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사람들은 또다시 "긴즈버그 대법관, 소수의견 제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마주해야 했다. 공화당이 임명한 남성 대법관 다섯 명은 기업도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직장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피임 비용을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 버웰 대 하비로비 사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피임이 뭐 그리 대수냐며, 여성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투였다. 몇 주 뒤, 케이티 커릭이 물었다. "남성 대법관 다섯 명이 이번 판결에 따른 파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십니까?" RBG가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남성으로서 "맹점"을 드러낸것인가? 커릭이 다시 묻자, RBC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든 여성이 피임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비로비 사주의 신앙은 분명 존중합니다. 하지만, 사주라고 해서 종교가 다른 수많은 여성 직원에게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강요할 헌법적 권리는 없습니다."
RBG는 하비로비 사건의 소수의견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때까지 내놓은 여러 소수의견에 그대로 가져다 붙여도 잘 어울릴 법한 문장이었다.
"대법원이 지뢰밭에 뛰어든 것 같아 우려스럽다." - P193

RBG는 버락 오바마를 향해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한다. 그는 대통령을가리켜 "생파티크sympathique" 라는 단어를 쓴다. 프랑스어로 ‘마음에 꼭 든다‘는 뜻인데, RBG가 사용하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RBG는 백악관 만찬 자리에서 중간에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체육관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말했습니다. ‘대통령님을 버리고 저한테 오셨다고요? 아이고, 대법관님, 오늘은 팔굽혀펴기를 몇 개 더 하셔야겠습니다.‘" - P204

RBG의 유산, 이 문제는 그가 자주 거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이끝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문제도 아니다. "내 인생에서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성차별이 모두에게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에게도 나쁘고, 아이들에게도 나쁩니다. 그런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려서 한없이 행복•합니다. 헌법 첫 줄에 뭐라고 적혔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 합중국 인민은보다 완벽한 연합을 형성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헌법이 말하는 더 완벽한 연합을 만들기 위해서 분투해야 합니다. 그 완벽함의 형태 가운데 하나는 ‘우리 합중국 인민‘의 개념이 훨씬 더 광범위한 집단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포용이야말로 RBG가 평생을 바쳐서 이루고자 했던 목표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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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국어 정책은 국어 사용의 현황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국어학은 국어의 정립이라는 근대적 과제에서 벗어나 언어 분석 이론을 바탕으로 국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촘스키N. Chomsky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이 국어학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국어학의 주류적 경향은 국어 정책을위한 언어 연구와 멀어졌지요. 변형생성문법 이론에서는 민족과 민족어의 관계나 언어와 사고방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보편적인 언어 능력과 보편문법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언어 능력과 보편문법을 전제하는 국어학 연에서 ‘민족어를 발전시키기 위하여‘라는 논리가 설 자리는 없었던것입니다. - P327

●●● 선생님께서는 앞서 해외 한국어 문제, 북한어 문제 등에 대한장기적인 계획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문제는 선생님께서사명의식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실천 방안을 모색한 문제이기도 하죠.
먼저 선생님께서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계획의 일환으로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어 연구를 해오셨고 그 결과물로 《북한의 언어연구》(1985)를 출간하셨습니다. 이는 최초의 종합적 북한 언어 연구이면서 이후 북한어 연구의 토대가 되었던 저술이었죠. 선생님께서연구의 물꼬를 트신 북한어 문제는 남북 언어 통일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라 할 수 있을 텐데, 선생님께서 북한어 연구를 하시면서 언어 통일과 관련한 정책 방향에 대해 생각하신 바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지금 국어 정책에 관련되는 문제도 그렇고, 맞춤법 문제와 표준어 문제는 남북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느낌이나 감상을 떠나 장기적으로 검토해서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가령 맞춤법은 반드시 합리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또 표준어는 북측과 관련해서 역시 서로가 무리가 없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 P333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원칙은 대체로 2005년부터 시작한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는 이 사전은 남과 북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남과 북의 서로 다른 규범을 존중하는 가운데 남북이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을 편찬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 이야기가 나오니까 1993년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와의 만남에 동행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문익환 목사께서 1989년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면서 남북 통일사전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으로 돌아와 옥고를 치른 후 이와 관한 사업을 구체화하시면서, 1994년 1월 11일 선생님과 회동을 했으지요. 그 만남이 있고 얼마 뒤인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께서 돌아시면서 더 이상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했었습니다.  - P334

