 어떤 경우라도 초과 작업 시간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더 지급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툴라빌 부인은 자기가 짐작했던 게 아닌가 하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잘못 이해했었기를 바랄 수밖에."
어쨌든 그녀는 항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걸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 P212

옆 사무실의 한 남자가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 이제 우리 둘뿐이야"라고 말했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고, 역시 재빠른 동작으로 익숙하게 책상과 의자 사이에서 편안하게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녀는 조용하고, 남자는 마치 연극 속의 독백처럼 계속 지껄여대는데, 자세히 들리지는 않고 그저 낮은 음악소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위치에서 시끄러운 진공청소기를돌리면서 그들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사람이 있다는기척을 내려고 일부러 가구들에 부딪히고 쓰레기통도 흔들어 대면서 소음을 더 크게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리를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나같은 존재는 그저 진공청소기의 연장일 뿐이며, 고무장갑에 청소작업복을 걸친 진공청소기 같은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창문 가까이에 있는 철망 바구니에 그녀의 암탉이 낳은 달걀들을 놓고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빅토리아를 생각했다. 그녀는 반짝이는 녹색,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알게 될 거야. 청소부가 되면 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거야. 사람들이 말하거나 한 짓들을 알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절대알아서도 안 되는 거고. 그 외에 네게 해줄 조언은 없어."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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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에, 그것도 청나라의 일방적인 승전으로싱겁게(?) 끝난 전쟁이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1644년 이전, 즉 중원 정복 이전의 청나라 역사 연구에서 조선과의 관계 자체가 기껏해야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된 탓이 큰 것 같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주(主)‘, 몽고와의16) 관계가 ‘부(副)‘였다면, 조선과의 관계는 간혹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라면,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먼저 제거한 전쟁 정도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병자년에 한정해보자면, 정작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전쟁을 명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병자호란을 친정으로 치렀다. 배후에 명나라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을 비우고 조선에 출정한 셈이니, 종래의 인식으로는 이해 불가이다. 게다가 병자년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나라를 먼저 쳤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P40

그렇다면, 1636년경 청나라 팔기의 인구 총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입관 전 팔기의 인구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로 전하는 기록은 현재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팔기의 인구 조사 결과로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관으로부터 4년이 지난 1648년의 통계이다. 1648년의 인구 조사에서 팔기의 성인 남자 총수는 34만6,931명으로 집계되었다.34) 이 숫자를 토대로표준인구이론(Standard Population Theory)을 써서 전체 인구를 추산한 연구에 따르면, 1648년 팔기의 인구는 적게 잡아 130만 명, 많게 잡아 240만명으로 추정된다. 35) 명나라 말기 약 1.5억 명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중국 인구의 1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게다가 1648년의 성인 남자 34만6,931 명 가운데 전체의 약 63퍼센트에달하는 21만6,967 명은 자유민이 아닌 노복(奴僕)이었다. 만주어로 ‘아하(aha)‘라 불리던 노복들은 대부분 한인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군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따라서 1648년 팔기에서 갑병으로 차출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최대치는 12만9,964명에 그쳤다고 보아야한다. 성인 남자가 약 13만 명 있었다고 해서 이 모두를 실제 갑병으로 출정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1648년의 통계만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를 계산할 수 없다. 병자호란 무렵 팔기의 인구는 아마 입관으로부터 4년이지난 1648년의 인구보다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통계는 유념해둘 가치가 충분하다. 입관 전의 청이 결코 대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숫자로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농업 위주의 경제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 규모의 대리지표가 된다. 입관 전의 청은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명나라의 약 100분의 1에 불과한 소국이었다. - P46

