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은 독약을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 명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이 죽음에 따른 민심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못 본체했다. 이 동시다발적 죽음들은 무력하기는 했으나 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서울의 통감부 집무실에서 이토는 날마다 주둔군 사령부에서 보내오는 폭민 대처 상황 보고서를 읽었다. 정보참모는 여러지역의 소요사태를 열거하고 문서의 말미에 상황개요라는 항목으로
일파가 흔들리니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라고 써놓았다. ••••• 참으로 한가한 녀석이구나. 이토는 주둔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귀 사령부의 정보참모는 문장력이 좋더구나. 풍류남아냐? 라고 말했다. 그뒤로 정보참모는 보고서에 상황개요를 쓰지 않았다. - P18
수백 년 동안의 수탈과 억압으로 검불처럼 무기력해 보이던조선 백성들이 무너진 왕조의 부흥을 외치며 그토록 가열하게봉기하는 사태가 이토는 두려웠다. 농장기를 들고, 꽹과리를 치고.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펄럭였지만 조선의 폭민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일어섰고 한 고을이 무너지면 이웃 마을이 또 일어섰다. 기생과 거지까지 대열에 합세했다. 무력집단이라기보다는 시위군중에 가까웠지만, 영명한 장한壯漢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무장과 대오를 갖추고 주둔군을 위협했다. 허튼 풍류기가 추접하기는 했지만, 주둔군 정보참모의 상황개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는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이 폭민들을 의병이라고 일컫고 기세를 부추겼다. 통감부가 신문사를 겁박했으나 배설은 굽히지 않았다. 조선이 문명개화되면 이 거친 백성들의 들뜸은 스스로 잦아들어 제국에 동화될 테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소요가 풍토병으로 눌어붙으면 조선 병합 정책은 순조롭지 못할 것이었다. 무리가 되더라도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그의 결정은 단호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 P19
큰 구도가 필요하다. 폐허를 크게, 조선 황제를 작게 나타내라고 이토는 만월대 돌계단 앞에서 일본인 사진사에게 명령했다. 이토는 손짓으로 송악산 능선과 계단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무너진 돌계단과 그 너머의 송악산 능선을 구도의 횡축에 들어앉히고 조선 황제의 대열이 그 폐허에 종축으로 길게 늘어선 사진을 이토는 요구했다. 미리 현장을 답사한 사진사는 이토의 요구를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사진사는 멀리 떨어져서 카메라를 설치했다. 시야의 범위를넓게 잡고, 렌즈의 각도를 위쪽으로 오 도쯤 올려 잡았다. 뷰파인더 안에서 돌계단의 폐허가 화면 중앙에 가득차고 그 너머로송악산 능선이 구름처럼 떠 보였다. 조선 황제의 얼굴이 또렷이보이지는 않았지만 일산이 받쳐져 있어서 거기가 황제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토는 그 옆에 희미하게 보였고 군도를 찬 일본군 장교가 그 앞에서 대열을 인도하고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오느라고 황제의 대열은 흐트러졌다. 대열이 폐허를 배경으로 종축을 이루었을 때 사진사는 셔터를 눌렀다. - P51
안태건이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신 뒤 카, 소리를 뱉었다. -이번에 큰 놈을 잡았구나. 살이 실하다. -큰삼촌댁에 뒷다리 한 짝을 보냈습니다. -몇 발로 잡았느냐? - 한 발 쐈습니다. 안태건이 안중근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잔을 채웠다.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안태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술자리에 모인 사내들에게그 말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내들은 한동안 침묵했고,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게 시국의 위태로움을 말했다. 안씨 가문의 사내들은 마을의 우물을 청소하는 일이나 홍수에 터진 개울 둑방을 다시 쌓는 일을 논의하는 것처럼 시국의 일을 말했다. 일본이 청을 무찌르고 러시아를 무찔러서 조선의 독립은 탄탄해졌다고 한다하는 식자들이 신문과 강연으로필설을 펼쳤다. 말은 자욱했는데, 아무도 말을 믿지 않았다. 가끔씩 서울이나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이 날짜 지난 대한매일신보를 가져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조선 전역의 소요사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신문은 소요군중을 ‘의병‘이라는 두 글자로 일컬었는데, 글자 두 개가 더 큰 무리를 불러모았다. 신문의 문장은 곧고 단단해서 읽는 사람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 신문의 영문판에 ‘지난 목요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접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열두 명이 반란군insurgents에 의해 살해되었고, 죽은 자들의 시신은 서울로 운구되었다고 보고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청계동 사내들은 신문을 돌려 보며 영문을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들었다. ‘반란군‘이라는 말의 뜻을 놓고 사내들은 여러 말을뒤섞었다. - P54
