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재일동포사건이나 일본 관련 사건에는 증거의 왕 자백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간첩 조작의 만능열쇠가 하나 더 있다. 서울시 공무원간첩 조작 사건에서 논란이 된 ‘영사 증명‘이 바로 그것이다.
영사 증명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이재승 교수가 지적한것처럼 영사 증명은 증명되어야 할 사실을 증명된 것처럼 꾸민 ‘찌라시‘일 뿐이다. 간첩 사건에 제출된 영사 증명은 영사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는, 아니 원천적으로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 행위는 접수국의 주권 또는 관할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사가 본국 수사기관의 요청으로 "형사소송의 보조자로, 수사권의 주체로 나서 접수국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영사 증명서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본국 법정에 제출하는 행위는 자신이 국제법상 불법행위를저질렀다고 자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91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마리‘의 간첩이 나오기위해서는 수많은 자들의 팀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단 중앙정보부, 안기부만이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받쳐주고, 검찰이 법률적으로 포장해주고, 판사가 고문당했다는 호소에도 바짓가랑이 들어보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조작의 한 부분을 맡아 팀플레이를 해가며 간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간첩들 중에서 현재의 국가 기밀 개념을 적용한다면 간첩죄로 유죄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첩은 처음에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모르는 놈을 "저 자식 간첩 아냐"라고 손가락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첩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간첩보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 P93

대형 내란 사건이나 공안 사건이 발생할 때의 상황을 보면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을 늘 발견하게된다. 왜 하필 이런 때면 꼭 내란이 일어나거나 공안 사건이터지는 것일까?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에는빨갱이 선동이 필요했고, 1967년 6월 8일에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동백림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공개 등 정치 개입에 대한 반발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때맞춰 터져준 것처럼 내란의유령이 잠에서 깨어날 때는 스멀스멀 나쁜 기운이 한국 사회를 감싸기 마련이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초대형 공안 사건을 터뜨려 각종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다행히 그때만 해도 극우 보수 세력 중에서도 가장 극우라 할수 있는 공안 검사들의 양심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맞춤법도 안 맞는 시나리오에 따라 관련자들을 기소하는대신 사표를 던졌다. - P116

유신은 그렇게 왔다. 유신이야말로 형법전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내란이었다. 수많은 함량 미달의 내란 사범을 양산한 박정희가 내란이란 이런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란죄의 구성요건에서 가장 중요한 국헌문란에 대해 형법 9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박정희가 자기 마음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분리해놓은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로 집중시킨 것이야말로 똑 떨어진 국헌문란 행위였다. 탱크와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으니 이것이 87조 내란죄에서의 ‘국헌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5.16 군사반란 무렵의 군형법을 보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자" 중에서 "수괴는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무기징역도 없는 사형인 것이다. 유신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내란이었다. 이 내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많은 내란 사범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 P124

1979년의 10•26 사건은 김재규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자행한 유신이라는 내란을 종식시킨 민주혁명이었을까. 아니면 전두한 측의 주장대로 정권을 찬탈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망상을 가진 김재규가 저지른 내란이었을까? 12•12와 5•17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행위를 자연인 박정희에 대한 단순 살인이 아닌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규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강압적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장 이영석은 입이 돌아가는 마음고생을 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쫓겨나는 자리에서 이영석은 회한과 오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퇴임사를 쓰면서 사법부의 한자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부(府)가 아닌 법무부 같은 행정부의 한 부서를 의미하는 부(部)로 표기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5·16군사반란과 유신친위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뿐이다. 5.17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이바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란음모죄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전 단계인 모의를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 있다. 즉 내란음모죄로는 사형이 불가능한 것이다.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받은 것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유신 직후 일본에 망명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민주인사들을 모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1977년 법원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의간첩 조작 사건에서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판시했고, 이판례를 인용하여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반국가단체의 수괴로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민통에 대한 반국가 단체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한 사람이 박근혜 정권 출범직후까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 P130