◆◆◆ 1981년 6월 정부가 외국 이민과 유학을 자유화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종전 정책에 대한 대전환이었다. 그때 뜻있는 사람들은 개방에 앞서 민족성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정책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6월 26일 김민수, 박영순 두 교수는 가칭 이중언어교육연구회 창립이 긴급하다는 소신을 토로했고, 7월 3일 제1차 발기회를 시발로 학회 설립을 구체화했고, 9월 26일 덕성여대에서 이중언어학회 창립 총회를 하고 임원진을 구성했다.
이중언어학회의 문제의식은 학회 설립 취지서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 2세, 3세들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인 국어교육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데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기 위한 전문기구가 절대로 필요하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지한 논의를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이론적인 근거 위에 가칭 ‘이중언어학회‘라는학술단체를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 P338

우리말 글과 관련한 많은 것들이 선생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실천에 기대어 시작되었고 존속되고 있다. 우리말 공동체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언어 통합을 위한 연구와 실천은 지속되어야 하고, 재외동포와 세계인을 위한 우리말 보급은 더 확대되어야하고, 우리말 사전은 더 풍부하고 정교해져야 하고, 우리말의 원리와 작용은 더 정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선생의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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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정結晶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 P9

 마침내 잠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거의 잠들었다고 느꼈을 때였다.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그때 왜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눈물 같은 건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았다.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 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없을 무거운 쇳날이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바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 P11

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더이상 매 순간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힘을빼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위해 수없이 찬물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에 간다. - P28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거리에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눈 닿는 이차선 도로 어디에도차량이 다니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믿을 수 없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함박눈뿐이다. 허공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 사이로 선홍색 신호등이 켜진다.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보인다. 그럼•••••• 그래야지•••••• 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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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로 소수의견이란 무대 뒤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작업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죽을힘을 다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기로 작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소수의견들이 있다.
대법관 일곱 명이 아프리카계 인간은 일종의 재산일 뿐 절대로 시민이 될수 없다고 판결한 1857년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도 그랬고, 다수의견이 ‘분리-평등원칙‘을 지지했던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도 그랬다. 이들 소송건에서 소수의견을 제기한 대법관들은 동료 대법관에게 호소하는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법정 밖의 공중을 향해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자신들의 판단을 정당화해주기를 기대하면서. - P167

해 한바탕 싸움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셸비 사건에서 대법관들은 선출직 관료들을 무시하면서 대중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률의 주요조항을 무효화했다. RBG는 뉴욕 타임스」에서이렇게 밝혔다. "대법원은 보수적이라는 평판을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회가 통과시킨 법을 얼마든지 무효화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적극주의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현재 대법원은 그 어느때보다 적극적인 법원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5" RBG의 암담한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셸비 판결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주에서 앞다투어 법을 고쳐 투표 참여를 더 어렵게 만들어버렸고, 그 피해는 유색인종과 빈곤층에게 불균형적으로 쏠렸다. RBG가 말했다. "우리는 이 정도면 비에 젖지 않을 것 같다면서 우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거센 폭풍이 우리에게 밀려올 것입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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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리를, 광장을 기대했다. 대신 내가 서 있는 곳은 더러운 강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계단의 꼭대기이다. 강가에 도착한 것이다. 결국, 세인트폴 성당과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나 넓디넓은 템스 강이 나와교회 사이로 흐르고 있다.
나는 서서 일종의 공포와 외경 속에 강을 바라본다. 브라이어에서 템스 강을 따라 걷던 기억이 난다. 강이 둑을 침식하고흔드는 것같이 보이던 기억이 난다. 난 저 강이, 마치 나처럼, 미치도록 빨라지고 싶어 한다고, 넓어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넓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독처럼 퍼져 나간다. 강바닥이 부서진 물건들로 어지럽다. 짚, 나무, 잡초, 종이, 천조각, 코르크와 기우뚱한 병들이 보인다. 강이 움직인다. 강이아니라 바다처럼 움직인다. 파도가 친다. 그리고 선체에 부딪히면서, 강변에 철썩 떨어지면서, 강변에 솟아 있는 계단과 벽과나무 부두에 부딪히면서 강은 쉬어 버린 우유처럼 거품을 가득문다. - P556