- 내일 아침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안정근은 형이 가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날 서울 도심에서 눈으로 본 일들이 형이 가려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안정근은 형이 여기에 남아서 함께 견디면서 함께 살기를 바랐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기는 마찬가지일듯싶었다. 안정근이 말했다. -형님은 장자 아니오. 장자라는 말이 안중근의 가슴을 때렸다. -대륙으로 건너가도 나는 여전히 장자다. -어머니는 내가 모실 테지만 형수님과 아이들은 어찌하시려오. -어쩔 수 없는 일을 자꾸 얘기하지 마라. 내가 자리잡히면 데려가겠다. -형님, 가지 마시오. 여기서 삽시다. -여기는 이미 이토의 땅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찾아가겠다. 이것은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이것이 장자의 길이다. 안정근은 형이 의논하러 온 것이 아니고 통고하러 온 것임을 알았다. 안정근은 길게 말하지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먼 길에 조심하시오. 어머님께 형님이 우라지로 가셨다고 전하리다. 안정근은 돌아갔다. 안중근은 어둠 속에서 누웠다. 총소리와 호각소리, 고함소리, 빠르게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 P74
-우리는 강토를 모두 잃고 어디로 가려는가. 이번에 한 번싸워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승패와 유불리를 돌아보지 말고 싸워야 한다. 승산이 없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승산을 헤아리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부대는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기획된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산속을 이동하다 마주친 일본군 분견대와 그들의 척후병 두어 명을 상대로 작은 전투를 벌였다. 쌍방에서 서너 명씩 죽고 다쳤다. 죽은 자들은 피아의 구별이 없이 쓰러져 있었다. 의병들은 죽은 일본군의 신발을 벗겨서 신고 군복을 벗겨서 입었다. - P91
안중근은 말했다. - 너희들은 돌아가라. 돌아가서 포로가 되었던 일을 입 밖에내지 마라. 포로들 중 선임병이 말했다. -총기 없이 돌아가면 군법으로 처형됩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안중근은 포로들의 소총을 돌려주었다. -가져가라. 가서, 발설하지 마라. 포로들은 돌아갔다. 장교들이 안중근에게 항의했다. 장교들은 일본군이 생포한 의병들을 학살한 사례를 들며 분노했다. -우리는 적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니오! -포로를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너희들은 여러 말을 하지마라. 장교 한 명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부대를 떠났다. 석방된 일본군 포로는 부대로 돌아가서 안중근 부대의 위치와병력 규모를 보고했다. 일본군 부대는 즉각 출동했다. 석방된 자들이 선두에서 길을 인도했다. 회령에서 일본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조여들어왔다. 안중근 부대는 대항하지 못했다. 장교들은 포로를 풀어주어서 부대의 위치가 노출된 것이라고 안중근에게 들이댔다. 안중근 부대는 지휘 통제가 허물어져서 예닐곱 명씩무리를 지어서 흩어졌다.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두어 명씩 만났고 또 헤어졌다. 투항해서 포로가 되자는 대원과 집단자살하자는 대원이 싸웠다. 장맛비가 며칠째 쏟아졌고 안개가 끼어서 봉우리도 골짜기도 보이지 않았다. 풀뿌리를 캐 먹고 열매를 따먹었다. 옷을 찢어서 다친 발을 싸매고 걸었다. 닭 소리나 개소리가 들리면 민가로 내려가 밥을 얻어먹었다. - P92
연추에서 안중근은 한인들의 집에 기식하거나 여관에 묵었다. 안중근이 물색없이 포로를 살려주어서 기습 공격을 자초하게 된것이라고 연추로 돌아온 대원들이 말을 퍼뜨렸다. 연추에서 안중근은 운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세력을 일으키기는 점점 어려웠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연추에서 안중근은 늘 엎드려 있었고, 가끔씩 마을에 나가서 멀리서 온 소식들을 귀동냥했다. 소식들은 엇갈렸고 출처가 없는 소문은 더빨리 퍼졌다. 그해 겨울은 뒤숭숭했다. - P94
안중근이 하숙방으로 찾아와서 술을 사주면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이 왜 왔는지를 대번에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보지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는 이불가해한 운명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우덕순은 생각했다. 그 예감은 이토를 쏘아야 한다는 뚜렷하고 밝은 목표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토를 쏘면 이토는 그 사격의 결과로 죽게 될것이었고, 총알이 급소를 치지 못해서 이토가 죽지는 않더라도 총을 쏜 이유를 말할 자리는 마련될 것이었는데, 우덕순은 총알이 급소에 정확히 박히기를 원했다. 그날, 우덕순과 술집에서 마주앉았을 때 안중근은 우덕순을찾아온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음을 저절로 알았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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