김대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내란음모에서 주요 임무 종사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등의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향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바로 김정사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증인으로 활약했던 윤효동이란 자였다. 윤효동이 법정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북 말투로 김대중 등이 얼마나 불온한 자들이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있는지 열변을 토할 때 순발력 좋은 김상현 의원이 이 법정이어느 나라 법정이냐고 크게 외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간첩이 북한식 말투로 민주 인사들을 모함하는 발언을 증언이랍시고 듣는 법정이 대한민국 법정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정인가를 따져 물은 것이다. 쇼맨십 풍부한 문익환 목사는 벌떡 일어나 "내란이다!"라고 소리쳤고, 다른 피고인들도 따라 일어나 윤효동을 향해 "내란이다!" 하고 소리쳤다. 겁먹은 윤효동은 검사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쪽문으로 쫓겨나갔다고 한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슬픈 코미디였다. - P131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항, 그 존재만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이익분배 균점권 조항이 들어간 것일까? 혹시 제헌헌법을 좌파들이 모여 만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좌파는 5 • 10 선거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파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이익분배 균점권을 제헌헌법에 집어넣을 것을 주장한 세력은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대한노총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전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좌파 노동운동 세력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노동 단체의 간판을내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승흠에 따르면 노동자의 이익균점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을 한 정치 지도자는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자본과 노동이 평균 이익을 누리게 하자는 주장"을 "제헌국회의 헌법심의 중에서. 그것도 이익 균점권 논의에서" 한 것이다. 아무리 이승만이라 한들 국민생활의 균등한 보장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없었던 것이다. - P141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87조의 중요 산업 국영 · 공영 원칙에 대해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 조항은 소련이나 전시 중화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정으로 "우리나라 헌법의 진보성을 표현한 규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규정만으로 볼 때에는 우리나라는 국가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채용하였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P144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지주의 토지를 비록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토지가 가장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던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수백 년간 지배층으로 군림해온 지주층에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사 연구가 처음 시작된 1980년대에는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된 이북의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농지만을 대상으로한 남쪽의 농지개혁이 제한된 의미만 갖는다고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또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엄청난 교육열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구나 한국 전쟁의 향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농지개혁의 의미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 P147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 세력의 결집체인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교주와교수로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유진오는 헌법 조항을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 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인물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두 신문의 사주 일가가 김성수나 방응모가 보여주었던 아량과 금도를 반의반만 보여줬어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칭 ‘애국 보수‘들은 자기 조상의 역사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같은 인간 백정에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이회영 등 6형제, 김성수,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P149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 측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있다. 첫번째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김일성만 독점적·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과연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 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
더 중요한 문제는 검찰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만이 쓴것처럼 규정하면서 종북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을 종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된 것으로몰고 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우리 헌법의 역사성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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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높았다. - P9

- 청천강을 물었다. 청천강을 내주었는가?
- 아마도 그러할 것이옵니다. 서북의 군사를 안주로 모아깊은 산성에 의지해 있는데, 적병들은 산성을 멀리 비켜서 대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하옵니다.
- 안주는 금성철벽金城鐵壁에다가 서북의 중진重陣이라더니.......
안주는 북쪽으로 청천강의 사나운 물줄기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험준한 산세가 잇닿은 천험이었다. 서북의 군병들은 안주를 본진으로 삼아 도로와 음성을 비워 놓고 깊은 산성에 둔屯을 치고 기다렸다. 영의정 김류가 진지전의 전략을 냈고,
도원수 김자점이 군사를 배치했다. 그러나 적들이 안주성을멀리 돌아 빠른 기병을 앞세워 들길을 따라 달려온다면, 산성에 들어앉은 군사들은 화살 한 번 쏘지 못하고 이미 휩쓸고지나간 적들이 일으킨 먼지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안주에서 평양까지는 보병 걸음으로 이틀 거리였고, 평양에서 개성까지는 큰길 가까이 배치한 군사가 없었다. 청천강을 내주고서 대동강을 지킬 도리는 없었다.
임금이 물었다. 길을 묻는 과객의 어조였다.
- 청천강 다음이 대동강이지?
김류가 대답했다.
- 전하, 적이 다시 대동강을 건넌다면 도원수와 평양과 황해의 감사, 병마사 들의 목을 베고 그 처자식들도 군율로 연좌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
천장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임금은 말했다.
-그렇겠구나.
- ••••••.
- 그렇겠어. 그러하되 적병이 이미 도성을 에워싸서 왕명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서북 산성에 군율이 닿겠느냐. - P12

