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일 아닐까?
행정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체 이탈 화법을 쓴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것은 아니다.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나는......
(어머니는 세상에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한 사람이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조금씩 생겨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그 기회가 올까? 내게 맞는 기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덤벼 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인지 과연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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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그러는데 다른 아이들은 전부 바구니에 먹을 것을 담아온대요. 전 요리를 못하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그리고•••••• 볼록 소매 옷을 안 입고 가는 건 괜찮은데,
바구니 없이 소풍에 가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요 다이애나한테 그 얘기를 들은 뒤로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거라면 더 걱정할 필요 없다. 음식은 내가 만들어 주마."
"아,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아, 아주머니는 제게 참 잘해 주세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아‘를 연발하던 앤이 마릴라의 품에 뛰어들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윤기 없는 마릴라의 뺨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어린아이가 먼저 다가와 마릴라의 얼굴에 입을 맞춘 것은 평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놀랍도록 따뜻한 기분이 마릴라의 가슴에 순식간에 퍼졌다. 마릴라는 앤의 충동적 입맞춤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 P153

"앤, 넌 무슨 일이든 그렇게 온 마음을 다 쏟는구나. 앞으로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다."
마릴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뭔가를 기대하는 건 그 자체로 즐겁잖아요. 어쩌면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대할 때의 즐거움은 아무도 못 막을걸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 복 받을지어다. 왜냐하면 결코 실망할 일도 없으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기대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쁜 거 같아요." - P157

길버트 블라이드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되어본 적도 없었고, 또 시선 끌기에 실패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갸름한 턱에 커다란 두 눈을 가진 빨강 머리 여자아이 셜리. 에이번리의 여느 여학생들과는 다른 그 아이도 자신을 쳐다봐야 했다.
길버트는 통로를 가로질러 팔을 뻗더니 길게 땋은 앤의 빨강머리 끝을 잡고 쭉 잡아당기며 날카롭게 속삭였다.
"홍당무! 홍당무!"
그때서야 앤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쳐다봤다!
쳐다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앤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상상의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앤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길을 길버트에게 던졌고,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 비열한 나쁜 놈아! 어떻게 그런 말을!"
앤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다음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앤이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쳤고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머리가 아니라 석판이. - P185

앤이 엄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겠소, 다이애나. 이 시간 뒤로 그대와의 추억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읽은 책처럼 나의 외로운 인생에 별처럼 빛날 것이오. 다이애나, 내가 영원토록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이별에 앞서 그대의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 몇 올을 주시겠소?"
감정을 자극하는 앤의 말투에 다이애나는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눈물을 훔치면서 현실로 돌아와 물었다.
"뭐 자를 만한거 있니?"
"응. 마침 앞치마 주머니에 조각보를 만들 때 쓰던 가위가 있어."
앤은 엄숙한 자세로 곱슬곱슬한 다이애나의 머리칼을 조금잘랐다.
"잘 지내시오, 내 사랑하는 친구여. 이후로 우리는 곁에 있으면서도 낯선 이처럼 살아야 하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앤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다이애나를 지켜보며 다이애나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낭만적인 이별은 한동안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 P220

"잘 모르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요. 굉장히 놀라고 화가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희도 나름 이유가 있었어요. 할머니도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할 수 있다면 저희 입장이 되어보세요. 저희도 침대 위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할머니 때문에 놀라 기절할 뻔했어요.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손님방에서 자기로 되어 있었는데 손님방에서도 못 잤어요. 할머니는 손님방에서 주무시는 게 익숙하시겠죠. 하지만 할머니가 한 번도 그런 특권을 누린 적 없는 고아 여자애라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앤이 간절히 말했다.
이제 매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배리 할머니는 웃음을터뜨렸다. 걱정 때문에 입도 벙긋 못하고 부엌에서 기다리던 다이애나는 그 웃음소리에 숨통이 트이고 안심이 됐다.
"내 상상력은 조금 녹슨 것 같구나. 상상 같은 걸 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게지. 네 입장을 들으니 내 입장만큼이나 설득력이 있구나. 모든 일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 보이니 말이다. 이리 와 앉아서 네 이야기를 해 보거라."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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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레이철 린드 부인이 놀라다

