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는 이상스럽게 관대했고, 다른 식구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종일 모래밭에서 뒹구느라 옷을 다 버렸지만, 큰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새옷을 갈아입혀서 다시 모래밭으로 내몰았다. 사촌 형은 그런 그의 손에 감과 대추를 들려 주었다.
그런 순간에 그에게 쏟아지던 주변 사람들의 특별한 눈빛에 대해서 그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집안의 분위기에 만족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맨 처음 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너무쉽게 그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 한 사람의 죽음의 충격조차 어린아이의 감정을 오래 장악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지.
상여가 산으로 나가기 전날 저녁, 담장 아래에서 구슬을 만지고 있던 박부길의 모습을 한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던 친척 어른이 (부음을듣고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그에게는 고모가 된다고 했다)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더니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당연히 그는 어쩐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구 쓰다듬으면서 눈물에 젖어 훌쩍이는 음성으로 말했는데,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갑작스러운 것이어서 박부길은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길아, 죽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는 틀리게 알고 있었다. 어렴풋한 깨우침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쌍한 것,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 P70

큰아버지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와 발 밑을 때렸다. 시간도 파도를 따라 그들의 발 밑을 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큰아버지의 계산된 것 같은 침묵에 불안을 느꼈다. 그는엉덩이를 들썩이며 큰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여전히 시선을 바다로 둔 채 큰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엉뚱하기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직접 대답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너의 가슴속에 있다. 아버지는 너의 정신 속에 있다. 너는 아버지의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 속에 있는 아버지가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다. 너에 의해서, 아버지는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그는 큰아버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순간, 그는 막연하게 슬펐다. 무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면서도 아득한 낙망의 정서가 울타리를 만들어 그를 감쌌다. 그는 자신이 이큰 우주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큰아버지는 시선을 바다에서 거두지 않았다. 햇살을 반사한 바다의 푸른 광채가눈부셨다. - P71

큰아버지가 그의 손에 삽을 쥐여 주었다. 그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 그는 조금 멈칫거렸다.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그가 행동하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 그는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해 가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그는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필시 사람들은 오해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코를 훌쩍이는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또 애써 소리 죽인 이런 말도 들렸다.
「불쌍한 것•••••. 알긴 다 알고 있었던가 보지•••••.」「그러게나. 이제 저 아이를 어쩔꼬•••••.」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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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1
청탁을 해온 편집자에게 이미 밝힌 바대로, 나는 이 글의 필자로적합하지 않다. 나더러 박부길 씨를 이야기하라니•••••. 솔직히 나는 많이 망설였다.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끼어들 수밖에 없는 뜬구름 잡는 식의 변죽이나 애매모호한 수사들은 대개의 경우 진실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그런 일은 작가를 위해서나 그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 P13

그 호기심은 거의 직업적인 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부길 씨를 소설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덧붙이자면, 한 작가의 성장 배경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 그의 문학과 삶에 대해 깊은 이해를 확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썩 유익한 일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과 그에 대한 기사들과 두 번의 인터뷰 내용을 두루 섭렵해 가면서,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선 그의 유년기를 재구성해 볼 생각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충실한 연대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 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피상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 층은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P18

