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충성을 하고 가족이나 옛 귀족은 경쟁자로 나서지 않았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칭기스 칸의 샤먼 뎁 텡그리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여러 차례 ‘영원한 푸른하늘‘이 칭기스 칸을 사랑하며, 그를 세계의 지도자로 만들 것이라고 예언해왔다. 꿈이나 다른 징조도 칭기스 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그의 성공을 돕고 지위를 높였다. 칭기스 칸은 팁 텡그리의 초자연적인 가치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가치도 놓치지 않았다. 후엘룬과 테무게 옷치긴의 영지(領地)를 감독하는 일을 맡긴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팁 탱그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고 그와 여섯형제는 막강한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팁 텡그리의 초자연적인 권력을 바탕으로 새로 창조된 몽골 민족 내부에서 칭기스칸 다음 가는 규모의 추종자를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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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텡그리는 칭기스칸이 초원 부족들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만난 마지막 경쟁자였다. 칭기스 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귀족 가문과 모든 경쟁하는 칸을 말살했고, 예전의 부족들을 없앴으며, 사람들을 재배치했고, 마지막으로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샤먼을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칭기스 칸은 텝 텡그리의 자리에 새로운 샤먼을 임명했다. 새 샤먼은 나이는 많고 야심은 작았으며 성격은 유순했다. 칭기스 칸의 부하들도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칭기스 칸이 군사적인 힘만이 아니라 영적인힘에서도 가장 높은 샤먼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칭기스칸 자신이 강력한 샤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 이것은 많은 몽골인이 오늘날까지 간직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 P132

칭기스 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했다. 이것은 단순한 통치자 집안 사이의 동맹이 아니었다. 칭기스 칸은전체 부족이나 민족을 통째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제국에 받아들였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 뒤로도 이 용어를 계속 이용하고확대하면서,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보편적 시민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나 무슬림에 속한 민족의 경우처럼 공동의 종교에 바탕을둔 것도 아니었고, 전통적인 부족 문화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시민권은 단순히 신종(臣從)의 의무, 승인, 의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비몽골 왕국들은 ‘카리‘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209년경 위구르 칸은 결혼을 하러 몽골 왕궁으로 오면서 금은만이아니라 다양한 크기, 모양, 색깔의 진주 등 화려한 선물을 실은 낙타 캐러밴을 이끌고 왔다. 몽골족은 직물을 짜는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가죽, 모피, 압착한 양모로 만든 모전밖에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중요한 선물은 비단, 수단, 다마스크, 공단 등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직물이었다. 위구르인의 방문으로 농업문명의 부와 초원지대부족의 궁핍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드러났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있었다. 칭기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시험해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P136

칭기스칸은 주르첸 사절을 만난 뒤에 케룰렌 강 근거지로 돌아가 1211년 양의 해 봄에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결정할 안건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참석을 거부하여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만일 쿠릴타이 불참자가 너무 많으면 칭기스 칸으로서는 전쟁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칭기스 칸은 오랫동안 공개적인 토론을 하게 했으며 결국 공동체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아무런 질문 없이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만. 회의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도 하급 동반자로 대접을 받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과제 설명을 듣고 또 자신의 의견도 제시할 수 있었다. 지위가 높은구성원들은 대규모의 공개적인 회의를 열어 문제들을 토론하고, 그런다음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가 하급전사들과 토론을 계속했다. 모든 전사의 완전한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계급에서부터 가장낮은 계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논의에 참여하여 전체적인 계획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긴요했다. - P143

칭기스 칸은 동맹을 맺은 위구르와 탕구트의 대표자들도 참석시켜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그가 공격을 할 경우 취약해지는 나라의 배와 등을 보호했다. 국내에서는 백성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전쟁의 필요성을 이해시켜야 했다. 칭기스 칸은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백성에게 주르첸의 과거의 행패에 복수를 하여 명예를 되찾자고 호소하는 동시에 전쟁에 이기면 주르첸의 부유한 도시들로부터 물자가 제한 없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칭기스칸은 자신의 백성과 동맹국들이 자신을 확실히 지지할 것이라는자신감이 생기자, 쿠릴타이에서 빠져나와 근처 산으로 가서 혼자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푼 다음 ‘영원한 푸른하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초자연적인 안내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그의 민족이 몇 세대에 걸쳐 주르첸에게 품고 있는 원한을이야기하고 그의 조상들이 고문과 살해를 당한 과정을 자세히 알렸다.
이어 자신이 먼저 황금 칸과 전쟁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먼저 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칭기스칸이 없는 사이에 몽골 민족은 남자, 여자, 아이 등 세 집단으로 나뉘어 금식을 하고 기도를 했다. 몽골 민족은 모자를 벗고 굶으며 ‘영원한 푸른 하늘‘의 결정과 칭기스 칸의 명령을 사흘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들은 밤낮없이 ‘영원한 푸른 하늘을 향해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몽골의 기도 후렴구 "후레, 후레, 후레"를 중얼거렸다.
나흘째 되는 날 새벽에 칭기스 칸은 결정을 내리고 산을 내려왔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우리에게 승리와 복수를 약속하셨다."
몽골군은 남쪽 화려한 도시들을 향해 출발했고, 자만심에 찬 주르첸군은 그들을 기다리며 조롱했다. "우리의 제국은 바다와 같다. 너희 나라는 한줌의 모래에 불과하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주르첸의 칸이 칭기스칸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주르첸의 칸은 이렇게 물었다. " 어떻게 우리가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는 곧 몽골의 답을 얻게 된다. - P144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이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만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대개 다수의전사가 보병이었다. 주르첸 원정에 나선 약 6만 5000명의 몽골 기병은거의 같은 숫자의 주르첸 기병과 더불어 추가로 8만 5000명의 보병과맞서야 했다. 따라서 주르첸군은 숫자에서는 2대 1 정도로 우세를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몽골군과 같은 기동성이 없었다.
몽골군의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킬로그램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그램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새로 고기가 생겼는데 조리할시간이 없으면 날고기를 안장 밑에 넣었다. 그러면 곧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중국인은 몽골 전사가 적은 식량과 물만으로도 오래 버틸 수 있다는사실에 놀라움과 혐오감을 표시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군대 전체가야영한 곳에서 연기 한 오라기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리할 불이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주르첸 병사들과 비교할 때 몽골군은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했다. 몽골족은 고기며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이루어진 식사를 꾸준히 했으며, 적들은 여러 가지 곡물로 이루어진 죽을 먹었다. 농민 전사들은 곡물 식사를 하기 때문에 뼈의 발육이 좋지않았고, 이도 썩었고, 몸에 힘이 없었고, 병에 잘 걸렸다. 반대로 몽골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은 너끈히 버텼다. - P148