「내게도 내 배 아파 낳은 아기가 하나 있었는데 죽었다고 그 숙녀, 수의 어머니가 왔던 즈음에 말이야」 부인이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내가 말했지. 이 근처에서 다시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들을 거야. 아기들은 잘 죽거든. 그러니 누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겠어••••••?」목소리에 무언가가 있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한다. 부인이내가 떠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손을 뻗어 내 엉킨 머리를 어루만진다. 「됐어, 이젠 휴. 그래. 넌 이제 안전하단다. 그리고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춘다. 부인이 내 머리털 한 줌을 쥐고 있다. 부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오른다. 「참 재미있지.」부인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네 머리 말이야. 난 네 눈이 갈색이고 피부는 하얗고 허리와 손은 가늘 거라 생각했어. 오직 네 머리만이 내가 상상하던 이상으로 더 금발이구나•••••• 말이 갑자기 뚝 끊긴다. 손을 뻗으며 부인은 고개를 움직였다. 가로등 불빛과, 변색한 은 같은 달에서 나오는 달빛이 부인얼굴을 비추면서 갑자기 부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부인의갈색 눈과 창백한 피부, 통통한 입술.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깨닫는다. 저 입술은 한때는 훨씬 더 통통했으리라••••••. 부인이 입술을 적신다. 「아가.」 부인이 말한다. 「나의, 나의 소중한 딸••••••.
부인이 다시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 P589

「좋아하지, 그렇지?」 여전히 엉덩이를 돌리며 베이컨 간호사가 말했다.「아니라고? 네가 좋아한다는거 우리 모두 들었는데 뭘
그러자 간호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우성치며 날 바라보는얼굴에서, 전에는 보아도 이해하지 못했던 심술궂은 표정을 다시 보았다. 이제는 물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예전에 모드가 크림 부인의 집에서 크리스티 의사에게 했을 말이 짐작이 갔다. 모드가 그 일을 얘기했을 거란 생각이, 나를 미쳤다고 몰기 위해 젠틀먼 앞에서 그 일을 얘기했을 거란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심장이 멎는 듯했다. 브라이어를 떠난 뒤로는 심장멎을 일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최악 같았다. 화약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막 성냥으로 그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몸부림치고 비명 지르기 시작했다. - P661

우리는 젠틀먼이 어슬렁거리며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틀먼은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더니 입스 씨의 가게 문 앞에서멈추어 섰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더니 열쇠를 끄집어냈다. 계단에 대고 오른발, 그다음엔 왼발에서 먼지를 떨어냈다. 그러고는 자물쇠에 열쇠를 찌르고 주위를 무심히 둘러본 뒤 안으로들어갔다.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태도였다.
젠틀먼을 지켜보는 내내 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묘한 기분이들었다. 「저런 악마 자식! 내가 말했다. 죽여 버렸으면, 쏴버렸으면, 달려가 얼굴을 후려쳤으면 싶었다. 그러나 정작 모습을보자 두려워졌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졌다. 마치 아직도 여기가 크리스티 의사의 병원이고, 당장에라도 끌려가 흔들리고 묶이고 물에 쑤셔 박힐 것 같아 무서워졌다. 숨이 탁탁 걸리면서 숨소리가 이상하게 났다. 찰스가 알아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P705