김상헌의 형 김상용은 일흔다섯 살이었다. 우의정 벼슬을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때 임금은 붙잡지 못했다. 적이 다가오고 대궐이 술렁거리자 김상용은 보료에서 일어섰다. 김상용은 소임이 없는 신민으로서 어가를 따라나섰다. 강화도로 가는 눈길 위에서 쓴 편지를 노복을 부려서 동생에게 전했다.
급히 휘갈겨 쓴 편지였다.
•••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그리 알면 스스로 몸 둘 곳 또한 알 것이다……
양천, 행주, 김포의 눈 쌓인 벌판 위로 바싹 쫓기는 가마의 대열이 흘러가고, 그 뒤를 지팡이를 짚고 따라가는 늙은 형의뒷모습이 김상헌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 너는 어찌하려느냐? 나를 따르겠느냐?
- 소인은 큰댁 대감께 매인 몸인지라••••••.
노복은 돌아갔다. 김상헌은 돌아가는 노복에게 곶감 한 접을 내주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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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연락국이 운용하는 간첩선이 하도 바삐 간첩들을 실어 나르느라 배를 배정받지 못해 대기하는 기간이길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첩을 많이 내려보냈으니 남쪽의 방침 당국이 바쁠수밖에 없었다. 통혁당 사건, 1.21 청와대 기습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거치면서 남쪽의방첩 당국이 기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쪽이 갑자기 간첩 침투를 크게 줄인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월북한 남한 출신들을 선발하여 연고선을 이용한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4월 혁명 이후민주당 정권이 1960년 6월의 국가보안법 개정에서 이승만 시대에 없었던 불고지죄를 신설한 것은 북측의 대남 공작에서연고선 공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것은 그 적발 사례다. 불고지죄 신설 후 첫 번째 적발 사례가유명한 공안 검사 한옥신을 어려서 같이 자란 이종사촌 동생이 남파되어 찾아온 것이고, 두 번째 사례는 법무부 차관 김영천의 친동생이 남파되어 형을 찾아왔다가 적발된 일이다.
남한의 반공 태세가 점차 강화되고, 북한이 대규모 무장공작대를 파견하여 빈농들이 주로 사는 울진과 삼척 산간벽지에농촌 해방군을 건설하려던 공작이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도 대남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당의 모든사업을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정비하면서 대남 사업 전략에서는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이후 북한이 직접 간첩을 남파시키는 일은, 근절된 것은아니라 해도 크게 줄어들었다.  - P59

1970년대 이후 간첩 조작 사건이 빈발한 이유는 자명하다.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보안사, 대공경찰 등에서 방첩업무에 종사하는 수만 명의 대공수사 요원들로서는 간첩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존립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직파 간첩의 경우, 간첩 방조나 불고지 정도가 간첩단으로 묶여 고문을 당하고 중벌을 받는 등 간첩죄의 확대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 자체를 조작했다는 시비는 많지 않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새로운 간첩의 공급원으로 등장한 재일동포 사건, 유학생 사건, 납북어부 사건, 월북자 가족 사건의 경우에는 조작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중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재조사하였고, 재심 재판이 끝난 사건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 P62