트자마자 사방을병사들이 이렇게 넓은 지역에 흩어졌기 때문에 통신은 더 중요했고또 더 어려웠다. 예) 재래식 군대는 대규모로 열을 이루어 움직이고 진을•쳤다. 지휘관들은 문자로 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부대가 흩어져 있었으며, 장교들도 글을 몰랐다. 각 수준의 통신은모두 문자가 아니라 말로 이루어져야 했다. 명령도 말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러나 구두 통신체계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그내용을 매번 각 사람에게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또 상대방은 들은 대로기억해야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운을 맞추어 명령 내용을 꾸몄는데, 여기에는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는 표준화된 틀이 있었다. 몽골 전사들은 일군의 고정된 선율과 시의 양식을 알고있었으며, 여기에 명령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말을 즉흥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병사가 명령을 듣는 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의 새로운 가사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병사들은 오늘날 초원지대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무리처럼 작은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래를 자주 불렀다. 몽골 병사들은 고향, 여자, 전투 등 병사들이 흔히 소재로 삼는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법이나 행동 규칙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이런 내용들 역시 모두가암기할 수 있도록 곡조를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병사들은 늘 법을 암기하고 전달 내용이 담긴 노래 형식을 연습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명령이 담긴 노래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명령은 늘 연습하던 노래의 새로운 가사 형태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명령을 이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P150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목적으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은 동지나 다른 전사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중대한 금기였다. 모든 몽골 병사는 자신은 불멸하며, 누구도 자신을 이기거나 해칠 수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전사로서 살아갔다. 모든 것이 실패하고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몽골 전시는 위를 바라보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따라가야 했다.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마지막 하는 말이었다.
유목민은 초원지대에서 싸울 때 죽은 병사의 주검과 소유물을 들판에놓아두어 짐승이 처리하거나 자연스럽게 썩게 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농경지에 오자 몽골군은 주검이 자연스럽게 부패하지 못하고 지역 사람들로부터 모독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몽골군은 주르첸 원정을 하면서 전사들의 주검을 고향으로 보내 초원지대에 매장하게 했다. 이것이 초원지대 전투의 정상적인 패턴과 달라진 점이었다. 주검은 전쟁포로들이 운송했다. 아마 가죽 부대에 넣어 낙타에 싣거나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했을 것이다. 운송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주검을 근처 풀이 있는 지역으로 가져가 소지품과 함께 몰래 묻었다. 그런 뒤에 말을 타고 무덤 위를 달려 묻은 자국을 희미하게만들었다. 지역 농민이 무덤을 발견하고 도굴하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 P153