레이철 린드 부인은 에이번리 마을의 큰길이 작은 골짜기 쪽으로 비탈져 내려가는 곳에 살았다. 길가에 오리나무와 귀걸이를 닮은 후크시아 꽃나무가 늘어섰고, 오래된 커스버트네 농가가 자리한 숲에서 시작한 개울이 집 앞을 가로질렀다. 개울은 숲속 깊은 상류에서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폭포와 물웅덩이를만들며 복잡하게 뒤엉켜 세차게 흐르다가, 린드 부인의 집 앞에 이를 즈음에는 조용하고 잔잔해졌다. 개울조차 레이철 린드부인의 집 앞을 지날 때는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흘러야 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린드 부인이 창가에 앉아 개울이든 아이들이든 앞을 지나는 것은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평소와 다르다 싶으면 그 까닭과 사정을 캐내고 만다는 것을 알아서인지도 모르겠다. - P7

여자아이는 매슈가 지나쳐 간 뒤에도 줄곧 매슈를 쳐다보았고 지금도 매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슈는 여자아이를 보지도않았지만, 보았더라도 아이가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알아채지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아이는 열한 살 정도로 보였고, 아주 짧고 몸에 꽉 끼는 누런빛이 도는 볼품없는 회색빛 혼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색이 바래고 납작한 갈색 밀짚모자를 썼으며 모자 아래로 숱 많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작고 하얀 얼굴은 갸름했는데 주근깨투성이였다. 입도 크고 눈도 컸다. 눈동자는 햇살과 기분에 따라 초록색이 되었다가 잿빛이 되었다가 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매우 뾰족하고 도드라진 턱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또한 큰 눈은 생기발랄했고 입은 귀여운 입술에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 같았으며, 이마는 넓고 그랬다. 한마디로 보는 눈이 예리한 사람이었다면, 제자리가 아닌 곳으로 인도된 이 여자아이가 부끄럼 많은 매슈 커스버트가 그토록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흔하디흔한 여자들과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다행히 매슈는 먼저 말을 거는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매슈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햇볕에 그을린 야윈 한 손으로 다 해진 구식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을 매슈에게 내밀며 말했다. 유난히 또랑또랑하고 싹싹한 목소리였다. - P23

"초록 지붕 집의 매슈 커스버트 아저씨 맞으시죠? 만나 뵙게되어 정말 기뻐요. 절 데리러 오시지 않을까 봐 막 걱정이 되려고 해서, 아저씨가 못 오시는 온갖 이유를 상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오늘 밤까지 절 데리러 오시지 않으면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모퉁이까지 기찻길을 따라 내려갈 생각이었어요. 그나무에 올라가서 밤을 보내려고 마음먹었거든요. 전 하나도 무쉽지 않아요 하얀 벚꽃이 활짝 핀 나무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잔다니 굉장히 멋질거 같지 않으세요? 대리석으로 된 넓은 방에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아저씨가 오늘 밤에 못오셔도 내일 아침에는 꼭 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P24

이미 날이 꽤 어두워졌지만, 린드 부인이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두 사람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차는 언덕을 올라 초록 지붕 집 앞으로 난 좁고 긴 오솔길로 들어섰다. 집에 도착할 즈음 매슈는 곧 진실이 드러날 거라는 생각에 움츠러들면서도 알지 못할 힘이 났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이런 실수 때문에 마릴라나 자신이 겪게 될 어려움이 아니라 아이가 느낄 실망이었다. 아이의 눈에서 기쁨의 빛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치 뭔가를 죽이는 데 힘을 보태야 할 때처럼 거북했다. 새끼 양이나 송아지 같은 죄 없는 어린 생명을 죽여야할 때와 아주 비슷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벌써 꽤 어두워진 뜰로 들어섰다. 포플러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매슈가 아이를 마차에서 내려 주는데, 아이가 작게 소곤댔다.
"나무들이 자면서 하는 말 좀 들어 보세요. 멋진 꿈을 꾸고 있나 봐요!"
그러고는 ‘전 재산‘이 담긴 낡은 여행 가방을 꽉 움켜쥐고 매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 P41

