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 P7

"고 선상님을 잘 알그마요."
그제야 어머니의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P21

 아버지가 최 약방의 꼬임에 넘어가 한약을 먹는 바람에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열일곱의 나는 믿었다. 그 무렵 읍내 오거리에서 최약방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환갑 넘어 눈도 안 좋았을 그는 스스로 지은 약을 먹고 개안한 것인지 눈이 나보다 밝아, 저 멀리서•나를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나롤 이 세상에 불러낸 원흉을 일별도 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에게 동생이 하나뿐이었다는 걸,
일찍 어머니를 잃어 그가 업어 키운 아들 같은 동생이었다는 걸, 그 동생이 아버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용돈 쥐여주며 귀여워했을 조카였던 셈이다. 그 마음 쌩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 P28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건대 늘 그랬다. 유관순 언니보다두해 먼저 태어난 할머니가 1991년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지로 향하는 상여를 뒤따를 때도, 유품을 정리할 때도, 그 유품 속에서 닳을까봐 헝겊에 꿰매놓은 자신의 소학교 졸업사진을 발견했을 때도, 아버지는 아래윗집 살던 할머니와 오며가며 인사나 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무수한 죽음을 목도했다. 보급투쟁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왔더니 동지들의 시신이 목 잘린채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아버지는 예의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덤덤하게 말했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3

박선생도 아버지만큼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났다. 긴아•침나절이 무료하여 신문도 직접 받을 겸 허물없는 친구도볼 겸 배급소로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박선생이 구독하는 조선일보를 빼앗아 후루룩 일별했다. 그러고는 박선생에게 휙 집어던졌다.
"이런 반동 신문을 멀라고 아깐 돈 주고 보는 것이여!
한겨레로 바꿔 이번 기회에 펭상 교련선상 함시로 민족통일의 방해꾼 노릇을 했으믄 인자라도 철이 나야 헐 것아니냐!"
"니나 바꽈라. 뽈갱이가 뽈갱이 신문 본다고 소문나먼 경을 칠 텡게."
두 노인네는 매일 아침 투닥거리며 늘그막을 보냈다.
신문을 들고 집에 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 앞에서 평생 교련선생 한 놈이 조선일보만 본다고 박선생 흉을 보았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이라 어느 날 짜증이 나서물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놀아요?"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신문을 촥 펴면서 말했다.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 P46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는 친하지 않기도 했다.
오빠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왔을 때처럼 오빠는 휘적휘적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허리춤에서 엉덩이까지 어른 주먹 몇개는 들락거릴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 P85

국화꽃 한송이를 제단에 올린 아이는 가만히 서서 아버지 영정 사진을 응시했다. 조문이 처음인 듯했다.
"절할래요? 두번 절하면 돼요."
아이가 시킨 대로 두번 절을 올렸다. 나와의 절은 생략했다. 절을 올리고 난 아이가 쓱 얼굴을 훔쳤다. 나는 모르는 둘만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냥 가려는 아이를 한갓진 안쪽 접객실 테이블로 이끌었다.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라면 응당 그러했을테니.
"우리 아버지랑 친했나보다."
아이가 콜라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나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알았을 테고 아버지 방식대로 위로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 P140

