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테무진을 도와주고 또 귀중한 자산까지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도 물론 이 가족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타이치우드는 한때 그의 가족을 내팽개쳐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무런 친족관계도 아닌 이 가족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테무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ㅁ었다. - P72

친족 위계에서 각각의 가문은 뼈라고 불렀다. 혼인이 허용되지 않는가장 가까운 관계는 흰 삐였다. 혼인이 허용되는 먼 친족 관계는 검은뼈였다. 사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나 중요한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의 힘은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힘에 비례했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먼 친척이었지만 뼈가 달랐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 여자에게서 만나지지만, 이 여자의 남편에서 갈라졌다. 자무카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초원의 유목민 후손이었다. 테무진은 그들의 구전 역사에서 ‘바보‘ 보돈차르라고 알려진 숲의 사냥꾼 후손이었다. 보돈차르는 남편을 죽인뒤 이 여자를 납치했다. 이에 따르면 자무카는 자신이 장남의 후손일 뿐아니라 초원에서 살던 남자의 후손이므로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었다. 초원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유대를 강조할 때도 사용되었지만 적대감을 표현할 구실이 될 수도 있었다. 테무진과 자무카의 경우 그들의 친족 이야기는 양쪽으로 다 작용했다. 친족 관계는 실제로 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요구를 놓고 협상을 하거나 강요할 때 사용하는 공동의 방언 역할을 했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무리에 속해 있는 한, 자무카의 가문은 흰 뼈의지위였고 테무진은 먼 검은 뼈 친족일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이 흰 뼈의지위에 오르려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중심에 놓는 무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몽골 비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무카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난 뒤 자무카는 테무진을 안다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씨족이 공동의 조상의 장남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미 가족 관계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테무진은 열등한 지위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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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년 초여름 밤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몽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다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루기 힘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향해 나아갈 때 자무카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며, 그들의 분쟁은 몽골족 전체를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이후 25년 동안 서로 가축과 여자를 약탈하고, 상대를 습격하여 부하들을죽였다. 몽골족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 P86

1197년에 주르킨 원정에 나섰으며, 이제 자신이 전사와 지휘관으로서 높은 수준의 기술을 익혔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쉽게 그들을 물리쳤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은 통치 방식에 두 번째 첫 번째는 가족이아니라 충성스러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한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게 되며, 이것은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중요한특징이 된다.
초원의 기나긴 전쟁사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을 약탈하고, 일부 구성원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패배한 집단은 다시 모여 반격을 하거나, 흩어져서 다른 부족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테무진은 주르킨을 물리쳤을 때 공격과 반격의 악순환, 동맹을맺고 끊는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드러내며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부하들을 소집하여 쿠릴타이를 열고 주르킨의 귀족 지도자들을 공개 재판했다. 타타르 전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없을 때 야영지를 습격한 죄를 물은 것이다. 테무진은 그들이 유죄라고 판결하고 처형했다. 이것은 동맹자 사이의 의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조치였을 뿐 아니라, 어떤 가문의 귀족에게도 특별 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이어 테무진은 주르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의 씨족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유례 없는 조처를 취했다. 양쪽 씨족 가운데 일부는 이것이 주르킨족을 노예로 삼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사실 그것이 초원의 관습에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그들을 노예가 아니라 정상적인 부족 구성원으로받아들였다. 주르킨 야영지의 고아 소년을 데려와 후엘룬에게 주면서 그녀의 게르에서 노예가 아니라 아들로 기르라고 말한 것이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테무진은 이전에도 자신이 정복한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타타르에서 한 명씩을 골라 어머니의 양자로 들인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주르킨 아이를 양자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동생 숫자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감상적인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테무진은 가공의 친족 관계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단결시킬 때 그런 행동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들 전체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과 똑같이 정복당한 사람들 전체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도 미래의 정복에 참여하여번영을 함께 나눌 기회를 준 것이다. - P95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해온 규칙을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런 변화로 인해 그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그에게 적대하고 다수의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적대한 소수는 귀족가문이었고, 충성한 다수는 그가 개혁과 물자 분배를 통해 부를 안겨준하급 가문이었다. 테무진은 여러 차례 습격을 해보면서 패자들의 게르를 성급하게 약탈하는 것이 더 완전한 승리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을 추적하는 대신 보통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채 바로 상대 진영을 약탈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 결과 패한 전사들 다수가 탈출하여 결국 반격을 하러돌아왔다. 그래서 타타르 정복에 나선 테무진은 타타르군에게 완전한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또 모든 물자를 그가 있는 중앙에서 통제하면서 그가 보기에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테무진은 숲의 사냥꾼들이 집단 사냥이 끝난 뒤 사냥한 짐승을 분배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자를 분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 P102

