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어린나이에, 열여덟 살이던가 열다섯 살 때부터, 내 얼굴은 이미 중년이 되면 알코올때문에 형편없이 이지러질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알코올에는 신(神)이 갖고 있지 않은 기능이 있었다. 자살을 하게하는, 혹은 살인을 하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나는 알코올을 입에 대기 전부터 알코올의 그런 속성을 짐작했다. 알코올 자체는 그 사실을 확인해 준 것뿐이다. 당시 내 마음에는 그것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마찬가지로 그것을 입에 대기 시작했는데, 호기심이 강해서 너무 일찍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는 욕망이 자리 잡아 갔다. 열다섯 살 때의 내 얼굴은 관능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나는 관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지도못했다. 그 관능적인 요태는 뚜렷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며, 오빠들도 눈치 챘을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눈에 띄는 얼굴, 초조한 표정, 눈자위에 거무스레한 무리가 진 조숙한 눈 때문에 ‘경험‘은 시작되었다. - P15

그 영상이 흐려져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바로 그 여행 중이었다. 그 영상은 사진 한 장쯤 남겨 놓을 수도 있었다. 마치 다른 상황에서 그 어떤 영상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영상은 그러지 못했다. 대상이 너무나 가물거려서 떠올릴 수가 없었다. 누가 그것에 대해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날 강을 건넌 일, 그 사건이내 생애에서 가질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그 영상을 찍어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도나는 그 존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신(神)만이알았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 영상은, 물론 달리 어쩔 도리도 없었겠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략되었고 잊혔다. 흐려진 것이 아니라 숫제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부재(不在)를 통해 그 영상은 고유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 어떤 절대를 표현할 수 있는 힘, 요컨대 절대의 창조자와도 같은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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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 보행을 하게 된 인간은 그 손에 주먹도끼를 쥐어 봤자 광활한 아프리카의 초원에서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가련한 인간의 혼자 힘으로는 짐승을 잡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집단 수렴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단 수렴 활동을 위해서는 탄탄한 사회 구조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사계절마다 변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빙하기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정보 취합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인간에게 사회생활은 여가를 활용하기 위한 취미 생활이 아닌, 처절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원활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필수입니다. 그러한 정보를 수집, 교환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소통의 수단으로 언어가 발생하고 발달하였으며 그 주된 기능이 바로 수다인셈입니다.
••••••
수다는 입으로 하는 털 다듬기(grooming)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서로의 털을 만져 주고 이물질을 떼어 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합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원숭이를 만나면 먼저 털을 다듬어 주면서 내가 그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있음을 분명하게 하죠. 그러나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모두에게 일일이 직접 털을 다듬어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말로 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털을 다듬는 일은 한 번에 한 명에게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말로 하면 한 번에 여러 명에게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말로 때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P202

유지비가 많이 드는 두뇌를 위해 인류는 다시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을 끊임없이 확보하고 섭취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해야 했죠. 움직이는 동물에 대한 정보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종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류의 ‘무기‘가 나타납니다. 바로 사회적 협동입니다. 속해 있는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인류의 큰 두뇌는 이런 다채로운 정보를 저장해 두고 상황에 따라 응용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큰 두뇌를 지니고 있는 진짜 이유입니다. 두뇌 속의 뇌세포를 동시에 100퍼센트 쓰지 않더라도 많은 뇌세포를 지니는 것, 큰 두뇌를 지니는 것이 유리합니다. 상황에 대처할 수있는 능력을 축적해 둬서, 유사시 빠르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205

이런 외모,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지 않나요? 바로 유럽 사람들이생각했던 식민지 사람들, ‘미개한 원주민의 모습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원주민의 모습과 닮게 복원됐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서양사람들의 의식의 한 측면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원주민은 미개하기 때문에 문명사회로 이끌어 줘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로 만들어 발전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네안데르탈인을 봅시다. 서양인들에게 네안데르탈인은 무식하게 힘으로 동물을 잡아먹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동굴 속을 헤매던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다가 훤칠한 이마와 강한 턱, 굳게 다문 입을 가진 멋진 외모의 크로마뇽인(Cro-Magnon, 호모사피엔스, 그 중 특히 유럽인의 조상)에게 밀려나 멸종되고 말았고요. 서양 사람들에게 크로마뇽인은 세련된 사냥 기술과 언어, 문화를 지닌 진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사람이되지 못한 존재였으며 미개했지요. 미개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람에게멸종 당하게 된 운명이나(네안데르탈인), ‘미개하게‘ 살다가, 서양인들에의해 식민지가 된 이후에야 ‘문명사회‘로 발전할 기회를 얻은 운명이나(식민지의 원주민), 분명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네안데르탈인을 바라본 시선에는 이들이 식민지 원주민을 바라보던 시선이 스며 있었습니다. ‘넌 네안데르탈인이야‘라는 말이 치욕스럽게 들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P212