"아니여. 나가 맹근 누룽지가 자네 것보담 시배는 크거든, 우리 아리가 누룽지라면 환장을 허잖아."
아닌디, 누룽지 안 줘도 아빠가 최곤디, 잠결에 중얼거했고 아버지는 하하, 밤하늘이 시끌적하게 웃어젖혔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경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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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께서는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한국인 관리들이 속죄의뜻으로 해방 후 돈을 모은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한글학회 측 기록에따르면 "이 돈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이 일본에 바치기로 되어 있던 ‘국방헌금‘ 82만 원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당시 들으셨던 "속죄의 뜻으로 돈을 모았다"는 말은 일제에 국방현금으로 기부했다는 것 자체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데에서 만들어진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돈이 조선어학회에 기부된 계기는 선생님 말씀대로 조선어학회에 대한 대중적 신망이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해방 이후 시급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 <한글>과 <우리말본>이라는책이 당시 어떤 용도로 쓰였기에 이렇게 기증받은 돈으로 맨 먼저 이책들을 발간하게 되었을까요? 이 두 책 모두 최현배 선생께서 저술한것으로, 《한글>은 1942년에 간행한 훈민정음 연구서이고, 《우리말본>은 1937년에 간행한 문법서였는데요. 그만큼 당시 최현배 선생님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 책들은 일제 말기에 자비출판 형식으로 출판됐는데, 책이두껍고 또 디럭스판이어서 책 모양만 봐도 일제 때로서는 아주 묘하고 귀한 책이었죠. 해방이 되니까 모두들 그걸 보려고 하고 심지어 사다가 집안에 장식품처럼 꽂아 놓는 사람도 많고, 또 나도 이런 걸 가지고 있다 하고 자랑도 할 겸 해서 이 책들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최현배 선생 개인을 보고 샀다기보다는 책모양을 보고 샀다고 해야겠죠. - P87

◇◇◇ ‘조선어학회는 해방이 되자, 재건되어 당시 긴급한 국어 회복에지대한 중책을 다했다‘. 이렇게 평가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 실정을보면, 국민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한글은물론 우리말도 거의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학회가 서둘러 전개한 국어강습회, 또 검정 시험을 통한 국어 강사 양성은 시기적으로 봐서 아주 시급한 과업이었어요. 이런 사업은보통 기관에서는 해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것을 조선어학회에서 조기에 완수했던 거지요. 그런 점에서 ‘학회가 참 훌륭한 일을 했고,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 P89

◆◆◆ 그러니까 다 짐작하다시피, 일제시대의 공용어는 일본어였죠. 당시 공용어가 일본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기관에 가든지 일본말로해야 되고, 또 일본말로 신고를 해야 되고, 문서도 일본말로 작성해야한다는 뜻이죠.
그러다가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선포했어요. 미군정 기간이 1945~1948년인데, 이 기간 동안 공용어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대치됐어요.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문 것 같은데 그거는 미군 사령부의 포고령에 나오니까 확실합니다. 다만 학교에서의 교훈 용어, 즉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말은 "조선어로 한다", 이렇게 돼 있었어요. "모든 학교에서 영어로 가르쳐라"가 아니었으니까일반 사람이 공용어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아마 그런 점 때문인것 같아요.

<맥아더 포고령 제1호) 5조 언어에 대한 규정(1945년 9월)Proclamation No. 1 / To the people of Korea: Article V/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 모든 목적을 위한 공식 언어는영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사이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한 모호함과 부동한점이 있을 때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 P102