"그럼 영원히 방에서 살아야겠네요. 린드 아주머니께 그렇게말해서 죄송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전 미안한 마음이 안 들어요. 마릴라 아주머니를 속상하게한 건 죄송하지만, 린드 아주머니한테 그렇게 말한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속이 후련했거든요. 미안한 마음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건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라고요."
앤이 애처롭게 말했다.
마릴라가 몸을 일으켰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상상하기가 한결 쉬워질 게다. 밤새 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마음가짐도 좀 달라질 거고 초록지붕 집에 살게 해 주면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더니, 오늘 저녁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구나."
마릴라는 분노로 출렁이는 앤의 가슴에 묵직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부엌으로 내려갔다. 앤에게 화가 난 것만큼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말문이 막힌 린드 부인의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나와 입이 씰룩거렸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한바탕 웃고 싶었기 때문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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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르켐이 역설하는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갖가지 "사회적 사실들이 존재하며, 이런 사실들은 개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자살률이나 애국심관련 규범과 같은) 사회적 사실들은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분명 실재하는 만큼, (심리학에서) 사람과 사람의 정신 상태를 연구하듯 (사회학도) 이것들을 가져다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만 해도 뒤르켐은 다차원 선택이나 중대 과도기 이론을 알지 못했으나, 신기하게도 그의 사회학은 이 두사상과 기막히게 잘 맞아 돌아간다.
뒤르켐은 자신과 동시대 인물을 곧잘 비판했는데, 예를 들면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경우 도덕성과 종교를 개인 심리 및 그가 맺는 양자관계의 심리로만 설명하려 한 것이 문제였다(프로이트는 신이란 아버지를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편 뒤르켐의 주장은 이와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니, 호모 사피엔스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기 때문에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이중적인 인간)라고해야 옳다.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더 커다란 사회의 일부라는 것이다. 종교를 연구한 끝에 그가 다다른 결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각 차원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사회적 감성"을 지닌다. 그 첫 번째는 "개인 하나하나를 동료 시민 개개인과 엮어주는 역할을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감성은 공동체 안에서, 즉 일상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쉽게 눈에 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도의심, 존경, 호의, 두려움 등의 정서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성이 존재하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자연선택으로도 쉽사리 설명된다. 다윈이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은 이런 감성을 가지지못한 사람들과는 파트너가 되기를 꺼린다. - P403

뒤르켐이 말하는 이 고차원의 감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집단적 들썩임 (collective effervescence)"으로서, 집단적 의식에서 생겨날수 있는 열정과 열광을 말한다. 뒤르켐 자신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딘가에 모이는 행위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강력한 자극제이다. 개개인 여럿이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 서로 가까이 다가선 상태는 짜릿한 전류 같은 것을 일으킨다. 그러면 순식간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상태로 고양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에 들어가면, "원기가 고도로 활성화되고, 열정은 한층격렬해지며, 감정은 더욱 격해진다."" 뒤르켐이 보기에, 이러한 집단감정에 완전히 이끌리면 인간은 잠시나마 삶의 두 영역 중 더 고차원에 해당하는 성스러운 영역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 어느덧 자아는 사라지고 집단의 이해 (利害)가 가장 중요해진다. 한편 이와 대조되는 통속적인 영역은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적인 세계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삶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며 돈·건강·평판 따위의 문제를 걱정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늘 저기 어딘가에 더 고차원적이고 더 고상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이렇듯 이 두 차원을 오르락내리락함으로써 인간은 신 · 영혼 · 천국의 관념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객관적인 도덕 질서의 개념도 바로 여기서 생겨났다고 뒤르켐은 믿었다. 이러한 사회적 사실들은 심리학자가 개개인(혹은 양자 관계)을 연구해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단순히 꿀벌 한 마리 한 마리(혹은 두 마리씩)를 연구해서는 벌집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듯이.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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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생 자르기

사장이 혜미에게 처음 관심을 보인 것은 태국 바이어들을 접대한 회식 때였다. - P9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개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적 없잖아?"
부아가 치밀었지만 남편 말이 옳았다. 은영은 입술을깨물고 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래?"
전화를 끊자 남편이 물었다.
은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150만원 달래." - P40