석스비 부인의 방에 불이 켜지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바로 석스비 부인이었다! 심장이 급격히 쿵쾅대기 시작했다. 석스비 부인의 머리가 희어 보였고 낯익은 검은 태피터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 등불을 들고내게서 얼굴을 돌린 부인이 턱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방 안 저멀리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인이 뒤로 물러남에 따라 그 사람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자아이였다. 허리가 무척 가늘었고••••••. 그 여자아이를 보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석스비 부인이 그 아이 뒤쪽에서 방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여자아이는 브로치와 반지들을 빼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유리창 앞까지 왔다. 창틀의 가로막대 위에 팔을 걸치고 손목에 이마를 대고 서더니 조용해졌다. 오로지 손가락만이 창문의 레이스를 일없이 당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머리는 곱슬곱슬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럴 리 없어>그리고 석스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자 여자아이는 얼굴을 들었고 가로등 불빛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자아이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말이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거의 1분 동안이나 먼지투성이 거리와 어둠을 가로질러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아이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아이는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눈 색깔이 기억났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서서 한 발 물러나더니 등불을 집었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불꽃을 낮추는 동안 석스비 부인이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올려 여자아이의 옷깃 뒤쪽 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이 어두워졌다. - P708

찰스의 말이 눈물에 녹아든 소금처럼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내가 말했다. 「제발 인생에서 딱 한 번만 울음을 멈춰 봐, 안 그러면 맹세컨대 널 때릴 테야! 어서 말해, 모드가어떻게 했어?」찰스가 숨을 들이쉬더니 손을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아무것도요.」 찰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게 이걸 주셨어요. 앉아 있던 탁자에서 가져온 거예요.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시던데요. 그리고 키 큰 남자가 시계 뚜껑을 닫자 모드 양이 절 떠밀었어요. 키 큰 남자가 제게 1파운드를 주었고, 제가 받아 들자 빨간 머리 여자애가 절 내보냈어요. 모드 양이 제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눈이 이글이글거리시더라고요. 그러나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그냥 이것만 주셨고, 이걸로 모드 양이 아가씨에게 뭔가 뜻을 전달하려 했다고 생각해요. 오, 아가씨! 절 바보라고 불러도 좋아요. 하지만 하느님 맙소사, 전 그뜻까지는 정말 몰라요!」
찰스가 내게 물건을 넘겨주었다. 모드가 무척 작게 만들어놓았기에 그걸 풀고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알아본 뒤에는 손에 쥐고 돌리고, 또 돌렸다. 그리고 일어나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게 다야?」 내가 말했다.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카드였다. 브라이어에서 모드가 가지고 놀던 프렌치 덱의 한 장이었다. 하트 2였다. 기름때가 묻고 접힌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붉은 하트 하나에 아직도 모드가 발로 밟아 생긴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P722

내가 경멸에 몸을 떨며 말했다. 이제 와서 젠틀먼의 강요로그랬을 뿐이라고 말하려는 거야?」「정말로 강요당했어!  •••••• 하지만 네가 의미하는 그런 식은아니었어」
내가 말했다. 「네가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 아닌 척하시겠다?」 모드가 말했다. 「넌 안 그래?
모드가 재차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 다시 거의 부끄러움에 휩싸이며 나는 눈길을 돌려 버렸다. 잠시 후 나는 좀 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싫어했어. 네가 등을 돌리면 그 사람과 있을 땐 웃지도않았어.」
난 웃었다고 생각해?」「왜 아니겠어? 넌 배우잖아••••••. 지금도 연기하고 있는 거잖아!」「내가?」여전히 내 얼굴에 눈을 고정하고 여전히 내게 손을 뻗고 있지만 간신히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손을 멈춘 채 모드가 말했다. 빛이 온통 우리에게만 들었고, 부엌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모드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더럽혀져 있거나 멍들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젠틀먼을 싫어했다면, 왜 그렇게 했던 거야?」「다른 방법이 없었어」 모드가 말했다. 「내 삶이 어떤지 봤잖아. 난 내가 되어 줄 네가 필요했어「그래서 네가 여기 와서 내가 되려고!」 모드는 아무 대꾸도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우리가 젠틀먼을 속일 수도 있었어.
네가 내게 말만 해주었다면. 어쩌면 우리가••••••「어떻게?」「어떻게든. 뭐라도, 나도 몰라••••••.」모드가 고개를 저었다. 모드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얼마나많이 포기할 수 있었을까?」 - P738

