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G는 스웨덴의 법률체계에 몰두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거나 자막 없이 잉마르 베리만 영화를 볼 때면, 현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논쟁의 면면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여성을 위한 또 다른 세상, 즉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투쟁을 통해 불공평한 조건을 없앨 수 있으며 필요하면 임신상태를 중단할 수 있는 세상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떤 미국인이알았겠는가? 사회운동가들의 압력으로 정부가 남성과 여성을 기존의 성역할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이라니! RBG개인에게도 가히 혁명적인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스웨덴에 도착해서 혼자 지내기 시작한 지 6주 만에 이곳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61

대법관들은 여전히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RBG는 말을 이었다. "성별은인종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지만 바꿀 수는 없는, 개인의 능력과 필연적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특징입니다." 이 직유는 헌법적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이 촉발시킨 일련의 소송에서 대법원은인종에 근거해 차별을 규정한 거의 모든 법률에 대해 그것이 헌법에 위배되거나 "엄격심사"를 면할 수 없다는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리드사건에서 엄격심사를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후로는 어떤 식으로는 엄격심사가 필요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성별을 사유로 차별을 규정한 법률이 인종을 사유로 차별을 규정한 법률과 다를 바가 있을까? RBG는같은 맥락에서 성차별을 규정하는 법률 또한 위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주어진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RBG는 대법관들을 바라보면서 임신중절 옹호와 여성참정권을 부르짖었던 세라 그림케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아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오해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성별을 근거로 나를 우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결코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당신들의 발로 우리 여성들의 목을 더 이상 짓누르지 말라. 이것이 전부다."
#12 - P66

RBG보다 열 살도 더 어린 여성 법학도들은 불평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상당수가 미시시피 출신이자 학생비폭력실천위원회 Student Nonviolent Cordinating Counciltee 소속으로 여성의시민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변호사가 사회운동에앞장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로스쿨에 진학했고, 여성들 자신도 사회 변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1968년 이후로는 대학들도 여성에게 문호를 더 활짝 열어야 했다. 존슨 행정부가 연방정부의 예산 지원 철회 대상 목록에 성차별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RBG는 이렇게 활동적인 여학생들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주위를 시끄럽게 만들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자기 세대와 그들은 자못달랐다. 1970년에는 몇몇 학생이 RBG를 찾아와 럿거스대 최초로 ‘여성과법‘ 과목을 개설해달라고 요청했다. RBG는 흔쾌히 수락했다.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 내린 연방정부의 결정 및 관련 논문을 모조리 읽는 데는 고작한 달 정도가 소요됐다. 사실 분량이 많지 않았다. 널리 쓰이는 한 교재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눈에 띄었다. "토지란, 여성과 마찬가지로 소유의 대상이다."(이 책은 토지 소유에 관한 책이었고, 여성은 비유 대상에 불과했다.) RBG는 도서관을 나서면서 굳게 다짐했다. 말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던세월은 이제 막을 내렸다고 한때 럿거스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봉급을 깎아도 어쩌지 못했던 RBG는 그길로 다른 여성 교수들과 힘을 모아 대학을상대로 성차별적 급여체계에 관한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끌고간 끝에 마침내 승소했다. - P71

이 시기에 RBG는 평생 간직할 교훈을 배웠다. 그는 대법관들을 일깨우려했다. 어렵기는 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훗날 그가 밝혔듯이, "사람은하루아침에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대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진정한 변화란 한 번에 한 계단씩 일궈나감으로써 이룰 수 있다." 그는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전략을 세워야 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굴라는 말이 적절하게 다가온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동료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RBG는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이들을 설득했다. ACLU동료 변호사 캐슬린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법의 진보를 이루려면 한 번에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에 ‘논리적 후속 단계‘를선사해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는 한 단계 올라서면그다음 단계를 이어서 또 다음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빨리, 너무멀리 가라고 재촉하지 마라. 그러면 이미 얻은 것도잃게 된다‘면서 수시로 당부했습니다. ‘그 문제는 아직 다뤄질 때가 아니다. 우리는 대개 RBG의 충고를따랐습니다. 그러지 않았을 땐 예외 없이 패배했습니다. "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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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이름들은 자은에게도 익숙했다. 항로에 놓인 기착지들이었다. 물이 떨어지거나 태풍을 만나거나 배를 갑자기 고쳐야 할 때 들렀다.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죽은 자를 묻기도하는 바다 위의 물수제비 흔적 같은 점들. 육지가 그리워 그 섬들이라도 보면 속이 트일 것 같았다. - P23

