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 자르기

사장이 혜미에게 처음 관심을 보인 것은 태국 바이어들을 접대한 회식 때였다. - P9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개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적 없잖아?"
부아가 치밀었지만 남편 말이 옳았다. 은영은 입술을깨물고 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래?"
전화를 끊자 남편이 물었다.
은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150만원 달래." - P40

그녀는 그즈음 거대한 팬옵티콘을 자주 상상했다. 한번은 실제로 자신이 지금 그런 감옥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도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빠졌고,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승강기 앞을 왔다 갔다 걸으며 겨우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담당 팀장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10분 안에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생각하자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경영에 대한 사항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 P66

"그런가?"
"그 회사 새 대표가 탄산수 사업이랑 농장 사업 진출했다가 엄청 말아먹었거든. 그런데 거기에 책임지고 회사를 나간 사람은 없어. 우리 팀 예산의 몇십 배는 더 손해였을 텐데. 씨름 대회나 국악 오케스트라 후원도 그만두지않았어. 그 회사 화장실에 가면 휴지 한 장이 35원이라고한장이면 충분하다고 세면대 옆에 적혀 있었지. 그래서 휴지 덜 쓰면 돈 얼마나 아낄 수 있다고 그걸 아끼라는 건가 싶은데, 휴지를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각이 또 다른가보지? 그런 휴지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어."
"그게 기업이지. 쇼미 더 머니. 사람이나 휴지나."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기만에 화가 났던 걸까?‘ 연아는 생각했다.
"그때 윗분이 화났다면서 나더러 반성문 쓰게 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그건 옳지 않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사죄해. 아무리 회사라고 해도 그런 건 시키면 안 되지."
"쇼미 더 머니라며.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그러면 대기발령은?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남편이 생각에 잠겼다. - P78

"직원 37퍼센트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회생계획을 승인한다."
여자는 법원이 그런 수치까지 정하는 곳인 줄 알지 못했다.
‘판사들은 이게 누구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우리가 잘못한 게 뭐기에?‘
여자는 그것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막 밖에서 남자들과 경비업체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붙었다. 대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놓고 시비가 붙었다.
"왜 못 들여오게 하는 거야? 우리는 깃발도 세우지 말라 이거야?"
"기정님, 저희 입장 아시잖아요."
기정은 생산직 직급의 명칭이었다. 사무직은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순으로 높았고, 생산직은 기성, 기정,
기장, 기사 순으로 높았다.
"사장 어디 있어? 사장이 직접 와서 설명하라고 해."
기정이 말했다.
공수부대 대원 같은 복장의 경비업체 직원이 남자들에 둘러싸여 진땀을 흘렸다. 대나무 봉은 보기에 따라 깃대도 죽창도 될 수 있었다.  - P89

진짜 구호도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 P91

‘당신들이 정말 죽지 않을 각오로 여태까지 일을 해 왔나.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텐가.
당신들은 진짜로 죽는 게 어떤 건지 몰라. 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더 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로 옮겨 간다고 죽지는 않아.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짜로 죽을수 있는 건 회사뿐이다.‘
게다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힘은 이미 사측이고 노측이고, 회사 안에 있지 않았다. 회사는 거대한 빚 덩어리였다. 사람을 줄이지 않겠다고 하면 해외에 있는 투자자들은 회사가 앞으로 이윤을 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리라.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법원의 산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산수가 있었고, 차라리 공장 문을 닫고 땅과 설비를 내다 파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할 때 주저없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 P92

어쩌면 위원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일지도모르겠다고 사장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 상황에서 자유의지라 할 것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회사를살려야 한다는 명제와 채권자, 직원 들의 요구에 갇혀 사장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원장도 총고용 보장이라는 구호와 조합원들의 요구에 갇혀 있었다. 두 사람모두 타협을 하는 순간 변절자가 될 처지였다. - P94

"야, 이 사측의 앞잡이 새끼야! 거기 내려와! 내려와아아악!"
검은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트럭 아래에서 부장을 향해 악을 쓰고 생수병을 던졌다. 남편이 공장 안에 있는 여자들은 몇 달 동안 독해졌다. 몇몇 여자들은 줄을 선 직원들에게 가서 가슴에 "해고는 살인"이라고 적힌 리본을 달아 주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가 먼지바람에 휘날리고 손이 급해 미친 여자들 같아 보였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여러분 동료입니다. 사측의 선동에 속지 마세요."
앞줄에 선 직원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여자들이 리본을 달지 못하게 하거나 여자들이 지나간 뒤 몸에서 리본을 떼어 냈다. 뒷줄에서는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거 존나 시끄럽네!"
"아, 씨발년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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