세상에, 뺨은그러나 젠틀먼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말해 봐.」 젠틀먼이 모드에게 말했다. 「네가 언제 처음으로 친절해지는 법을 배웠는지. 수가 뭘 알든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야?
왜 그렇게 붉히시나! 아직도 그건 아니야? 석스비 부인을 보는거야? 석스비 부인의 생각에 네가 마음 쓴다는 말 따윈 하지마! 어이구, 너도 수만큼 나쁜 년이야. 떨기는! 좀 더 용감해지시지, 모드. 네 어머니를 생각해.」
모드는 심장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제 모드는 젠틀먼에게 꼬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젠틀먼이 그 모습을보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석스비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 역시 젠틀먼의 말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모드처럼 다이아몬드 브로치 아래 가슴에 손을 대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젠틀먼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모드를 흘낏 본 뒤 손을 떨어뜨렸다.
젠틀먼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건 뭐지?」 젠틀먼이 말했다.
「뭐가 뭔데?」 존이 말했다.
석스비 부인이 움직이며 말했다. 「자 그럼, 데인티••••••「오!」 젠틀먼이 말했다. 「오!」 젠틀먼은 탁자 근처를 걸어가는부인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부인에서 모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손을 머리에 올리더니 이마에 내려온 머리털을 세게 뒤로 잡아당겨 넘겼다.
「이제 알겠군.」 젠틀먼이 말했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웃음이 뚝 그쳤다. 「오, 이제야 알겠어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모드가 젠틀먼에게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그러나 눈길은 내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리처드,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젠틀먼이 모드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내가 바보였어! 오, 정말 대단한데! 언제부터알고 있었어? 네가 발로 걷어차고 욕을 퍼부었던 것도 당연하지! 심통을 부린 것도 당연해! 부인이 널 그냥 내버려 둔 것도! 늘 그 점이 놀라웠어. 불쌍한 모드!」 젠틀먼이 몹시 웃어댔다.
「그리고, 오, 석스비 부인, 정말 안됐군요!」「그만해요!」석스비 부인이 말했다. 「제 말 알겠어요? 그 얘기가 나오게 두지 않겠어요!」 부인도 젠틀먼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불쌍한지고.」 여전히 껄껄거리며 젠틀먼이 다시 말했다. 그러고는 외쳤다. 입스 씨, 당신도 이 일을 알고 계셨나요?」 입스 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뭘 알아?」 존이 물었다. 두 눈이 검은 점 두 개 같았다. 존이나를 보았다. 「뭘 안다는 거야?」「나도 몰라.」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 모드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 P746

「너무하는데, 안 그래? 경찰들이 말했다. 「굉장히 심각하군. 어디 얼마나 심각한지 보자고
경찰들은 젠틀먼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목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추악한 살인이야. 자, 누구 짓이지?」모드가 움직였다. 혹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존이 더 빨랐다.
「저 여자 짓이에요.」 존이 주저 없이 말했다. 부인에게 맞은뺨이 시꺼메져 있었다. 존이 팔을 들어 가리켰다. 
「저 여자짓이에요. 제가 봤어요.」 존은 석스비 부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존의 행동을 보고, 말도 들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게 다였다. 「뭐••••••?」 그리고 모드 역시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뭐••••••?> 혹은 <잠깐••••••!>이라고그러나 석스비 부인이 젠틀먼의 옆에서 일어났다. 태피터 드레스가 피에 흠뻑 젖어 있었고, 가슴에 매단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루비 브로치로 변해 있었다. 손끝에서 손목까지 온통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대중지에 나오는 살인자 사진 같은 모습이었다.
「제가 한 짓입니다.」 부인이 말했다. 「제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걸 하느님은 아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한 짓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이 여자아이들은 결백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선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 P757

그리고 나는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부인의 얼굴에서 이미 용기와 열정과 활기가 반은 사라져 있었다. 부인은 웅성대는 사람들을 멍하니 둘러보고 있었다. 나를 찾는다는 생각에 나는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도 부인은 앞서처럼 계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찾는 것처럼 눈길이 계속 방 안을 떠돌다가 마침내 한곳에 고정되더니 눈빛이 분명해졌다. 나는 부인의 시선을 따라가 방청객열 뒤쪽에서 여자아이 하나를 찾아내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막 베일을 내리는 중이었다. 모드였다. 보리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 순간에는 마음이 활짝 열렸다가, 전의 일이 모두 떠오르면서 다시 마음이굳게 닫혔다. 모드의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별일이라는 생각을했다. 모드는 혼자 앉아 있었다.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내말은 내게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석스비 부인에게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측 변호사가 나를 불러 악수를 하며 유감이라고 말했다. 데인티가 울며 내 팔에 기대어 걸었다. 내가 다시 석스비 부인을 보았을 때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드 쪽을보자 모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P770