형법상의 간첩죄도 마찬가지다. ‘적국‘이 보내는 간첩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 간첩, 일본 간첩, 중국 간첩이다. 외국인 간첩일 수도 있고, 한국 국적자로서 여타 국가를 위해 정보와 기밀을 제공하는 내국인 간첩일 수도 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은 반국가 단체도, 적국도 아닌 우방국들이다. 사실 대한민국이 처한국제 환경에서 진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득시글거리는 우방국의 간첩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간첩과 적국 간첩에만 매달려온 대한민국의 법체계로는 이들을 막아낼수 없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간첩들의 천국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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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에서 1636년 홍타이지의 ‘칭제‘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차하르 정복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홍타이지와 대결하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은 1634년 가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만약 릭단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8세기 중엽 건륭 연간 청의 준가르 정복 과정에서는 준가르 초원의 유목민 가운데 열에 셋이 청군에게 도륙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열에 넷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준가르 유목민의 지도자 아무르사나(Amursana)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따라서 청의 준가르 정복에 대해서도 ‘천연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올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청조가 천연두의 ‘혜택‘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중엽 청이입관을 달성한 때의 황제 순제(順帝)가 겨우 스물네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19세기 후반 동치제(同治帝)가 스무 살에 사망한 것도 천연두때문이었다. 결국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입관 초기의 황제 순치제는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특히 높은 겨울과 봄이면 거의 어김없이 은둔생활에 들어가 천연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 강희제(康熙帝)는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덕분에 순치제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다.
강희제는 황태자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된 이후 인두 접종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청조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고의 왕공 귀족에 대하여 북경 대신 열하(熱河)로 와서 조근(朝覲)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  - P261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입관 전의 만주인은 대명 전쟁에서 마마의 위협을 중대 요소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당시의한반도에도 이미 1,000년에 이르는 천연두 유행의 역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말까지의 조선 군적(軍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어느 정도인지가 필수적인 기입 사항이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연중 천연두의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다. 특히 병자호란은 한겨울에 벌어진 만큼 청군이 조선 땅에서 마마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로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만주인들은 과연 조선의 마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267

앞장의 말미에서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조선의 마마를 경험한 사실을 ‘침묵‘으로 ‘은폐‘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다. 그렇다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당시 조선에서의 마마 관련사실을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은 그간 조선이 자신들에게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죄를 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노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조선 침공은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예컨대 만주어 당안을 보면,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한 원정군이 "하늘의 은혜(abkai kesi)"를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문 [청태종실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을 입고 있다蒙天眷佑/蒙天佑]"는 것이다. 그런데 마마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만주인들은 마마를 곧 신의 뜻이라고여겼다. 만주어 당안에서 (가)와 (나)는 전쟁 당시 조선에 출병한 후금군과 심양의 홍타이지가 주고받은 전황 관련 문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당시의 전쟁 수행에 중대 변수가 되는 마마에 대한 언급을 그대로 실었을 것이다. (다)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이므로 일견 사실대로 적지 않을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훗날 실록과 같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체계적인 역사 서사를 구성할 때에는, 후금군이 조선에서 마마의 위협에 직면했다는 것은 "하늘의 은혜",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 등과 심각한 모순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만약 실록의 정묘호란 서사에 신의 뜻인 마마 관련 사실을 남겨둔다면, ‘의로운 전쟁‘이라는 역사 서사의 틀이 통째로 흔들리기때문이다. - P271

 다른 무엇보다도 정묘호란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은폐의동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정묘호란과 달리 황제인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친정이었으며, 당시 홍타이지는 명시적으로 이번 조선 침공이 ‘의로운 전쟁‘ 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동지 제천 의식을 거행하면서조선을 침공하는 이유를 하늘에 고했다. 이날의 고천(告天) 제문에서 홍타이지는, 기미년(1619)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사악한 전쟁(chedain)" [사르후 전투를 지칭을 일으킨 이래 조선이 자신들에게 저지른 갖가지 죄악을열거했다. 제문의 말미에서는 ‘절화교서‘의 내용을 조선이 먼저 맹약을 파기하여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증거로 내세웠다. 이처럼 전쟁 발발의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면서 홍타이지는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늘과 땅이 가려달라"고 기원하며 고천 제문을 마무리 지었다. - P273

