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연락국이 운용하는 간첩선이 하도 바삐 간첩들을 실어 나르느라 배를 배정받지 못해 대기하는 기간이길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첩을 많이 내려보냈으니 남쪽의 방침 당국이 바쁠수밖에 없었다. 통혁당 사건, 1.21 청와대 기습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거치면서 남쪽의방첩 당국이 기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쪽이 갑자기 간첩 침투를 크게 줄인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월북한 남한 출신들을 선발하여 연고선을 이용한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4월 혁명 이후민주당 정권이 1960년 6월의 국가보안법 개정에서 이승만 시대에 없었던 불고지죄를 신설한 것은 북측의 대남 공작에서연고선 공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것은 그 적발 사례다. 불고지죄 신설 후 첫 번째 적발 사례가유명한 공안 검사 한옥신을 어려서 같이 자란 이종사촌 동생이 남파되어 찾아온 것이고, 두 번째 사례는 법무부 차관 김영천의 친동생이 남파되어 형을 찾아왔다가 적발된 일이다. 남한의 반공 태세가 점차 강화되고, 북한이 대규모 무장공작대를 파견하여 빈농들이 주로 사는 울진과 삼척 산간벽지에농촌 해방군을 건설하려던 공작이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도 대남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당의 모든사업을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정비하면서 대남 사업 전략에서는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이후 북한이 직접 간첩을 남파시키는 일은, 근절된 것은아니라 해도 크게 줄어들었다. - P59
1970년대 이후 간첩 조작 사건이 빈발한 이유는 자명하다.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보안사, 대공경찰 등에서 방첩업무에 종사하는 수만 명의 대공수사 요원들로서는 간첩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존립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직파 간첩의 경우, 간첩 방조나 불고지 정도가 간첩단으로 묶여 고문을 당하고 중벌을 받는 등 간첩죄의 확대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 자체를 조작했다는 시비는 많지 않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새로운 간첩의 공급원으로 등장한 재일동포 사건, 유학생 사건, 납북어부 사건, 월북자 가족 사건의 경우에는 조작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중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재조사하였고, 재심 재판이 끝난 사건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 P62
형법상의 간첩죄도 마찬가지다. ‘적국‘이 보내는 간첩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 간첩, 일본 간첩, 중국 간첩이다. 외국인 간첩일 수도 있고, 한국 국적자로서 여타 국가를 위해 정보와 기밀을 제공하는 내국인 간첩일 수도 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은 반국가 단체도, 적국도 아닌 우방국들이다. 사실 대한민국이 처한국제 환경에서 진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득시글거리는 우방국의 간첩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간첩과 적국 간첩에만 매달려온 대한민국의 법체계로는 이들을 막아낼수 없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간첩들의 천국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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