셋째는 죽은 다섯째의 시신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을 배울 때 스승님은 너는 그만 배워도 된다고방에서 내보냈지. 그런데 너는 떠나지 않고 창밖에서 귀로 배웠다. 나중에 스승님이 너를 혼내려 불러 모질게 시험해보았을 때 네가 써낸 것이 내가 써낸 것보다 나았다. 나는 그 일을잊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셋째의 특징은 도발이었다. 여섯째는 태어나서 셋째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죽음의 색이 짙어져가는 다섯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 귀로 공부를 쫓아갈 때 몰래 책을 베껴줬던 것은 다섯째였다. 너와 나는 거의 같지, 하고 속삭이면서.. 다섯째에게 빚이 있었다. 다섯째로 살면 다섯째를 살린 것 같을까? - P29

꿈속에서 부르던 노래가 깨어나는 순간에도 입술에 남아 이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 노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잠이 물러난 걸지도 모르지만, 그날 새벽 자은이 깨어날 때가 그랬다.
단번에 눈을 떴고, 입술은 가사를 기억하며 달싹이고 있었다.
"달 같은 진주를 네 머리에 꽂았다 내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먼저 일어난 인곤이 바로 뒷부분을 받아 불렀다.
"삼백 궁녀의 머리에 보름달이 떴다 졌다 하였네."
"자네는 노래 전체를 아는가? 나는 한두 구절밖에 알지 못하네."
백제인에게 그 쓸쓸한 노래에 대해 묻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자은은 인곤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지 보고 싶었지만 새벽빛이 어두웠다. - P41

병사 하나하나로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독군 어른 아래에서우리는 뛰어났습니다. 가장 복잡한 작전, 장수부터 어린 병사까지 모두 이해해야 해낼 수 있는 작전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독군 어른이 만약 장군이 되어 우리를 두고 가셨더라면, 우리도 그 뛰어남을 곧바로 잃고 말았을 겁니다. 우리는 일흔명 남짓이었지만 신라군에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있어 군 전체가 강의 신이 돕고 바람의 신이 돕는 것처럼 싸울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가능했습니까?"
자은의 물음에 중봉은 답을 찾으려 기억에 잠겼다.
"지킬 것을 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킬 것요?"
"집이 없는 자에게는 집을. 밭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이름이 없는 자에게는 이름을 주셨고, 가족이 노비가 되어버린 자는 그 주인에게서 되찾아주셨고••••• 그 나눔이 아무 불만도일으키지 않도록 세세한 균형을 살피며 주고 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식읍 출신으로 정발된 자들이 모여 있으니 싸우긴 싸우면서도 왜 싸우는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나 점점 변해갔습니다. 독군님은 매번 우리 싸움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싸우는지, 전체에 비추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이기고 진다면 결과는 어떠할지 일러주시곤 했어요. 글자하나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들로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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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은 오래 머물렀던 장안을 사신단과 함께 떠나. 육로로 등주까지 왔다. 유학생으로 처음 당나라 땅을 밟았던 곳에서 다시 떠나게 되다니 한 생이 끝난 듯한 감회가 일었다. 뜻밖의 전쟁으로 사신단이 오가지 않은 기간이 길었고, 덕분에 수학 기간이 배가 되어 지원 없이 고립되고 말았다. 지니고 왔던 것을 다 팔아야 했으며 스승과 친우들이 따로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면 굶어죽은 몸이 가는 뼈로 흩어진 지도 한참이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사이가 드디어 회복되어 신라 왕경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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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낭독을 이어가며 RBG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지고 희미해졌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낭랑하게 빛났다. 굳은 얼굴로 옆에 앉아 있던 얼리토는 주먹을 말아 쥐어 뺨에 괴고 있었다. RBG는 투표권법의 고귀한 목적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취지는 점점 더 교묘해져가는 유권자 탄압에 맞서 싸우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보수 대법관들이 규제를 좋아하고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건만, 이번에는 선을 넘고야 말았다고 덧붙였다. RBG는 소수의견에서 "오늘날 투표권법 파괴에 앞장서는 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오만"이라고 썼다. 투표권법이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는 행위는 "이 정도 비에는 옷이 젖을 것 같지 않다고 우산을 내동댕이치는 격이라면서 "
RBG는 이 자리에서 "한때 꿈으로만 여겼던 미국 내 모든 구성원의 평등・시민적 지위, 인종을 빌미로 희석되지 않는 민주주의 체제, 그 안에서 모든 유권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발언권이 위기에 처했다고 일갈했다. 이표현은 마틴 루서 킹의 저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참고한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평등한 시민적 지위는 RBG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대목이었다.
RBG는 40년 전 대법관들 앞에 서서 여성도 헌법상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따라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시민적 지위를 누려 마땅하다는 사실, 나아가 시민으로서 권리는 물론 의무까지도 당당하게 진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 사람이다. 그는 킹 목사가 주도한 사회운동의 흐름 속에서 세상에 눈을 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던 처지에서 제힘으로 벗어났으며,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사건을 대법원으로 가져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누구도 특히 아이 딸린 젊은 여성이라며 손사래를 쳤던 로펌과 판사들, 임신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내쫓거나 여성이라고 급여를 깎은 상사들은 긴즈버그가 대법관이라는 그 높은 자리에 올라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P17