몽골군은 당시 군대의 전형적인 방식과는 달리 피난민 무리를 뒤에달고 다닌 것이 아니라 앞세우고 다녔다. 또 몽골군은 방패나 성문을 공격할 때 집을 떠난 농민을 살아 있는 공성 망치로 사용하기도 했다. 몽골군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적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포로들의 몸은 해자를 채우거나 적이 만든 방어용 구덩이나 구조물을 덮어 길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주르첸족과 백성은 도시 안에 갇힌 채 굶주렸다. 결국 여러 도시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성이 높아지면서 난민을 보호하지도, 먹이지도, 관리하지도 못하는 주르첸의 관헌에 대항하여 도시 폭동이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최악의 폭동 사태가 일어났을 때 주르첸군은 자국 농민을3만 명가량 죽이기도 했다. - P156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프랑스 역사가 프티는 당시 칭기스 칸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 •••••이 황제는 이제 동, 서, 아시아 북부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었기때문에 호라즘의 왕과 진지한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1217년에 그에게 선물과 함께 세 명의 사절을 보내 •••••  양쪽 사람들이서로 안전하게 교역을 하고, 완벽한 화합을 이루어 모든 왕국이 바라는 최고의 축복인 평안과 풍요를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칭기스 칸은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상업적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호라즘의 술탄에게 사절을 보냈다. "나는 그대와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크나큰 바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대를 내 아들로 여기겠다. 그대는내가 중국 북부를 정복하고 북쪽의 모든 부족을 복속시켰다는 사실을알고 있다. 그대는 내 나라가 전사들의 개밋둑이며, 은의 광산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영토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 사이에 교역을 장려하는 데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술탄은 의심을 털어내지 못해 주저하면서 조약에 합의했다. 몽골인은 상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그가 새로 얻은 위구르 영토에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무슬림과 힌두 상인들에게 의지했다. 칭기스칸은 그곳에서 450명의 상인과 종자를 모아 하얀 낙타 모피 옷감, 중국비단, 은괴, 가공하지 않은 비취 등의 사치품을 실은 캐러밴과 함께 몽골에서 호라즘으로 보냈다. 그는 인도인을 대표단 우두머리로 보내면서다시 술탄에게 우호 관계를 요청하고 교역을 권유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어 악한 생각이라는 종기가 사라질 것이고, 난동과 폭동이라는 고름이 제거될 것이다."76)그러나 캐러밴이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르-현재의 카자흐스탄남부에 있다 에 들어가자 오만하고 욕심 많은 총독이 물자를 몰수하고 상인과 짐승 몰이꾼들을 죽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얼마나 살벌한 보복을 당하게 될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자 주베이니가 설명하듯이, 총독의 폭력은 캐러밴을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결국 "전 세계를 초토화시켰다.")
칭기스칸은 이 이야기를 듣자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폭력을 휘두른 지방관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술탄은 자신이 아는 가장 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칸을 자극했다. 사절들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을 망가뜨려 주인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이 소식이 초원을 가로질러 몽골 왕궁에 들어가는 데는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베이니의 말을 빌리면, 몽골 왕궁에서는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었다. 칭기스칸은 분노, 수치, 좌절을 느끼며 다시 부르칸 칼둔 꼭대기로 올라가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사흘 낮밤을 기도하면서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산에서 내려와 작전을 숙고하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 P171

몽골군은 귀족을 죽임으로써 적의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서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일부 도시는 귀족이 전장에서 죽고 그 가족이 몰살을 당한 뒤에 사회를 재건할 힘을 다시는 회복하지못했다. 칭기스 칸은 몽골인에게 충성을 하는 관리, 또 몽골인 덕분에 권력을 얻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관리만을 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수여한 직책 외에 다른 직책은 인정하지 않았다. 동맹한 제후나 왕이 예전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으면 몽골 당국으로부터 다시 그직책을 부여받는 형식을 거쳐야 했다. 교황의 사절 조반니 디 플라노카르피니는 1245~1247년의 몽골 출장 보고서에서 몽골인이 귀족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몽골인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도 그들을방문한 왕이나 왕비 앞을 걸어다니고 무례하게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호라즘 제국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여자였던 술탄의 어머니의 운명은 몽골인이 귀족 여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보여준다. 몽골군은 그녀를 포로로 잡았고, 그녀의 궁정 구성원 대부분과 가족 20명 정도를 죽였다. 그런 다음 몽골로 보내 노예로 삼아 수치스러운 여생을 살게 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몽골군은 그런 여자의 경우 출생이 고귀하다 해서 존경해주거나 배려해주지 않았다. 다른 남자 포로와 마찬가지로 기술, 일, 봉사를 기준으로 분류해 처리해버렸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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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4월 8일 금요일

새벽 1시 반이 조금 못된 시각, 간호사 한나 니칸데르가 안데르스 요나손을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헬리콥터가 들어왔어요. 응급환자 두 명을 싣고요. 나이든 남자하나와 젊은 여자 하나. 여자는 총상을 입었고요."
"알았어요. 가봅시다......" 대꾸하는 안데르스의 얼굴에는 피로가잔뜩 묻어 있었다. - P11

안데르스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비관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업을 골키퍼와 비교하고는 했다. 매일 그의 작업장에는 숱한 사람들이 실려온다. 상태는 가지각색이지만 목적은 단 하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노르스탄 상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74세 노부인, 드라이버에 왼쪽폐가 뚫린 14세 소년, 엑스터시를 먹고 열여덟 시간을 쉬지 않고 춤추다가 얼굴이 새파래져 뻗어버린 16세 소녀, 온갖 안전사고와 폭력의 희생자들, 바사 광장에서 투견들에게 공격당한 아이들, 약간의 손재주를 믿고 전기톱으로 널판 몇 장 자르려다 결국 손목 뼈까지 잘라버린 남자들.
안데르스는 이런 환자들과 장의사 사이에 서 있는 골키퍼인 셈이었다. - P23