 그 책들을 어린 박부길은 뜻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무작정읽어 치운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무의지적인 것이었고, 책을 읽는다는 분명한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한 번도 어린아이다운 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지긋지긋한 그는 내게 그 표현을 썼다. 그 나이에 벌써 현실에 대해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상을 하곤 했노라는 것이다)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기를 꿈꿨다. 요컨대 그의 독서에 몰두는, 책속에서 낙원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현실에 눈감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들은 일찍부터 마취제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신의 글 만들기가 마취제인 셈이라고, 그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고백했다. - P22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금령은 권고가 아니라 유혹이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금령이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금령이 있기 때문에범죄를 저지른다. 사람이 에덴의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야훼가금령을 준 것이 아니다. 야훼가 금령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따먹었다. 금령이 없으면 범함도 없다.
큰아버지가 뒤채의 ‘차꼬를 찬 남자‘ 대신 ‘감나무‘를 금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런 성찰 때문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금령은 포괄적인 것이었다. 감을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감나무가 서 있는 곳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제 분명해진셈인데, 금지된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감나무가 서 있는 땅이었다. 감나무는 단지 하나의 표지에 불과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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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와서 방해됐어?"
리스베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욕조 안에 있었어요."
"응 그래 보였어. 잠시 같이 있어줄까?"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욕조 안에 같이 들어가겠다는 게 아냐. 베이글을 좀 가져왔다고."
그가 봉지 하나를 보이며 말했다. "에스프레소용 원두도 좀 사왔어. 주방에 쥐라 엥프레사 X7을 갖췄으면 적어도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녀는 눈썹을 움찔 들어올렸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실망인지, 혹은 안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죠?"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야." 그가 확실히 말했다. "난 좋은 친구를 방문한 다른 좋은 친구일 뿐이야. 환영해야 할 손님이라고."
리스베트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 이 년간 그녀는 미카엘을 최대한 멀리해왔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나 실제 삶에서나 마치 신발 밑에붙은 껌처럼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인터넷상에선 문제될 게 없었다. 거기서 그는 전기와 텍스트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밖에 펼쳐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인 빌어먹을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비밀을 다 알고 있듯이.
리스베트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적어도 그런 감정들은.
올해 내내 그는 진정으로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는 그를 신뢰했다. 어쩌면 자신이 애써 피하려는 사람이 한편으론 자신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를 봐도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리스베트는 문을 열어 다시 한번 자신의 삶 안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밀레니엄 3권 끝. - P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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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말, 트루먼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고, 로런스와 오펜하이머는 그를맞으러 공항에 나갔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관련 사안을 논의하기 전에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와 잠시 개인적으로 의논할 것이 있다며그를 옆으로 데리고 갔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를 전쟁 말기에 한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콘크리트 활주로에 서서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뉴저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그는 연구소의 새로운 소장을 선출하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위원회는 다섯 명의 후보들가운데 오펜하이머를 가장 선호했고, 이사회는 오펜하이머에게 제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관심을 보였지만, 생각할 시간이필요하다고 말했다. 약 한 달 후인 1947년 1월,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으로 가 스트라우스와 아침을 먹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 결심을 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생각 같다고 말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대단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피는 고등 연구소의 "과학 관련 학과들에 과학자가 한 명도 없으며, 자신은 그것을 곧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고등 연구소는 아인슈타인의 지적 피난처로 가장 유명했다. 스트라우스가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소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집중하려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깊이있는 학술연구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547

스트라우스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첫인상은 FBI 도청 기록에서 볼 수있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는,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는 훌륭한 교양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일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릴리엔털은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은 스트라우스가 "활발한 성격을 가졌고 확실히 보수적이지만 전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평가는 스트라우스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는 병적인 야심가였고, 집요한 데다 대단히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로인해 그는 대단히 위험한 정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스트라우스의 동료였던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한 위원은 그에 대해 "당신이 루이스와 무엇인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처음에 당신이 바보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해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당신이 반역자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포춘》은 그를 "올빼미 상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성마르고, 지적 오만함을 가졌으며, 대단한 싸움꾼"이라고 묘사했다고 밝혔다. 수년간 스트라우스는 맨해튼의 사원 에마누엘의 회장으로 일했는데, 이곳은 마침 펠릭스 애들러가 1876년 윤리 문화 협회를 설립하기 위해 떠난 곳이기도 했다. 유태 혈통과 남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스트라우스는자신의 성을 "스트로스(Straws)"로 발음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대단히 독선적이던 그는 다른 사람의 실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억했고, 그것을 "기록용" 파일에 세심하게 기록했다. 그는 앨솝 형제가 썼듯이 "남에게 생색을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 P550

프린스턴의 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에게 "지금 나의 평판을 떨어뜨릴 만한 정보가 떠돌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당시 스트라우스는 경고를 무시했다. 하지만 새로 통과된 맥마혼법에 의해, FBI는 모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직원의 비밀 취급 인가를재검토하고 있었고 전 위원들은 오펜하이머의 파일을 읽어야만 했다. 후버의 어느 보좌관이 말했듯이, 이는 FBI가 "더 이상 조심스러워야 할필요 없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개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진행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요원들은 오펜하이머의 뒤를 밟았고, 스프라울과 로런스를 포함한 10여 명의 지인들과 인터뷰 조사를 벌였다. 모두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스프라울은 한 요원에게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과거 좌익 활동에 대해 "창피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로런스는 오펜하이머가 "과거에 뾰루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면역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오펜하이머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우스와 다른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은 곧 FBI로부터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1947년 2월 말, 후버는 백악관으로 12쪽 분량의 오펜하이머 파일 요약본을 보냈는데, 이 문서는 그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었다. - P555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로스앨러모스가 스파르타식이었다면, 고등 연구소는 전원적이고 편안했다. 특히 종신 교수진에게 그곳은 플라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이곳은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도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외부인들에게 연구소는 괴짜들을 위한 보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 P571