16세기 말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할 무렵의 만주 땅은 단지 여진인들만의 세계가 아니었다. 만주의 남부와 동부는 여진인들의 영역이었지만, 서남부의 요동 지역은 명나라의 영토였다. 만주 서북부와 북부에는 흥안령(興安) 산맥의 동남 사면을 따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초원은 흥안령 산맥의 서북 사면과 고비(Gobi) 사막의 남북 지역과 더불어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지만, 옛날 몽고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 여전히 존재하여 ‘차하르‘라고불리던 유목민 집단의 수장이 그 지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르는 16세기중엽 세력이 악화되어 흥안령 산맥 동쪽 요하 상류의 초원 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620 년대에 이르러 대칸 릭단(Ligdan) [1588~1634년, 재위 1604~1634년이 초원의 재통일을 꿈꾸며 세력을 급속히 키웠고, 마침내 내몽고초원의 중심지였던 후흐흐트[和浩特]까지 점령했다. 지리적 근접성만 놓고 보더라도 누르하치가 일찍부터 여러 유목민 집단들과 적대적 또는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누르하치는일부 유목민 집단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혼인 등의 수단을 써서유목민 수장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1620 년대 후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이 패권 추구를 본격화하자, 홍타이지는 릭단과 적대 관계에 있던 유목민 수장들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홍타이지는 자기편으로 넘어온 유목민 수장들과 맹약을 체결하고 겹겹의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군사동맹의 파트너로 삼았다. 홍타이지의 동맹 집단들은 때로는 차하르, 때로는명나라에 대한 전쟁에 동참했다. 마침내 1634년 릭단이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차하르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1635년에는 릭단의 처자(妻子)들이 투항함으로써 홍타이지가 내몽고 초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 P52

따라서 외번몽고란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몽고 유목민 집단이었다고 할수 있다. 단,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모든 유목민이 전부 외번몽고가 된 것은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누르하치 시기에 일찌감치 복속하여 최종적으로 팔기만주에 편입된 유목민들도 있었다. 또한 1635년 홍타이지에 의해 팔기몽고로 조직된 사람들도 있었다. 외번몽고는 이들과 달리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이후로도 팔기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간 유목민 집단이었다. - P55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투입했느냐는 질문에 대한지금까지의 고찰 결과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봉고에서 약 1만 명을 우전 하에서 전 병력인 약 1만 명을 조선 침공에투입했고, 천우병과 천조병에 대해서는 상례보다 많은 약 1,900명의 동원을 요구했다. 따라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청나라 국내의 정규 병력은 약 2만2,000명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외번몽고 각 집단에 합계 1만2,000명 남짓의 갑병을 출전시키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병력까지 합해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총수는약 3만4,000명 정도였던 셈이다. - P56

그러나 청군 병력의 많고 적음에 대한 판단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병자호란 무렵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천조병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는 3만1,000~3만2,000 명 수준이었다. 병자호란에 참전한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 천조병의 총수는 약 2만2,000명이므로, 홍타이지는동원 가능 병력 총수의 약 70퍼센트를 조선 침공에 투입한 셈이 된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위한 사전 준비로 아지거의 약탈전을 벌인바 있다. 홍타이지가 이 약탈전에 투입한 병력의 총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의 규모로 보아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을 투입했을 터인데, 장거리 원정에서 귀환한 지 얼마 안 된 일반 갑병들을 재차 조선 원정에 출정시키기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또한 명나라와의 국경 및 수도 심양을 위시한 여러 요충지에 적지 않은 수의 수비 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하면, 홍타이지가 국내의 가용 군사 역량을 거의 전부 조선 침공에투입하는 총력전을 준비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앞두고 외번몽고 회맹을 개최하여 합계 약 1만2,000명의 병을 할당한 조치 또한 과거 만주와 몽고 간 군사동맹의 실태와 비교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홍타이지는 1629년 유목민 집단의 수장들과 체결한 맹약에서 명을 상대로 한 출병에는 각 집단이 100명씩의 병력을보내고, 차하르에 출병할 때에는 각 집단의 수장급 인사 전원이 참전하라고규정했다. 후자의 경우 파병 규모는 수장들의 성의(誠意) 여하에 맡겨져있었다.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사전에 각 집단의 파병 규모가 구체적으로정해졌다. 예컨대, 호수가 2,900가였던 한 집단은 936명의 병을 부담했는데, 이는 1629년의 맹약에서 규정한 부담의 아홉 배가 넘는 것이었다. 각 집단의 부담 수준은 집단마다 편차가 작지 않았지만, 전체 평균은 3.4~3.5가에 1명꼴이었다.  - P58