이렇게 잘못된 유전 정보를 갖는 것을 변이 또는 돌연변이(mutation)라고 합니다. 돌연변이가 있는 생명체는 어떻게 될까요? 유명한 마블사의 영화 중 하나인 「엑스맨(X-Men)은 이런 돌연변이 때문에 특이한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가 탄생했다는 설정에서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 일본의 유전학자인 기무라 모토 박사는 다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돌연변이는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기무라 박사에 따르면, 유전자 부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우리가 관찰할 수 없으며, 관찰할 수 있는 돌연변이는 오로지 유전자가 아닌 부분에서만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유전학에서 가장중요한 이론으로 평가 받는 ‘중립 이론(neutral theory)‘ 또는 ‘중립 진화이론(neutral evolution theory)‘의 핵심 가정입니다.
중립 이론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생물의 유전자 부분(단백질을 만드는 부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해 봅시다. 만약 그 돌연변이가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해롭다면 생명체는 후손을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로운 돌연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집니다.반대로 삶에 유익한 돌연변이라면 그 생물체가 많은 후손을 남기겠지요. 유익한 돌연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종의 모든 개체에게 퍼져 대세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돌연변이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모두 똑같은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돌연변이라고 알아볼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전자 부분에 일어난 돌연변이는 사라져 버리거나 알아볼 수 없게 돼, 오늘날 우리가 구분할 방법이 없습니다. - P224

그렇다면 알아볼 수 있는 돌연변이는 없는 걸까요? 단백질을 만들지 않는 부분을 ‘비암호화(noncoding) DNA‘라고 합니다(이에 반해 단백질을 만드는 부분, 즉 유전자는 ‘암호화 (coding) DNA‘라고 합니다.). 기무라 박사에 따르면, 비암호화 DNA에서 생겨난 돌연변이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비암호화 DNA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기능이없고, 삶에 도움도 해도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후손을 많이 남기거나적게 남기는 ‘선택‘과 무관합니다. 사라지지도 않고 전체 개체에 퍼지지도 않은 채 남게 되죠. 이 돌연변이의 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변수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는 우연히 그 빈도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듭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만약 돌연변이의 빈도 패턴을 알 수 있다면 그 생물 집단이 겪은 시간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한 중립 이론은 20세기 유전학에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0년대 이후의 집단 유전학은 중립 이론의토대 위에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 P225

예를 들어, 돌연변이가 100년에하나꼴로 생긴다고 해 봅시다. 돌연변이가 5개 관찰되면 500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해 온 연대 추정 방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돌연변이가 하나 나오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이100년이 아니라 50년이라면 어떨까요? 실제로 흐른 시간은 250년으로 반으로 줄겠죠. 반대로 200년에 하나꼴로 돌연변이가 나왔던 것이라면, 시간은 1000년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만약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빈도가 불규칙하다면 어떨까요? 아예 시간을 측정할 수조차 없게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토콘드리아 돌연변이의 속도 자체가 흔들리면서, 불확실성이 늘어났습니다. 그동안돌연변이 수는 인류 진화의 역사를 밝힐 ‘시계‘였는데, 알고 보니 눈금이 아주 부정확한 시계였던 셈입니다. 그 시계로 추정한 시간이 올바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P228

중립 이론은 비암호화 DNA 부분의 돌연변이는 개체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가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연변이가 개체의 삶과 번식재생산에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전체 게놈 중에서 유전자가 차지하는 부위가 크지 않고나머지 대부분(비암호화 DNA)은 의미가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필요없는 DNA 뭉치라는 뜻에서 ‘쓰레기(junk) DNA‘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쓰레기 DNA가 다른 유전자들을 조정하거나 신호를 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돌연변이는 유전자에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삶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거나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선택‘의 손길에서 벗어날수 없고, 역시 중립이 아니므로 중립 이론에 근거한 ‘돌연변이 시계(mutation clock)‘의 눈금은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핵 밖에 존재하는 DNA로서 개체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토콘드리아 DNA도, 사실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2000년대 이후 밝혀졌습니다. 핵 밖에서 신진대사를 조절한다는 것이지요. 당시 이런 연구 결과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학계에서 ‘설마‘라며 술렁대던 그 긴장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뒤돌아보면, ‘세포의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우스꽝스럽지만, 당시에는 중립 이론이 그만큼 막강했습니다. - P229