그러나 생신 병사들의 탈영 현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보호토의 죄목에 보이듯이 홍타이지의 어영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발생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나라에서는 마마 발생 시홍타이지와 생신 버일러들이 곧장 피두에 들어가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매뉴얼‘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숙소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홍타이지는 생신 버일러들과 함께 곧장 피두를위한 칩거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월 16일의 심양행 서신 이후 약보름 동안의 청 측 기록이 사실상 홍타이지와 인조가 주고받은 국서의 인용과 강화도 작전 관련 기사로만 채워져 있는 까닭도 비로소 이해가 간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 양 홍타이지나 왕 · 버일러들의 동정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피두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말이다.
단, 정월 22일에 감행한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가 예외적인데,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이 숙신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청의 왕 · 일러가운데 숙신이었다는 사실이 사료상 명시적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아바타이, 아지거, 사할리얀, 두두 등 네 사람이므로, 일단 두두가 숙신이었다는것은 확실하다. 도르곤의 경우는 숙신이었음을 명시하는 사료상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생 동안 그가 피두한 흔적 또한 없다. 게다가 홍타이지가 천연두 감염이 무서워 한동안 접견을 기피했던 소현세자 일행을 서울에서 심양까지 데려간 사람이 바로 도르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르곤이 만약 생신이었다면, 홍타이지는 그에게 두두와 함께 조선에 남아 청군의 철수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 P277

요컨대, 홍타이지는 마마에 쫓겨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청군 진영에 마마 환자가 발생한 시점이다. 바로 이대목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5장에서 고찰했듯이,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정월 16일경의 청군에게 전쟁 계획의 궤도 수정을 요구했을 법한 군사적 상황 변화는 없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는 미지수에 ‘어영 부근에 천연두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의 인지‘라는 사건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제5장의 말미에서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16일의 중대사건‘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진영의 마마 환자 발생이야말로 ‘중대사건‘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모두 충족한다. 첫째, 청군 진영의 마마 발발(smallpox outbreak)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둘째, 그것은 홍타이지에게 전쟁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피부에 들어가야 했다. 셋째, 홍타이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공들은 생신이었으므로 마마의 발발은 그들이 모두 조선을 서둘러 떠나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홍타이지는 자신이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국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 P281

‘승자의 전쟁 서사‘로 흐른 것은 오히려 종래의 ‘외교 실패‘ 서사였다는첨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외교 실패‘ 서사는 청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 조선의 죄를 묻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승자의 전쟁서사‘와 공명하고 있다. 이기지도 못할 전쟁의 발발을 사전에 막지 못한 ‘외교 실패‘의 책임을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묻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자초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전쟁이었다는 청이 만들어낸 ‘승자의 전쟁서사‘와 별 차이가 없는 인식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청의 ‘의로운 전쟁‘ 논리와 공명하든 말든 간에그대로 사실로 승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1장에서는 ‘홍타이지는 왜 병자호란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과 함께 그가 친정과총력전으로 병자호란에 임한 까닭을 규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잉태‘ 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수단으로 달성하려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책에서는 조선 침공을 위해 총력전을 준비한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공격전략을 짠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작전 수행을 총괄지휘한 것도 홍타이지였음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다. 앞에서의 고찰에 따르면, 고사 작전을 폐기하고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한 것도 홍타이지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인조의출성과 척화신 두세 명의 박송을 조건으로 하는 철군 약속과 그 약속의 이행도 홍타이지의 존재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홍타이지가 없었다면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발발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개전부터 종전까지 시종일관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 P292

전근대 시기의 전쟁에서 승전 이후의 전후 처리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극단적인 경우, 그는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철저히 파괴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병자년 십일월 29일 이번 전쟁은맹약을 깬 조선 조정의 죄를 묻기 위한 것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않는일반 조선인에 대해서는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관민(官民)을 상대로 한 선전문에서도 조선의 왕과 대신들이 저지른잘못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말라고 말했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했다는 것은 ‘조선 정복‘ 이후 어떤 형태로든, 즉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조선을 지배할 의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 P294

만약 홍타이지의 전후 구상이 괴뢰정권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면, 병자호란이후 아예 조선의 종묘사직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최소한 인조 대신에 종친중 다른 누군가가 왕위에 올랐을 수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정말 정권 교체를 구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설사 그런 구상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전쟁은 홍타이지가 그런 구상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실질적 근거도, 명분적 근거도 확보할 수 없는방향으로 흘러갔다. 천연두 문제로 인해 홍타이지가 전쟁의 종결과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국 인조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조 정권의 온존溫存은 홍타이지의 애초 구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병자호란 발발 이후 조선 땅에서 진행된 전쟁과 협상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296