"그럼 당신이 차에 치였다고 가정해봐요. 그럼 여긴 곧바로 편집장없는 회사가 되지 않나요?"
에리카가 시선을 치켜들었다.
"나는 차에 치인 게 아니잖아요. 몇 주간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겨왔다고요."
"지금 이곳 상황이 어렵다는 건 나도 이해해요. 하지만 미카엘과크리스테르,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이 사실을 빨리는 알려야 할 것 같네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의 그 빌어먹을 오라버니는 오늘 예테보리에있어요. 쿨쿨 자고 있는지 전화도 안받네요."
"그러게요. 전화를 안 받기로는 미카엘만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없죠. 하지만 에리카, 이건 단지 당신과 미카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두 사람이 이십 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이 일을 함께 해왔다는건 나도 알지만, 크리스테르와 다른 직원들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끝까지 감추고 있었다는 걸 미카엘이 알면......"
"그래요. 물론 놀라서 펄쩍 뛰겠죠. 그런데 이십 년간 당신이 단 한번 저지른 실수를 그가 받아주지 못한다면요? 미카엘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이십 년간 헛수고한 거예요.."
에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 힘을 내요! 크리스테르와 다른 사람들을 불러요. 지금 당장!"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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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살라첸코" 문이 닫히자마자 홀게르가 말했다.
미카엘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그 이름을 아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베트가 내게 그 이름을 말해줬다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소. 내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못 일어날 일도 아니지."
리스베트가요? 그녀가 어떻게 그를 알죠?"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아버지요."
맨 처음 미카엘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몇 초가흐른 후에야 각 단어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갔다.
"지금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살라첸코는 1970년대에 스웨덴에 온 사람이오. 일종의 정치망명자였던 것 같소. 사실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오. 알다시피 리스베트가 원래 과묵한데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말이 없었소"
그녀의 출생증명서 ••••• 부친 미상•••••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아버지였다니•••••." 미카엘이 되뇌듯 말했다. - P676

"왜 리스베트가 정신과 의사들이나 당국자들과 대화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해왔는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일은 더 악화됐었죠. 우유팩 사건이 일어난 후에 그녀는 십여 명 되는 어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어린 소녀 혼자서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 흉악한 사이코패스와 맞서 싸웠던 겁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요. 그런데 어른들은 ‘잘했다‘ ‘넌 착한 아이구나‘라고 칭찬해주는 대신 그녀를 정신병자 수용소에 처넣어버린 겁니다." - P690

살라첸코는 헛간에 갇혀 있고 로날드는 솔레브룬 방면 갓길에 묶여 있다. 미카엘은 잰걸음으로 뜰을 가로질러 농가로 향했다. 제3의위험인물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미카엘은 총구를 땅으로 향하게 하고 살며시 출입문을 열었다. 현관은 컴컴했지만 문이 열려 있는 주방은 불을 밝힌상태였다. 들리는 것은 똑딱거리는 벽시계 소리뿐이었다. 주방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벤치에 누워 있는 리스베트를 보았다.
한순간 그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내 엉망이된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권총을 든 그녀의 손이 소파 아래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다그와 미아를 발견하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이제 리스베트도 죽었다는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흉곽이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희미하게나마 숨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을 조심스럽게 빼내기시작했다. 그러자 총을 잡은 그녀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가느다랗게 두 눈을 떴다. 기나긴 순간 같은 몇 초 동안 그를 응시했다.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들만큼 낮은 목소리로.
빌어먹을 칼레 블롬크비스트•••••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권총을 놓아주었다. 미카엘은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

밀레니엄 2권 끝. - P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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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앨러모스는 군사 기지였지만, 산장 같은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직전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년)의 「마법의 산(The Magic Mountain)』을 읽은 로버트 윌슨은 가끔자신이 그 책에 나오는 마법의 세계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국인물리학자인 제임스 터크는 그 시기를 "황금기"라고 불렀다. "이곳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아테네의,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의 정신을 발견했다.""그곳은 "하늘 위의 섬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샹그릴라(Shangri-La)"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스앨러모스의 주민들은 불과 몇 달 안에 공동체 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곳에 정착한 부인들에 따르면 그렇게 되기까지 오펜하이머의 공이 컸다. 그는 참여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처음부터 마을 평심의회를 임명했다. 나중에 그것은 선출 기구가 되었고, 비록 공식 권력을 가지고있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오펜하이머가 공동체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서 PX 음식의 질, 주거 환경, 주차 위반딱지 등과 같은 일상생활의 소소한 불만들을 제기할 수 있었다. 1943년말이 되자 로스앨러모스에는 뉴스, 지역 사회 공지사항, 음악을 방송하•는 저출력 라디오 기지국까지 생겨났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오펜하이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고전음악 레코드들에서 음악을 선곡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모두의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개인 생활의 부재, 검소한 생활, 그리고 반복적인 물, 우유, 심지어 전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의 유쾌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갔다. 하루는오펜하이머가 버니스 브로드에게 "당신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미쳤어. 그러니까 잘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브로드 부부는 같은 아파트에서 시릴 스미스와 앨리스 킴벌 스미스 부부, 에드워드 텔러와 미시 텔러 부부 위층에 살고 있었다.). 동네 극단이 조지프 케설링(Joseph Kesselring)의 희극 「비소와 낡은 레이스(Arsenic and Old Lace)」 공연을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시체처럼 뻣뻣한 채로 다른 희생자들과 같이 무대 바닥에서 뒹구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에 놀라고 즐거워했다. 1943년 가을 한 그룹 리더의 아내가 알 수 없는 마비 증세로 사망하자, 오펜하이머는 소아마비에 감염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슬픔에 빠진 남편을 찾아갔다. - P394