유전학자와 고인류학자들은 세계의 다양한 현생 인류 안에도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결과는 기이했습니다. 현생인류 안에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남아 있긴 했는데, 엉뚱하게도 멀리남쪽에 위치한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등 멜라네시아인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DNA 중 약 4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의 DNA도 4퍼센트 가지고 있으니, 결국 현생 인류지만 그 안에 고인류의 DNA를 8퍼센트나 갖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정작 데니소바 동굴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북아시아의 인류에게서는 데니소바인의 DNA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는 네안데르탈인이 주로 거주했던 유럽 사람들에게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결과입니다.
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데니소바인은 후기 플라이스토세(약 12만 5000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를 나타내는 기간)에 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프리카에서 퍼져 나온 현생 인류 집단과 유전자 교환을 했고(피가 섞였다는 뜻입니다.), 특히 적응에 유리한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현생 인류안에서 계속 살아남았다는 해석입니다. 현생 인류에서 발견되는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는 면역성과 관련한 역할을 합니다. 최근에는 티베트지역 사람들이 고산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유전자가 데니소바인에게서도 발견되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왜 데니소바인의 DNA가 발견되지 않을까요? 혹시 오늘날의 아시아인은 그 이후, 그러니까 인류가 멜라네시아에 이주한 뒤에야 다시 등장한 건 아닐까요? 아직은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단지 덜 발견됐을 뿐, 사실은아시아에도 퍼져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한 셈입니다. 우리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계속 기대해야 할 이유입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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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영웅시대

선장 프랭크 워슬리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남극의 한겨울인 7월 기나긴 극지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 34도였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사방으로 펼쳐진 아득한 얼음뿐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맹렬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얼음이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워슬리와 다른 두 사람은 그 섬뜩한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작은 배도 얼음소리에 놀라 온 몸을 떨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시작된 수백만 톤의 얼음 압력이 배를 향해 밀려올 때면 배의 구석구석이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거의 끝이 온 것 같군•••••• 배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거야. 선장, 이제 시간 문제일뿐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아.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고, 단 며칠이 될 수도 있어..…."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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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약하다는 점, 그것이 이유였을지 모릅니다. 인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강해지는 대신 유연하게 적응하는 전략을 택해야 했습니다. 빙하기가 꼭 춥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변덕스럽게도 조금 따뜻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건조하거나, 반대로 비가 계속 쏟아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기후가 변하면 거기에 맞춰 동식물상과 환경이 변했습니다. 지형도 바뀌었습니다. 바닷물의 높낮이가 달라져 섬이 육지가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습니다. 먼저 급변하는 환경을 잘 살피는 법을 배웠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면 그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 기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경이 늘 전에 없이 새롭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변하다 보면 과거와 비슷한 환경을 다시 맞을 때가 있지요. 인류는 바로 그럴 때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활용해 대처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정보가 원천이라는 사실도요.
인류는 이렇게 해서 정보력(문화)에 의존해 살아남는 전략을 진화시켰습니다. 이런 정보력의 보고는 노인입니다. 쌓아온 시간만큼 정보를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정보력을 전수 받고 활용하는 방법으로, 이제 인류는 다른 어떤 유인원도 가보지 못한 곳까지 적응해 살고있습니다. 아마 인류는 처음에는 이런 정보력의 원천으로서 노인을 존중하고 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좀 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됐습니다. 다른 동물은 지니지 못한 능력, 바로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능력, 생판 모르는 남과도 콩 한쪽을 나눠 먹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낮추거나 희생하는 능력, 제 힘으로 살 수 없는 이웃과부족한 힘이나마 나누는 능력,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에 함께 참여할기회를 나누는 능력입니다. 인류는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한 이 능력을 바탕으로, 오늘도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하고 있습니다. - P160

