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충성을 하고 가족이나 옛 귀족은 경쟁자로 나서지 않았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칭기스 칸의 샤먼 뎁 텡그리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여러 차례 ‘영원한 푸른하늘‘이 칭기스 칸을 사랑하며, 그를 세계의 지도자로 만들 것이라고 예언해왔다. 꿈이나 다른 징조도 칭기스 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그의 성공을 돕고 지위를 높였다. 칭기스 칸은 팁 텡그리의 초자연적인 가치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가치도 놓치지 않았다. 후엘룬과 테무게 옷치긴의 영지(領地)를 감독하는 일을 맡긴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팁 탱그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고 그와 여섯형제는 막강한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팁 텡그리의 초자연적인 권력을 바탕으로 새로 창조된 몽골 민족 내부에서 칭기스칸 다음 가는 규모의 추종자를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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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텡그리는 칭기스칸이 초원 부족들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만난 마지막 경쟁자였다. 칭기스 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귀족 가문과 모든 경쟁하는 칸을 말살했고, 예전의 부족들을 없앴으며, 사람들을 재배치했고, 마지막으로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샤먼을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칭기스 칸은 텝 텡그리의 자리에 새로운 샤먼을 임명했다. 새 샤먼은 나이는 많고 야심은 작았으며 성격은 유순했다. 칭기스 칸의 부하들도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칭기스 칸이 군사적인 힘만이 아니라 영적인힘에서도 가장 높은 샤먼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칭기스칸 자신이 강력한 샤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 이것은 많은 몽골인이 오늘날까지 간직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 P132

칭기스 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했다. 이것은 단순한 통치자 집안 사이의 동맹이 아니었다. 칭기스 칸은전체 부족이나 민족을 통째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제국에 받아들였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 뒤로도 이 용어를 계속 이용하고확대하면서,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보편적 시민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나 무슬림에 속한 민족의 경우처럼 공동의 종교에 바탕을둔 것도 아니었고, 전통적인 부족 문화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시민권은 단순히 신종(臣從)의 의무, 승인, 의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비몽골 왕국들은 ‘카리‘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209년경 위구르 칸은 결혼을 하러 몽골 왕궁으로 오면서 금은만이아니라 다양한 크기, 모양, 색깔의 진주 등 화려한 선물을 실은 낙타 캐러밴을 이끌고 왔다. 몽골족은 직물을 짜는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가죽, 모피, 압착한 양모로 만든 모전밖에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중요한 선물은 비단, 수단, 다마스크, 공단 등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직물이었다. 위구르인의 방문으로 농업문명의 부와 초원지대부족의 궁핍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드러났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있었다. 칭기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시험해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P136

칭기스칸은 주르첸 사절을 만난 뒤에 케룰렌 강 근거지로 돌아가 1211년 양의 해 봄에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결정할 안건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참석을 거부하여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만일 쿠릴타이 불참자가 너무 많으면 칭기스 칸으로서는 전쟁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칭기스 칸은 오랫동안 공개적인 토론을 하게 했으며 결국 공동체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아무런 질문 없이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만. 회의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도 하급 동반자로 대접을 받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과제 설명을 듣고 또 자신의 의견도 제시할 수 있었다. 지위가 높은구성원들은 대규모의 공개적인 회의를 열어 문제들을 토론하고, 그런다음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가 하급전사들과 토론을 계속했다. 모든 전사의 완전한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계급에서부터 가장낮은 계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논의에 참여하여 전체적인 계획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긴요했다. - P143