 이밖에 피로인의 총수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정축년 삼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나,  심양에서 도망치는 피로인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심양장계(瀋陽狀啓)』의 정축년 팔월 19일 기록 등은 최명길의 "50여만 명"이나 나만갑의 "60만 명"이사실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만갑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조선 출신 노예만 해도 "60만 명"에 달했던 심양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1590년대 햇수로 7년이나 지속되었던 왜란 기간에 발생한 피로인의 숫자가 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마당에, 겨우 두 달의 전쟁에서 50만 명 또는 60만 명의 피로인이 발생했다는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최명길의 50여만 명은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를 명에 알리는 문서에 등장하는 숫자이다. 명나라에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동기에 추동된 과장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말은 ‘수가 많다‘
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수사적 관용구이다.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표현인 것이다. - P61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심양의 남문 밖에 쌓은 제단으로 나아가 먼저 하늘에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이때 읽은 축문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이 "조선을 정복하고 몽고를 통일했으며 옥새를 획득했기에 "존호를 받는다고밝혔다. 아울러 명나라가 여전히 적국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감히 "존호"
를 칭할 수 없어 거듭 고사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천의 의식을 마친 홍타이지는 이어서 "수존호례(受尊號禮)", 즉 존호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홍타이지는 이 의식을 위해 따로 쌓은 단에 올라 자리를 잡았고,
좌우로 서열에 맞추어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그를 향해 삼궤구고두의 예를올렸다. 이어서 조선 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 등 세 가지 위업을 다시강조하면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선포했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가 존호를 받으면서 내건 명분은 ‘조선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이었다. 몽고 통일과 옥새 획득은 차하르 정복의 업적을 가리키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복‘은 그렇지 않다. ‘조선 정복‘이란 정묘호란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비록 조선이 수세에 처한 상황이었을지라도 쌍방의 맹약으로 화의가 성립함으로써 끝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자신이 이미 조선을 정복했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홍타이지가 "인성황제"라는 존호를 받은 의식, 편의상 앞으로 ‘황제 즉위식‘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장엄한 의례를 거행하던 현장에는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마침 심양에 와 있던 나덕현과 이확을 ‘황제 즉위식‘에 데려와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두 사람은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목숨을 걸고 거부함으로써 한바탕의 ‘소동‘을 야기했다. 두 사람의 저항은 항마디로 장엄한 ‘황제즉위식‘에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 P65

여기서 ‘절화교서‘는 아니었다고 치더라도 나덕현과 이확의 의례 참여 거부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역시 조선이 전쟁을 자초했다고 말할 수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당시의 조선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국력 쇠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병자년의 시점에서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는 절대 수용 불가였다. 단지 대명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을지라도 병자년의 명나라가 여전히 대국으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무렵의 명나라는 멸망을 코앞에 둔 처지였으니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무슨 대수이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청의 입관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홍타이지조차도 명이 곧 멸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644년 청에게 입관의 기회를제공한 이자성(李自成)의 북경 점령은 문자 그대로 돌발 사태였다. - P66

어느 쪽이 문제였는지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홍타이지야말로 애초에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홍타이지의 존호는 논의 당초 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였다. 병자년의 전년인 을해년 십이월 말 홍타이지가 이제 존호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하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차하르 정복과 옥새 획득이었다. 그런데 존호를 칭하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홍타이지가 돌연 "조선국의 왕은 (나의) 형제가 되어 있다. 그에게 상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조선 왕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존호 문제가 홍타이지에 의해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존호를 바치는 대열에 조선의 왕을 동참시키자는 발상을 내놓은 장본인은바로 홍타이지였던 것이다.
정묘년의 맹약은 어디까지나 형제처럼 잘 지내자는 것이었다. 인조에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맹약 파기 행위였다. 인조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절화교서‘를 내세우며 조선이 맹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늘에 고했지만, 정작 ‘절화교서‘
가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칭제‘ 과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일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이 자신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은 일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P68

여기서 홍타이지가 자신의 ‘희망사항‘ 때문에 굳이 조선을 끌어들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까닭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자년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도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가 내세운 명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원 11일의 장엄한 의식은 기껏해야 ‘미완의 황제 즉위식‘에 그치고 만 셈이다. 이왕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가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정묘년의 ‘조선 정복‘은 사실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조선이 ‘배신‘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그는 ‘배신‘의 증거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절화교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배신‘을 주장한 이상, 홍타이지로서는 ‘조선 정복‘을 위한 전쟁 발동이 당위이자 필연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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