 오펜하이머는 일생 동안 자신의정신적 스트레스를 관리하면서 보냈다. 그럼에도 타이크의 출생과 키티가 떠난 사건은 그를 특히 상처받기 쉽게 만들었다.
셰르는 "아주 이상했어요."라고 기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나하고 수다를 떨었지만, 아기를 보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보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하루는 내가 참다못해 ‘딸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주 예쁘게 자라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네, 네‘ 정도로 가볍게 대답할 뿐이었어요."
두 달이 지났고, 오펜하이머는 셰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녀에게 "당•신은 타이크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셰르는 단순히 "나는 아이를 좋아해요. 그리고 아이를 보살피면 누구의 아이건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오펜하이머가 "당신은 그녀를 입양할 생각이 있습니까?"라고물었을 때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예요? 훌륭한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그런 감정은 아이와 떨어져 살게 된 부모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라며 그를 안심시키고는, 시간이 지나면 아이에게 애착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아뇨, 나는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셰르가 이 문제에 대해 키티와 의논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아뇨, 아뇨, 아뇨. 나는 아이에게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먼저 물었던 겁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주었잖습니까."라고 말했다.
셰르는 이 대화를 창피하고 심란하게 생각했다. 그의 제안이 비록 기이했지만, 진심 어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커다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까지는......이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동시에 그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자신이 아이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 P406

오펜하이머가 나중에 쓰기를, 그때까지 이일은 "으스스해 보였다." 보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히틀러를 무릎풀리기 위해 과학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 결말이 오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협력적인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그렇게믿고 싶었다."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18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 P419

오펜하이머는 항상 우라늄 ‘총구식 설계(gun-design)‘ 프로그램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핵분열성 물질 "한덩어리(slug)"를 또 다른 핵분열성 물질 목표물로 발사시켜 "임계성"을 만들어 핵폭발로 이어지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44년 봄이 되자,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디자인을 통째로 바꾸어야만 하는 위기를 맞았다. 오펜하이머는 세스 네더마이어에게 내파 설계(implosion design) 폭탄(핵분열성 물질을 듬성듬성하게 배열해 순간적인 압력을 가하면 임계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만들기 위한 폭발 실험을 진행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는 단순한 총구식 설계로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1944년 7월까지 만들어진 적은 분량의 플루토늄으로 실험을 하자, 총구식 디자인으로는 플루토늄 폭탄을 효율적으로 폭발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와 같은 시도는 플루토늄이 "총" 안에서 미리 폭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플루토늄 물질을 더 농축시켜 보다 안정적인 원소로 만드는 것이었다. 맨리가 설명하기를 "우리는 나쁜 플루토늄 동위 원소를 좋은 놈들로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라늄 동위 원소를 분리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공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지요. 결국 누군가가 플루토늄으로 폭발 가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워싱턴 주) 핸포드에 투자한 막대한 시간과 노력은 낭비였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4년 7월 17일,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코넌트, 페르미 등과 함께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코넌트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섞어서 저효율 내파식 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런 무기는 수백 톤의 TNT에 불과한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코넌트는 저효율폭탄으로 성공적인 시험을 거치면, 더 큰 무기로 나아갈 자신감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일정을 지나치게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코넌트의 계획을 거부했다. 그는 서버가 처음 내파식이라는 아이디어를 냈을 때 회의적이었지만, 이제 내파식 디자인의 플루토늄 폭탄에 모든 것을 걸자고 모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용감하고 훌륭한 도박이었다. 1943년봄에 네더마이어가 이 개념으로 실험해 보겠다고 나선 이래 그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943년 가을,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의 수학자인 폰 노이만을 로스앨러모스로 데려왔고, 노이만은 계산해 본 결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내파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이것이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 P427

폭탄 만들기는 이론 물리학보다는 공학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에서 학생들이 새로운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극했던 것만큼이나, 그의 과학자들이 기술적이고 공학적인 장애들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베테는 나중에 "로스앨러모스는 그가 없이도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힘은 더 들고, 정열은훨씬 적고, 더 느리게 진척되었겠지요. 그것은 연구원들 모두에게 잊을수 없는 기억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큰 성과를 올린 다른 연구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든지, 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린다든지,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라는 느낌을 주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앨러모스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펜하이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 P431

다이슨은 "유일하게 잠시 멈춰 섰던 사람은 리버풀 출신의 조지프 로트블랙이었다……."라고 썼다."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인 로트블랫은 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에 있었다. 그는 제임스 채드윅의 초청으로 영국 폭탄프로젝트에 참가했고 1944년 초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했다. 1944년 3월 어느 저녁, 로트블랫은 "불편한 충격"을 받았다. 채드윅의 집에 함께 저녁초대를 받은 그로브스 장군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당신은 물론 이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 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로트블랫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의 독재자는 그가 사랑하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터였다. 하지만 매일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동부 전선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로트블랫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작업이 나치스의 승리를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제 나는 우리가 준비하는 무기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사용할 의도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1944년 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고 6개월 후, 유럽에서의 전쟁은 곧 끝나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로트블랫은 독일인들을 굴복시키는 데 필요치 않은 무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위한 환송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1944년 12월 8일 로스앨러모스를 떠났다. - P436