여기서 조선의 마마라는 변수까지 고려하여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자면, 홍타이지의 친정 및 총력전 선택은 처음부터 ‘양날의 칼‘이었다고 말할 수있다. 그 자신도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거니와,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한 참전 왕공의 대다수도 생신이었다.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왕공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땅에서 마마와 조우하는 경우, 친정과 총력전의 지속은 불가능해질 터였다. 만약 홍타이지 본인과 생신 왕공들이 전쟁을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귀국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조선 정복‘을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전쟁이 그만 정묘호란과 질적으로 다를바 없는 약탈전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조선이 천연두걱정이 없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정묘호란 때 알려진 바이므로, 홍타이지는 자신의 선택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도 알 고 있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홍타이지는 실제로 천연두 문제에 봉착했다. 마치 천연두발발 시의 비상 대책(contingency plan)이라도 있었던 것인 양, 그는 재빨리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했다. 천연두 발발에도불구하고 즉각 철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전쟁을 약탈전으로 변질시키느니 차라리 인조 정권을 온존시킬지언정 ‘조선 정복‘의 명분이라도 챙기는쪽이 더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 P297

삼전도 의례가 사실상 항복 의식이었다는 점에 견주자면, 위의 의례 진행과정에 뚜렷이 나타나는 인조에 대한 우대는 실로 예상 밖이다. 이날의 연석에서 인조의 석차는 홍타이지 바로 다음이었다. 인조 제2위의 자리에 앉힌 것도 홍타이지의 결정이었다. 『청태종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런 뜻밖의 결정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비록 어쩔 수 없이 항복했지만 인조는그래도 "역시 한 나라의 왕"이며,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구절은만주어 기록에서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홍타이지는인조를 외국의 군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승정원일기』도 이날의 잔치에서 인조와 홍타이지의 술잔 및 잔 받침이 같았던 것을 가리켜 인조에 대한존경과 우대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고 적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범위의 세계에서 조선이 명나라 다음가는 대국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터이지만,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이날 홍타이지의 인조에 대한 뜻밖의 우대는 훗날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높은 위상을점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에 드러나듯이, 조선은 나중에 외교적 수사의 영역에서 홍타이지의 ‘공덕‘을 찬미했다. 그리고 훗날 청의 전쟁 서사는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한 침략 행위를 ‘관온인성황제‘ 홍타이지의 조선에 대한 관대하고 온유하며 인자하고 성스러운‘ 시은(恩) 행위로 둔갑시키면서 그날의 우대를 대서특필했다. - P300

위에서 소개했듯이,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는 인조의 두 차례에 걸친삼궤구고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하늘, 즉 천신(天神)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이때에는 홍타이지 역시 인조 일행과 함께 하늘에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두 번째는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조선의 왕 인조가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러한 의례 절차를통해서 홍타이지의 ‘조선 정복‘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병자년 사월 11일 심양에서 거행되었던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서도 두 차례의 삼궤구고두가 의례의 핵심 절차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황제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먼저 고천의 절차를 밟았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천신에 대한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이어서 존호를 받는 의례를 진행하여 그 자신이 신하들로부터 삼궤구고두를 받았다. 역시 새로운 군신 관계의 확립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로부터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가 사실상 병자년 사월 11일에 거행되었던 ‘황제 즉위식‘을 간소화한 형태로 재현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날짜와 장소를 달리한 두 의례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의례 모두에서 활쏘기가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 활쏘기는 단순히무예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날 요금의 제천 의례에서 부수적으로거행되던 ‘사류(射柳)‘라는 이름의 샤머니즘 의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한 홍타이지가 삼전도 의례를 심양에서의 ‘황제 즉위식‘ 못지않게 엄숙한 의례로 치르고 싶어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전쟁의 패자로부터 항복을 받는 자리에서는 승리에 도취한 장수와 병사들의 방종도 얼마간 허용되기 마련이다. 삼전도 의례에 참석한 청군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그런 자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축년 유월말, 홍타이지는 삼전도 의례 현장에서 대열을 멋대로 벗어나거나 갑옷 · 투구를 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명의 최고위 대신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 P301