오펜하이머는 "기하학과 중력을 통합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사람의 "남다른 독창성"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인슈타인이 "창의적인 작업에 오래된 전통 요소들을 적용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이 "전통"에발목을 잡혔다고 강하게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지내는 동안 양자 이론이 중대한 모순으로 인해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보다 더 솜씨 있게 예기치 못한 적절한 사례를 생각해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중대한 모순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은 아인슈타인 자신의 이전업적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 이론에서 불편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불확정성이란 개념이었다. 하지만 보어의 통찰력에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상대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어와 고상하지만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증오하는 이론과 싸웠다. 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 P575

프랭크에 대해 걱정했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유명세가 동생의 좌익 과거사를 덮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1948년 11월 그는<타임> 표지 모델로 선정되었다. <타임>의 편집자들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원자력 시대의 창시자인 오펜하이머가 "당대의 진정한 영응"이라고 추켜세웠다. <타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급진주의에 경도되었던 과거에 대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1936년까지 자신은 "확실히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설명했다.그러고 나서 그는 실업자가 된 젊은 물리학자들이 "지쳐 가는 것"을, 그리고 독일에 있던 자신의 친지들이 나치스 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피난을 가야 하는 것을 보며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나는정치가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좌익이 되었다. 나는교원 노조에 가입했고, 여러 공산주의자 친구를 사귀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시절이나 고등학교 고학년 때 하는 일이었다.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는 이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만, 나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 부끄럽다. 당시 내가 믿었던 대부분의 가치들이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허튼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와 같은 교육 과정이 없었다면, 나는 로스앨러모스에서 나의 업무를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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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는 입구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던 미카엘이 삼십대 중반의 어떤 남자와 부딪힐 뻔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카가 보기에 그 낯선 사내는 깜짝 놀란눈으로 미카엘을 응시하는 듯했다. 혹시 미카엘을 아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음 순간,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에리카는 처음에 자신이 본 광경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내그가 미카엘을 향해 총을 겨눴을 때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카엘은 생각할 겨를 없이 반응했다. 왼손을 불쑥 내밀어 총부리를 붙잡아 천장을 향해 올렸다. 찰나의 순간, 시커먼 총구가 그의 얼굴 앞을 홱 지나갔다.
이어 기관단총 소리가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우며 귀를 먹먹하게만들었다. 미로 니콜리치가 총알을 열 발 넘게 갈겨대는 사이에 박살난 천장에서 석회와 유럿조각이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져내렸다. 그짧은 순간에 미카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내 미로 니콜리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미카엘의 손에서총을 빼냈다. 순간적으로 당한 미카엘은 총부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곧장 괴한을 향해 돌진했다. 만일 이때 몸을 숙였거나 뒷걸음쳤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미카엘은 다시 한번 총부리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온몸에 체중을 실어 괴한을 벽으로밀어붙였다. 다시 총알 예닐곱 발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으며 총부리를 바닥으로 돌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잡아내렸다. - P694

이내 미카엘은 깨달았다. 지금 리스베트는 분장을 하고 나온 것이있다. 평상시 그녀는 옷을 대충 입었고 별다른 취향도 없어 보였다. 미카엘은 그녀가 괴상한 옷차림을 하는 건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가아니라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자신의 개인적 영역이 하나의 적대적 지대라는 걸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미카엘에겐 그녀의 가죽재킷에 박힌 뾰족한 징들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일종의 방어기제로 느껴졌었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는신호였다. 날 만지려고 하지 마. 아플 테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는 법정에 등장하면서 그런 옷차림을 한층 더 강조했다. 얼마나 강렬한지 과장된 패러디로 보일 정도였다.
미카엘은 불현듯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안니카가 세운 변호 전략의 일부였다.
만일 리스베트가 단정히 빗은 머리에 얌전한 블라우스와 깔끔한 단화 차림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분명 법정에 거짓말을 팔러 나온 속 보이는 사기꾼으로 비춰질 것이다. 이건 신뢰성의 문제였다. 지금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심지어는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려고 과장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아닌누군가인 척하려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부끄러워할 생각도, 어떤쇼를 할 생각도 없어, 이것이 그녀가 법정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법정이 이런 모습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상관할바가 아니었다. 사회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고, 검사는결국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들어왔다. 리스베트는 이런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써 자신은 검사가 기소한 내용들을 모두 엿 같은 소리로 여기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 P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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