1944년 9월 무렵 테드 홀은 내파식 폭탄에 필요한 측정 시험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홀이 내파 시험에 관한 한 메사에서 가장뛰어난 젊은 테크니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3 대단히 똑똑한 젊은이였던 홀은 그해 가을 지적인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에 소련을 선망하는 인물이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일과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내내 그는 20대 후반이나 30대초반의 ‘선배‘ 과학자들이 전후 군비 경쟁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풀러 로지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앉아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는 보어가 "열린 세계"을 갈망한다는 이야기를듣게 되었다. 홀은 전후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보어의 결론을 듣고서는 1944년 10월부터 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을 때 미국의 독점은 위험하고 방지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진 유일한 과학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홀은 로스앨러모스에서 14일간 휴가를 얻어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곧장 소련 무역 사무소로 걸어 들어가 소련관료에게 친필로 작성한 로스앨러모스에 대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보고서에는 연구소의 목적과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고위 과학자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홀은 소련에 내파식 폭탄의 디자인에 관한 중요 정보를 포함한 추가 정보를 제공했다. 홀은 ‘자생적‘ 스파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러시아 인들이 원자 폭탄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핵을 독점하게 된다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 P438

놀랍게도 오펜하이머는 그날 저녁에 참석해 토론을 경청했다. 윌슨은 나중에 바이스코프 같은 고참 물리학자를 포함해 20명 정도가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회의는 사이클로트론이 있는 건물에서 열렸다. 윌슨은 "나는 건물이 매우 추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전쟁이(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우리가 계속해서 폭탄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꽤 격렬한 토론을 했습니다."
원자 폭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파 기술에 관한 일을 하던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로젠(Louis Rosen)은 낡은 극장에서 열린 콜로키움에, 방이 꽉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것을 기억했다. 로젠에 따르면 오펜하이머가 연사였고 주제는 ‘이 나라가 핵무기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였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장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여느 시민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가질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로젠은 "그는 매우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학자 조지프 허시펠더(Joseph Hirschfelder)는 1945년초 어느 추운 일요일 저녁에 폭풍우가 치는 와중에 로스앨러모스의 작은 목조 교회당에서 열린 비슷한 토론회를 회고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그 특유의 유창함으로 우리 모두는 끝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지만 폭탄은 또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희망은 당시 모인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 P440

이제 이 장치가 독일인에게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와 다른 참석자들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쾌한 해답은 없었다. 윌슨은 "나는 우리가 나치스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일본인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일본인들 역시 폭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일어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윌슨은 오펜하이머가 토론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근본적으로 닐스 보어의 "열림 (openness)"이라는 비전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이 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무기에 대해 모른 채 이 전쟁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악의 경우는 장치가 군사 기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전쟁은거의 확실히 핵전쟁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 장치가 시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세계 연합이 1945년 4월 첫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계 국가의대표들이 전후 세계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인류가 대량 살상 무기를 발명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나는 그것이 매우 좋은 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동안 보어와 오펜하이머는 이 장치가 어떻게 세계를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학자들은 이 장치가 국가 주권의 개념을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신뢰했고 그가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윌슨이 말했듯이 "주권이 없는 지역이 존재할 것이고, 주권은 국제 연합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약속이다.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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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테무진을 도와주고 또 귀중한 자산까지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도 물론 이 가족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타이치우드는 한때 그의 가족을 내팽개쳐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무런 친족관계도 아닌 이 가족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테무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ㅁ었다. - P72

친족 위계에서 각각의 가문은 뼈라고 불렀다. 혼인이 허용되지 않는가장 가까운 관계는 흰 삐였다. 혼인이 허용되는 먼 친족 관계는 검은뼈였다. 사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나 중요한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의 힘은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힘에 비례했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먼 친척이었지만 뼈가 달랐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 여자에게서 만나지지만, 이 여자의 남편에서 갈라졌다. 자무카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초원의 유목민 후손이었다. 테무진은 그들의 구전 역사에서 ‘바보‘ 보돈차르라고 알려진 숲의 사냥꾼 후손이었다. 보돈차르는 남편을 죽인뒤 이 여자를 납치했다. 이에 따르면 자무카는 자신이 장남의 후손일 뿐아니라 초원에서 살던 남자의 후손이므로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었다. 초원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유대를 강조할 때도 사용되었지만 적대감을 표현할 구실이 될 수도 있었다. 테무진과 자무카의 경우 그들의 친족 이야기는 양쪽으로 다 작용했다. 친족 관계는 실제로 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요구를 놓고 협상을 하거나 강요할 때 사용하는 공동의 방언 역할을 했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무리에 속해 있는 한, 자무카의 가문은 흰 뼈의지위였고 테무진은 먼 검은 뼈 친족일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이 흰 뼈의지위에 오르려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중심에 놓는 무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몽골 비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무카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난 뒤 자무카는 테무진을 안다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씨족이 공동의 조상의 장남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미 가족 관계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테무진은 열등한 지위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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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년 초여름 밤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몽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다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루기 힘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향해 나아갈 때 자무카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며, 그들의 분쟁은 몽골족 전체를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이후 25년 동안 서로 가축과 여자를 약탈하고, 상대를 습격하여 부하들을죽였다. 몽골족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 P86