딸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 루스는 숙녀다운 태도를 한시도 잃지 않았다. RBG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숙녀다운 행실이란 늘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분노나 질투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과 자존감을 확고하게 지킬 줄 알아야 했습니다. 분노에 차서 펄펄 뛰는 건 절대 금물이었고, 노여움과 분노에 휩싸이거나 충동적으로 맞대응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기력 낭비라고 배웠죠. 하지만 그 시절 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딸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준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독립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그 말은 철학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경고였다. 셀리아는 어렵사리 모은8000달러 정도의 학자금을 딸의 앞으로 남겼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키 역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셀리아는 외상으로 물건을 구입하면 큰일 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대공황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모은 돈을 2000달러 안으로 쪼개어 다섯 군데 은행에 분할 예치했다. RBG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바랐던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 말이다. 나는 그분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 - P44

 그래서 그는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연방정부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일반직 분류표를기준으로 업무와 급여가 결정되었는데, 당시 RBG는 5급에 해당되어 민원심사관 자격을 획득했다. RBG는 순진하게도 자신이 취직한 사회보장사무소에 임신 3개월째임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볼티모어에 가서 연수를 받기 어렵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급수도 최하 등급인 2급으로 떨어졌다. 급여도, 업무 중요도도 낮아진다는 뜻이었다. 같은 사무소에서 일하던 또 다른군인 아내도 5급을 받았지만, 임신 사실을 숨긴 덕분에 볼티모어로 갈 수 있었다. 루스는 이런 이야기를 귀띔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는 출산 전에 퇴직하라는 압력까지 받아야 했다.
RBG는 사회보장사무소에서 특정 계층 사람들이 좀스러운 관료주의의 부조리 탓에 고통받는 모습을 몇 주에 걸쳐 목격했다. 온갖 풍파에 찌든, 비슷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무소를 찾아와 사회보장 혜택을 받기 위해 대상자로 등록하려 했지만 서류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곤했다. 출생증명서가 없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기를 낳았을 때, 그들을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RBG는 잘못된 관행을 조금씩 바로잡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65세정도로 보이는 방문자에게 사냥. 낚시 면허를 말없이 발급해주기도 했다.
오클라호마에서 그렇게 2년을 보낸 뒤, RBG는 하버드대 재입학 허가를받아냈다. 사실 군사기지에서 젊은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안락했다. 장교들을 위한 보육시설은 생후 두 달부터 원생을 받았고, 자정까지 운영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건이 좋다고 해도 어떻게 젖먹이를 둔 엄마가 로스쿨을 소화할 수 있겠는가?
시어머니는 수시로 루스를 안심시켰다. 시아버지도 걱정하지 말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루스, 네가 로스쿨에 못 간다고 해도 너를 나무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정말 로스쿨에 가고 싶다면 더 이상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지 말거라. 분명 방도가 있을 거다." 루스는 진심으로 로스쿨에 가고 싶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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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근현대국어 만들기의
역사를 되짚어보다