타타르 원정 뒤에 부하 몇 사람이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는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러자 테무진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엄하지만 적당한 벌을 내렸다. 명령을 어긴 자들의 소유를 박탈하고원정에서 약탈한 물건을 몰수한 것이다. 약탈한 모든 물자의 분배를 테무진이 통제하자 그 휘하의 귀족적인 가문들은 다시 한 번 전통적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부하들에게 독자적으로 물자를 나누어줄 권한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테무진의 급진적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지체높은 가문과 일반적인 유목민 사이의 구분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부족 구성원들은 친족의 유대나 전통 대신 테무진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정책으로 테무진은 그의 통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면서 동시에 부하들의 충성심을 높였다.
소수가 불만을 품기는 했지만 테무진의 새로운 정책은 즉시 효과를발휘했다. 약탈을 원정이 끝날 때까지 미루자 테무진 군대는 전보다 더많은 물자와 가축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는 새로운 문제를•초래했다. 몽골족은 타타르를 이겼을 뿐 아니라 군대와 민간인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기 때문이다.
초원지대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친족의 망(網)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으며, 입양이나 혼인이라는 유대를 통하여 가족으로편입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그런집단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주르킨이나 타이치우드를 다루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타타르도 다루고 싶었다. 즉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와 물자와 가축은 모두 그의 부족으로 흡수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수백 명 단위의 씨족을 상대로 할 때는효과를 보았지만, 타타르는 수천 명에 달하는 부족이었다. 이들을 흡수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그런 지지를 얻기 위해 승리한 전사들을 쿠릴타이로 소집했다.
쿠릴타이의 구성원들은 그 계획에 찬성하여, 수레의 바퀴를 지탱하는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자는 죽이기로 결정했다. 수레는 어른의 키를 측정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나라의 상징이기도 했다. 해양민족이 배를 자기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테무진은 이런 살육에 보상이라도 하듯이, 살아남은 타타르족을 자신의 부족의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에도 타타르 아이를 어머니의 양자로 들였을뿐 아니라, 그들과 혼인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 테무진의 공식적인 부인은 부르테 한 사람으로, 그녀는 아들 넷과 딸 몇 명인지 확인되지 않았다-을 낳았다. 그러나 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운 뒤 타타르귀족인 예수겐과 그녀의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타르는 몽골족보다 널리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 싸움 뒤에 몽골족은 타타르족을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몽골 제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이름을 떨쳤다. 이런 연유로 타타르라는 이름은 몽골과 동의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몽골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아 수백 년 동안 역사적 혼란을 일으켰다. - P103

테무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카사르 외에는 친척이 아니라 친구들이었다.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은 초원에서 잠시 서로를 놓쳤지만, 다른친척들은 테무진을 버리고 옹 칸이나 자무카에게로 갔다. 특히 그의 숙부- 아버지의 두 형제 가운데 하나로 테무진의 어머니를 메르키트족남편에게서 납치하는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가 옹 칸 진영에 합류하여 조카와 맞섰다.
서로 위로할 것도 없고 격려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지친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나타난 것을 초자연적인 징조로 여겼다. 이 말은 허기진 배를채울 음식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몽골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도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 주요한 전투나 쿠릴타이를 앞두고 말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테무진의 영기의 힘은 강화되었다. 말고기를 먹은 뒤에 마실 물이라고는 발주나의 흙탕물밖에 없었다. 테무진칸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리고, 축배를 들듯 다른 손으로 발주나의 흙탕물을 들어올렸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에 감사하면서 결코 잊지않겠다고 맹세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역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서 ‘발주나 맹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테무진 칸의 군사적 운(運)의 최저점으로서, 또 몽골 제국의 정체성과 형식이 규정된사건으로서 신화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사건은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테무진 칸과 함께 있던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다. 아마 테무진과 형제 카사르만이몽골 씨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메르키트, 키타이, 케레이트 출신도 있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과 성산 부르칸칼둔을 숭배하는 헌신적인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19명 가운데는 무슬림 3명 외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 명씩 있었다. 그들은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결국 발주나 호수의 맹약을 통해 하나의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다. 이 결사체는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했기 때문에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P113