그러나 물은 필요 없었다. 데인티가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나는 데인티를 잡고 가까이 당긴 뒤 데인티의 옷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삐걱대는 용수철 위로•날름쇠가 올라가고 볼트가 풀려 튀어 오르면 녹슨 자물쇠가 덜덜 떨 듯이 나도 그렇게 떨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가 말했 - P792

다.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말로 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안다는 것조차 너무 버거웠다! <내 어머니, 모드의 어머니!> 믿을 수가 없었다. 브라이어에서 보았던, 상자 안의 잘생긴 숙녀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모드가 닦고 손질하곤 하던 비석을 떠올렸다.
모드를, 그리고 석스비 부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젠틀먼을 떠올렸다. <오, 이제야 알겠군!> 젠틀먼은 그렇게 말했다. 이제 나도알게 되었다. 석스비 부인이 감옥에서 그토록 내게 말하고 싶어하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해 견디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왜부인은 이 비밀을 그토록 오래 간직했던 것일까? 왜 내 어머니에대해 거짓말을 했을까? 어머니는 살인자가 아니라 숙녀였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숙녀였고, 어머니는 그 재산을 나누어••••••.<나에 대해 견디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생각하렴.> - P793

「데인티」 내가 헐떡이며 말했다. 「데인티, 부인은 분명 알고있었어. 분명히 내내 알고 있었어. 날 젠틀먼에게 붙여 거기로보낸 것도 분명히 부인이야. 결국은 젠틀먼이 날 어떻게 할지알면서도 •••••• 오!」 목소리가 쉬기 시작했다. 부인이 날 거기로보냈어. 그래서 젠틀먼이 날 거기 두고 자기 딸 모드를 데려오게 하려고 부인이 내내 원했던 건 단지 모드뿐이었던 거야. 날안전하게 지켜주다가 포기해 버렸어. 다 모드를, 모드를••••••.
그러나 그 뒤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칼을 쥐고 나서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미워하게 내버려 두었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가장 해친 이가 누군지 알면서도 내가 모르게 하기 위해 자기가 나를 해친 것이라 믿게 하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 P794

나는 숨을 멈췄다. 웅얼대는 소리가 멎었다가 다시 들려왔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로> 들려오고 있었다. 서재에서 나는 소리였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엔 정말로 집에 유령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쩌면, 어쩌면••••••나는 문으로 가서 떨리는 손을 얹고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선 채 눈을 깜박였다. 방이 변해 있었다. 창문에 붙어 있던 페인트는 모두 벗겨지고, 바닥의 놋쇠 손가락은 뽑혀 있었다. 책꽂이에는 거의 책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난로에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문을 열었다. 릴리 씨의 낡은 책상이보였다.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불빛 속에 모드가 보였다.
모드는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뺨을 손바닥에 올린 채 손가락을 눈 쪽으로 반쯤 굽히고 있었다. 불빛 덕에 모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손은 장갑 없이 맨손이었으며, 소매는 걷어붙였고, 손가락은 잉크 얼룩으로 시커멨다. 나는 선 채로 모드가 글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종이는 이미 글자들로 빽빽했다. 모드가 종이에서 펜을 떼더니 마치 그다음엔 무엇을 써야 할지 잘모르겠다는 듯이 펜을 돌리고 또 돌렸다. 다시 모드는 숨결 아래로 웅얼거렸다. 모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써 내려갔다. 그러고는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
그러면서 눈가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보았다.
모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 움직임도 없어졌다. 소리지르지도 않았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앉아 있었다. 얼굴에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한 걸음을 뗐다. 그러자 모드가 잉크 묻은 펜을 내려놓고 일어났고, 펜이 종이 위로 그리고 책상 위로 구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모드의 뺨이 창백해져 있었다. 모드가 의자 등을잡았다. 마치 손을 떼면 넘어지거나 기절할 것 같다는 태도였다. 내가 다시 한 걸음을 더 떼자 모드는 의자를 더욱 강하게 쥐었다.
모드가 말했다. 「날 죽이려고 온 거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모드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알았다. 단순히 놀라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포심에서 창백해져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끔찍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쏟았던 눈물로 얼굴이 아직도 축축했다. 다시 눈물이 떨어지면서 더욱 축축해졌다.
「오, 모드!」 내가 말했다. 「오, 모드!」 - P804