규범 정책을 보면, 1930년대에 논쟁이 치열했던 한글파의 조선어학회 ‘어원 표기 맞춤법‘과 정음파 혹은 박승빈파라고도 하는 조선어학연구회의 ‘표음주의 표기법‘ 사이의 논의는 조선어학회의 위력에의해 없던 일처럼 되었어요. 검토의 여지도 없이 당당해진 조선어학회의 안으로 결정되었던 거예요. 오늘날 맞춤법이 어려운데, 이것을좀 쉽게 가공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이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글 맞춤법((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말함)이라는 게 조선어학회가 일제시대에 만든 건데, 어원 표시를 해요. 이 어원 표시라는 게 일정한기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얼음‘ 하면 ‘얼다‘에서 왔으니까 ‘ㄹ‘ 받침을 해서 ‘얼음‘이라고 쓰고, 밭에 주는 ‘거름‘은 ‘거‘하고‘름‘으로 소리 나는 대로 써요. 그것도 ‘걸다‘에서 왔는데 ‘거름‘이라고 할 적에는 정신 바짝 차려서 ‘ㄹ‘ 받침을 쓰면 안 되고 소리 나는대로 ‘름‘으로 써야 되거든요. 우리 같은 전공자는 이런 거 다 문제없이 찾아보거나 다 가려서 쓸 수 있는데, 일반 사람은 ‘얼음‘은 ‘ㄹ‘ 받침을 밝혀 적고, ‘거름‘은 소리 나는 대로 쓴다. 이걸 외워야 되니까, 참 이게 문제거든요.
물론 이 표기법이 두 종류가 있어서 학문용, 학자용이 따로 있으면아무 상관없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여기에대해 검토할 기회가 싹 없어져서 그게 아쉽다. 그런 얘기지요. 앞으로우리가 국어 문제에서 해야 될 것은 맞춤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거는 어디까지나 전공자하고는 무관한 거예요.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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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이 동생의 묶인 팔을 안타까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희가 듣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까?"
"상대등께서, 기찬에게 좋은 자리를 하나 주려 하셨지만 아버지가 거절하셨지요. 집을 돌보고 저를 돌보고 죽은 자들을공양하며 사는게 맞는다면서•••••• 그때 네 편을 들지 못해 미안하다. 그때 네 편을 들었더라면. 누구 한 사람이라도 아버지를 설득했더라면."
기찬은 지율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집을 지키라 하셔놓고, 집을 버려버리시면••••••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집과 함께 버려지는 나는 아버지께, 저 북쪽에서죽어 돌아오지 못한 이들보다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그들에게 보내드리는 게 맞지요. 가서 저 너머에서 계속 그들의 장수로 지내시는 게 맞지요. 살아 있는 사람들을지긋지긋한 어둠으로 그만 물들이시도록, 아버지 쪽이 사라지시는 게 맞았습니다. 그 독은 한 번에 들었어야 했는데, 글씨따위 남기지 않았어야 했는데!" - P167

"한 명쯤은 기억하고 있어도 좋을 뻔했어."
인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엇을?"
" 이 융성한 날들을 위해 누가 죽어야 했는지. 어떤 싸움을했는지. 한 명쯤은 계속 곱씹고 있어도, 사로잡혀 있어도 좋지않았겠는가? 천년왕국을 고대하며, 그것이 무엇 위에 세워지는지 이 흥청망청한 거리는 다 잊은 것 같군.‘
"천년이라•••••• 이다음 천년이라."
자은은 사람들이 잊고 잊고 또 잊는다 해도 이 활기와 온기로 가득한 거리 위로 어둠이 드리워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누구에게 기원하는지도 정하지 않은 채. - P174

"그래, 도은을 위해서라면 나도 상황에 따라 베틀 정도는부수었을지도. 나라면 그보단 다른 방법으로 그 사태를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각자 처한 형편이 있고 할 수 있는 일도 다르니... 자네에겐 그런 사람이 있나? 그렇게 어긋난 일도 하게 만들 만한 이가?"
자은이 기대하며 묻는 것 같아, 인곤은 바로 떠오른 답을 전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런 이가 있는 자가 부러움을 살 자인지, 없는 자가 두려움을 살 자인지 모르겠네."
옷을 입은 채 물을 짜는 것은 한계가 있어, 두 사람이 집으로 걸어온 길에는 진한 발자국이 남았지만 밤이 지워낼 것이었다. - P212

그렇게 자은도 매가, 매잡이가 되었다. 왕의 것이 되었다.
달이 차오르고 다시 허물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베지 않은 때도 있었고, 하나를 벤 적도 있었고, 수없이 벤 적도 있었다.
그것은 그다음의 이야기.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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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이요...?"
"전투 전날 마지막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먹고 마신 것들이 몸 밖으로 나오기 전에 죽는 것이 아니냐. 그런 농담을 하며 웃던 얼굴들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불가에서 눈의 흰자위들이 번쩍거렸지요. 그 바짝 곤두선 병사들을 위해 씨름 대회를 열었습니다. 독군님께서 우승한 자에게 상을 하나 주겠다했는데 그 녀석이••••• 혜요가 이를 악물고 이기더니, 상으로 지율님의 옷과 갑옷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
죽을 게 뻔한 미끼 전투에서, 주인의 옷과 갑옷을 달라고 했다. 미끼 중의 미끼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려서 듣던 옛이야기의 신하나 다름없었다.
"사방이 어찌나 조용해지던지요. 기이하게 들떠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지율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를 냈습니다. 왜 그딴 걸 달라 하느냐, 진짜 상이 될 만한 것을 고르라, 나는 싫다••••••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면 물러날 법도 한데 혜요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더이다. 어린것이 약조를 어기지 말라고 똑바로 외치는 바람에, 독군님께서 결국지율님의 뜻을 굽히셨지요. 지율님이 제일 좋은 비단옷과 늘입던 갑옷을 혜요에게 주시면서 울었습니다." - P101