근대 어문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국어학 연구

"우리말 연구를 왜 하는 걸까요?"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서지요."
근대 국어학 연구의 일관된 목표는 ‘국어 만들기‘, 곧 ‘국어의 정립‘이었다. 그러한 목표가 분명하던 시절, 우리말 연구를 왜 하느냐는질문에 대한 모범적인 답은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근대 어문개혁 운동과 더불어 국어학연구가 시작되었고 근대 어문 규범을 세우는 과정에서 국어학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어문개혁은 ‘언문‘을 ‘국문으로 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개혁의 요지는 속된 글로 취급받던 언문의 위상을 높여 한문을대신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 (칙령 제1호 공문식·1894)는 원칙은 일견 단순했지만,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단순치 않았다. 국문 쓰는 법, 즉 한글 맞춤법을 정해야 했고, 공문서에 쓸 수 있는 공통의 말, 즉 표준어를 정해야 했고, 소통 가능한 문장을 쓰는 법, 즉 문법을 체계화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어문규범화의 결과물을 모두가 공유하기 위한 사전을 편찬해야 했다.
근대 어문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국어 만들기는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하고 문법을 체계화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근대 어문개혁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지배적 문자였던 한자의 역할을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하는지가 국어 연구와 국어 정책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국문과 국한문을 동시에 인정하는 1894년의 칙령은 20세기 내내 이어진 논쟁의 시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어학 연구와 국어 정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 P4

식민지의 시간은 권력 언어 일본어의 힘이 무한정 확대되는 시간이었다. 조선어 과목의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가 일본어로 쓰였고, 교실에서의 강의 언어는 일본어였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럴듯한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월등한 일본어 실력을 갖춰야 했다. 식민지 현실에서 권력 언어의 위력은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을 뛰어넘었다. 행정력을 동원한 강요 이전에 이미 일본어는실질적 공용어로 자리잡았다. 식민 지배 초기 2개 언어 병용 정책은결국 ‘국어 상용화‘를 위한 준비 단계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조선어 학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어 학계의 대응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2개 언어 병용 정책의 상황을활용하여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 사업을 진행했다. 둘째, 철자법및 표준어 제정, 조선어사전 편찬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했다. - P19

이런 점에서 1938년 이후 진행된 조선어학회의 어문 정리 사업은조선어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강압적인 상황에서도 조선어학회가 조선어 문화의 독자적인 발전이라는 목적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한글 강습 활동을 통해 문맹 타파사업을 전개하고, 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통해 조선어를 공용어의 위상에 걸맞게 만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식민지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의 언어정책과 길항작용을 하면서, 조선어 문화를 유지해야 함을 그리고 조선어 연구를 심화해야 함을 끊임없이 환기했다. - P22

●●● 선생님께서 당시 교련 선생에게 두들겨 맞을 걱정을 하신 걸 보면, 그리고 학생 체벌이 일제 교육의 잔재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일제강점기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 심했을 것 같아요.
◇◇◇일제하의 여러 가지 제도를 가만히 회고해보면, 물론 일본인들이 나쁜 점도 많이 있지만 개중에는 좋은 점도 있어요. 첫째 교원들은거의 다 성실했어요. 성실하고 정말 진심으로 인생 교육을 했어요. 소학교 다닐 적에 담임선생이 일본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저녁형이라 어려서부터 밤에 공부하고 늦게 일어나니까 학교에 매일 지각을했어요. 지각하면 교실에 들어가서 뒤에 서 있어야 했어요. 벌서느라고. 담임선생이 왜 늦었느냐고 물어요. 오다가 뒤가 마려워서 뒤를 보고 나니까 늦었다고 했더니, 이 일본 선생이 "네가 공부는 잘해서 좋은데 그런 변명하면 아무 소용없다. 공부 잘해도 소용없어. 왜 변명해?"라고 했어요. 내가 지금 팔십 넘어서도 변명은 안 해요. 그 가르침 때문에 그런 걸 보면 교육이 중요하잖아요. 일본인 선생이지만 이런 점은 훌륭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다닌 학교에서 학생을 매 때리는 방식으로 체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대신 벌을 세웠어요. 종아리 치는 일도 없었어요. 교육 부분에서 일본 식민이 되라고 하는 황국신민화 교육은일본 정부가 교사들에게 시켜서 하는 거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 부분 말고 인성 교육 같은 부분에서는 교육적이라고 볼 만한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분위기나 교사 성향에 따라 체벌의 정도는 다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조선일보> 기사를 검색해보니까 1936년 7월 15일과 1937년 12월 19일 자에 교사의 체벌로 사망한 학생의 사건과 함께 당시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가 심각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더라고요. 물론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 교사들의 교육철학에서 배울 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황국신민화 교육과 인성 교육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식민지 교육이라고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 P32