나는 모드에게서 책을 받아 활자를 들여다보았다. 내게는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책을 내려놓고 서가로가서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역시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또 다른 책을 꺼냈다. 이 책에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울 만한 그림들이었다. 그림 하나에는 벌거벗은 여자아이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모드를 바라보았고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넌 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말했다. 그게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내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아무것도 몰랐어.」 모드가 말했다.
「다 알고 있었어! 넌 내가 너한테 키스하게 했어. 다시 키스하고 싶게 만들었어! 그동안 내내 넌 여기에 들락거리면서••••••」갑자기 말이 막혔다. 모드가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서재 문앞에 와서 모드의 오르락내리락하던 숨죽인 목소리를 듣던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스타일스 부인 그리고 웨이 씨와 함께 타르트와 커스터드를 먹는 동안, 신사들에게, 젠틀먼에게 책을 읽어 주던 모드를 생각했다. 나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너무나 강하게 옥죄어 와서 가슴이 아팠다.
「오 모드」 내가 말했다. 「내가 알기만 했어도! 널 생각하면나는 울기 시작했다. 「네 삼촌을 생각하면 •••••• 오!」 내 손이 빠르게 입으로 올라갔다. <내> 삼촌!」 그 생각에 너무나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 나는 여전히 책을 쥐고 있었다. 이제 나는 책을 바라보고는 마치 책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떨어뜨렸다. - P811

 단지<단지 널 사랑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무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모드가 아직도 당당할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내가 과연...... 어쨌거나 내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드는 내 표정에 쓰인 그 말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모드의 얼굴색이 바뀌고 시선이 차분해졌다. 모드는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때문에 이마에 검은 얼룩이 더 많이 생겼다. 여전히 얼룩이 참기 어려웠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모드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엄지에 침을 묻혀 모드의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저 잉크와 모드의 하얀 살결만을생각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나 모드는 내 손을 느끼더니 아주 조용히 있었다. 엄지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모드의 뺨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손으로 모드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모드가 눈을 감았다. 뺨이 부드러웠다. 진주와는 달랐다. 진주보다 따뜻했다. 모드가 고개를 돌려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부드러웠다. 잉크 얼룩이 모드의 이마에 검게 남아 있었다. 결국엔 잉크일 뿐이란 생각을 했다. - P814

모드가 등불을 집어 들었다. 방이 어두워지고, 비는 여전히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드는 나를 벽난롯가로 데려가 앉힌 뒤 옆에 앉았다. 모드의 비단 치마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모드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를 평평하게 폈다. 그리고 자기가 쓴 글자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시작했다. - P815

마지막으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네 가지가 있군요. 1. 미친 듯 읽어라. 모든 작가는 기본적으로 열정적인 독자여야 해요. 그래서 자신이 느꼈던 멋진 독서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즐길 수 있도록 제공하고 싶어 해야죠.
2. 되도록 날마다 일정한 분량의 글을 써라. (앞서 말했듯이 저는 평일에는 1천 단어씩 써요. 주말에는 글을 안 쓰고요.) 만약영감이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면, 영감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쓴 글이 쓰레기라 할지라도 나중에 더 낫게 고칠 수 있죠. 그게 바로 세 번째예요. 3. <다시> 써라! 잘라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4. 계속 노력하라. 거절을 두려워하면 안 돼요. 제 처음 소설은 열 곳에서퇴짜를 맞았어요. 자신에게 맞는 출판사를 찾아내야 하고, 그과정에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죠. - P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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