칭기스 칸은 동맹을 맺은 위구르와 탕구트의 대표자들도 참석시켜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그가 공격을 할 경우 취약해지는 나라의 배와 등을 보호했다. 국내에서는 백성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전쟁의 필요성을 이해시켜야 했다. 칭기스 칸은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백성에게 주르첸의 과거의 행패에 복수를 하여 명예를 되찾자고 호소하는 동시에 전쟁에 이기면 주르첸의 부유한 도시들로부터 물자가 제한 없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칭기스칸은 자신의 백성과 동맹국들이 자신을 확실히 지지할 것이라는자신감이 생기자, 쿠릴타이에서 빠져나와 근처 산으로 가서 혼자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푼 다음 ‘영원한 푸른하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초자연적인 안내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그의 민족이 몇 세대에 걸쳐 주르첸에게 품고 있는 원한을이야기하고 그의 조상들이 고문과 살해를 당한 과정을 자세히 알렸다.
이어 자신이 먼저 황금 칸과 전쟁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먼저 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칭기스칸이 없는 사이에 몽골 민족은 남자, 여자, 아이 등 세 집단으로 나뉘어 금식을 하고 기도를 했다. 몽골 민족은 모자를 벗고 굶으며 ‘영원한 푸른 하늘‘의 결정과 칭기스 칸의 명령을 사흘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들은 밤낮없이 ‘영원한 푸른 하늘을 향해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몽골의 기도 후렴구 "후레, 후레, 후레"를 중얼거렸다.
나흘째 되는 날 새벽에 칭기스 칸은 결정을 내리고 산을 내려왔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우리에게 승리와 복수를 약속하셨다."
몽골군은 남쪽 화려한 도시들을 향해 출발했고, 자만심에 찬 주르첸군은 그들을 기다리며 조롱했다. "우리의 제국은 바다와 같다. 너희 나라는 한줌의 모래에 불과하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주르첸의 칸이 칭기스칸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주르첸의 칸은 이렇게 물었다. " 어떻게 우리가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는 곧 몽골의 답을 얻게 된다. - P144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이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만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대개 다수의전사가 보병이었다. 주르첸 원정에 나선 약 6만 5000명의 몽골 기병은거의 같은 숫자의 주르첸 기병과 더불어 추가로 8만 5000명의 보병과맞서야 했다. 따라서 주르첸군은 숫자에서는 2대 1 정도로 우세를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몽골군과 같은 기동성이 없었다.
몽골군의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킬로그램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그램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새로 고기가 생겼는데 조리할시간이 없으면 날고기를 안장 밑에 넣었다. 그러면 곧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중국인은 몽골 전사가 적은 식량과 물만으로도 오래 버틸 수 있다는사실에 놀라움과 혐오감을 표시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군대 전체가야영한 곳에서 연기 한 오라기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리할 불이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주르첸 병사들과 비교할 때 몽골군은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했다. 몽골족은 고기며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이루어진 식사를 꾸준히 했으며, 적들은 여러 가지 곡물로 이루어진 죽을 먹었다. 농민 전사들은 곡물 식사를 하기 때문에 뼈의 발육이 좋지않았고, 이도 썩었고, 몸에 힘이 없었고, 병에 잘 걸렸다. 반대로 몽골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은 너끈히 버텼다. - P148

트자마자 사방을병사들이 이렇게 넓은 지역에 흩어졌기 때문에 통신은 더 중요했고또 더 어려웠다. 예) 재래식 군대는 대규모로 열을 이루어 움직이고 진을•쳤다. 지휘관들은 문자로 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부대가 흩어져 있었으며, 장교들도 글을 몰랐다. 각 수준의 통신은모두 문자가 아니라 말로 이루어져야 했다. 명령도 말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러나 구두 통신체계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그내용을 매번 각 사람에게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또 상대방은 들은 대로기억해야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운을 맞추어 명령 내용을 꾸몄는데, 여기에는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는 표준화된 틀이 있었다. 몽골 전사들은 일군의 고정된 선율과 시의 양식을 알고있었으며, 여기에 명령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말을 즉흥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병사가 명령을 듣는 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의 새로운 가사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병사들은 오늘날 초원지대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무리처럼 작은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래를 자주 불렀다. 몽골 병사들은 고향, 여자, 전투 등 병사들이 흔히 소재로 삼는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법이나 행동 규칙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이런 내용들 역시 모두가암기할 수 있도록 곡조를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병사들은 늘 법을 암기하고 전달 내용이 담긴 노래 형식을 연습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명령이 담긴 노래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명령은 늘 연습하던 노래의 새로운 가사 형태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명령을 이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P150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목적으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은 동지나 다른 전사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중대한 금기였다. 모든 몽골 병사는 자신은 불멸하며, 누구도 자신을 이기거나 해칠 수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전사로서 살아갔다. 모든 것이 실패하고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몽골 전시는 위를 바라보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따라가야 했다.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마지막 하는 말이었다.
유목민은 초원지대에서 싸울 때 죽은 병사의 주검과 소유물을 들판에놓아두어 짐승이 처리하거나 자연스럽게 썩게 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농경지에 오자 몽골군은 주검이 자연스럽게 부패하지 못하고 지역 사람들로부터 모독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몽골군은 주르첸 원정을 하면서 전사들의 주검을 고향으로 보내 초원지대에 매장하게 했다. 이것이 초원지대 전투의 정상적인 패턴과 달라진 점이었다. 주검은 전쟁포로들이 운송했다. 아마 가죽 부대에 넣어 낙타에 싣거나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했을 것이다. 운송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주검을 근처 풀이 있는 지역으로 가져가 소지품과 함께 몰래 묻었다. 그런 뒤에 말을 타고 무덤 위를 달려 묻은 자국을 희미하게만들었다. 지역 농민이 무덤을 발견하고 도굴하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 P153

