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근현대국어 만들기의
역사를 되짚어보다

근대 어문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국어학 연구

"우리말 연구를 왜 하는 걸까요?"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서지요."
근대 국어학 연구의 일관된 목표는 ‘국어 만들기‘, 곧 ‘국어의 정립‘이었다. 그러한 목표가 분명하던 시절, 우리말 연구를 왜 하느냐는질문에 대한 모범적인 답은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근대 어문개혁 운동과 더불어 국어학연구가 시작되었고 근대 어문 규범을 세우는 과정에서 국어학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어문개혁은 ‘언문‘을 ‘국문으로 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개혁의 요지는 속된 글로 취급받던 언문의 위상을 높여 한문을대신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 (칙령 제1호 공문식·1894)는 원칙은 일견 단순했지만,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단순치 않았다. 국문 쓰는 법, 즉 한글 맞춤법을 정해야 했고, 공문서에 쓸 수 있는 공통의 말, 즉 표준어를 정해야 했고, 소통 가능한 문장을 쓰는 법, 즉 문법을 체계화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어문규범화의 결과물을 모두가 공유하기 위한 사전을 편찬해야 했다.
근대 어문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국어 만들기는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하고 문법을 체계화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근대 어문개혁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지배적 문자였던 한자의 역할을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하는지가 국어 연구와 국어 정책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국문과 국한문을 동시에 인정하는 1894년의 칙령은 20세기 내내 이어진 논쟁의 시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어학 연구와 국어 정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 P4

식민지의 시간은 권력 언어 일본어의 힘이 무한정 확대되는 시간이었다. 조선어 과목의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가 일본어로 쓰였고, 교실에서의 강의 언어는 일본어였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럴듯한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월등한 일본어 실력을 갖춰야 했다. 식민지 현실에서 권력 언어의 위력은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을 뛰어넘었다. 행정력을 동원한 강요 이전에 이미 일본어는실질적 공용어로 자리잡았다. 식민 지배 초기 2개 언어 병용 정책은결국 ‘국어 상용화‘를 위한 준비 단계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조선어 학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어 학계의 대응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2개 언어 병용 정책의 상황을활용하여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 사업을 진행했다. 둘째, 철자법및 표준어 제정, 조선어사전 편찬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했다. - P19

이런 점에서 1938년 이후 진행된 조선어학회의 어문 정리 사업은조선어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강압적인 상황에서도 조선어학회가 조선어 문화의 독자적인 발전이라는 목적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한글 강습 활동을 통해 문맹 타파사업을 전개하고, 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통해 조선어를 공용어의 위상에 걸맞게 만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식민지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의 언어정책과 길항작용을 하면서, 조선어 문화를 유지해야 함을 그리고 조선어 연구를 심화해야 함을 끊임없이 환기했다. - P22

●●● 선생님께서 당시 교련 선생에게 두들겨 맞을 걱정을 하신 걸 보면, 그리고 학생 체벌이 일제 교육의 잔재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일제강점기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 심했을 것 같아요.
◇◇◇일제하의 여러 가지 제도를 가만히 회고해보면, 물론 일본인들이 나쁜 점도 많이 있지만 개중에는 좋은 점도 있어요. 첫째 교원들은거의 다 성실했어요. 성실하고 정말 진심으로 인생 교육을 했어요. 소학교 다닐 적에 담임선생이 일본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저녁형이라 어려서부터 밤에 공부하고 늦게 일어나니까 학교에 매일 지각을했어요. 지각하면 교실에 들어가서 뒤에 서 있어야 했어요. 벌서느라고. 담임선생이 왜 늦었느냐고 물어요. 오다가 뒤가 마려워서 뒤를 보고 나니까 늦었다고 했더니, 이 일본 선생이 "네가 공부는 잘해서 좋은데 그런 변명하면 아무 소용없다. 공부 잘해도 소용없어. 왜 변명해?"라고 했어요. 내가 지금 팔십 넘어서도 변명은 안 해요. 그 가르침 때문에 그런 걸 보면 교육이 중요하잖아요. 일본인 선생이지만 이런 점은 훌륭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다닌 학교에서 학생을 매 때리는 방식으로 체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대신 벌을 세웠어요. 종아리 치는 일도 없었어요. 교육 부분에서 일본 식민이 되라고 하는 황국신민화 교육은일본 정부가 교사들에게 시켜서 하는 거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 부분 말고 인성 교육 같은 부분에서는 교육적이라고 볼 만한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분위기나 교사 성향에 따라 체벌의 정도는 다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조선일보> 기사를 검색해보니까 1936년 7월 15일과 1937년 12월 19일 자에 교사의 체벌로 사망한 학생의 사건과 함께 당시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가 심각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더라고요. 물론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 교사들의 교육철학에서 배울 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황국신민화 교육과 인성 교육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식민지 교육이라고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 P32