그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중봉은 고개를 내둘렀다. 자은은 지율의 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회한에찬 그 남자는 쉽게 울 것 같지 않았다.
"그땐 지율님도 한참 어리셨으니까요."
"매초성에서, 혜요가 그 옷과 갑옷을 입었습니까?"
"예에, 그 고집스러운 아이가 지율님의 옷과 갑옷을 입고•••••• 아수라장 속에서 퇴로를 뚫었습니다. 독군 어른이 정신을 잃고 계신 걸 저와 두섭이 구해 오다가, 크게 다친 지율님도 발견해 제 말에 태웠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행한 일이라•••••• 아군 진영에 다다랐을 때 두섭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젖어 있어 귀신이나 도깨비도 저런 꼴은 아니겠다고 뜨악해했는데 저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곧 후방으로 보내졌지만두섭은 눈 하나를 뽑아내야 했고 지율님은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셔야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 전쟁이 끝났지요."
끝나리라 알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소강에 접어들자, 그것 또한 겪은 적 없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얼마간은 얼떨떨하고 얼마간은 허망했을지도 모른다.
"금성에 돌아와, 지율님이 죽음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고 안도하고 나서야 독군 어른이•••••• 괴로워하고 계시단 걸 깨달았습니다. 독군 어른과 지율님은 아마 저희를 원망하고 계시겠죠. 굳이 구하지 않았다면 정해진 대로 명예로웠을 거라고요. 뒤늦게 저도 그 점을 보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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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사범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국어 과목을 가르쳤지요. 물론 일제시대 국어는 일본말이었는데, 가서 부임을 해보니까 제가 최초의 국어과 교유였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각급 학교 차이가 없고 거의 다 한글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학년 차이 학교 차이도 없이 우선 한글을 가르쳐야 했고맞춤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춘천사범학교에서는 5학년 학생들이 "선생님, <용비어천가>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해요. 그래서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어리니까 용감했지요, 제가 〈용비어천가〉를 어디서 배웠겠어요? 중세어를 알기나 해요? 그런데 ‘그래 그거 공부하자‘ 탁 아주 그냥 즉석에서 쾌하게 답을 하고서 <용비어천가>를 가르쳤던겁니다.
저는 그냥 아는 대로 가르쳤는데 사실 그 <용비어천가> 가사의 내용이 역사적인 배경이 많거든요. 그걸 모르면 가사의 의미가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되니까 자꾸 질문을 해요. 그런데 제가 알아야지그걸. 그래서 인제 대답을 못 하고 모르겠다고 그러고 가만히 생각을해봤죠. ‘이래가지고는 내가 안 되겠다. 아무래도 국어학 전공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국어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P63

◆◆◆ 조선어학회는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됐습니다. 그 후 1931년 1월에 이 학회가 개편되면서 고루 이극로 선생이 직접 조선어학회를 주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이 시작됩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결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말 표기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글 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10월에 학회 안으로 제정된 것이지요. 1941년 1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한 것도 우리말 표기 통일의 한 요소였습니다. 둘째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정査定한 조선어,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죠. 1936년 10월에 발표됐죠. 셋째는 언어규범의 종합입니다. 이것은 <조선어 대사전>을 1942년 10월에 편찬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로 민족어 확립은 일단 역사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 조선어학회 활동과 그 의미를 큰 틀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1942년 10월에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한 것은 민족어 규범화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선어 대사전>의 원고가 일본경찰에 압수되며 출판되지 못했지만, 해방 후인 1947년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첫째 권이 나오고, 1957년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섯째 권이 나오면서 사전 출판이 완결되었죠. - P67