그녀는 그즈음 거대한 팬옵티콘을 자주 상상했다. 한번은 실제로 자신이 지금 그런 감옥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도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빠졌고,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승강기 앞을 왔다 갔다 걸으며 겨우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담당 팀장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10분 안에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생각하자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경영에 대한 사항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 P66

"그런가?"
"그 회사 새 대표가 탄산수 사업이랑 농장 사업 진출했다가 엄청 말아먹었거든. 그런데 거기에 책임지고 회사를 나간 사람은 없어. 우리 팀 예산의 몇십 배는 더 손해였을 텐데. 씨름 대회나 국악 오케스트라 후원도 그만두지않았어. 그 회사 화장실에 가면 휴지 한 장이 35원이라고한장이면 충분하다고 세면대 옆에 적혀 있었지. 그래서 휴지 덜 쓰면 돈 얼마나 아낄 수 있다고 그걸 아끼라는 건가 싶은데, 휴지를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각이 또 다른가보지? 그런 휴지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어."
"그게 기업이지. 쇼미 더 머니. 사람이나 휴지나."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기만에 화가 났던 걸까?‘ 연아는 생각했다.
"그때 윗분이 화났다면서 나더러 반성문 쓰게 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그건 옳지 않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사죄해. 아무리 회사라고 해도 그런 건 시키면 안 되지."
"쇼미 더 머니라며.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그러면 대기발령은?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남편이 생각에 잠겼다. - P78

"직원 37퍼센트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회생계획을 승인한다."
여자는 법원이 그런 수치까지 정하는 곳인 줄 알지 못했다.
‘판사들은 이게 누구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우리가 잘못한 게 뭐기에?‘
여자는 그것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막 밖에서 남자들과 경비업체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붙었다. 대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놓고 시비가 붙었다.
"왜 못 들여오게 하는 거야? 우리는 깃발도 세우지 말라 이거야?"
"기정님, 저희 입장 아시잖아요."
기정은 생산직 직급의 명칭이었다. 사무직은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순으로 높았고, 생산직은 기성, 기정,
기장, 기사 순으로 높았다.
"사장 어디 있어? 사장이 직접 와서 설명하라고 해."
기정이 말했다.
공수부대 대원 같은 복장의 경비업체 직원이 남자들에 둘러싸여 진땀을 흘렸다. 대나무 봉은 보기에 따라 깃대도 죽창도 될 수 있었다.  - P89

진짜 구호도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 P91

‘당신들이 정말 죽지 않을 각오로 여태까지 일을 해 왔나.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텐가.
당신들은 진짜로 죽는 게 어떤 건지 몰라. 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더 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로 옮겨 간다고 죽지는 않아.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짜로 죽을수 있는 건 회사뿐이다.‘
게다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힘은 이미 사측이고 노측이고, 회사 안에 있지 않았다. 회사는 거대한 빚 덩어리였다. 사람을 줄이지 않겠다고 하면 해외에 있는 투자자들은 회사가 앞으로 이윤을 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리라.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법원의 산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산수가 있었고, 차라리 공장 문을 닫고 땅과 설비를 내다 파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할 때 주저없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 P92

어쩌면 위원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일지도모르겠다고 사장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 상황에서 자유의지라 할 것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회사를살려야 한다는 명제와 채권자, 직원 들의 요구에 갇혀 사장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원장도 총고용 보장이라는 구호와 조합원들의 요구에 갇혀 있었다. 두 사람모두 타협을 하는 순간 변절자가 될 처지였다. - P94

"야, 이 사측의 앞잡이 새끼야! 거기 내려와! 내려와아아악!"
검은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트럭 아래에서 부장을 향해 악을 쓰고 생수병을 던졌다. 남편이 공장 안에 있는 여자들은 몇 달 동안 독해졌다. 몇몇 여자들은 줄을 선 직원들에게 가서 가슴에 "해고는 살인"이라고 적힌 리본을 달아 주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가 먼지바람에 휘날리고 손이 급해 미친 여자들 같아 보였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여러분 동료입니다. 사측의 선동에 속지 마세요."
앞줄에 선 직원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여자들이 리본을 달지 못하게 하거나 여자들이 지나간 뒤 몸에서 리본을 떼어 냈다. 뒷줄에서는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거 존나 시끄럽네!"
"아, 씨발년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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