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정結晶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 P9
마침내 잠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거의 잠들었다고 느꼈을 때였다.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그때 왜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눈물 같은 건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았다.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 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없을 무거운 쇳날이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바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 P11
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더이상 매 순간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힘을빼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위해 수없이 찬물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에 간다. - P28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거리에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눈 닿는 이차선 도로 어디에도차량이 다니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믿을 수 없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함박눈뿐이다. 허공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 사이로 선홍색 신호등이 켜진다.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보인다. 그럼•••••• 그래야지•••••• 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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