몽골군은 당시 군대의 전형적인 방식과는 달리 피난민 무리를 뒤에달고 다닌 것이 아니라 앞세우고 다녔다. 또 몽골군은 방패나 성문을 공격할 때 집을 떠난 농민을 살아 있는 공성 망치로 사용하기도 했다. 몽골군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적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포로들의 몸은 해자를 채우거나 적이 만든 방어용 구덩이나 구조물을 덮어 길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주르첸족과 백성은 도시 안에 갇힌 채 굶주렸다. 결국 여러 도시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성이 높아지면서 난민을 보호하지도, 먹이지도, 관리하지도 못하는 주르첸의 관헌에 대항하여 도시 폭동이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최악의 폭동 사태가 일어났을 때 주르첸군은 자국 농민을3만 명가량 죽이기도 했다. - P156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프랑스 역사가 프티는 당시 칭기스 칸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 •••••이 황제는 이제 동, 서, 아시아 북부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었기때문에 호라즘의 왕과 진지한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1217년에 그에게 선물과 함께 세 명의 사절을 보내 •••••  양쪽 사람들이서로 안전하게 교역을 하고, 완벽한 화합을 이루어 모든 왕국이 바라는 최고의 축복인 평안과 풍요를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칭기스 칸은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상업적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호라즘의 술탄에게 사절을 보냈다. "나는 그대와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크나큰 바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대를 내 아들로 여기겠다. 그대는내가 중국 북부를 정복하고 북쪽의 모든 부족을 복속시켰다는 사실을알고 있다. 그대는 내 나라가 전사들의 개밋둑이며, 은의 광산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영토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 사이에 교역을 장려하는 데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술탄은 의심을 털어내지 못해 주저하면서 조약에 합의했다. 몽골인은 상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그가 새로 얻은 위구르 영토에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무슬림과 힌두 상인들에게 의지했다. 칭기스칸은 그곳에서 450명의 상인과 종자를 모아 하얀 낙타 모피 옷감, 중국비단, 은괴, 가공하지 않은 비취 등의 사치품을 실은 캐러밴과 함께 몽골에서 호라즘으로 보냈다. 그는 인도인을 대표단 우두머리로 보내면서다시 술탄에게 우호 관계를 요청하고 교역을 권유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어 악한 생각이라는 종기가 사라질 것이고, 난동과 폭동이라는 고름이 제거될 것이다."76)그러나 캐러밴이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르-현재의 카자흐스탄남부에 있다 에 들어가자 오만하고 욕심 많은 총독이 물자를 몰수하고 상인과 짐승 몰이꾼들을 죽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얼마나 살벌한 보복을 당하게 될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자 주베이니가 설명하듯이, 총독의 폭력은 캐러밴을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결국 "전 세계를 초토화시켰다.")
칭기스칸은 이 이야기를 듣자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폭력을 휘두른 지방관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술탄은 자신이 아는 가장 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칸을 자극했다. 사절들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을 망가뜨려 주인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이 소식이 초원을 가로질러 몽골 왕궁에 들어가는 데는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베이니의 말을 빌리면, 몽골 왕궁에서는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었다. 칭기스칸은 분노, 수치, 좌절을 느끼며 다시 부르칸 칼둔 꼭대기로 올라가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사흘 낮밤을 기도하면서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산에서 내려와 작전을 숙고하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 P171

몽골군은 귀족을 죽임으로써 적의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서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일부 도시는 귀족이 전장에서 죽고 그 가족이 몰살을 당한 뒤에 사회를 재건할 힘을 다시는 회복하지못했다. 칭기스 칸은 몽골인에게 충성을 하는 관리, 또 몽골인 덕분에 권력을 얻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관리만을 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수여한 직책 외에 다른 직책은 인정하지 않았다. 동맹한 제후나 왕이 예전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으면 몽골 당국으로부터 다시 그직책을 부여받는 형식을 거쳐야 했다. 교황의 사절 조반니 디 플라노카르피니는 1245~1247년의 몽골 출장 보고서에서 몽골인이 귀족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몽골인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도 그들을방문한 왕이나 왕비 앞을 걸어다니고 무례하게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호라즘 제국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여자였던 술탄의 어머니의 운명은 몽골인이 귀족 여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보여준다. 몽골군은 그녀를 포로로 잡았고, 그녀의 궁정 구성원 대부분과 가족 20명 정도를 죽였다. 그런 다음 몽골로 보내 노예로 삼아 수치스러운 여생을 살게 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몽골군은 그런 여자의 경우 출생이 고귀하다 해서 존경해주거나 배려해주지 않았다. 다른 남자 포로와 마찬가지로 기술, 일, 봉사를 기준으로 분류해 처리해버렸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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