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랜 리바이스 청바지에 멋진 주니 벨트를 한, 키가 큰 인디언 노인. 목부분에서 산딸기색 실로 묶은 긴 백발. 이상하게도 한 일 년쯤 우리는 에인절 빨래방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마주쳤다. 그러나 매번 같은 시간은아니었다. 나는 때에 따라 월요일 저녁 일곱 시에 가기도 하고 금요일 저녁 여섯 시 반에 가기도 해서 불규칙적인데 그때마다 그도 늘 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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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성의 손에 의한 폭력만이 조상 남성이 죽음에 직면할지도모르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었다. 사냥도 항상 남성이 도맡아 온 활동이었으며 조상 남성들은 특히 멧돼지나 들소, 물소 같은 큰 짐승을 사냥할 때면 큰 부상을 당할 위험에 처했다. 사자, 표범, 호랑이 등이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을 지배했으며 조심성 없고 미숙하거나 경솔한 사냥꾼에게 큰 부상을 입히곤 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도 빈번했을 것이다. 인간의 조상 환경에서 어떤 여성이라도 남편이 먼저 죽을 가능성이나 남편이 사냥 및 아내를 보호할 능력을 상실할 만큼 큰 부상을 당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평소에 다른 대체 배우자를 잘 살피고 심지어는 유혹까지 하는 것이 여성의 입장에서는 매우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조상 여성들은 결코 전투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냥에 참여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여성들이 주로 담당했던 채집 활동은 사냥보다 훨씬 덜 위험했으며 가족의 총 음식 수요량의 60~80퍼센트를 충당했다. 하지만 출산은 아내에게 손실을 끼쳤다. 현대적 의학 기술이 없었으므로 많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위험한 경로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을 내다보고 대체할 배우자를 찾을 발판을 미리 마련하게 해 주는 심리 기제가 없었다면 아내가 죽어 홀로 된 남성은 다시 처음부터 배우자를 찾고 구애하는 과정을 되밟아야 했을 것이다. 배우자가 예기치 않게 죽을 때까지 마냥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미리 잠재적인 대체 방안을 생각해 두는 편이 남녀 모두에게 이로웠을 것이다. - P335

요약하면 장기적인 배우자를 버리게 만드는 세 가지 주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현재의 배우자가 자원이나 능력이 감소하거나번식에 관련된 자원을 제때 제공해 주지 않기 시작하여 그의 배우자가치가 떨어졌을 때, 둘째, 나 자신의 자원이나 평판이 증가해서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짝짓기 가능성이 열렸을 때, 셋째, 강력한 대안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등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들 세 가지 상황을 반복적으로 접했을 것이므로, 인간은 기존 부부 관계의 이득과 손실을 다른가능한 대안과 비교하여 따져 보는 심리 기제를 진화시켰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 기제는 현재 배우자의 가치 변화를 민감하게 살피고, 다른 짝짓기 대안을 판별하여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대체배우자에게 구애 행위를 하게끔 우리 조상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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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우는 뭐, 모순이 아니지.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것은여자의 본능이잖나."
"마시바 아야네가 낳으라고 권했답니다."
가오루의 말에 물리학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후,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말로 모순이로군. 알 수 없어."
"그런 것이 여자죠."
"흠, 그런 것 같군. 아무튼 이번 사건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다니.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그렇지 않은......."
구사나기에게 말을 건네던 유가와가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가오루도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구사나기는 고개를 푹꺾은 채 잠들어 있었다.
"완전 범죄가 해결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났군. 피곤하기도 할 거야. 조금 쉬게 해 주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유가와는 잔을 기울였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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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플라스틱 화분에 심은 팬지가 조그만 꽃을 송이송이피웠다. 흙이 부슬부슬 말라 보인다. 그런데도 꽃잎의 선명한모양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진정한 강함이라 해야 하리라. 유리문 너머 베란다를바라보면서 아야네는, 나중에 다른 화분에도 물을 좀 줘야겠네. 하고 생각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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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3개월의 육아 휴가 동안 내 일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3층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한 번에 담당하는 구역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말끔한전시실 대신 고물상 같은 방들이 내 일터가 되었다. 하지만 7만평이 넘는 메트에서보다 20평짜리 이곳에서 할 일이 훨씬 많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삶에서는 내게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세상을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부모 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일을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라. 산더미 같은 빨래, 계속되는 병원 출입, 끝없이 반복해서 기저귀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해야 하는 일상. 나는 농부들이느꼈을 법한 기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이 너무 고단해서 그 결실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느낌 말이다. - P261

경탄할 만한 또 다른 대상을 찾아 천천히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세심하게신경을 쓰고 실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냈을때 결국 그것이 넘칠 정도로 좋은 것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무엇이 됐든 그것을 정말로 잘하는 것이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지, 수월해 보이는 외양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우리는잘 안다. 내가 자랑스러웠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꽤 자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 듯하다. - P272

 매일 아침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은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했다. 이것을 이탈리아어로 ‘하루의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giornata 라고 하는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사실 이렇게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성취들이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아담은 조르나타 네 개, 팔을 뻗고 있는 신도 조르나타 네 개 조각들을 세어보면 미켈란젤로가 붓과 물감통과 모래, 회반죽 자루를 가지고 흙손(이긴 흙이나 시멘트 등을 떠서 바르는 연장-옮긴이)으로 그 높은 곳에서 570일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트에서 열린 전시는 좀 더 아담한 규모지만 내게는 거장의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물은 미켈란젤로의 70년 커리어 전반에 걸친 133점의 소묘 작품들로, 대부분이 아무에게도 보여줄 의도가 없었던 습작들이다. 전시는 <미켈란젤로: 신이 내린 소묘 화가이자 디자이너>라는 제목을 내걸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주인공이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는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예술사 최고의 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을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더없이 전념했기 때문이다. - P280

메트의 현대 미술 전시관에 걸린 그 작품은 야생적이고 대담하고 도전적이다. 그것이 외풍이 술술 들어오는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잠든 그녀의 아이를 덮은 이불이었을 때 어땠을지는 상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다. 1930년대는 지스 벤드가 곤궁했던시기였다. 대공황이 터지고 목화 가격이 폭락하면서 백인 부재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빚 수금업자들이 조직적으로 급습을 해서 농기구와 가축, 가재도구들을 압수해버리자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 식량과 땔감을 구해야만했다. 그렇게 곤궁한 시기에 케네디는 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도 이 용어를 썼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정의 그 자체로 보인다. 과분하게 아름다운 것. - P299

혼자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세계적으로 장대한 곳에서 얻는 깨달음치고는 좀 우습긴 하지만,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벤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 P302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 H. 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 Arts (미술관)」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 하단이 있다. 그곳에서 그림의 톤은 다시 한번 변화한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P319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신비롭다. 예술은 평범한 것과 신비로움 양쪽 모두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일깨워준다. 예술이 있는 곳에서 보낼 수 있었던 모든 시간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10년 전, 배치된 구역에 처음 섰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것들이 있었다.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군말 없이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것이기도 하다.
5시 30분이 되자 나는 클립으로 부착하는 해진 넥타이를 떼고서 중앙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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