●●●그래도 제가 해방될 때까지 계속 일본말로 우리나라 여성들을교육했다는 것이 친일 행위의 일종인 것은 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 선생님께서 일본말로 학생을 가르친 것까지도 친일 행위의 일종이었다고 고백하신 말씀을 들으니,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어로 수업하는 게 원칙인 상황에서, 일본어 수업을 교사 개인의 선택적 행위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수업 시간에 한글을 칠판에 쓰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행위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당시 학생들의 한글 해독 능력이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소학교를 다니셨을 때, 그중 소학교 3학년때인 1938년부터는 조선어 과목이 사실상 폐지되다시피 했었고,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셨을 때는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었으니, 당시 학생들은 한글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한글로 판서하는 게 좀 미숙하셨을 것 같고 학생들도한글을 읽는게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 그 말씀은 옳습니다. 제가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얼마 있다가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었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안 가르쳤으니까 모르지요. 그런데 저는 원래 집에서 한문과 한글을 동시에 배웠습니다. - P36

제가 일본의지배를 받았던 민족이 일본어를 이해하는 비율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식민지로는 타이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비교가 되지요.
일제 말기 타이완의 경우를 보니까 일본어 해득률이 85퍼센트예요. 이건 대단한 겁니다. 나머지 15퍼센트는 저 어디 오지에 사는 노동자나 농민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다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한다는 거예요. 당시 타이완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일을 실제로 겪었습니다.
1964년에 하버드대학에 초청 받아서 갔었는데, 그때 마침 초청 받아 온 타이완 학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부부 사이에 편지를 일본말로 써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집에서 일본말을 한답니다. 나이는 나하고 비슷했지요.
타이완의 일본어 해득률이 85퍼센트였다는 것과 내가 미국에서 겪은 일을 관련지어 생각하면 일제 말기 우리의 언어생활이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해방이 한 20년만 늦어졌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제가 <국어 정책론》에서 조금 언급한 것 같은데요, 일본어 해득률이 90퍼센트에 육박했을 겁니다. 그럼 국어 회복은어렵지요.
여기서 하나 고백하고 싶은 게 아까 말한 대로 열 살에 소학교 들어가서 일본말로 교육 받고, 다들 짐작하다시피 작문은 늘 일본말로 썼습니다. 지금도 어떤 때는 일본말로 생각해요. 일본말로 사고를 해요.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서 우리말 어휘를 찾아야 해요. 어떤때는 우리말 어휘를 찾을 수 없어서 일한사전 들출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적절한 어휘를 찾을 때가 있어요. 자, 이 이야길 들으면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그럴 겁니다. 이렇게 이 문제가 중대한 문제예요. - P39

◇◇◇ 일제의 침략이라는 게 애초부터 그렇게 대단한 흉계였어요. 그런데 일제의 침략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거같아요. 우선 1894년 갑오개혁이 일본의 수중에서 이루어졌어요. 일본 군대가 왕궁을 지키는 그러한 상황에서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선포가 됐거든. 우리 역사에서는 그때부터 근대화를 시작한 거니까 그건인정하자고 하지요. 그런데 일본 측에서 보면 갑오경장을 통해 근대화를 한다고 표방했지만 실제 내용은 내정 침투를 위장한 거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정확히 알아둬야 해요. 또 그 후에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했는데 그것은 독립국을 가장한 일본의 괴뢰정부 수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왕이라고 하던 걸 황제라고 했고요.
그럼 일본의 의도는 뭐냐. 왕을 황제라고 하니까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쌍수를 들어서 다 환영한 겁니다. 우리가 당시 청나라에 예속되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대한제국을 수립한 것은 청나라와 단절한다는 거예요. 단절했으면 어디로 가느냐? 일본 쪽으로 붙인 거예요. 자기네 괴뢰로, 근데 우리 역사책이나 역사가들 서술한 거 보면 안 그래. 다 찬양해요. 대한제국 위대하다고. 나는 그런 거 보면 당최 하도 실망스러워서 말이 안 나와요.
그다음에 마침내 ‘일한합병‘, 일본사람들은 ‘일한합병‘이라는 명칭을 썼어요. 우리는 ‘한일합방‘이라는데, ‘한일합방‘이 왜 잘못된 말이냐면, ‘한일합방‘은 우리나라가 일본을 합방해야 쓸 수 있는 말이에요. 그렇잖아? 그러니까 ‘일한합방‘이 맞아요, 일본이 했으니까. 우리사학에서 내가 보기에는 아주 참 제대로 안 해요.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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