자무카의 종말은 극적인 최종 결전이 아니라 느린 흐느낌처럼 찾아왔다. 점차 부풀어오르는 몽골 민족은 얼마 안 남은 메르키트족 무리들을 금방삼켜버렸다. 마흔 살의 자무카는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야생동물을잡아먹으며 추방당한 산적처럼 살았다. 운명의 묘한 역전인지, 한때 귀족이었던 자무카는 어린 테무진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처럼 초라하게 몰락해버렸다. 테무진이 나이만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일 년 뒤인 1205년 소의 해, 절망과 체념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적대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도 의리를 높이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20년 이상 싸워온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몽골비사」에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테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한다. "우리 동무가 되자. 이제 다시 힘을 합쳐 잊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자. 서로를 잠에서 깨워주자. 그대는 멀리 있을 때에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여전히 행운과 축복을 잃지 않은 나의 형제였다. 물론 죽고 죽이던 시절에는 그대의 명치와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물론 베이고 베던 시절에는 그대의 가슴과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자무카는 한때 그의 동생뻘 동반자였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가졌던 것 이상을 손에 넣고 다스리는 사람의 호소와 감정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젊은 날의 형제애를 감상적으로 회상하는 테무진의 감정에 잠시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자무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함께 먹었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자무카는 그들이 헤어진 것을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영향 탓으로 돌린다. "우리를 갈라놓은 자가 우리를 자극했다. 옆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들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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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19

그러나 종국에는 자비를구하는 대신 죽음을 청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한다. 귀족적인 방법으로, 즉 땅에 피를 흘리거나, 해와 하늘에 피를 드러내지 않고 죽게 해달라는것이었다.
자무카는 살아서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주검을 높은 곳에 안치해주면 테무진과그 후손을 보살피겠다고 맹세한다. "나를 죽여 그 죽은 뼈를 높은 곳에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 씨의 씨를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전설에 따르면 테무진은 안다의 맹세를 할 때 자무카에게 주었던 황금 허리띠를 채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P120

이제 테무진은 방대한 땅의 논란의 여지없는 통치자로서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산맥까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의 제국은 풀밭이었으며, 인간보다 동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영토 각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의 쿠릴타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에는 통치의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었다. 만일 어떤 집단이 대표를 보내지 않으면, 소집을 한 칸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칸은 그들을 통치할수 없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들도 칸의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테무진은 일 년을 더 기다려 평화를 회복하고 관계들을 정리한 뒤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범의 해인 1206년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의 원류에서 쿠릴타이가 열렸다.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쿠릴타이였을 것이다.  - P121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 정도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통제하는 유목 부족민 숫자는 100만 명 정도였고, 가축은 1500만 내지 2000만 마리였을 것이다. 그는 단지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사람들만의 칸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모전 벽의 사람들의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 이 새로운 제국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부족 이름에서 파생된 새로운 공식 명칭을 선택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 즉 큰 몽골 나라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앴다. 그런 직책들은 개인이나가족이 아니라 나라에 귀속되었으며, 새 통치자의 의지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 같은 예전의 부족적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마 그의 부하들이 이미 그 전부터 이 칭호를 사용해왔을 것이다.
- P122

테무진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이 대규모 부족 연합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 분쟁과 전쟁의 전통적 원인을 없애는 새로운 법을 즉시 발표했다. ‘칭기스 칸의 대법령 ‘(대야사)은 다른 입법자들의 법과는 달랐다. 그는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어떤 정주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 법을통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의 기능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버렸다. 그는 각 집단이 독자적인 영역에서는 대법령과 부딪히지 않는 한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이렇게 해서 대법령은 모든사람의 최고의 법 또는 관습법 역할을 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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