◇◇◇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사전, 우리 국어사전 상황을 보면 1880년대까지 올라가요. 1880년대에는 주로 선교사들이 사전을 편찬했는데,1920년에 오면 조선총독부, 즉 식민지 당국에서 <조선어사전)을 냈어요. 이런 편찬사업들이 계속되고 그 후에는 문세영이 (조선어사전)을편찬했어요. 그런데 이 사진들은 어휘의 의미를 설명하는 정도지 우리말 규범에 대한 전제가 없었어요. 규범이라고 하면 맞춤법과 표준어이고, 그다음에 발음에서는 장단 문제, 된소리 발음 문제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규범이 없으니까 사전에서의 기술이 들쭉날쭉이고 또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처럼 규범적으로 확실치가 않으니까 그때까지 국어사전은 어휘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으로 끝났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대사전, 즉 <조선말 큰사전>은 국어규범을 전제로 편찬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실제로 이것이 출판된 게 1957년이었어요. 6권으로 완간된 때가. 그러니까 1957년 전까지는 국어 규범을 제시하는 사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 목적에 소용되는 사전이 없으니까 너도나도 사전을 편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6.25사변 전에 박문출판사에서 시작한 일석(이희승)의 국어사전도 그러한 목적에서 편찬했던 겁니다.
일석의 국어사전처럼 해방 후에 편찬한 국어사전은 <한글 맞춤법통일안>의 수정 부분을 반영할 목적이 컸죠. 해방 직후에 맞춤법 일부를 수정했었으니까, 맞춤법을 포함해서 국어 규범을 사전에 반영하는문제가 있었어요. 표제어뿐만 아니라 그 주석의 풀이말도 개정 맞춤법에 따라 써야 했던 거지요.
맞춤법 다음에 중요한 게 표준말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표준말은 사실 7,000개가 안 됐기 때문에, 그 외의 단어들이 표준어인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더군다나 일반인들은 더 몰라요. 그러면 사전을 편찬할 적에 그걸 다 해결해놔야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에서 표제어의 표준어 여부를 판단하는 업무가 부가된 거예요. 표준말에 없는 것은 어떤 것이 표준말이냐를 정해야 했지요. 그러면 편찬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의 표준말 기준을 보고 "이기준으로 봐서 이 단어는 표준어로 삼았을 거다", "그래야 앞뒤가 맞다"등과 같은 판단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전의 국어사전 편찬원처럼 어휘 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규범의 종합적인 판단까지도 하는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 P77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된 국어 정책은 크게 ‘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국어 정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해방 후 모든 교육에서 한글만 쓰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미군정 문교부에서는 <한자 안 쓰기의 이론>(1948)을 출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률 제6호로 <한글 전용법>(1948.10)을선포하며 한글 전용을 시행했다. 일본식 용어의 철폐와 우리말 도로찾기를 목표로 이루어진 국어 정화 운동은 국어 정화의 지침으로서<우리말 도로 찾기>(1948.6)를 펴내며 본격화했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여전히 한자 병용의 글쓰기가 계속되고 있었고, 국어 정화지침 역시 성글게 이루어지면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중심의 국어 정책은 일제 치하부터 이어진 군국주의 혹은 국수주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정부수립과 함께 좀 더 깊이 있는 국어 정책이 가능했음에도, 민족 혹은민족의 순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한글 전용이나 순우리말 쓰기등과 같은 정책이 맹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한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내용에서 큰 수정 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어법에 맞춰 적도록 하는 형태주의 표기법이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팽배했고,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글 간소화 정책이라는 강력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이 국가의 권위가 아닌 조선어학회의 권위에 기대어 어문 규범의 역할을 해온 데 따른 것이었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규범화를 주도하면서 한글 풀어쓰기와 같은 조선어학회 일부 연구자 특유의 주장을 규범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일방적인 행태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국어 규범을 정립하고자했던 연구자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해방 직후 국어 정책을 펼쳐나가는 데 커다란 갈등 요인이 되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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