1197년에 주르킨 원정에 나섰으며, 이제 자신이 전사와 지휘관으로서 높은 수준의 기술을 익혔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쉽게 그들을 물리쳤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은 통치 방식에 두 번째 첫 번째는 가족이아니라 충성스러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한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게 되며, 이것은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중요한특징이 된다.
초원의 기나긴 전쟁사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을 약탈하고, 일부 구성원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패배한 집단은 다시 모여 반격을 하거나, 흩어져서 다른 부족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테무진은 주르킨을 물리쳤을 때 공격과 반격의 악순환, 동맹을맺고 끊는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드러내며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부하들을 소집하여 쿠릴타이를 열고 주르킨의 귀족 지도자들을 공개 재판했다. 타타르 전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없을 때 야영지를 습격한 죄를 물은 것이다. 테무진은 그들이 유죄라고 판결하고 처형했다. 이것은 동맹자 사이의 의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조치였을 뿐 아니라, 어떤 가문의 귀족에게도 특별 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이어 테무진은 주르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의 씨족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유례 없는 조처를 취했다. 양쪽 씨족 가운데 일부는 이것이 주르킨족을 노예로 삼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사실 그것이 초원의 관습에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그들을 노예가 아니라 정상적인 부족 구성원으로받아들였다. 주르킨 야영지의 고아 소년을 데려와 후엘룬에게 주면서 그녀의 게르에서 노예가 아니라 아들로 기르라고 말한 것이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테무진은 이전에도 자신이 정복한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타타르에서 한 명씩을 골라 어머니의 양자로 들인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주르킨 아이를 양자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동생 숫자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감상적인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테무진은 가공의 친족 관계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단결시킬 때 그런 행동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들 전체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과 똑같이 정복당한 사람들 전체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도 미래의 정복에 참여하여번영을 함께 나눌 기회를 준 것이다. - P95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해온 규칙을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런 변화로 인해 그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그에게 적대하고 다수의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적대한 소수는 귀족가문이었고, 충성한 다수는 그가 개혁과 물자 분배를 통해 부를 안겨준하급 가문이었다. 테무진은 여러 차례 습격을 해보면서 패자들의 게르를 성급하게 약탈하는 것이 더 완전한 승리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을 추적하는 대신 보통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채 바로 상대 진영을 약탈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 결과 패한 전사들 다수가 탈출하여 결국 반격을 하러돌아왔다. 그래서 타타르 정복에 나선 테무진은 타타르군에게 완전한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또 모든 물자를 그가 있는 중앙에서 통제하면서 그가 보기에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테무진은 숲의 사냥꾼들이 집단 사냥이 끝난 뒤 사냥한 짐승을 분배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자를 분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 P102

타타르 원정 뒤에 부하 몇 사람이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는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러자 테무진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엄하지만 적당한 벌을 내렸다. 명령을 어긴 자들의 소유를 박탈하고원정에서 약탈한 물건을 몰수한 것이다. 약탈한 모든 물자의 분배를 테무진이 통제하자 그 휘하의 귀족적인 가문들은 다시 한 번 전통적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부하들에게 독자적으로 물자를 나누어줄 권한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테무진의 급진적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지체높은 가문과 일반적인 유목민 사이의 구분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부족 구성원들은 친족의 유대나 전통 대신 테무진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정책으로 테무진은 그의 통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면서 동시에 부하들의 충성심을 높였다.
소수가 불만을 품기는 했지만 테무진의 새로운 정책은 즉시 효과를발휘했다. 약탈을 원정이 끝날 때까지 미루자 테무진 군대는 전보다 더많은 물자와 가축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는 새로운 문제를•초래했다. 몽골족은 타타르를 이겼을 뿐 아니라 군대와 민간인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기 때문이다.
초원지대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친족의 망(網)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으며, 입양이나 혼인이라는 유대를 통하여 가족으로편입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그런집단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주르킨이나 타이치우드를 다루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타타르도 다루고 싶었다. 즉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와 물자와 가축은 모두 그의 부족으로 흡수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수백 명 단위의 씨족을 상대로 할 때는효과를 보았지만, 타타르는 수천 명에 달하는 부족이었다. 이들을 흡수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그런 지지를 얻기 위해 승리한 전사들을 쿠릴타이로 소집했다.
쿠릴타이의 구성원들은 그 계획에 찬성하여, 수레의 바퀴를 지탱하는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자는 죽이기로 결정했다. 수레는 어른의 키를 측정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나라의 상징이기도 했다. 해양민족이 배를 자기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테무진은 이런 살육에 보상이라도 하듯이, 살아남은 타타르족을 자신의 부족의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에도 타타르 아이를 어머니의 양자로 들였을뿐 아니라, 그들과 혼인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 테무진의 공식적인 부인은 부르테 한 사람으로, 그녀는 아들 넷과 딸 몇 명인지 확인되지 않았다-을 낳았다. 그러나 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운 뒤 타타르귀족인 예수겐과 그녀의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타르는 몽골족보다 널리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 싸움 뒤에 몽골족은 타타르족을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몽골 제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이름을 떨쳤다. 이런 연유로 타타르라는 이름은 몽골과 동의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몽골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아 수백 년 동안 역사적 혼란을 일으켰다. - P103