결국 홍타이지는 ‘미완‘에 그쳤던 병자년 사월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정월 삼전도에서 ‘완성‘, 그것도 좀더 고차원적으로 ‘완성‘ 하고자 했다고 볼수 있다. 홍타이지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어젠다를 끝까지 잊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수미(首尾)가 상응하는 의례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셈이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황제 즉위식‘의 ‘미완‘으로인해 ‘잉태‘된 병자호란이 정축년 정월 30일 ‘황제 즉위식‘의 고차원적인 ‘완성‘으로 종결되었다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철저하게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고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링컨의 말을 차용하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 P303

만약 홍이포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그것은 물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차원에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너편 갑곶을 향해 발사한 포탄은엄청난 공포를 야기했고, 강진은 함대를 향해 쏜 포탄은 함대의 남하를 저지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장신의 함대도 북쪽 해상이나 갑곶을 향해 쏜 천지를 진동하는 홍이포의 위력에 지레 겁을 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그렇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타격의 정도는 청군이 사전에 예상할 수 없는성질이다. 조선군이 홍이포만 쏘면 달아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중대한 군사작전에 나섰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하자가 없다면, 역시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들을 타고강화도로 건너간다는 작전의 수립 자체가 염하수로의 물리적 해양환경에관한 정보의 사전 입수를 전제로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실제 도해 과정에서 청군은 그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작전 당일 아침 청군은 일찌감치 도해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배도 바다에 띄웠고 흥이포도 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장 도해를 개시하지 않았다. 11시~11시 30분까지 기다렸다.
게다가 이미 사거리에 들어온 장신의 함대를 향해 대포를 쏜 흔적도 없다.
굳이 홍이포를 쏘지 않더라도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장신의 함대가 결국에는 스스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행태를 보였을 리 없다. 염하수로의 특성을 사전에 파악하지 않았다면 그런 예상은 물론 불가능하다. - P308

앞서 언급했듯이 청군은 염하수로의 특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강화도 작전을 입안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정보는 경기 서해안 지역의 뱃사람으로부터 입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청군의 정보원이 되었을 뱃사람은 이제 조선인으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광해군 대의 논의로부더 향화호인(귀화한 여진족)을 그런 뱃사람의 후보로 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대의 조선 조정에서는 향화호인을 잘 다스려 "인화가 깨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반하는 사태가 초래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인조 대, 특히 병자호란 전야에 이르러 혹 향화호인이 이반할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 P315

그야 어쨌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퉁커션 모델‘이 아닌 ‘흑룡강 모델‘의 선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다. (ㄱ-1)의 ㉡에서 홍타이지가 강조하고 있듯이, ‘흑룡강 모델‘의 ‘비선" 은 강화도 작전 당시 수심이 얕고조류가 빠른 염하수로에서 대단한 기동성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청군의 정보원이 된 뱃사람은 염하수로의 특성뿐만 아니라 ‘흑룡강 모델‘의 배가 염하수로에서의 작전에 최적이라는 점까지 알려주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없으며, 이는 다시 청군의 정보원이 조선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35

요컨대, 병자호란 전야에 조선의 향화호인들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잠재적 이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향화호인을 향한 조선 사회의 의심은 병자호란 동안에 실제 이반사례가 발생함으로써 현실화되고 말았다. 경기 남부 연해 지역의 남양에살던 여천과 마푸타가 청구에 귀순했고, 이들의 안내로 청군은 남양부를기습했다. 또한 두 사람은 청군의 강화도 작전 입안. 감행을 가능하게 만든정보의 제공자이자, 청군의 강화도 작전과 가도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선박건조의 ‘숨은 공로자‘로 추정되는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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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대리석 조리대 위에 쾅하고 샴페인 병이 쓰러지자, 나는 펄쩍 뛰어오른다.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챘을까 두려워 얼른 잭을 쳐다본다.
잭은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한다. "아주 잘했네" - P9

에스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밀리의 방 색깔이 뭐였지, 그레이스?"
나는 잠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빨간색." 목소리가 갈라진다. "밀리의 방은 빨간색이었어."
"그럴 거라 생각했어." 에스터가 조용히 대꾸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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