●●●그래도 제가 해방될 때까지 계속 일본말로 우리나라 여성들을교육했다는 것이 친일 행위의 일종인 것은 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 선생님께서 일본말로 학생을 가르친 것까지도 친일 행위의 일종이었다고 고백하신 말씀을 들으니,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어로 수업하는 게 원칙인 상황에서, 일본어 수업을 교사 개인의 선택적 행위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수업 시간에 한글을 칠판에 쓰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행위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당시 학생들의 한글 해독 능력이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소학교를 다니셨을 때, 그중 소학교 3학년때인 1938년부터는 조선어 과목이 사실상 폐지되다시피 했었고,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셨을 때는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었으니, 당시 학생들은 한글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한글로 판서하는 게 좀 미숙하셨을 것 같고 학생들도한글을 읽는게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 그 말씀은 옳습니다. 제가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얼마 있다가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었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안 가르쳤으니까 모르지요. 그런데 저는 원래 집에서 한문과 한글을 동시에 배웠습니다. - P36

제가 일본의지배를 받았던 민족이 일본어를 이해하는 비율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식민지로는 타이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비교가 되지요.
일제 말기 타이완의 경우를 보니까 일본어 해득률이 85퍼센트예요. 이건 대단한 겁니다. 나머지 15퍼센트는 저 어디 오지에 사는 노동자나 농민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다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한다는 거예요. 당시 타이완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일을 실제로 겪었습니다.
1964년에 하버드대학에 초청 받아서 갔었는데, 그때 마침 초청 받아 온 타이완 학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부부 사이에 편지를 일본말로 써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집에서 일본말을 한답니다. 나이는 나하고 비슷했지요.
타이완의 일본어 해득률이 85퍼센트였다는 것과 내가 미국에서 겪은 일을 관련지어 생각하면 일제 말기 우리의 언어생활이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해방이 한 20년만 늦어졌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제가 <국어 정책론》에서 조금 언급한 것 같은데요, 일본어 해득률이 90퍼센트에 육박했을 겁니다. 그럼 국어 회복은어렵지요.
여기서 하나 고백하고 싶은 게 아까 말한 대로 열 살에 소학교 들어가서 일본말로 교육 받고, 다들 짐작하다시피 작문은 늘 일본말로 썼습니다. 지금도 어떤 때는 일본말로 생각해요. 일본말로 사고를 해요.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서 우리말 어휘를 찾아야 해요. 어떤때는 우리말 어휘를 찾을 수 없어서 일한사전 들출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적절한 어휘를 찾을 때가 있어요. 자, 이 이야길 들으면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그럴 겁니다. 이렇게 이 문제가 중대한 문제예요. - P39

◇◇◇ 일제의 침략이라는 게 애초부터 그렇게 대단한 흉계였어요. 그런데 일제의 침략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거같아요. 우선 1894년 갑오개혁이 일본의 수중에서 이루어졌어요. 일본 군대가 왕궁을 지키는 그러한 상황에서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선포가 됐거든. 우리 역사에서는 그때부터 근대화를 시작한 거니까 그건인정하자고 하지요. 그런데 일본 측에서 보면 갑오경장을 통해 근대화를 한다고 표방했지만 실제 내용은 내정 침투를 위장한 거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정확히 알아둬야 해요. 또 그 후에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했는데 그것은 독립국을 가장한 일본의 괴뢰정부 수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왕이라고 하던 걸 황제라고 했고요.
그럼 일본의 의도는 뭐냐. 왕을 황제라고 하니까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쌍수를 들어서 다 환영한 겁니다. 우리가 당시 청나라에 예속되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대한제국을 수립한 것은 청나라와 단절한다는 거예요. 단절했으면 어디로 가느냐? 일본 쪽으로 붙인 거예요. 자기네 괴뢰로, 근데 우리 역사책이나 역사가들 서술한 거 보면 안 그래. 다 찬양해요. 대한제국 위대하다고. 나는 그런 거 보면 당최 하도 실망스러워서 말이 안 나와요.
그다음에 마침내 ‘일한합병‘, 일본사람들은 ‘일한합병‘이라는 명칭을 썼어요. 우리는 ‘한일합방‘이라는데, ‘한일합방‘이 왜 잘못된 말이냐면, ‘한일합방‘은 우리나라가 일본을 합방해야 쓸 수 있는 말이에요. 그렇잖아? 그러니까 ‘일한합방‘이 맞아요, 일본이 했으니까. 우리사학에서 내가 보기에는 아주 참 제대로 안 해요.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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