테무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카사르 외에는 친척이 아니라 친구들이었다.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은 초원에서 잠시 서로를 놓쳤지만, 다른친척들은 테무진을 버리고 옹 칸이나 자무카에게로 갔다. 특히 그의 숙부- 아버지의 두 형제 가운데 하나로 테무진의 어머니를 메르키트족남편에게서 납치하는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가 옹 칸 진영에 합류하여 조카와 맞섰다.
서로 위로할 것도 없고 격려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지친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나타난 것을 초자연적인 징조로 여겼다. 이 말은 허기진 배를채울 음식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몽골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도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 주요한 전투나 쿠릴타이를 앞두고 말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테무진의 영기의 힘은 강화되었다. 말고기를 먹은 뒤에 마실 물이라고는 발주나의 흙탕물밖에 없었다. 테무진칸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리고, 축배를 들듯 다른 손으로 발주나의 흙탕물을 들어올렸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에 감사하면서 결코 잊지않겠다고 맹세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역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서 ‘발주나 맹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테무진 칸의 군사적 운(運)의 최저점으로서, 또 몽골 제국의 정체성과 형식이 규정된사건으로서 신화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사건은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테무진 칸과 함께 있던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다. 아마 테무진과 형제 카사르만이몽골 씨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메르키트, 키타이, 케레이트 출신도 있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과 성산 부르칸칼둔을 숭배하는 헌신적인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19명 가운데는 무슬림 3명 외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 명씩 있었다. 그들은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결국 발주나 호수의 맹약을 통해 하나의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다. 이 결사체는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했기 때문에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P113

자무카의 종말은 극적인 최종 결전이 아니라 느린 흐느낌처럼 찾아왔다. 점차 부풀어오르는 몽골 민족은 얼마 안 남은 메르키트족 무리들을 금방삼켜버렸다. 마흔 살의 자무카는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야생동물을잡아먹으며 추방당한 산적처럼 살았다. 운명의 묘한 역전인지, 한때 귀족이었던 자무카는 어린 테무진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처럼 초라하게 몰락해버렸다. 테무진이 나이만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일 년 뒤인 1205년 소의 해, 절망과 체념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적대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도 의리를 높이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20년 이상 싸워온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몽골비사」에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테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한다. "우리 동무가 되자. 이제 다시 힘을 합쳐 잊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자. 서로를 잠에서 깨워주자. 그대는 멀리 있을 때에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여전히 행운과 축복을 잃지 않은 나의 형제였다. 물론 죽고 죽이던 시절에는 그대의 명치와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물론 베이고 베던 시절에는 그대의 가슴과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자무카는 한때 그의 동생뻘 동반자였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가졌던 것 이상을 손에 넣고 다스리는 사람의 호소와 감정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젊은 날의 형제애를 감상적으로 회상하는 테무진의 감정에 잠시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자무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함께 먹었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자무카는 그들이 헤어진 것을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영향 탓으로 돌린다. "우리를 갈라놓은 자가 우리를 자극했다. 옆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들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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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19

그러나 종국에는 자비를구하는 대신 죽음을 청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한다. 귀족적인 방법으로, 즉 땅에 피를 흘리거나, 해와 하늘에 피를 드러내지 않고 죽게 해달라는것이었다.
자무카는 살아서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주검을 높은 곳에 안치해주면 테무진과그 후손을 보살피겠다고 맹세한다. "나를 죽여 그 죽은 뼈를 높은 곳에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 씨의 씨를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전설에 따르면 테무진은 안다의 맹세를 할 때 자무카에게 주었던 황금 허리띠를 채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P120

이제 테무진은 방대한 땅의 논란의 여지없는 통치자로서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산맥까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의 제국은 풀밭이었으며, 인간보다 동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영토 각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의 쿠릴타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에는 통치의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었다. 만일 어떤 집단이 대표를 보내지 않으면, 소집을 한 칸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칸은 그들을 통치할수 없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들도 칸의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테무진은 일 년을 더 기다려 평화를 회복하고 관계들을 정리한 뒤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범의 해인 1206년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의 원류에서 쿠릴타이가 열렸다.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쿠릴타이였을 것이다.  - P121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 정도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통제하는 유목 부족민 숫자는 100만 명 정도였고, 가축은 1500만 내지 2000만 마리였을 것이다. 그는 단지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사람들만의 칸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모전 벽의 사람들의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 이 새로운 제국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부족 이름에서 파생된 새로운 공식 명칭을 선택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 즉 큰 몽골 나라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앴다. 그런 직책들은 개인이나가족이 아니라 나라에 귀속되었으며, 새 통치자의 의지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 같은 예전의 부족적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마 그의 부하들이 이미 그 전부터 이 칭호를 사용해왔을 것이다.
- P122

테무진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이 대규모 부족 연합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 분쟁과 전쟁의 전통적 원인을 없애는 새로운 법을 즉시 발표했다. ‘칭기스 칸의 대법령 ‘(대야사)은 다른 입법자들의 법과는 달랐다. 그는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어떤 정주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 법을통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의 기능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버렸다. 그는 각 집단이 독자적인 영역에서는 대법령과 부딪히지 않는 한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이렇게 해서 대법령은 모든사람의 최고의 법 또는 관습법 역할을 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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