몸집은 암수 차이가 크지만 송곳니 크기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기간토피테쿠스는 수컷끼리의 경쟁이 격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컷의 덩치가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은 바로 포식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몸집이 크면 포식자를물리칠 때 유리합니다. 특히 수컷의 덩치가 커집니다. 포식자는 암수를 가리지 않는데 수컷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재생산과 관계가 있습니다. 유인원을 비롯한 영장류의 경우, 몸집을 키우려면 자라는 기간(성장기)이 늘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기가 길어지면 성적으로 성숙해지는 시기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해야 하는 암컷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암컷은 마냥 몸집을 키우지 않아 작고, 수컷만 성장기가 길어져서 몸집이 커집니다. 나중엔 확연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지요. 실제로 영장류를 연구해 보면 암컷의 성장기와 성적 성숙기가 안정돼 있고, 개체 차이도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수컷은 환경 요인에 따라 성장기가 변하기 쉽고 몸집 역시 개체별로 차이를 많이 보이지요.
기간토피테쿠스의 성차가 적고 크기도 작은 송곳니는 무시무시한 천적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간토피테쿠스로 하여금 큰 체구로 무장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킹콩‘을 탄생시킨 이 무시무시한 천적은 놀랍게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P169

기간토피테쿠스의 이야기는 단순히 비운의 종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플라이스토세 내내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다른 동물과 경쟁을 했고, 이들을 모두 제치며 세상에서 가장 우세한 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겠죠. 저는 기간토피테쿠스를 생각할 때마다 오랑우탄이 떠오릅니다. 오랑우탄은 기간토피테쿠스가 살던 동남아시아 삼림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몸집이 크고 암수 크기 차이도 큽니다. 그러나 오랑우탄은 단일 수컷-복수암컷이 무리 지어 생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일 수컷-단일 암컷 짝짓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희한하게도, 오랑우탄은 외톨이처럼 철저히 홀로 생활합니다. 혹시 오랑우탄의 홀로서기는 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거대한 친척, 기간토피테쿠스의 멸종에서 배웠는지모릅니다. 유인원의 가장 무서운 천적은 인간이라는 사실을요.
인간은 지금도 모든 유인원들에게 천적입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은 다른 모든 유인원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홀로 살아남게 될지도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P172

심장도 피로해졌습니다. 네 발로 걷는 짐승은 심장이 몸 위쪽에습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피를 보낼 때 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손쉽습니다. 예외적으로 목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기린이 있지만, 대신 머리가 몸에 비해 유별나게 작고 심장은 유별나게 커서 어려움을극복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두 발로 서는 바람에 심장의 상대적인 위치가 네 발로 걷는동물보다 낮아졌습니다. 겨우 키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게 됐죠. 그 결과 머리는 물론이고 가슴과 어깨, 양팔이 모두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있게 됐습니다. 심장은 이제 몸 위로 상당량의 피를 올려 보낼 의무가 생겼고, 과거보다 훨씬 큰 부담을 졌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두뇌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커서, 기린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피가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가만히만 있어도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 많게는 최고 50퍼센트까지 혼자 소모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제 인간의 심장은 가장 많은 피를 가장 높은 곳까지, 중력의 방향을 거슬러 가며 쉴 새 없이 올려 보내게 됐습니다. 인간의 심장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Sisyphus)와도같습니다. 끝도 없이 피를 몸의 꼭대기로 퍼 올립니다. 언제 백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심장과 관련한 사망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 P180

호모 하빌리스 문제의 핵심은, 고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다양성‘ 입니다. 어떤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해 본다고 합시다. 똑같이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조금씩 다릅니다. 임의의 두 사람이 생김이서로 다른 이유는 대개 몸집 크기, 성별, 그리고 나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차이가 있어도 우리는 이들이 모두 ‘사람‘이라는 하나의 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렇게 같은 종 사이에서 보이는생김새의 다양성을 우리는 ‘종 내 다양성(intraspecific variation)‘이라고부릅니다. 종 내 다양성과 대비되는 개념은 ‘종간 다양성 (interspecificvariation)‘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 한 명과 침팬지 한 마리를 놓고 비교해 보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제, 개체의 다양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같은 종사이의 다양성이면 종 내 다양성, 다른 종사이의 다양성은 종간 다양성입니다. 이번에는 상황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다양성의 양상을 보면, 반대로 두 개체가 서로 같은 종사이인지 다른 종사이인지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크기만 다르고 생김새가 대략 비슷하면 같은 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성별에 따른 차이만 보인다면 역시 같은 종입니다. 나이에 따른 차이를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체별로 특징이 달라도 기본적인 특징이 비슷하면 같은 종입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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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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